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부모가 놓치고 있는 것들
| 부모의 다정한 손길이 따뜻한 울타리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아이가 스스로 걷지 못하게 하는 벽이 되기도 합니다. 이 글은 그 미묘한 경계를 살피며, 부모와 사회가 어떤 울타리를 다시 세워야 하는지를 이야기합니다. |
지금 부모만큼 다정한 세대는 없다. 부모는 아이의 감정을 읽어내고, 사소한 상처도 놓칠까 봐 불안해하며, 매일 “나는 좋은 부모였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정서적 안전, 자존감, 애착은 더 이상 유행어가 아니라 부모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책임처럼 여겨진다. 아이가 울기 전에 막고, 좌절은 부모가 대신 조율하며, 실패는 미리 제거해야 할 위험으로 여겨진다. 오늘의 부모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어느 때보다 세심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아이의 삶에 개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데도 부모는 지쳐가고, 아이는 오히려 더 불안해진다. 사소한 변화에도 흔들리고, 스스로 해결할 기회를 갖지 못한 아이들은 작은 실패에도 무너진다. “우리 때보다 훨씬 더 사랑받고 자랐는데 왜 더 약할까?”라는 부모의 당혹감은 그래서 생긴다. 다정함이 충분한 시대에, 오히려 자율성과 정신건강이 무너지는 역설적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부모는 명령하고 훈육하는 방식 대신 공감과 대화, 감정코칭을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치는 부모는 스스로를 죄책감에 빠뜨리고, 친절하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그 다정함의 이면에는 아이의 모든 감정을 관리해야 한다는 압박이 숨어 있다. 아이가 실망하면 빨리 회복시켜야 하고, 갈등이 생기면 즉시 중재해야 하며, 불편함을 느끼면 곧장 제거해 줘야 한다. 그렇게 부모는 아이의 감정을 대신 조율하는 조정자가 되고, 개입의 범위는 점점 넓어진다. 아이 곁을 지키려는 마음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도 모르게 아이의 삶 깊숙이 개입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그 결과 부모의 다정함은 의도치 않게 아이의 자율성을 약화시키고, 표현은 풍부하지만 실행은 약한 세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아이들은 하고 싶은 것은 많다고 말하지만, 그 일을 해내기 위한 과정과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와 소아정신과 의사 류한욱 원장은 이런 현상을 ‘정서적 비만’1이라고 설명한다(김경일, 류한욱, 2025). 감정과 욕구는 넘치는데, 그 감정을 조절하고 목표를 끝까지 수행하는 힘은 부족한 상태이다. 말하자면 생각은 이미 초거대 AI처럼 빠르게 확장되지만, 행동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의 아이들은 표현은 넘치지만 실행은 약한 세대라는 평가를 듣는다. 감정 표현은 화려한데, 그 감정을 삶으로 옮기는 근육은 충분히 단련되지 못한 것이다.
문제는 부모가 아이를 망치려 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좋은 부모가 되려는 마음이 과하게 작동한 결과이다.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수록, 부모는 더 지치고 아이는 더 약해지는 이 시대의 아이러니를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감정에 세심하게 반응하는 다정함이, 어느 순간 아이의 경험을 대신 살아주는 개입으로 바뀌면서 자율성이 설 자리를 잃는 것이다. 다정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다정함이 지나치고 통제적으로 작동할 때 아이는 스스로 감정을 다루고 선택하는 기회를 빼앗긴다.
우리는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우리는 아이에게서 스스로 살아볼 기회를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의 ‘정서적 비만’은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만큼 부모가 대신 살아주고 있는 양육 방식의 결과이지는 않을까? 다정한 손길이 따뜻한 울타리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아이가 스스로 걷지 못하게 하는 벽이 되기도 한다. 이 글은 그 미묘한 경계를 살피며, 부모와 사회가 어떤 울타리를 다시 세워야 하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좋은 부모’라는 이름의 부담
오늘날 부모는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육 정보를 접하며 살아간다. SNS에는 ‘아이를 망치는 7가지 말’, ‘정서 코칭 5단계’와 같은 조언이 끊임없이 쏟아지며, 부모는 늘 다정해야 하고, 조금 더 현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좋은 부모는 아이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어느새 그 감정을 부모가 책임지고 관리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바뀌고 있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부모의 부족함으로 연결되는 분위기 속에서, 부모는 감정의 방패막이가 되기를 요구받는다.
과거의 권위적 양육이 ‘통제’라는 이름으로 아이의 감정을 억눌렀다면, 오늘의 다정한 양육은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아이의 감정을 대신 떠안는다. 아이가 불편해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고, 좌절을 겪기 전에 위로를 미리 준비한다. 그것은 분명 사랑에서 출발한 행동이지만, 동시에 부모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통제의 방식이 되곤 한다. ‘좋은 부모’라는 이상이 높아질수록, 부모는 아이의 감정과 행동을 더 세밀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압박에 놓인다.
이 과정에서 부모는 스스로도 모르게 양육 ‘관리자’가 된다. 아이의 하루는 부모의 체크리스트로 관리되고, 모든 행동 뒤에는 해석과 개입이 따라붙는다. 아이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친구와 갈등을 겪으면, 부모는 즉시 교사와 연락하고 상황을 조정하려 든다. 아이가 해야 할 일을 미루면, 미루는 이유를 분석하고 동기 부여 전략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이 모든 개입의 결과가 반드시 아이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개입할수록 아이는 스스로 감정을 처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잃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모가 통제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좋은 부모가 되려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좋은 부모라는 기준은 이제 행동이 아니라 감정 관리 능력으로 옮겨갔다. 아이가 울지 않게, 실망하지 않게, 힘들어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부모의 역량이 되었다. 그러나 감정이 충족되는 것과 감정을 견디는 능력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지나치게 완충된 환경은 아이가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연습할 기회를 가로막는다.
부모는 아이를 통제하려는 의도가 없다. 그러나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압박 속에서 감정을 구제하고 조정해 주는 역할이 지나치게 확장되면서, 부모와 아이 모두가 숨이 막힐 만큼의 부담을 떠안게 된다. 다정함이 통제로 변하는 순간은 소리 지르는 순간이 아니라, 아이보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부터 아이는 자기 삶의 주인이 아니라, 부모가 설계한 감정 세계 속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표현은 넘치지만 실행은 부족한 세대의 탄생일지 모른다.
부모는 왜 놓지 못하는가?
부모가 아이 곁에서 지나치게 개입하게 되는 이유는 단순히 성향이나 성격 때문이 아니다. 지금의 부모는 아이의 모든 경험이 곧 부모의 역량으로 평가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아이가 떼를 쓰면 양육 방식이 문제라는 말을 듣고, 친구와 다투면 사회성 교육이 부족했다 등의 지적을 받는다. 잠을 잘 못 자거나 식습관이 달라져도 부모는 스스로 양육을 잘못한 탓이라고 자책한다. 아이에게 나타나는 작은 흔들림 하나하나가 곧 부모의 부족함으로 연결되는 분위기 속에서, 부모가 불안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 불안은 소비와 만날 때 더욱 커진다. SNS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의 뇌가 손상됩니다”, “지금 놓치면 평생 후회합니다” 같은 자극적인 메시지가 끝없이 흘러나온다. 아이의 마음을 다독이는 법, 좌절을 줄이는 법, 자존감을 높이는 교육 프로그램 등이 매일 새롭게 등장한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부모는 더 흔들린다.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지고, 불안할수록 더 개입하게 되며, 개입이 반복될수록 “내가 없으면 아이가 무너질 것”이라는 믿음은 커지고 있다. 악순환이 계속되면 부모는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보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양육에 더 개입하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불안이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구조적 요구라는 점이다. 지금의 사회는 아이가 실패하거나 흔들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입시와 평가 중심의 교육 체계는 잠깐의 늦어짐도 치명적인 낙오로 판단하고, 일상적 어려움도 조기 개입이라는 이름으로 개입 대상으로 삼는다. 그 결과 부모는 아이의 일상을 지켜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실패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개입해야 하는 ‘관리자’가 된다. 불안을 내려놓을 틈이 없는 것이다.
사회적 돌봄 역시 부모의 불안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과 같은 제도적 공간이 충분히 신뢰받지 못하면, 부모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공동체적 양육이 약해질수록 ‘모든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는 메시지는 더 강해지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가정으로 흘러든다. 이때 좋은 부모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 된다. 아이에게 생길 수 있는 모든 위험을 미리 차단하지 못하면 실패한 부모로 낙인찍히고, 이는 다시 불안과 개입을 확대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양육 부담은 부모 개인의 역량 부족 때문이 아니라, 돌봄을 가정에만 떠넘겨 온 사회 구조의 결과다. 부모교육도 물론 필요하지만, 불안을 부모의 심리 문제로만 다루는 순간 책임은 더 무거워지고 양육은 더욱 고립된다. 아이의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부모가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개입을 내려놓아도 괜찮다고 믿을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다. 믿을 만한 공공 돌봄, 부모가 자리를 비워도 걱정하지 않도록 설계된 긴급 돌봄 시스템, 실패해도 다시 연결할 수 있는 유연한 학제 구조, 아이를 함께 돌보는 지역 기반 네트워크가 바로 그러한 장치들이다. 이러한 기반이 탄탄하게 마련될 때에야 부모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떠안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제야 개입을 내려놓을 ‘용기’ 역시 현실이 될 수 있다.
좋은 권위, 건강한 좌절
오늘의 부모는 아이와 권위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려 한다. 강압적 훈육이라는 낙인을 피하고자, 지시와 통제 대신 협상과 설득을 선택한다. 그러나 문제는 권위 자체가 사라졌다는 데 있다. 부모가 규칙을 제시하지 못하고 모든 결정을 아이의 감정 상태에 따라 조정하다 보면, 아이는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움직일 수 있다”는 감각을 익힌다. 이는 존중받는 경험이 아니라, 세상의 한계를 체감하지 못하는 성장 경험이 된다.
이 과정에서 좌절은 아이의 성장 경험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좌절을 위험 요소로 간주하는 분위기 속에서, 부모는 아이가 불편해하기 전에 문제를 제거하고 갈등이 생기기 전에 대신 해결한다. 그러나 좌절은 자율성의 반대가 아니라, 자율성을 만드는 재료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경험, 실패 후 다시 시도해 보는 과정 속에서만 아이는 선택의 책임과 결과의 무게를 배운다. 좌절을 박탈당한 아이는 단단해지지 못한 채 감정적으로는 풍부하지만, 실행력은 약한 존재로 남게 된다.
권위 부재와 좌절 회피는 결국 아이의 ‘내적 기준’을 약화시킨다. 외부의 통제가 사라지고 부모가 모든 상황을 조율해 주면, 아이는 스스로 행동을 조절할 기준을 기르지 못한다. 그 결과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해야 할 일을 지속하지 못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최근 아동·청소년에게서 늘고 있는 집중력 부족과 실행 기능 결핍 역시 단순한 기질 문제가 아니라, 불편함과 실패를 견디며 기준을 세워볼 경험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CDC(2022)는 실행 기능·자기조절 문제로 진단되는 아동 비율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보고했고, 국내 ‘아동·청소년 정신건강실태조사’에서도 주의집중 곤란과 충동조절 어려움을 호소하는 비율이 전년 대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보건복지부, 2023).
그 해결책으로 다시 과거처럼 명령과 통제를 강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권위는 ‘지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준을 일관되게 지켜주는 ‘안정감’에서 나온다. 아이가 원한다고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도 위험하지만, 아이가 불편해한다고 매번 해결해 주는 것 역시 위험하다. ‘좋은 권위’는 감정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한계를 제시할 수 있는 힘이며, ‘건강한 좌절’은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성장을 위한 마찰을 제공하는 경험이다. 아이의 자율성은 바로 그 ‘따뜻한 권위’와 ‘의미 있는 좌절’의 균형 속에서만 자라난다.
넘치는 공감 속에 사라진 ‘감정 근육’
부모는 아이의 마음을 잘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이가 속상해하면 함께 감정을 읽어주고, 좌절감을 표현하면 충분히 받아주려 애쓴다. 이러한 공감의 노력은 분명 소중하다. 그러나 공감이 지나쳐 아이의 감정을 즉시 회복시키는 것이 목표로 바뀌는 순간, 그것은 오히려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개입이 된다. 부모가 감정을 대신 정리해 주는 경험이 반복될수록 아이는 스스로 감정을 다루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힘들면 엄마나 아빠가 해결해 줄 것이라는 방식으로 세상을 배우게 된다.
아이의 감정조절 능력은 공감을 많이 받았을 때보다, 스스로 감정을 정리해 본 경험이 쌓일 때 더 단단해진다. 울 때마다 곧바로 달래진 아이보다, 스스로 울음을 멈추고 다시 놀이로 돌아가 본 아이가 자기조절 능력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감정을 빨리 진정시키는 방법만 가르칠 뿐, 아이가 감정을 끝까지 겪어 보고 스스로 회복해 보는 경험은 거의 허락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오늘의 아이들은 감정 표현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발달했지만,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연습하지 못한 채 성장하고 있다. 불편함을 견디는 경험이 부족하면 아이는 좌절을 견뎌야 할 과정이 아니라, 즉시 제거해야 할 위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결과 스스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누군가가 빠르게 개입해 주기를 기대하게 되고, 감정의 주도권 역시 아이 자신이 아니라 감정을 대신 회복시켜 온 외부의 손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 자율성의 기반은 필연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을 완벽하게 보호받는 ‘환경’이 아니다. 감정을 느끼되 휘둘리지 않고, 혼란스러워도 다시 안정되는 과정을 스스로 경험해 보는 ‘기회’이다. 이 과정에서 실패는 필수적이며, 불편함은 자연스러운 성장의 일부이다. 아이가 감정을 다루는 힘은 부모의 즉각적인 개입 속에서가 아니라, 어른이 곁에서 지켜보되 멈추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시간 속에서 자란다. 달리 말하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 쿠션’이 아니라 ‘감정 근육’2이다.
좋은 부모란 아이의 감정을 대신 해결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감정을 다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주는 사람이다. 아이의 울음을 무조건 참게 한다고, 혹은 곧바로 달래준다고 자율성이 자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지켜보되 포기하지 않는 시간, 개입하되 대신하지 않는 거리이다. 이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채 감정을 계속 대신 다루어 주는 환경에서는 ‘정서적 비만’이 쌓이고, 자율성은 더 깊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부모의 ‘용기’보다 먼저 바뀌어야 할 ‘구조’
우리는 흔히 부모교육을 해답으로 떠올린다. 부모가 좋은 태도를 익히면 아이의 자율성도 자연스럽게 자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부모는 무엇을 모르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이미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것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사람에 가깝다. 문제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지식을 실천할 시간과 여유, 그리고 놓아도 괜찮다고 느낄 수 있는 환경이 없다는 데 있다. 결국 부모교육과 부모 훈련을 더 강화하는 방식은, 이미 과도한 책임을 지고 있는 부모에게 또 다른 의무만 덧씌우게 된다.
아이의 자율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부모의 개입이 줄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부모가 개입을 줄이려면, 먼저 불안하지 않아도 되는 조건이 필요하다. 지금의 영유아 부모는 아이가 잠시 혼자 놀이를 하거나 스스로 시도해 보는 순간에도 마음이 불안해지고, 작은 사고가 나면 “내가 더 챙겼어야 했다”는 책임감을 떠안는다. 이는 교사나 기관을 불신해서가 아니라, 돌봄의 결과를 부모가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공적 장치가 충분하지 않을 때, 부모는 아이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문제가 생기면 결국 내 탓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개입을 멈추지 못한다. 결국 ‘자율성을 존중하되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현실에서 작동하려면, 부모가 안심하고 놓을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영유아 교육기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부모가 개입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공적 돌봄 공간이 존재해야 한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단순히 교육과 돌봄을 대신해 주는 장소가 아니라, 부모가 모든 순간을 통제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보장하는 사회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공공 돌봄 시스템이 촘촘할수록, 부모는 비로소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영유아 교육기관은 실패해도 괜찮은 교육 환경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작은 갈등, 시행착오, 느린 발달은 결함이 아니라 성장의 과정이라는 관점이 확립될 때, 부모는 아이의 경험을 대신 통제하려는 압박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질 것이다. 시험과 성과 중심의 경쟁 논리가 영유아 교육에까지 스며들 때, 부모는 실패를 허락할 수 없게 되고, 결국 더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목격해 왔다. 성공을 부모가 만들어주는 결과가 아니라, 아이 스스로 탐색하며 발견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율성은 자라날 것이다.
부모 불안을 개인의 심리 문제로만 다루는 상담·심리 영역의 관점도 재고해야 한다. 지금의 상담 시장은 아이의 감정을 과도하게 개입 대상으로 만들고, 부모의 불안을 개선해야 할 문제로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많은 불안은 부모의 성향이 아니라 돌봄을 혼자 떠안은 사회 구조가 만든 결과다. ‘문제가 생기면 부모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제공할수록 양육 부담은 다시 가정으로 되돌아간다. 부모의 불안을 완화하는 길은 더 노력하라는 조언이 아니라, ‘교사-기관-지역사회’가 돌봄을 함께 나누는 신뢰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부모가 상담실에서 홀로 감당하던 불안이 교육 공동체 안에서 나누어질 때, 그 불안은 비로소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
물론 사회가 바뀌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부모에게도 개입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아이의 불편함을 지켜보며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 일이다. 울음을 곧바로 멈추게 하기보다, 스스로 감정을 가라앉힐 시간을 허락하는 태도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좌절하더라도 그 경험을 통과하도록 기다려 주는 자세이며, 갈등이 벌어졌을 때 먼저 나서기보다 아이의 서툰 해결 노력을 끝까지 지켜보는 인내이기도 하다. 결국 이는 특정한 기술이 아니라, 부모가 지켜가야 할 태도이자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에게 참기만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부모가 개입을 멈추려면, 멈출 수 있는 기반이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부모가 개입하지 않아도 아이가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는 환경, 부모가 잠시 놓아도 괜찮은 사회적 조건이다. 이 기반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부모의 용기는 실천될 수 있고, 아이의 자율성도 현실이 된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완벽한 부모가 아니라, 부모가 완벽하지 않아도 아이가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사회다.
결국 문제는 부모 개인의 역량이 아니다. 부모가 놓을 수 없게 하는 구조가 문제다. 더 많은 책임과 훈련을 요구하는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부모가 책임을 나눌 수 있는 사회적 울타리를 세우는 일이 먼저다. 다정함이 통제로 바뀌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아니라 사회가 개입을 내려놓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 아이를 잘 키우는 사회란 부모를 더 강하게 만드는 사회가 아니라, 부모를 결코 혼자 두지 않는 사회다.
다정함의 시대, ‘자율성’을 다시 묻다
지금의 부모는 이전 세대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헌신적이다. 그러나 그 다정함이 때로는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문제는 부모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개입과 통제의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환경에 있다. 감정을 잘 보살피는 시대가 되었지만, 정작 감정을 다루는 힘을 키울 기회는 아이에게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아이의 자율성은 부모가 대신 키워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해 보고, 실패해 보고, 책임져 보는 경험의 축적 속에서 자라난다. 부모가 완벽히 감싸줄 때가 아니라, 불완전한 순간을 함께 견뎌낼 때 성장의 근육은 붙는다. 다정한 보호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시간, 아이의 삶을 대신해 주지 않는 거리이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 부모가 되려는 노력을 넘어, 개입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야 한다. 부모가 잠시 손을 놓아도 불안하지 않은 교육 환경, 실패가 낙오가 되지 않는 평가 체계, 돌봄이 가정 안에만 갇히지 않는 공공적 안전망, 이들이 마련될 때 비로소 부모는 개입을 줄일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자율성을 가르치려면 먼저 부모가 덜 개입해도 괜찮은 세상이 필요하다. 다정함이 통제로 바뀌는 순간을 막기 위해,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의 삶을 돕고 있는가? 아니면 대신 살아주고 있는가?”
아이의 자율성은 부모의 기술이 아니라 사회의 선택이며, 함께 만들어야 할 공동의 책임이다. 다정함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정함 속에 숨어 있는 불안과 통제를 성찰하고, 다시 한번 아이에게 묻는 일, “너는 스스로 해볼 준비가 되었니?” 바로 거기서부터, 자율성의 시대는 다시 시작된다.
참고문헌
• 김경일, 류한욱 (2025). 적절한 좌절. 저녁달.
• 보건복지부, 질병관리청 (2023). 2023 아동·청소년 정신건강 실태조사. 보건복지부.
•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2022). Data and statistics on children’s mental health. U.S. Department of Health & Human Services.
• David, S. (2016). Emotional agility: Get unstuck, embrace change, and thrive in work and life. Avery.
|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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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김경일 교수와 류한욱 원장은 저서 『적절한 좌절』을 통해 감정과 욕구는 비대해져 있지만, 감정을 조절하고 실행으로 옮기는 힘이 부족한 상태를 ‘정서적 비만’이라고 명명하였다. 책에서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만, 공을 차기 위해 운동장에 나가는 일은 귀찮아하는 사례를 제시하며, 표현은 풍부하지만 실행은 약한 세대의 특징을 설명한다. 이 개념은 다정함 속에서 좌절 경험이 사라지고, 감정을 스스로 조절해 본 경험이 부족한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을 비유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 ‘감정 근육’은 필자가 제안하는 개념으로, 정서적 자기조절·회복 탄력성·실행 기능을 하나로 묶어 설명하는 심리학적 비유이다. 수전 데이비드는 『감정의 민첩성』에서 감정조절 능력을 ‘근육처럼 단련되는 역량’으로 설명하였고, 김경일과 류한욱의 『적절한 좌절』 역시 반복 경험을 통한 감정조절 능력의 성장을 강조하였다.
아동학과 유아교육학을 전공한 후 현재는 경남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유아 교육정책을 주로 연구하며 관심분야를 확장하고 있다. 구성원의 참여와 상생을 추구하는 공동선의 가치가 영유아 교육정책에 반영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상향식 영유아 교육정책 수립 및 평가에 관심이 많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