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민주주의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은 교육이다
요즘 숙의민주주의라는 말이 남용되고 있다. 너도 나도 이 말을 저마다의 의미로 사용한다. 기존의 정치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예단한 상태에서, 저마다 자기들이 원하는 정치에다 숙의민주주의라는 말을 붙이고들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숙의가 필요한 실정이다.
한편에서는 이 말을 대의정치에 기반한 기존의 민주주의보다 더 좋은 것, 혹은 직접민주주의에 최대한 가까워지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소수의 전문가가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일반 시민들이 그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반엘리트주의적인 의미로 쓰기도 한다. 사실 전문가와 엘리트는 의미가 다른데도, 은근슬쩍 의미가 뒤섞이면서 사회 모든 영역에서 전문가 불신주의를 유포되고 있는데, 엉뚱하게 숙의민주주의가 그 숙주가 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를 다수결과 대비시키면서 그 의미를 엉뚱하게 쓰는 사람들도 있다. 무분별한 다수결보다 올바른 의견을 가진 소수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이며 이른바 숙의민주주의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들은 깊게 생각할 줄 알고 진실을 아는 소수가 생각없이 투표하는 다수보다 존중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이런 경향은 주로 진보적인 경향을 가지거나, 탈핵 생태주의자들 중에서 나온다. 하지만 누가 깊게 생각하고 진실을 아는 사람을 판별하는가? 결국 이런 주장은 마치 특정 집단이 “우리 주장이 관철되어야만 숙의민주주의다”라 말하는 것 같아 듣기 거북하다.
공교롭게도 숙의민주주의라는 같은 말을 놓고 한 쪽에서는 소수의 전문가집단을 배제하는 직접민주정치의 하나로 주장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다수결보다 소수의 운동가집단의 판단에 무게를 두는 일종의 계몽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다만 두 주장에 공통으로 서 있는 기반은 현대 민주정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정치, 대의정치에 대한 불신이다.
하지만 두 주장 모두 숙의민주주의를 오해하고 있다. 우선 숙의민주주의는 전문가주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도 아니며 직접민주정치의 다른 말도 아니다. 이미 ‘숙의’(deliberative)라는 말 자체가 반엘리트, 반전문가주의와는 맞지 않는다. 어느 모로 보나 어떤 주제에 대해 숙의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주제에 관한 한 무차별한 대중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숙의민주주의가 다수결과 대립되는 개념인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말을 쓰는 한 ‘다수결’은 필수 불가결하다.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말 자체가 이미 ‘다수의 지배’이니, 민주주의의 의사결정과정이 다수결인 것은 공리에 가깝다.
그런데 다수의 뜻을 확인하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답이 없다. 오늘날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은 투표다. 하지만 민주정치의 발상지인 고대 아테네에서는 투표보다 합의를 보다 선호하였다. 투표는 어떤 쟁점에서 다수가 지지하는 안을 선택하고, 소수가 거기에 복종하는 방식이다. 합의는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집단이 어느 한 안에 모두 동의하거나,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안을 도출해내는 방식이다. 투표는 현재 존재하는 대안들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뜻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며, 합의는 가능한 한 전체가 동의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투표의 가장 큰 장점은 다수의 뜻을 가장 빠르게 확인하여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단점은 이 과정에서 실제로는 더 올바른 대안일 수도 있었고, 적어도 더 나은 대안을 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소수의 의견이 사장된다는 점이다. 합의의 가장 큰 장점은 소수 의견이라도 묵살되지 않고 최대한 반영되어 보다 나은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며, 가장 큰 단점은 의사결정과정이 길어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끝없는 평행선을 그릴 수 있다는 점이다.
숙의민주주의란 바로 이 투표와 합의의 교집합을 찾는 것이다. 이는 이미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연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회를 일컬어 “충분한 토론을 거치기 전에 투표에 붙이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충분한 토론을 통해 먼저 합의를 시도하고, 만약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더 이상 토론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될 때 투표를 통해 결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수결의 원칙은 고수하되, 다수의 의견을 문제가 제기된 시점에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고, 여러 대안들이 검토되고 토론된 다음에 확인한다는 것이다. 의회정치의 역사가 긴 영국은 의원들의 좌석이 여당과 야당이 서로 마주보고 앉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의회의 의사결정 방식이 숙의민주주의적 방식이었던 시절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제대로 작동한다면 숙의민주주의는 투표가 포괄하지 못하는 소수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좋은 장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숙의민주주의가 반드시 선거-대표선출-대표들의 투표로 이어지는 현재의 대의정치보다 더 민주적인 것은 아니다. 투표였다면 소수에 그쳤을 사람들 중에 정보를 독점하고, 토론을 주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이 다수의 의견을 조종하여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고대 아테네에서도 골칫거리였다. 소피스테스라는 전문 변론술사들이 돈이 많거나 야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변론술을 가르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거액의 수업료를 내고 말재주를 배운 사람들은 교묘한 변론술로 진실을 거짓으로 거짓을 진실로 뒤바꿔 버렸고, 대중들이 듣기 좋아할 말을 꾸며내어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간파해낼 지적 능력이 없는 대다수 시민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 이들에게 설득되어, 마치 자신의 생각에 따라 투표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이들 소수의 변론가, 선동가들의 뜻에 따라 투표했다. 플라톤의 ‘폴리테이야’에서는 그런 식으로 대중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는 선동가들이 결국 잔혹한 독재자로 변신하면서 민주정치가 참주정치로 전락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고대 뿐 아니라 현대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파시즘이 창궐했다. 히틀러는 쿠데타가 아니라 다수결에 따라 독일의 권력을 움켜잡았다. 이와 같이 다수결은 그 다수가 무지할 경우 우민정치로 전락하며, 다수결의 방법이 합의이냐, 숙의이냐, 투표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다수가 무지한 상태에서 투표를 늦추고 깊이 있는 토론을 한다고 해서 그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선동의 기회만 늘어나서 만장일치로 선동가의 손을 들어줄 위험마저 있다.
이런식으로 전락하지 않고 숙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숙의’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들은 현재의 쟁점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며, 이 쟁점에서 대립하고 있는 각각의 대안들의 결과를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어야 하며, 이 쟁점을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이해관계에 따라 판단할 수 있어야 하며, 합리적인 토론에 숙달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숙의민주주의의 참여자는 쟁점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아니면서 쟁점을 이해하고 대안을 검토할만한 능력과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자연발생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의식적으로 갖추어져야 하는 것, 즉 교육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은, 특히 학습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사람들은 숙의 과정에 진정으로 참여할 수 없다. 기껏해야 자기 주장만 맹목적으로 반복하다가 투표에 임할 뿐이다. 반대로 이런 숙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질을 길러주지 못한다면, 그 교육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다.
숙의민주주의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숙의민주주의는 교육의 결과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숙의의 시간을 주어도 숙의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때 교육은 어린이, 청소년에 대한 교육 뿐 아니라 성인들에 대한 교육까지도 포괄한다. 현재 성인들 중에는 중학생보다 합리적인 토론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지 않으며, 사회 여러 분야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여러 분과 학문에 대한 기초지식이 중학생 수준 이상으로 갖춘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 존 듀이는 그의 명저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이 양자 간에 선후관계가 따로 없음을 간파하였다. 민주주의가 아니고서는 제대로 된 교육이 어렵지만,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숙의민주주의까지 가능하려면 보다 깊은 수준의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공교육의 목적이며 존립 근거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사회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중학교에서 24년간 사회를 가르쳤고, 서울대, 상명대, 방송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에서 정책연구를 담당했고, 현재 계간 우리교육 편집위원이다. '학교라는 괴물', '그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등의 교육 비평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거짓말로 배우는 10대들의 경제학', '세상을 바꾼 질문' 등의 청소년 교양서들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