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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5) – “학제의 형성”

#1406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2025.11.19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6-3-3-4 학제의 근간은 1945년부터 1951년 사이에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형성되었습니다. 관련 자료에 의거하여 각 학제(안)를 정당화하는 원리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합니다.                                 

 

 

학제의 의미

 

정부 수립 이후 교육제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아마도 가장 뜨거운 쟁점이었고, 또 이후 학교교육의 팽창과 한국민의 교육열 전개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학제’ 문제였다. 여기서 ‘학제’란 한 사회 내의 여러 수준과 종류의 학교들을 제도적으로 상호 관련시키고 각각의 위치를 초등, 중등, 고등 등으로 자리매김하는 체제, 즉 ‘학교 체제’(school system)를 가리킨다.

 

우리 사회에서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이른바 6-3-3-4 학제의 근간이 1945년부터 1951년까지의 기간 동안에 형성되었다. 그 과정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미군정기의 학제, 정부수립 후 문교부가 1949년 초에 작성한 「학교교육법(안)」1(이하 ‘문교부초안’으로 약칭함)의 학제, 그리고 제헌국회의 문교사회위원회가 새롭게 작성하여 1949년 10월 26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한 「대한민국교육법안」2(이하 「교육법안」으로 약칭함)의 학제, 제헌국회에서 심의를 거쳐 1949년 12월 31일 법률 제86호로 공포된 「교육법」의 학제, 제정 3개월 후인 1950년 3월 10일 법률 제118호로 개정된 「교육법」 학제, 그 이듬해인 1951년 3월 20일, 법률 제178호로 재차 개정된 「교육법」 학제 등 여섯 단계를 거치면서 학제가 형성되었다. 단계별 학제 변천의 주된 내용을 도표로 제시하면 <표 1>과 같다.

 

<표 1> 학제 변천 과정(1945〜1951)

학제관련 법률(안) 초등교육 전기중등교육       후기중등교육       고등교육
미군정기 학제

(1945.12.14)

6 국민학교 6(3·3)중학교(초급·고급)       4 대학
문교부초안

(1949.1.)

6 국민학교 3 중학교       3 고등학교       4 대학
대한민국교육법안

(1949.10.31)

6 국민학교 3 중학교수료       3 고등중학교       4 대학

4 중학교       4 초급대학

교육법

(1949.12.31. 법률제86호)

6 국민학교 4 중학교       2 고등학교       4 대학

4 중학교       4 고등학교

1차 교육법개정

(1950.3.10. 법률제118호)

6 국민학교 3 중학교수료       3 고등학교       4 대학

       3 중학교수료       3 고등학교       2 초급대학

4 중학교       4 초급대학

2차 교육법개정

(1951.3.20. 법률제178호)

6 국민학교 3 중학교       3 고등학교       4 대학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미군정기 학제를 계승한 ‘문교부초안’의 6-3-3-4제가 「교육법안」에서는 6-3-3-4제와 6-4-4제가 공존하는 복선제로 바뀌고, 그것이 1949년 12월 제정 「교육법」에서는 6-4-2-4제와 6-4-4제가 공존하는 복선제로 바뀌었다가 다시 1950년 3월 1차 「교육법」 개정을 통해 「교육법안」의 학제로 복귀한 후, 또다시 1951년 3월의 2차 「교육법」 개정을 통해 6-3-3-4제로 정착하여 결과적으로 ‘문교부초안’의 그것으로 돌아오는, 말하자면 ‘원점 회귀’의 흐름을 밟았음을 알 수 있다.

 

국회의 회의록 자료3 및 교육법령 제정·개정 관련 자료4에 의거하여 각 학제(안)를 정당화하는 원리가 무엇이었는지 확인해 보자. 여기서는 특히 ‘중등 교육 단계’의 학제에 초점을 맞춘다. 학제의 특질을 논의할 때 중요한 쟁점의 하나가 이른바 단선형/복선형 여부인데, 이는 주로 중등 교육 제도 여하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미군정기의 학제

 

한국 학제의 기원은 미군정기에서 찾을 수 있다. 오천석의 회고에 따르면 해방 직후 이른바 ‘천연동모임’에서 김성수가 6-3-3-4 학제를 제안했다고 한다.5 이 학제 구상은 조선교육심의회의 1945년 12월 14일 「현행 교육제도에 대한 임시조치안」 발표를 통해 정책으로 실현되었다.6 이는 6년제 국민학교(식민지 말기 6년제 국민학교의 전환) 이후 6년제 중학교(주로 식민지기 5년제 중학교, 또는 실업학교의 전환), 또는 3년제 초급중학(주로 식민지기 2년제 실업보습학교, 3년제 실업학교, 국민학교 고등과의 전환)과 3년제 고급중학(형식화되기는 했으나 실제로 3년제 고급중학은 없었다)의 중등교육이 이어지고 그 후에 4년제 대학이 이어지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6-3-3-4 학제를 오천석은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다.

 

심의회(조선교육심의회를 말함. 인용자주)에서 제정한 학제의 획기적인 의의는 그것이 단선형이라는 데 있다. 종래의 제도가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따로따로 양성하기 위하여 복선형이었음에 반하여, 신제도는 교육의 기회를 모든 국민에게 균등하게 주는 일원적인 것이다.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온갖 사람이, 지위, 문벌, 종족, 종교 및 성별의 구애를 받음 없이 다 같이 향유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민주사회에 부합한 교육 제도라 할 수 있는 것이다.7

 

이 논리대로라면 해방 이후 한국의 학제 형성은 그야말로 명쾌하게 설명될 수 있다. 즉 식민지기의 차별적인 ‘복선형’과는 달리 해방 이후에는 ‘교육의 기회균등’ 원리를 실현시키는 ‘민주적’인 제도로 6-3-3-4의 ‘단선형’ 학제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학제’는 ‘교육기회 균등을 위한 단선형 학제’라는 식으로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될 수는 없는 복합적인 특질을 지니고 있으며, 그 복합성은 학제의 형성 과정에도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바꿔 말하면, ‘교육의 기회균등’ 원리가 ‘단선형’ 학제를 정당화하는 데에만 고유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학제의 정당화에도 동원되는 것이었는지, 나아가 6-3-3-4 학제라 할지라도 그것이 ‘교육의 기회균등’이라는 원리에 의해서만 정당화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원리가 그것의 정당화 과정에 작동하였는지는 좀 더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국의 학제를 ‘단선형’ 대 ‘복선형’이라는 이분법 논리로 규정할 수 있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후술하겠지만 한국의 학제는 단선형과 복선형의 성격이 혼재되어 있는 복합적 특질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을 이념적 원리에 의해 작동시키는가에 따라 단선형적 측면이나 복선형적 측면 중 어느 하나가 강화되거나 약화되어 학제 운용의 내실과 효과, 성격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제헌국회의 학제 제정

 

학제는 정부 수립 이후 원점에서부터 다시 검토되었다. 1948년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문교부장관이 된 안호상의 지휘 하에 교육법안 작성이 시작되는데, 거기서는 미군정기의 6-6(3-3)-4제 학제를 6-3-3-4제로 재편하는 방안이 구상되고 있었다. 안호상은 이와 관련하여 신학제 제정의 5원칙을 천명했다. 그것은 “1. 국민 각인의 능력을 자유롭게 최고도로 발휘케 할 수 있는 제도일 것. 2. 교육기회 균등적인 제도일 것. 3. 교육의 보급 향상을 신속히 달성할 수 있는 발전적인 내용을 내포한 제도일 것. 4. 우리 실정에 적절한 제도일 것. 5. 국제 교육 수준에 대책할 수 있는 제도일 것”8 등이었다.

 

이 원칙만으로 보면, 오천석의 논리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다섯 원칙 중에서 실제로 어디에 방점이 찍혀 있었을까. 교육의 기회균등 실현이나 국제 교육 수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원리가 분명 천명되기는 했으나9, ‘문교부초안’의 주된 초점은 그보다는 학교 보급의 효율성과 실업교육의 강화라는 실제적인 필요성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안호상 자신이 6-3-3-4제를 지지한 이유는 그것이 지닌 ‘단선형’적 의의 때문이 아니라 전기 중등교육과 후기 중등교육을 각기 3년씩으로 분리함으로써 전기 중등교육을 비교적 용이하게 보급하고, 동시에 후기 중등교육에서 실업 교육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는 제헌국회에서 그가 내세운 논리를 통해 거듭하여 확인되는데 이는 후에 다시 다루기로 한다.

 

그런데 ‘문교부초안’은 제헌국회에 상정되지도 못하고 전면 폐기되었고, 국회는 문교사회위원회 주도로 새롭게 교육법안 작성에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교육법안은 「대한민국교육법안」으로 정리되어 제헌국회 제5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10 학제의 면에서 이 「교육법안」이 ‘문교부초안’과 뚜렷이 다른 점은 후기 중등교육 단계에서 6-3(4년제 중학교 3학년 수료)-3(고등학교)-4(대학) 학제와 6-4(4년제 중학교 졸업)-4(초급대학) 학제의 서로 다른 두 경로를 제도적으로 구별했다는 것, 즉 중학교는 4년제로 하되, 대학에 진학할 사람은 중학교를 3년으로 수료한 후 3년제 고등학교로 진학하며, 대학에 진학하지 않을 사람은 중학교 4년을 졸업하고 취업하거나 직업교육기관인 4년제 초급대학으로 진학하도록 경로를 ‘복선형’적으로 나누었다는 점이다.

 

문교사회위원회 위원장 이영준은 1949년 10월 28일, 제헌국회 제5회 본회의에서 이러한 학제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까지 우리 현실에 있어서 경제곤란으로 인해서, 3·3을 한다면 초 3년을 하고 다 나간다 그 말이에요. 그렇다면 초 3년을 하고 나간다면 이것은 중학교육을 받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에요. 아무리해도 적어도 4년 동안은 하고 나가야 겨우 면무식 하겠다. … 그다음 좀 다른 것은 중학 4년을 졸업한 사람은 예전에 전문학교와 같은 데에 갈 길을 하나 열어 주었읍니다. 말하자면 앞으로 초급대학이라고 하면 이 초급대학에 들어가서 자기가 전문학을 습득하는 그런 길을 열어서 소위 신문에서 말하는 이본제(二本制)를 취급한 것입니다.11

 

「교육법안」의 이 학제안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전기 중등교육으로 그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중학교를 3년제로 할 경우 결과적으로 중등교육 수준이 식민지기에 비해 더 저하될 것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이 학제안은 ‘이본제(二本制)’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후기 중등교육을 ‘단선형’이 아니라 ‘복선형’으로 하겠다는 뚜렷한 지향을 지니고 있었다. 문교사회위원회 위원들은 중등 단계에서의 복선형이 지닌 불평등 문제에 대해 둔감했다.

 

그렇다면 ‘교육의 기회균등’ 원리 자체를 문교사회위원회가 부정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단선형 학제 주장자들만이 내세우는 독점적인 원리는 아니었다. ‘복선형’의 「교육법안」 학제가 동일하게 ‘교육의 기회균등’ 원리에 의해서 정당화되기도 했다. 문교사회위원회 위원이었던 권태희 의원의 국회 발언을 보자.

 

… 이 교육법안은 어데까지든지 교육의 기회를 균등히 골고로 가지게 하기 위해서 … 6, 3, 3, 4로 원칙의 길이 있고 다시 6, 4, 3의 옆길이 하나 있고 또 6학년을 졸업하고서 정규중학교를 가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공민학교 고등공민학교 또 거기에도 가지 못하는 사람은 기술학교 고등기술학교 그런 여러 가지의 갈래 길을 두어 가지고서 그 개인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가지고서 진학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 이번 교육법안의 정신입니다.12

 

그에게 교육 경로의 분화, 심지어 정규학교 이외에 공민학교 등의 방계 경로까지 다양하게 설정하는 것은 ‘교육의 기회균등’ 원리의 침해가 아니라 반대로 진학 기회를 보다 확장함으로써 그 원리를 적극적으로 실현한다는 의미로 정당화되었다. 즉, 「교육법안」의 복선형적 학제 구상과 ‘교육의 기회균등’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교육의 기회균등’ 원리는 이렇게 당시에는 애매하게 통용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의 기회균등’ 이념은 「대한민국헌법」의 제16조에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 모든 교육기관은 국가의 감독을 받으며 교육제도는 법률로써 정한다”13고 규정함으로써 최초로 법제화되었다. 이 조항 자체는 한국 교육사상 최초로 ‘교육의 기회균등’ 원리를 제도적으로 확정한 것으로서 그 의미가 가볍지 않다. 그런데 제헌국회에서 헌법초안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한 의원이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무슨 의미인지를 물었다. 그에 대해 헌법초안을 기초한 유진오 위원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균등은 기회균등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가량 어떠한 사회적 신분에 의지해서 특별한 어떠한 사람이 어떻게 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 점이 아니라 입학시험에 합격해야 들어갈 수 있다”14는 뜻이라는 답변이었다. 여기서 ‘교육의 기회균등’은 신분과 같은 귀속적 요인이 아니라 단지 학력에 따른 교육 선발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학제의 단선형/복선형과 논리적으로 무관한 것이었다.

 

한편, 4년제 중학교안의 이면에는 「문교부안」에 비해 중학교 교육연한이 4년으로 1년간 연장되는 데서 비롯되는 실제적 이익에 대한 고려 또한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3·3제를 지지했던 당시 문교부 편수국장 손진태는 한 신문의 기고문에서 4·2제 주장의 이면에 지방 중학교 교장들의 이익이 작동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문교심의회(문교사회위원회의 오기로 보인다. 인용자주) 위원 중에서는 … 중학교 관계자 중에서 약간 이론(異論)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속하는 중학교의 이익에 관련이 있는 까닭이었을 것이다. … 비도시지방의 교장들이 많이 4·2를 주장하였던 것이니, 3·3제가 되면 그분들이 속하는 초급중학의 격이 저하될까 저어한 까닭이 아닌가 하고 추측되었다.15

 

손진태의 지적은 근거가 없지 않았다. 실제로 당시 문교사회위원회 위원 17명 중 9명이 중학교 교장 경력을 갖고 있었다.16

 

그런데 제헌국회 본회의에서 「교육법안」에 대한 심의가 시작되자 예상외로 격론이 벌어졌다. 심의 과정에서 정부 측의 ‘문교부초안’이나 문교사회위원회 측의 「교육법안」과 다른 새로운 내용의 학제안이 갑자기 돌출한 것이다. 제5회 제38차 국회 본회의(1949년 11월 11일)에서, 조헌영(趙憲泳) 의원이 중등 학교를 중학교 4년, 고등학교 2년으로 통일하고, 초급대학을 전문학교로 개칭하며 전문학교의 수업 연한을 2년 내지 4년으로 하는 내용의 수정안을 제출했다. 이 수정안 제출과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이유를 설명했다.

 

(「교육법안」대로 할 경우. 인용자주) 중학 4년을 졸업하는 사람은 결국은 돈이 없어서 대학에 갈 수 없는 학생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재조가 없어서 3년을 마치고 대학에 가는 데 시험에 못 들어간 사람이라는 ‘패’를 차게 됩니다. … 도시의 중학 6년을 마친 사람은 대학에 갈 수가 있는데 시골서 4년제를 마친 사람은 대학 맛도 못 보고 전문기술학교밖에 가지 못하는데 이렇게 도시와 시골에 큰 차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17

 

조헌영 의원의 이 발언은 국회에서의 학제를 둘러싼 심의 과정에서 ‘이본제’ 즉 ‘복선형’ 학제가 지닌 ‘불평등성’ 문제를 지적한 아마도 유일한 문제 제기였다. 「교육법안」의 학제는 ‘돈이 없는 사람’, ‘재조가 없는 사람’, ‘시골서 4년제를 마친 사람’에게 ‘패’, 즉 사회적 낙인을 찍어 대학 진학자와 차별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하는 이 논리는 학제의 평등/불평등 문제를 ‘감정적 차원’에서 파악하는 매우 거칠고 단순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혹은 그러했기 때문에― 이 조헌영 의원의 학제안이 다른 의원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다. 중학교 4년제는 만장일치로, 고등학교 2년제는 재석 126, 가 89, 부 3으로 가결되었으며, 초급대학을 전문학교로 고치는 안은 재석 126, 가 103, 부 2로 가결되었고, 전문학교를 2년 내지 4년으로 하는 안 역시 재석 126, 가 103, 부 3으로 가결되어버린 것이다.

 

문교부나 문교사회위원회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사태였다. 문교부가 즉각적으로 격렬하게 반대했다. 안호상은 3·3제를 고집할 생각은 없다고 양보하면서도 여전히 고등학교 2년제에 대해서는 정면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 고등학교는 반드시 3년이 되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실업교육 과학교육에 중점을 두는 까닭에 만일에 고등학교를 2년으로 하면 여기에 실업학교는 몰락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대학에 갈 사람에 대해서는 고등학교 3년이나 2년이나 1년이나 혹은 고등학교를 없애고 6년제 중학도 상관이 없읍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대학에 못 가는 사람이 많은 까닭에 고등학교 3년을 두어 가지고 실업 농업 수산 공업 상업은 전부 3년으로 해야만 되지 2년으로는 실업학교를 해 갈 수가 없읍니다.18

 

안호상에게 애초 6-3-3-4제는 ‘단선형’ 학제를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후기 중등교육에서의 대학 진학 과정과 취업 과정으로의 학교 분리 및 실업교육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볼 때 오히려 그는 후기 중등교육 단계에서 ‘단선형’보다는 ‘복선형’을 지향했다. 그가 조헌영의 수정안에 격렬히 반대한 이유는 수정안이 ‘교육의 기회균등’ 원리를 침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업교육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교부의 강력한 반대, 그리고 국회 내에서도 문교사회위원회 위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제헌국회 사상 초유의 사태, 즉 한번 의결된 사항이 번안되는 과정이 벌어진다. 조헌영 의원은 이미 가결된 자신의 수정안에 대한 번안에 동의했고, 재심의 결과 조헌영의 수정안과 문교부의 안을 절충하는 형태로 김수선 의원이 중학교를 4년으로, 고등학교를 2년 내지 4년으로 하는 내용의 수정안을 제출했고 이것이 재석 136, 가 89, 부 23으로 가결되었다. 동시에 예전에 수정 통과되었던 초급대학을 전문학교로 개칭하는 조헌영 수정안 역시 번안된 후에 폐기되었다. 이렇게 해서 1949년 「교육법」의 학제가 결정되었다.

 

그 학제는 중등 교육 단계에서 4-2(인문고교)-4제와 4-3(실업고교) 또는 4-4(실업고교)제를 병존시키는 사실상의 ‘복선형’ 학제였다. 이 학제는 3년 또는 4년제 실업고등학교를 둔다는 점에서 문교부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또 대학진학 경로와 취업 경로를 병존시키며 중학교를 4년제로 하여 중등교육의 수준을 식민지기의 그것과 유사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교사회위원회의 요구도 만족시키며, 동시에 어쨌든 중학교 4년까지는 통일적인 교육을 실시해 중학교 수준에서의 경로 분리로 인한 사회적 불만을 막아보자는 다른 의원들의 요구도 만족시킨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특이한 타협의 산물이었다.

 

 

국회의 학제 개정

 

제헌국회에서 진통 끝에 가까스로 만들어진 학제는 곧 실제적인 문제를 노정시켰다. 「교육법」 제정으로 인해 만들어진 6-4-2-4/6-4-3/6-4-4 학제에서 고등학교는 2년 내지 4년으로 다양화되었다. 2년제는 대학 진학을 위한 인문고교, 3년제와 4년제는 실업고교였다. 그런데 같은 「교육법」의 제111조에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고등학교, 사범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이와 동등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2년제 고교 졸업자와 3, 4년제 고교 졸업자가 결과적으로 동일하게 대학입학 자격을 갖게 된 것이다. 이는 곧바로 불균등 문제를 야기했다.

 

이를 반영하여 안호상은 「교육법」 통과 후 세 달 만에 다시 국회에 「교육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개정안의 내용은 위에서 말한 불균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3년제로 통일하는 것이었지만, 또한 그와 함께 고교 입학 자격을 ‘4년제 중학교 졸업’에서 ‘4년제 중학교 3학년 수료’로 바꾸는 것이 개정안에 담겨 있었다. 후자의 개정안을 내놓은 이유는 당시 중학교의 2/3 가량이 3년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중학교 205교 중에서 3년제 중학교가 143교, 전수과(專修科) 1년을 더한 4년제 중학교는 62교에 불과했다. “… 중학 4년제의 졸업생으로만 고등학교를 들어가게 한다고 하면 143학교의 학생은 앞길이 막연합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읍니다”19라고 안호상은 국회에서 개정 이유를 설명했다. 논의 끝에 학제 수정안이 재석 122, 가 63, 부 12로 가결되어20 학제는 결과적으로 「교육법안」의 그것과 유사한 내용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본제’가 아닌 ‘삼본제’로 좀 더 복잡해진 것이다. 즉 6-3(중학교 3년 수료)-3(고등학교)-4(대학)/6-3(중학교 3년 수료)-3(고등학교)-2(초급대학)/6-4(4년제 중학교 졸업)-4(초급대학) 등 세 경로가 만들어졌다.

 

[그림 1] 국회의 학제 개정 관련 신문기사(『東亞日報』 1950.2.5.(2).)

그런데 이 학제는 1951년에 접어들어 다시 한번 개정된다. 먼저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4일, 문교부장관이 안호상에서 백낙준으로 교체되자 학제를 단선형으로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다시 본격화된다. 백낙준이 이끄는 문교부의 학제 개정안의 요지는 중학교의 연한을 3년으로 통일하고, 중학교 이후 입학하는 4년제 초급대학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이 개정안이 1951년 2월 28일, 제2대 국회 제10회 제36차 본회의에 제출되어 심의에 들어갔다. 국회에서 문교부장관 백낙준은 중학교 3년제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첫째, 중등교육이라고 하는 것을 3․3제로 하자고 하는 근본 뜻은 … 중등교육의 정도를 높이자고 하는 데 있읍니다. … 우리 중등학교의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중등학교, 고등학교 3년을 합해 가지고 중등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법과 마찬가지로 중등학교를 4년으로 해 버린다고 하면 우리나라의 중등학교라는 것이 4년으로 저하될 염려가 있는 것입니다. … 3년제의 중등학교를 두는 경우에는 수를 많이 증가할 수 있다는 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 지금은 우리 소학교 국민학교 교육은 의무교육으로 실시하고 있지만, 우리의 교육 정도도 높아질 것 같으면 적어도 중등학교 교육까지 9년의 의무교육을 실시하게 될 터인 것과 지금부터 그 기초로서 중등학교를 3년으로 해 두었읍니다. … 중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그 기초를 미리 놓자는 것입니다. … 3·3제로 나누는 것이 다른 나라에서도 경향이 있으니 만큼 다른 나라의 학제를 답지(踏之)하자고 하는 것이 이유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21

 

주된 이유는 네 가지였다. 첫째는 ‘중등교육’의 연한은 중학교 연한이 아니라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한 연한이므로 중학교를 3년으로 한다고 해서 중등교육의 질이 저하될 것이라는 우려는 오해라는 점, 둘째는 중학교를 3년제로 하면 지방에서 설립이 용이하다는 점, 셋째는 향후 중학교까지의 의무제 도입에 대비하기 위해 3년제가 유리하다는 점, 넷째는 6-3-3제가 국제적 기준에 부합한다는 점 등이었다.

 

이러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개정안에 대한 반대 의견이 격렬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반대 논리는 학제가 49년 말에 제정된 후 반 년도 되지 않아 50년 초에 바로 개정되었는데 그것을 채 실시하기도 전에 다시 개정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헌국회 때와는 국회 내의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제2대 국회였기 때문에 의원 구성에 변화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문교부 정책을 지지하는 대한교육연합회가 추천한 의원들이 일부 국회에 진출했다.22 문교부 자체도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의원들을 대상으로 사전 로비를 한 탓인지, 1951년 3월 7일의 제41차 본회의에서 문교부가 제시한 학제 개정안이 재석 107, 가 57표, 부 13표로 가결된 것이다.23 오늘날에도 기본적으로 유지되는 한국의 기간학제 즉 6-3-3-4제는 양 대에 걸친 국회에서의 공방 끝에 이렇게 하여 가까스로 제정될 수 있었다.

 

백낙준의 국회 발언에서 제시된 중학교 3년제화의 이유 네 가지 중, 의원들의 동의를 확보하는데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아마도 3년제 중학교 보급의 용이성이라는 실제적 이유였던 것으로 보인다. 1951년 3월은 한국전쟁 상황이었으며 국회도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열렸다. 전쟁으로 인한 교육의 물적, 인적 자원 파괴와 손실이 심각한 상황에서 단선형/복선형 여부가 쟁점으로 제기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중학교를 신속히 증설하는 것이 보다 시급하다는 실제적 판단에서 비롯된 중학교의 ‘연한 조정’이 학제 개정의 핵심이었다. 물론 3년제 중학교 보급의 용이성은 교육 기회의 절대적 확대로 이어지고, 나아가 장래에 중학교 의무제 실현을 비교적 용이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의 기회균등’ 이념의 실현을 위한 조건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고등학교 수준에서 인문고교와 실업고교의 제도적 분리를 문교부나 국회의원들 모두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것은 국회에서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다. 문교부와 국회에서 학제를 제정할 때 주된 쟁점이 되었던 것은 단선형·복선형 문제였다기보다는 각급 학교 교육의 연한 설정 문제였다.

 

 

한국 학제의 특질

 

지금까지 검토한 학제 형성 과정과 그것을 뒷받침한 각각의 논리들에 비추어 볼 때, 해방 후 제정된 한국의 학제는 어떤 특질을 지닌 것이었을까.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학제 제정 과정에서 ‘교육의 기회균등’과 같은 이념적 원리 이상으로 학교 증설의 효율성이나 실업교육 강화와 같은 국가의 필요성에 입각한 실제적 원리가 작용했다. ‘교육의 기회균등’ 원리는 그 의미가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채 애매하게 통용되었다. 6-3-3-4 학제가 ‘교육의 기회균등’ 원리를 실현하는 학제로 주장되고 정당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학제 제정 과정에서 각축을 벌인 다양한 다른 학제안들 역시 마찬가지로 ‘교육의 기회균등’ 원리를 표방했다. 실제로 ‘교육의 기회균등’ 원리는 ‘교육 기회의 확대’와 같은 의미였다. 따라서 학제 제정 과정에서 실제로 보다 강하게 다루어진 쟁점은 단선형·복선형의 선택 문제보다는 교육 기회의 신속한 확대와 실업교육의 강화를 위해 중등 및 고등교육의 학년을 몇 년으로 설정할 것인가 하는 연한 조정 문제였다.

 

물론 식민지기의 학제를 지속할 수는 없고 교육 기회를 확장하기 위하여 어떤 식으로든 학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식이 일치했다. 이러한 공통된 인식은 적어도 해방 이후 한국의 학제가 초등교육 이후 차별적인 위계를 지닌 다양한 경로로 나뉘었던 식민지기의 그것을 답습하지 않도록 만든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으며, 그것이 초등교육 및 전기 중등교육 단계까지의 단선형 학제를 실현시킨 힘이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둘째, 학제 제정 과정은 각급 단계 교육의 성격과 목적, 내용 등에 대한 면밀한 검토 과정을 결여한 채로 제도적 틀을 서둘러 마련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제의 내용, 즉 각급 학교에서 어떠한 성격의 교육이 어떠한 목적과 목표로 전개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후의 과제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각급 단계 교육의 성격과 관련된 논의 과정의 부실함이 이후 한국 학제의 내실을 동요시킬 여지를 증폭시켰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예컨대 1951년의 학제 제정으로부터 12년이 지난 1963년, 박정희 정권 시기에 ‘실업고등전문학교’제가 도입되어 중학교 이후 5년제의 복선형적 실업교육 경로가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중학교 이후의 후기 중등교육 제도로 5년제 실업고등전문학교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이는 전술한 「교육법안」의 재래를 떠올리게 하는 조치였다. 이후 1970년에는 고등교육 기관으로 2〜3년제 전문학교가 제도화되었으나 1978년에 초급대학과 더불어 모두 2〜3년제 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고, 1979년 이후부터 공식적으로 전문대학 제도로 일원화되었다.24 이러한 중등교육 단계에서의 복선형 학제 강화는 이렇다 할 논란이나 반대 없이 추진되었다.

 

셋째, 학제 제정 과정에서 사회적인 계급·계층적 갈등이나 이해관계의 작동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학제의 제정은 문교부와 국회의 교섭과 논의, 조정이라는 제한된 소세계 안에서 다소간의 폐쇄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문교부와 국회의 학제 제정 관련 정보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또 문교부와 국회 밖에서도 학제를 둘러싼 논의가 일부 지식인을 중심으로 진행되기는 했으나 그것이 전 국민적인 관심사로 부상하거나 사회 운동으로 발현되는 경우는 없었다.25 물론 해방 이후 급격히 발흥한 교육열을 고려한다면, 국민들이 당시 학제에 대해 무관심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민들 혹은 특정 사회계층이나 집단의 교육적 관심이 학제 제정에 ‘운동’의 형태로 영향을 미치거나, 혹은 경합하는 여러 학제안이 특정 계층의 이해관계와 결합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이 점은 유럽에서 학제 재편의 역사적 과정과 비교해 볼 때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프리츠 링거(Fritz Ringer)에 따르면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중등교육의 이른바 ‘분절화’(segmentation)가 1870년부터 1920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분절화’란 “교육시스템이 하위 구분되어 커리큘럼과 학생의 사회적 출신 쌍방을 달리 하는 학교나 프로그램이 병존하는 제도”26를 가리킨다. 간단히 말하면 ‘복선형 학제’이다. 유럽의 중등교육에서 그리스, 로마의 고전어를 가르치는 프랑스의 ‘리세’, 독일의 ‘김나지움’과 같은 학교계통 그리고 고전어를 가르치지 않고 대학 진학 기회도 현격히 제한되는 비고전어 학교계통의 분화가 그 예인데, 예컨대 20세기 전반의 영국의 경우처럼 소수의 엘리트 계층을 위한 경로와 일반 대중을 위한 경로가 초기부터 뚜렷이 구분되는 ‘복선형’도 그 전형이라 할 수 있다.27 이러한 분절화는 산업화 과정에서 전통적인 지배계급, 신흥 부르주아계급, 신흥 전문직 계급과 소상공인 및 노동자계급 간에 교육을 둘러싸고 전개된 계급적 역동의 산물이었다. 유럽에서 ‘분절화’를 폐지하고 그것을 ‘단선형’ 제도로 개편하려는 시도는 계급적 이해에 가로막혀 쉽게 실현되지 못했으며 20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힘겹게 점차 제도화되어 갔다.

 

넷째, 한국의 학제는 후기 중등교육에서의 ‘법제적 단선형’과 ‘실질적 복선형’의 병존을 내장하고 있었다. 여기서 ‘법제적 단선형’과 ‘실질적 복선형’ 개념은 전후 일본 학제 제정 과정을 분석한 야마노우치 다로(山內太郞)의 연구에서 시사받은 것이다. 그는 전후 일본의 학제에서 고등학교가 초기에는 미국의 ‘comprehensive school’과 같은 ‘종합제 고교’를 중심으로 했으나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미군정이 종식된 이후에 진학계 고교와 취업계 고교를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법제적 단선형’과 ‘실질적 복선형’의 병존으로 파악하였다.

 

‘법제적 단선형’이란 일본의 후기 중등교육기관은 진학계 고교이건 취업계 고교이건 졸업 후 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으로의 진학 기회를 동일하게 부여한다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학제는 학교기관의 제도적 분리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학력 인정의 차별화가 결합되어 있는 유럽식의 ‘법제적 복선형’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실질적 복선형’이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후기 중등교육기관 자체를 진학 준비와 취업 준비로 제도적으로 분리한다는 것, 그리고 입학 단계에서 분류·배치된 학생들이 이후 그들의 선택을 번복할 기회를 부여하지 않고 반대로 일단 이루어진 학교 배치에 무조건 적응하도록 사실상 강제하는 틀이라는 의미다.28 그의 이러한 입론은 1951년에 제정된 한국의 학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한국의 후기 중등교육 단계에서는 진학이든 취업이든 일단 어느 계열로 배치된 학생에게는 선택의 번복을 사실상 허용하지 않는다. 특히 실업계 고교로 배치된 학생이 이후 대학 진학의 포부를 갖게 된다 해도 그를 위해 일반계 고교로의 전학이 허용된다거나 아니면 실업계 고교 내에서 진학에 대비하는 교육과정을 이수할 기회가 부여되지는 않는다. 오로지 자의든 타의든 일단 배치된 계열의 고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응을 요구할 뿐이다. 예컨대 1959년 3월 4일, 서울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이 교내에 ‘진학반’을 설치해 달라고 요구하며 맹휴에 돌입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서울시교육위원회는 이 학교가 공업학교이므로 학생들의 요구는 부당하다며 거부했고, 심지어 당시 경기공업고등학교에 설치되어 있던 ‘진학반’도 폐지하는 방향으로 대응했다.29 이는 ‘단선형’으로 흔히 여겨지는 한국 학제의 ‘실질적 복선형’적 특질을 보여주는 여러 근거들 중 하나다.

 

한국 학제의 ‘단선형’ 원리를 약화시키는 또 다른 측면들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랜 기간 우리 사회에서 중등교육은 주로 남학생과 여학생이 서로 다른 기관에서 교육받는 실질적인 ‘남녀 별학(別學)’의 형식으로 전개되어 왔다.30 따라서 중등교육 단계에서 성별로 차별적인 사회화가 전개되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은 사실상 매우 오랜 기간 서로 다른 ‘선’을 밟으며 교육을 받아 왔다는 점에서 한국 학제의 ‘단선형’ 원리는 그 안에서 침식되고 있었다.

 

한편, 1960년대 말부터 ‘중학무시험제’, ‘고교평준화정책’ 등을 통해 중등교육기관의 ‘평준화’가 진행되기 전까지는 중학교 및 고등학교에서 이른바 ‘K-S’31로 대표되는 ‘명문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들 간에 뚜렷한 ‘학교차’가 존재했다.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는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이른바 정계의 학교와 제도적으로 분리되어 공민학교-고등공민학교·기술학교-고등기술학교 등 그 학력이 상급학교로의 진학 자격이 될 수 없는 방계의 학교가 오랜 기간 일정한 규모로 존재해 왔다.32 ‘남녀 별학’, ‘학교차’, ‘방계 학교’ 등 한국 학제의 내면을 구성하는 여러 측면들은 한국의 학제의 성격을 ‘단선형’으로만 단순하게 규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측면들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의 학제는 초등 및 전기 중등교육까지는 단선적 경로를 취하지만 후기 중등교육부터 복선적으로 경로가 나뉘어, 단선형과 복선형이 일종의 포크와 같은 형태로 병존하는 ‘분지형(分肢型: fork system)’33 학제다. 향후 단선형적인 지향이 강화될지 복선형적인 지향이 강화될지는 여전히 미확정인 채로 우리나라의 학제가 출발했다. 다만 동시에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중등교육의 적어도 ‘법제적 단선형’을 내용으로 하는 한국의 학제가 1940년대 후반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 볼 때 비교적 진보적인 제도였다는 점이다.34 한국의 학제는 그러한 학제의 탄생을 저지하는 특정 계급·계층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구에 비해 용이하게 진보적인 ‘법제적 단선형’을 내용으로 담을 수 있었다. 그것은 교육제도가 아래로부터의 사회적인 투쟁과 운동의 산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계층적 역동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국가에 의해 위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학제는 학교교육의 범계층적 대중화를 촉진할 가능성이 크다. 아마노 이쿠오(天野郁夫)에 따르면 단선형 학제의 성립은 학교 제도가 지닌 교육 포부의 ‘냉각’(cooling out) 기능을 약화시켜 중·고등교육에 대해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심리적으로도 ‘접근’하기 용이하게 만든다.35 한국의 경우 6-3-3-4 기간 학제 제정을 통해 적어도 특정 집단의 교육열을 ‘냉각’시키지는 않는, 나아가 범계층적으로 교육열을 ‘가열’시키는 제도적 틀이 마련된 셈이다. 물론 전술한 것처럼 한국의 학제는 ‘분지형’으로서 그 안에 복선형적 지향을 내장하고 있었고 이후 국가권력은 실업교육의 필요를 제기하며 복선형적 지향을 강화하려 거듭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의 중등 실업교육 강화정책은 아래로부터의 민중의 교육열 작동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무력화될 가능성도 상존했다. 나아가 한국인의 교육열은 사회적인 변동과 조우하게 되면 점진적인 가열을 넘어서서 급격하게 폭발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폭발의 계기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갑자기 찾아왔다. 한국현대사상 가장 파괴적이고도 전면적인 사회 변동, 즉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전 칼럼]

• 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4) – “교육법 제정”

• 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3) – “정부 수립과 안호상의 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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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국무회의록』 「교육기본법 및 학교교육법안 건」(제34회), 1949.3.22. BA0182402.
  2. 「國會速記錄 第1代國會 第5回 第28號」(1949.10.31.).
  3. 『국회회의록』 원문은 국회회의록(http://likms.assembly.go.kr/record/) 수록 자료를 활용했다.
  4. 「교육법」 원안과 개정안 자료는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http://www.law.go.kr/main.html) 자료를 활용했다.
  5. 吳天錫 (1964), 『韓國新敎育史』, 現代敎育叢書出版社, 404쪽.
  6. 류지선 (1992), 「기간학제 형성과정에서의 대립과 갈등」,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장 참조.
  7. 吳天錫 (1964), 『韓國新敎育史』, 現代敎育叢書出版社, 403쪽.
  8. 洪鼎植 (1949), 「新學制案의 特色」, 『새교육』, 3월, 2(2), 93-95쪽.
  9. 그런데 국제적인 교육 수준에 부합한다는 논리는 반박될 여지가 컸다. 예컨대 문교부의 3·3제 주장과 관련하여 당시 성균관대학 부학장인 이우관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첫재로 선진국가의 제도라 할지라도 맹목적 추종은 금하여야 할 것이며 또 선진국이라 할지라도 영국을 위시하야 다수의 서구 국가 중에는 3·3제를 채용하지 않는 자 많으며 미국에 있어서도 주에 따라서 반드시 3·3제가 않인 예외도 있는 것을 우리는 아라야 할 것이요”(李又觀 (1950), 「學制改革批判」, 『新天地』 1월, 5(1), 117쪽.).
  10. 朴熙秉 (1959), 『敎育法解義』, 교육주보사, 16쪽.
  11. 「國會速記錄 第1代國會 第5回 第26號」(1949.10.28.), 515쪽.
  12. 「國會速記錄 第1代國會 第5回 第28號」(1949.10.31.), 553쪽.
  13. 이 조항의 초안에는 ‘적어도’라는 문구가 없었다. 그러나 제헌국회 제1회 제23차 본회의에서 주기용 의원이 의무교육을 초등교육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수정안을 제출함으로서 이상과 같이 수정된 것이다(「國會臨時會議速記錄 第1代國會 第1回 第23號」(1948.7.2.).
  14. 「國會速記錄 第1代國會 第1回 第18號」(1948.6.26.), 237쪽.
  15. 孫晋泰 「학교제도론-국회의원 諸公에 고함」 『서울신문』(1949.11.11.)(國史編纂委員會(編) (2001), 『資料大韓民國史 15』, 國史編纂委員會, 150쪽.
  16. 류지선 (1992), 앞의 논문, 53쪽.
  17. 「國會速記錄 第1代國會 第5回 第38號」(1949.11.11.), 794쪽.
  18. 「國會速記錄 第1代國會 第5回 第38號」(1949.11.11.), 799쪽.
  19. 「國會速記錄 第1代國會 第6回 第27號」(1950.2.10.).
  20. 「國會速記錄 第1代國會 第6回 第28號」(1950.2.11.).
  21. 「國會速記錄 第2代國會 第10回 第36號」(1951.2.28.).
  22. 류지선 (1992), 앞의 논문, 93쪽.
  23. 「國會速記錄 第2代國會 第10回 第41號」(1951.3.7.).
  24. 文敎40年史編纂委員會 (1988), 『文敎40年史』, 文敎部, 14쪽.
  25. 일본의 경우 흥미로운 대조를 보인다. 일본에서는 6·3제 완전 실시를 호소하는 청원문이 국회에 쇄도하여 47년의 7월과 8월 두 달 동안 224만 건에 달했으며, 또한 신교육법안이 국회에서 토의되었을 때, 단선형 학제 실현을 요구하는 일반인들의 편지가 육백만 통 가까이 국회에 쇄도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총사령부에도 2백만 통 정도 답지했다. “일반국민이 이처럼 분명하게 더구나 대세로 자신들의 생각을 말한 것은 전전의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山內太郞(編) (1972), 앞의 책, 103-108쪽).
  26. ミュラ, D.K., F.リンガ, B.サイモン(編) (1989), 望田幸男 外(譯), 󰡔現代敎育システムの形成-構造變動と社會的再生産 1870-1920󰡕, 京都: 晃洋書房, p.67.[Müller, Detlef K., Fritz Ringer and Brian Simon(eds.) (1987), The Rise of the Modern Educational System-Structural Change and Social Reproduction 1870-1920,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7. 영국의 경우, 엘리트 자제를 위한 경로 즉 ‘pre-preparatory school’(초등수준)-‘preparatory school’(전기중등 수준)-‘public school’(후기중등 수준)의 경로가 일반 대중을 위한 경로인 ‘primary school’(초등수준)-‘grammer school’(중등수준 일반)·‘technical school’(중등수준 직업)·‘secondary modern school’(중등수준 종합) 등의 경로와 구분되어 있다(竹內洋 (1993), 『パブリック・スクール-英國式受驗とエリート』, 東京: 講談社. 참조).
  28. 山內太郞(編) (1972), 『戰後日本の敎育改革 5 – 學校制度』,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제1장 제2절 참조.
  29. 「서울工高盟休 理由있다」 『朝鮮日報』 1959.3.6.(3). 조간.
  30. 김미숙 (2001), 「미군정기의 남녀공학정책」, 『교육학연구』, 39(4), 93-112쪽. 참조.
  31. 본래는 한국공산품표준규격을 의미하지만, 또한 경기고(K)→서울대(S)를 거치는 것이 성공의 표준루트라는 의미로 1960년대에 통용되었다(「60年代 新語」 『東亞日報』 1969.12.20.(7).).
  32. 예컨대 학제 제정 20년 후인 1969년 당시를 보더라도 중학생 1,147,408명과 함께 고등공민학교와 기술학교, 중학 수준 각종학교에 92,265명(전기 중등학생 전체의 7.4%)이 다니고 있었고, 고등학생 530,101명과 함께 고등기술학교, 고등 수준 각종학교에 18,898명(후기 중등학생 전체의 3.4%)이 다니고 있었다(『교육통계연보』 1969년도). 「교육법안」에는 「문교부초안」과 마찬가지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등의 ‘정계’ 학교계통과는 별개로 공민학교, 고등공민학교, 기술학교, 고등기술학교 등 이른바 ‘방계’ 학교계통이 설정되어 있었다. 박희병은 ‘모든 학생이 학교의 종별 여하를 막론하고 학력년(School Age)에 따라 자유로 진학할 수 있는 자격과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는 ‘기회균등의 철칙’에 따라 이들 방계 학교 졸업자도 정계 학교로 입학할 수 있도록 그 학력을 제도적으로 인정하자고 제안했지만 20인위원회와 문교사회위원회에서 모두 부결되었다고 증언한다(박희병 (1959), 앞의 책, 19쪽.). 이 점은 「교육법」에서도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방계’는 ‘학제’의 변방으로 밀려난 교육경로를 벗어날 수 없었다.
  33. 苅谷剛彦 (2014), 『敎育の世紀-大衆敎育社會の源流』, ちくま學藝文庫, 東京: 筑摩書房, p.57.
  34. 山內太郞(編) (1972), 앞의 책, 종장 참조.
  35. 天野郁夫 (1982), 『敎育と選拔 敎育學大全集 5』, 東京: 第一法規, pp.201-202.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식민교육사 및 교육역사사회학, 동아시아근대교육의 비교사회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교육과학사, 2000),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서해문집, 2018), 역서로는 야나기 하루오의 『학급의 역사학』(교육을바꾸는책, 2026), 가리야 다케히코의 『대중교육사회의 형성』(학지사, 2023), 고마고메 다케시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공역, 역사비평사,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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