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 읽기 – ⑥ 논란에서 문제 삼지 않는 문제
| 고교학점제를 옹호하건 비판하건, 논자들이 학교 교육을 ‘목표’의 수단으로 여기는 데서는 서로 차이가 없다고 지적한다. ‘수단적 교육관’에서 특히 교육 내용의 전통을 가볍게 여긴다는 점을 비판한다. 교육 내용을 함부로 다루기 전에, 왜 그런 내용이 교육 내용이 되었는지부터 고찰해야 바른 순서라고 주장한다. |
고교학점제가 필요하다는 많은 이유
고교학점제가 왜 필요한지 정당화하는 이야기는 분분하다. 정부는(정권의 ‘색깔’에 관계없이) “생산 가능 인구 감소가 국가 성장동력 저하로 이어지지 않도록 대비”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진보적’ 교육론자들은 “자사고·특목고를 폐지하여 고교 서열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하고, 따라갈 수 없기에(준비도와 관계없이 강제되기에) 학교 수업이 무의미했던, “내신의 바닥을 까는” 학생들에게 ‘의미’를 주기 위해서 필요하다고도 한다. ‘보수적’ 교육론자들도, 고교학점제가 ‘진보’ 정권의 프로젝트라는 선입견에서1 대체로 비판하는 데 집중하고 옹호하는 경우가 드물기는 하지만, ‘학생 맞춤형’이란 기치 아래 각자 나름의 전략을 구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에 묵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어떤 이유이건, 고교학점제가 자신이 주목하는 ‘교육 문제’를 건드려 준다고 여겨지는 경우, 바로 그 이유로 지지자들은 옹호에 나서는 듯하다. 반면, 비판하는 쪽에서는 그런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고 맞선다. 그렇게 논란은 이어지고 있지만, 어느 입장이건, 우리는 좀 더 깊고 면밀하게 헤아리며 합의를 모색해야 할 점이 있다. 우리가 ‘지금 여기’의 이해(利害)에 몰두해 각축하는 동안 더 큰 무엇을 잃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볼 점이 있다.
학교는 이제 교육의 장(場)이기보다 개인 지위를(‘행복’을) 결정하는 선별 장치로 인식된다. 교육의 과정은 살벌한 경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파생되는 고통은 모두가 견뎌내기 힘든 지경이다. 그 고통을 해소해 주겠다는 공약은 정치에서 으레 챙기는 ‘표심(票心) 낚싯밥’이다. 수사(修辭)는 늘 바뀌고 화려하지만, 그런 약속은 으레 섣부른 정책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교육 정책은 어떤 정권에서나 국민 고통을 해결한다는 선의의 외양을 갖추지만, ‘해결책’의 이름으로 학교 교육 본체를 희생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
편이 갈린 논란에서도 학교 교육을 수단으로 여기기는 서로 마찬가지
고교학점제 논란에서는 편이 갈려 서로 부딪고 있지만, 표면의 다툼 이면에서는 논자들 대부분이 하나의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학교 교육은 ‘수단’이라는 전제이다. 학교 교육에는 목표가 주어져야 하고, 교육 내용과 수업은 그것에 맞춰 프로그램되어야 한다는 전제이다. 고교학점제는 말하자면 그렇게 요구되는 프로그램의 운영 체제이다. 운영 체제로써 고교학점제가 알맞다-아니다 의견이 갈리기는 하지만, 변화하는 목표에 상응하도록 학교가 적절한 교육 운영 체제를 갖춰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하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지만, 이를테면, 고교학점제가 필요한 이유를 정부가 어떻게 해명했는가. 인구 감소 때문이라고 했다. 과거 인구가 충분(?)했을 때 ‘교육상의 유실(遺失)’은 그다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지만, 인구가 줄어들면서 사태는 달라졌다는 말이다. 국가 성장동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게 되는 형국에서, 생산 가능 인구를 유지하려면 교육의 과정에서 단 한 명의 ‘인재’ 유실이라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교학점제는 바로 이 위기를 위한 처방이다. 이런 정당화, 즉 ‘수단적 교육관’에는 논자들이 별 이의가 없는 듯하다. ‘국가 성장동력 유지’라는 목표에 학교 교육을 수단으로 동원한다는 고교학점제 전제 자체가 논란되지는 않는다.2
인구 이야기가 국가적 수준의 것이라면, 개인 수준에서는 ‘학생 맞춤’의 이야기가 있다. 결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소외 학생 배려의 이야기도 기본 성질은 다르지 않다.3 모두 교육을 개인 수준의 수단으로 운위한다. 개인의 ‘적성과 진로’에 맞게 또는 ‘느린 학습자’가 배제되지 않도록 학교 교육의 길을 틀어야 한다는 논지를 편다. 이때 ‘길을 트는’ 방향은 주로 개인의 선택 또는 필요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학교 교육은 수단이 된다.
과연 내용은 목표(필요)대로 바뀌어야 할지
교육을 외재적인 목적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통념은 어제오늘의 것이 아니다. 근대 이후 이른바 합리주의적인 사고의 틀에서 학교 교육을 사회 공학의 구도로 읽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졌다. ‘교육’에서 ‘성취’로 이어지는 흐름을 ‘수단 동원’에서 ‘목표 달성’으로 잇는 공정, 즉 ‘투입-산출’의 공정으로 동일시하는 논리는 이제 전혀 무리 없다는 듯 받아들여진다. 국가의 경제 성장이건 개인의 지위 획득이건, 그것이 목표라면 학교 교육은 그것에 조응하도록 프로그램되어야 하고, 또 그런 프로그램 만들기는 어려운 일도 아니라 여겨진다. 마치 역사적으로도 학교 교육은 늘 그렇게 쓰여 왔던 듯 안이하게들 이야기한다.
‘교육과정 이론’마저도 수단적 교육관을 고착하는 데 대대로 한몫해 왔다. 우리나라 교육과정 개정의 ‘표어’들만 일별해 보아도 그런 흐름은 확인할 수 있다. 광복 후 우리 교육과정은 ‘교과’를 기조로 삼았으나, 얼마 안 가, ‘경험 중심’이니 ‘생활 중심’이니 하는 사조를 따른다고 표방했다. 냉전 시대의 군비(軍備) 경쟁과 맞물린 ‘지식’ 또는 ‘탐구’ 중심의 조류가 그 뒤 표어를 색칠했고, ‘인간 중심’(또는 ‘열린 교육’)이란 표방도 이어졌으며, 최근에는 OECD 등이 내거는 기치를 좇아 ‘역량 중심’이 대세이다. ‘시대’의 과제(목표)를 따라 교육 내용을 재구성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이론’ 흐름이었다.
교육과 교육 내용을 목표에 종속시켜 수단 취급하는 논리가 공학적으로(인과적으로) 자명해 보일지 모르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수상쩍음은 곧 드러난다. 우리의 교육사를 보자. 일제식민지기에 조선의 학교 교육은 ‘황국신민’을 기르는 데 강제 동원되었다. 광복 후에 우리는 ‘홍익인간’ 또는 ‘민주 공민’을 키워내는 교육을 추구했다. 교육이념(일반 수준에서의 목표)만 보면 변화는 근본적이고 총체적이었다. 그러나 교육 내용을 보면 어떤가? ‘국어’나 역사 그리고 공민(사회, 도덕) 등과 같은 교과의 내용에서는 당연히 이념 변화에 상응할 만큼 개벽의 변화가 따랐다. 그러나 주지 교과 대부분에서 심대한 변화는 없었다. 국어, 역사, 공민과 같은 교과 경우에도 변화가 획기적이었지만, 그것은 ‘속 내용’에 대한 것이었다. 교과 과정(課程)의 틀(교과 범주)이나 운영을 보면 사실상 바뀐 것이 없었다.
천지개벽과 다름없는 ‘목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교육과정의 조직과 운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우리 교육사는 ‘교육과 교육 내용’에 대하여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리고 그런 미미한 변화가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구 일반의 현상이라는 사실은 또 어떤가? 광복 후에도 우리는 제국주의적 침해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열강’의 교육제도를 들여올 수밖에 없었기에 그랬을까? 늘 ‘선진국’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고, 또 일제 잔재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런 점이 없다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이란 활동이나 그것에 함축된 교육 내용이 사회 공학의 설계대로 축조되어 온 것이 아니고 인류 역사(진화)와 함께 ‘생성’되어 온 것이란 점을 환기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교육 내용은 ‘교육 목표’에 앞서 있었다고 보아야 할 터이다. 인류의 문화 전통에는 으레 교육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그 ‘내용’을 가르치는(전승하는) 행위를 일러 ‘교육’이라 하고, 그런 행위와 관련하여 교육 목표를 운위하게 된다면 그것은 교육 내용을 새롭게 선정하고 조직하는 데 작용할 지표로서가 아니라 이미 있는 교육 내용의 가치에 대한 주석으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었다. 요컨대, 교육 목표는 “교육 내용을 선정하고 조직”하기 위해 먼저 설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주어진 교육 내용을 어떻게 풀고 가르쳐야 할지 궁구한 결과로 막연하나마 추론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교육을 수단으로 동원하기 전에 교육이 무엇인지부터 짚어야
우리의 지혜로는 교육 내용의 ‘이유’를 헤아릴 수 없다. 어쩌면 200만 년이 넘는 인류 진화 과정에서4 완만히 잠입해 든(궁극적으로 ‘교육’으로 자리 잡은) 문화와 제도는, 지난 5만 년 정도의5 짧은(생물학적 진화가 개입할 여지가 있을 수 없는) 시간 만에 급속하게 지금의(‘인류세’라는 지질 시대 구분이 필요하다고 할 만큼의) ‘문명’을 일구도록 이끌었다. 그 과정에 작용한 ‘교육 내용’의 몫이 어떤 것인지 확연하게 알아낼 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이 불투명 또는 불가지(不可知) 하다고 해서, 상식적으로 명료해 보이는(실증적으로 그렇지 않은데도6) 인과론 또는 ‘목적-수단’론으로 교육을 마름질해서는 안 될 터이다. 그런 식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할 듯 여겨지더라도, 먼저, 교육 내용이 어째서 우리가 물려받은 바대로인지부터 숙고해야 마땅하다.
‘눈부시게 발달한 인간 문명’으로 인류는 지구(자연)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을 만큼 컸다. 이제 인간은 자연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없는 자유를 쟁취한 듯하다. 자유는 누구나 거침없이 누려도 될 듯하고, 그런 자유방임이 혹시라도 지구적 위기를 초래한다 해도 끊임없는 과학 기술 발전이 능히 해결해 주리라고 낙관한다. 정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행성으로 옮겨가면 된다는 호언도 나온다. 자유를 견제해 온 규범의 시대가 무너지고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이르자 고전이나 ‘형이상학’이 ‘개취’(개인적 취향)보다 더 존중되어야 할 이유는 폐기되었다. 전통을 잇는 교육도, 말하자면, ‘개인 선택’을 따라 종사해 마땅하다는 ‘이론’이 대세를 쥐게 된 셈이다.
인류의 문화 전통은 이제 추앙하며 이어가야 할 것이 아니라 지양해야 할 것으로 비아냥거려진다. 고교학점제 계획을 발표하는 정부 문서에서도 암암리에 드러나는 사태이다. 이를테면 정부는 교육 내용(교육과정)과 관련하여 고교학점제가 가져올 으뜸의 변화라며 이렇게 기술했다. “교사 중심의 획일적 교육과정 ➜ 학생 선택형 교육과정”. 이제까지의 교육 내용은 인류 역사가 정제해 낸 ‘위대한 유산’이 아니라 일개 교사가 학생들에게 임의로 강제하는 과제에 불과한 것이라는 듯이 서술하고 있다. 고교학점제는 그것을 학생 선택에 맡김으로써 ‘진정한’(‘맞춤’의) 가치를 갖추도록 탈바꿈시킬 것이라 장담하고 있다.7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취학률을 자랑한다. 누구나 학교에 다녀 보았고, 그래서 모두 교육이라면 ‘나도 안다’ 여기게 되었다. 나름의 바람이나 계산을 품고 교육 기회를 쟁취하고, 그만큼 교육을 수단으로 보게 된다. 교육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나의 ‘진로’를 풀어가는 일에 관련된 것일 뿐, 다른 이유는 없을 듯이 여긴다. ‘학교보다 학원이 교육을 잘한다’ 하거나 ‘문과생은 물리 시간에 자도 되지 않느냐’ 따지는 일이 다반사로 생겨난다.
‘나라 걱정’을 내세우는 이들은 교육이 국가 수준의 사업임을 힘주어 말한다. 국가의 ‘미래’ 또는 ‘경쟁력’이 교육에 달렸다고 외친다. 미래는 늘 불확실하고 경쟁력은 우리가 살아갈 밑천인 만큼, 교육은 민첩하게 시대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고 신봉한다. 지능정보사회, 제4차산업혁명, 디지털 대전환, AI 등등, 정권의 주기만큼이나 빠르게 변하는 ‘시대’ 표징을 따라 교육은 거듭 바뀌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턱대고 바꾸려 들기 전에, 본디 교육이 어떠했으며 왜 그러했는지부터 짚어야 한다. 이 우선순위는 논리적으로만 아니라 실제로도 당위이다. 전통은 구닥다리이고 버려져야 마땅한 것이 아니다. 전통은 ‘오늘 우리’의 원인이며, 우리가 제대로 살아가려면 먼저 전통의 존재 이유부터 헤아려야 한다. 뒤집더라도 그 이유를 알고 뒤집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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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학점제’ 구상이나 시도는, 진보 보수 구분할 것 없이, 과거 여러 정부에서 있었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는 연재 두 번째 글(“고교학점제 읽기 – ② ‘레토릭 과잉’의 경위”)에서 다뤘다. 고교학점제의 제도적 기반은 30년 전의 ‘5.31 교육개혁’에서 이미 마련했다고 정리했었다.
- 심지어 그러한 정당화 논리에는 학생(인간)을 수단화하는(국가라는 엔진의 연료 정도로 여기는) 오싹한 문제의 기미가 있지만, 이 점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논의가 없다.
- 이렇게 말하는 게 소외되는 학생을 배려하는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곡해되지 않길 바란다. 교육은 바람직하며, 당연히 누구도 거기에서 소외되어선 안 된다. 여기에서 문제 삼는 점은 소외 학생이 없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소외 학생을 배려한다는 원칙과 방법이다. 고교학점제에 포함된 ‘최소 수준 성취보장’의 규정을 바탕으로 ‘느린 학습자’도 ‘40% 이상 성취’란 이수 기준에 도달할 수 있게 만들겠다는 정도의 ‘맞춤형 교육’으로 “소외 학생 배려”를 이야기하는 것은 턱없다는 뜻이다. 교육이라면 교육 내용이 모든 학생의 삶에 스며들고 또 배어나도록 이끌어야 마땅하다.
- 두뇌 용량의 증가나 석기 제작과 전승 그리고 불의 관리 등을 근거로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의 생존 시기에 ‘가르치는 일’이 생겨났으리라고 가정한다면 어림잡을 수 있는 기간이다. 물론 가설적인 얘기이지만 터무니없는 가설은 아니라고 여긴다.
- 여러 지역의 동굴 벽화나 다른 여러 ‘상징적인’ 유물이 지시하는 시점을 ‘완전한 현생 인류’(fully modern humans) 시대의 기점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대략 5만 년 전이라 이야기할 수 있다.
- 세계 교육사를 보더라도, 지난 100년 이상 교육 담론은 학교 교육을 ‘목표’ 따라 바뀌어야 하는 수단으로 취급해 왔다. 그러나 그런 ‘패러다임’ 안에서도 목표와 학교 교육(또는 교육 내용)의 관련이 인과적으로 그리고 실증적으로 ‘투입-산출’의 공정으로 갈음된다는 근거를 찾아 정당화한 적은 없다. ‘공학적 교육관’에 대한 정당화는 늘 수사(修辭)에 머물렀다. 오늘날 OECD의 PISA가 퍼뜨리는 ‘역량 담론’에서도 그 허구성은 여전하다.
- 고교학점제가 ‘학생 맞춤형’을 표방하고 있기는 하지만, ‘공통과목’을 필수로 이수한 후에라야 선택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교과 과정을 그다지 허물지 않는다고 변호할지 모른다. 그러나 고교학점제에 맞춘 ‘2022 개정 교육과정’ 자체가 6개의 ‘핵심역량’을 “학교 교육 전 과정을 통해 중점적으로 기르고자” 한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성질을 유지하는 교과들 경우에도 학생의 선택을 고려하여 ‘실용’이나 ‘흥미’ 등의 이름으로 ‘물 타져’ 있다. 교육과정을 구성하거나 운영하는 원칙과 실제 전반에서 학교 교육은 수단이 되어 있고, 교육과정도 따라서 변질되어 있다.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