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기 위한 교육을 넘어서기
공교육의 뿌리
근대 학교교육과 자본주의는 쌍둥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한 프로이센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국민교육‘을 시작한 것이 근대 학교교육의 출발이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말해주듯 자본주의 경제는 ‘부국’을 위한 것이고, 교육이 하는 일은 국민을 국가에 필요한 인적자원으로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 기본 패러다임은 21세기에 들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2000년도에 우리 교육부의 명칭이 교육인적자원부로 바뀐 것은 이 점을 더욱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이다. 국민을, 아이들을 석유나 석탄 같은 자원으로 간주하는 셈이다.
국가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교육목표인 점은 단지 그 방식이 다를 뿐, 이백 년 전의 프로이센이나 21세기의 대한민국이나 똑같다. 근대화 과정에서 필요한 인적자원이 말 잘 듣는 노동자나 관료, 군인들이었다면 탈근대 정보화 사회에서 필요한 인적자원은 보다 창의성 있고 세계화에 걸맞은 국제 감각을 갖춘 사람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근대 초기에는 국가 간 ‘무력’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교육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무역’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교육을 추구하는 셈이다. 결국 전쟁(경쟁)을 위한 교육이다. 국가 주도의 교육이 교육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되는 근본 원인은 여기에 있다.
사실상 지금 대부분의 중고등학교는 아이들이 낮잠 자는 곳이 되었다. 책상에 엎드려 자느라 시간을 죽이고 있는 아이들을 방치하면서 교사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또 얼마나 큰가. 수십만 명의 교사들과 수백만 명의 청소년들이 서로의 시간을 죽이며 삶을 낭비하는 이 상황은 국가적 재난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공교육이 변화되려면 먼저 교육당국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국가경쟁력을 우선하여 수월성(탁월성) 교육에 연연할수록 교육은 왜곡된다.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교육 풍토는 결국 우리 사회의 수준이 낳은 결과이다.
자유와 평등, 두 가치 중에 교육 분야에서 국가가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쪽은 평등일 것이다. 자유는 개인 차원에서도 확보할 수 있는 가치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사교육이 이렇게 창궐하는 것은 지나친 자유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개인들에게 맡겨진 극심한 자유 경쟁의 결과물이다. 문제는 이를 국가가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힘 있는 개인들의 지나친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견제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이를 방조하고 있는 것이다.
약자를 배려하는 교육, 이것이 공교육의 본래 모습이다. 국가경쟁력을 높인답시고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워 몰아붙이는 교육은 사실상 공(公)교육의 허울을 쓴 공(空)교육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경쟁력은 아이들이 타고난 저마다의 자기 가능성을 꽃피울 때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지 그렇게 선착순 달리기 경쟁을 시켜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수만 명을 먹여 살릴 1%를 길러내는 데 주력할 것이 아니라 수만 명이 저마다 자기다움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것이 국가 정책의 기본 목표가 되어야 한다. 공동체성이 결여된 1%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경쟁력에 대한 착각
국가 수준의 교육 본질 회복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국가경쟁력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다. 교육정책에서 국가경쟁력을 우선시하게 되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 당연한 일이라 하더라도 무엇이 국가경쟁력을 높여주는지에 대한 올바른 통찰이 필요하다. 교육에서 국가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국가경쟁력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진실로 국가경쟁력을 높이고자 한다면 구성원들이 서로 협동하게 만들어야 한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착취하는 상황을 방치한다면 경제구조가 건전해질 수 없다. 몇몇 아이들을 위해 수많은 아이들이 들러리가 되게 만드는 교육 환경을 바꾸지 못하면 미래의 국가경쟁력은 허약해지기 마련이다. 양극화된 사회, 공동체성이 무너진 사회에서는 맨 아래쪽에 자리한 약자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서 결국 꼭대기 층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경쟁에 유리한 지점을 선점한 이들이 계속 이기도록 경기 룰을 만들고 유지하는 사회는 건강할 수가 없다. 교육이 계층 재생산의 기제로 작동하는 것은 동서고금에 공통되는 현상이지만, 민주국가의 역할은 그 정도를 완화하는 쪽으로 기능해야 한다.
계층 간의 교육 불평등 못지않게 국가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인력 수급의 불균형이다.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는 국민들 개개인의 능력을 충분히 살리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공동체를 위해 바람직하게 쓰일 수 있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국가는 해야 한다. 한 가지 작물을 지나치게 많이 재배하면 가격이 폭락하여 농가들도 죽어나고 국가경제도 해치듯이, 국가가 조정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비슷한 상황이 교육에서도 재연될 수 있다. 이공계 우수학생들이 의대, 치대로 옮겨가는 현상은 국가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다. 교육부와 과학기술부를 통합한 것은 교육에서 과학기술 분야를 강화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교육과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수단으로 간주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과학기술부, 정보통신부 등이 폐지되면서 그 분야가 활력을 잃은 것은 사실이다. 20세기식 개발토건사업에 국가 예산의 대부분이 쓰인 것은 미래를 내다볼 때 큰 패착이 아닐 수 없다.
국가 수준의 교육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국제 정세의 변화에도 촉각을 세워야 한다. 남북한 통일, 중국의 부상과 세계질서의 재편 같은 큰 그림 속에서 지금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읽고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진짜 국가경쟁력은 그런 데서 생겨난다. 중국과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절실한 시점이다. 유감스럽게도 국가 교육 차원에서 이에 대한 준비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통일에 대한 준비도 매우 미흡한 상황이다. 다문화사회에 대한 대비가 미흡하여 지금 겪고 있고 또 앞으로 겪게 될 혼란이 통일 상황에서도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통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탈북자들이 늘어나고 있고 최근의 ‘삐라 사태’처럼 이념 갈등이 사회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경제적 격차와 사고방식의 차이, 문화적 충격을 어떻게 완화할지에 대한 대비 없이 맞이하는 통일은 ‘혼란’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자유와 평등은 서로 배타적인 듯하지만, 두 가치가 서로 보완될 때 사회도 온전해질 수 있다. 해방 후 남한 사회가 자유를 기치로 국가를 운영해 왔다면 북한은 평등을 기치로 국가를 운영해왔다고 볼 수 있다.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의 본질은 이 두 가치를 융합시키는 것이다. 개개인의 수월성(탁월성)을 높이는 일과 동시에 사회적 공공성을 살리는 일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치를 조화시킬 때 가능하다. 우리 사회는 이제 이 역사적 과제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경쟁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한 이 과제는 달성할 수 없는 꿈으로 남을 것이다. 설령 물리적인 통일은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사회의 분열은 가속될 것이다.
수월성과 공공성의 조화
국가경쟁력이란 그림자 같은 것이다. 그 자체를 쫓아가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본질적인 부분이 해결되면 그에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에서 수월성과 공공성이 확보될 때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국가경쟁력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국가 차원에서 수월성과 공공성을 함께 살리는 과제를 살펴보자. 수월성(excellence, 탁월성) 교육이란 과연 무엇일까. 흔히 수월성 교육을 정의하기를, 탁월한 재능을 지닌 학생은 그 능력을 최대한 발현할 수 있도록 하고, 평범한 학생들도 저마다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교육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찬반 논쟁을 벌일 때 흔히, 수월성 교육을 평등성 교육과 반대되는 것으로 두고 논지를 전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모든 아이들이 저마다의 탁월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근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수월성과 평등성은 서로 통한다. 교육의 본질은 모든 아이들이 타고나는 탁월성을 어떻게 살려줄 것인가 하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수월성이 제대로 구현된다면 공공성도 따라서 구현되는 셈이다. 먼저 수월성을 평등성과 대치되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공교육의 목표는 모든 아이들의 개화(開化)여야 마땅하다.
현재의 교육과정에서는 학생들의 수월성을 특정 인지교과 학습 능력이나 특정 예체능 분야에 한정해서 바라보지만, 사실 모든 아이들이 저마다 탁월한 면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인간 이해일 것이다. 손재주가 뛰어난 아이들도 있고, 동식물을 잘 돌보는 아이들도 있다. 지능이론에서도 정서적 지능(EQ), 영성적 지능(SQ) 같은 새로운 이론들이 나오듯이 인간의 능력은 다양한 면을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능력도 뛰어난 능력이다. 미래 사회에서는 이런 능력이 더 소중하게 여겨질 것이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거나 잘 놀 줄 아는 아이들도 있다. 이들도 미래 사회에는 탁월한 인재로 부각될 것이다.
학력평가 명목으로 일제고사를 시행하여 아이들을 한 줄 세우기 하는 것은 수월성 측면에서나 공공성에서 근시안적 교육정책이 아닐 수 없다. 학력 평가를 위해서는 전수조사가 아니라 표본조사를 하는 것이 예산 낭비도 막고 교육현장의 혼란도 야기하지 않는 길이다. 통제를 위한 경쟁 구도 만들기가 아니라면 일제고사 같은 근대적 교육정책은 하루빨리 폐기해야 한다. 교육 불평등을 완화하기보다 더 심화시키는 정책이고,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도 득보다는 실이 훨씬 더 클 것이다.
공공성의 문제는 결국 교육 불평등 문제로 귀착된다. 지금 같은 학력사회 구조에서는 저소득층이 대학 진학을 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하는 것이 교육 불평등을 완화하는 길이긴 하지만, 많은 경우에 대학 진학은 삶을 유예하는 결과를 낳기 쉽다. 대학 진학이 자기 길을 찾아서 보다 나은 삶으로 연결될 수 있게 하는 세심한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진로교육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진학 상담 수준의 진로교육이 아니라 미래사회를 내다보면서 개인의 전망을 세우는 폭넓은 진로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1970년대 골목골목 울려 퍼지던 ‘잘살아보세’가 이제는 웰빙 바람으로 바뀌었지만, 정말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때다. 국가 차원에서, 또 개인 차원에서 잘 사는 사회, 잘 사는 삶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학연을 대신할 수 있는 지역공동체가 활성화되고,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자기 일을 찾아 해 나가는 이들이 늘어날 때 우리 사회는 훨씬 건강한 공동체가 될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도 그럴 때 가능하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교육 매체 계간 《민들레》 발행인. 저서로는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이 있고, 《대안교육 20년을 말하다》,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 외 여러 권을 함께 썼다. 옮긴 책으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 《소통하는 신체》(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