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역사를 들추며
| 조선시대의 노동 천시와 신분 질서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 남긴 흔적을 노비의 과거를 지운 ‘망각의 역사’ 속에서 확인하며, 외면해 온 역사를 직시해야 공동체가 건강해진다고 말합니다. |
나라와 긴 손톱 중에
18세기 말 연암 박지원은 “나라에 수레도 없고 수레가 다닐 길도 없다”라며 한탄했다. 불과 2백 년 전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로마는 기원전부터 이탈리아반도에서 유럽 전역에 이르기까지 포장도로를 건설했으며1 중국만 해도 수레가 보편적인 이동 수단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도 우마차가 운송수단으로 쓰였지만 산지가 많은 지형상 널리 보급되진 않았다. 청의 수도 연경을 비롯해 중원 지방은 평지여서 수레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던 반면, 조선은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닦기보다 가마와 지게를 이용하는 데 머물렀다. 하인들에게 ‘몸빵’을 시킨 것이다.
로마제국이 만든 길. 유럽 전역과 중동에까지 뻗어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겨난 이유다. 유럽의 문명은 이 길 덕분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박제가는 박지원보다 먼저 청나라를 돌아본 뒤 1778년에 펴낸 『북학의』에서 당대의 시대착오적인 북벌론에 맞서 청나라를 배우자는 북학론을 펼쳤다.2 당시 청나라와 조선의 의식주 전반에 관한 세밀한 기록을 담은 이 책에는 흙벽 틈새로 바람이 숭숭 드나드는 집, 땔감을 구하지 못해 냉골 같은 방에서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겨울을 나야 했던 민초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선각자의 고뇌가 담겨 있다.
1780년에 나온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조선의 백성들은 벌레가 우글거리는 초가에서 사는데 청나라는 일반 백성도 벽돌로 지은 2층집에서 산다”라며 감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 초가집들은 오늘날 민속촌에서 보는 번듯한 초가가 아니라 움막과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비옥한 화산토에 비가 잦은 일본만 해도 목조를 골조로 한 초가의 규모가 꽤 크다. 토양이 척박한 한반도는 일본처럼 나무가 잘 자라지는 않지만 전국 각지에 벽돌용 흙이 널려 있어 숯가마를 이용해 벽돌을 구울 수도 있었으련만 중국처럼 벽돌집을 지을 시도를 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주거에서부터 신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함이었을까.
조선의 양반들은 양지바른 남향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살면서 북향 마을의 움막 같은 초가삼간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사는 민초들의 삶을 왜 개선하려 하지 않았을까. 자신들이 먹는 양식과 입을 옷을 생산하는 민중의 의식주를 개선할 생각을 못 한 것은 무능함일까 잔인함일까. 물론 양반들이 다 떵떵거리며 살았던 것은 아니며, 관직에 진출한 소수의 양반들 외에는 그저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노동은 하지 않고 글이나 읽으면서 소일했으니 가난을 면할 길이 없었다.
박제가는 나라의 가장 큰 폐단이 가난이라며, 사농공상 네 부류의 백성 모두 곤궁하게 살아 서로를 구제할 방도가 없다고 한탄했다. 그보다 백여 년 뒤에 태어나 구한말 어지러운 시대에 일본과 미국, 중국을 떠돌았던 ‘조선 최초의 세계인’ 윤치호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청인(淸人)의 집은 음침하기 측량 없어 일본 사람의 정결하고 명랑한 집에 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똥뒷간 같은 집이야 어찌 청인의 2층집에 비하겠는가.” 박제가가 시시콜콜 문제를 짚은 뒤에도 백 년이 지나도록 문제 해결을 미루고 방치한 지배계급의 무능과 무책임이 나라를 망하게 했으니 뒤늦게 시일야방성대곡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조선의 궁핍과 가난은 노비들의 노동에 의존해 살면서 노동을 천시한 양반들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의료와 선교 활동을 했던 영국 출신 캐나다인 석호필(Frank W. Schofield)은 이렇게 한탄했다. “하나님은 조선 사람들에게 나라와 긴 손톱 중에 선택할 수 있게 했지만 조선 사람들은 긴 손톱을 선택했다.” 안창호 같은 선각자들은 노동 천시 풍습이 나라를 망하게 만든 원흉임을 자각하고 노동의 중요성을 교육하기 위해 애썼지만 기울어진 국운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문제는 인성이 아니다
노동을 천시한 선조들의 후손답게 ‘노동’이란 말 대신 ‘근로’라는 말을 애써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그래도 부국강병을 위해 제조업에 올인해 불과 반세기 만에 나라를 제조업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노동자들이 산재를 무릅쓰고 밤낮없이 ‘근로’를 한 덕분이다. 오늘날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수레를 생산해 내고 있고,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산업은 세계를 선도한다. 2백 년, 아니 지난 반세기 동안 후손들이 이룬 성취를 보면 “수레도, 수레가 다닐 길도 없다”라고 한탄했던 연암도 깜짝 놀랄 것이다.
1세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게을렀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벽안의 서구인에게는 조선인들의 게으름이 인성 탓으로 보였겠지만, 실상은 사회구조의 문제였다. 조선의 양반들이 노동을 하지 않은 것은 신분제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고, 민중이 게으른 것은 애써 생산해 봐야 다 빼앗기기 때문이었다. 어떤 집단이든 게으른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만 한 사회의 구성원이 모두 게으르다면 개인의 인성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로 봐야 한다.
이슬람 사회에서 딸이나 누이가 강간을 당하면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명예살인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를 두고 아버지나 오빠의 인성을 논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여성의 인권을 상상도 하지 못하는 사회, 마을에서 명예마저 잃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의 구조가 있는 것이다. 신분제하의 조선시대에는 굶어 죽을지언정 양반의 체통을 잃을 수 없는 사정이 있고, 맞아 죽어도 일할 이유가 없는 상놈의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게을렀던 조선인들이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에서 가장 근면한 한국인이 된 것은 사회구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많은 하층민들이 돈을 주고 벼슬자리를 샀지만 실제로 관료가 될 수는 없었다. 문서상의 양반이었던 셈이다.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자 평민들 중 재력 있는 이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전국 방방곡곡에 학교를 설립했다.3 신분을 살 수는 있었어도 교육의 기회를 누리지 못한 신진 양반들이 자녀를 교육시켜 ‘진정한 양반’이 되고자 한 것이다. 입시와 고시는 신분 상승의 확실한 통로였다. 해방 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기반을 둔 나라에서 자신이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자 게으름을 피울 이유가 없어졌다.
조선시대와 얼마나 다를까
조선 후기 관청에 바칠 청어 공물4을 마련하기 위해 남해 어민 넷이 악천후 속에 바다로 나갔다가 배가 전복되어 모두 죽었다. 그중 셋은 노비 출신인 16~17살 젊은이와 고공(머슴)이었다.5 그들이 타고 나간 배도 나룻배 수준의 목선이었을 것이다. 공물을 받아먹는 고관대작들은 그들의 죽음을 알았을까.
북한 어민들은 오늘날에도 조선시대 역사물에서나 볼 법한 목선을 타고 고기를 잡는다. 작은 목선은 길이 4m, 폭 1m 정도이며 큰 목선도 길이 15m를 넘지 않는다. 이런 조악한 목선이 북한의 어업을 절반 이상 담당하고 있으니 해상 사고가 잦을 수밖에 없다. “북한 목선은 몇 시간만 달려도 안에 물이 찹니다. 퍼내지 않으면 가라앉습네다.” 2023년 목선을 타고 가족과 함께 귀순한 강규리 씨 말이다. 낡은 목선에 몸을 싣고 험한 바다에 나서는 어민들이 한 해 얼마나 목숨을 잃는지 통계는 없지만 적지 않을 것이다. (2018년엔 일본에서 무려 225척의 난파 목선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배에 타고 있던 어민들 태반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평양의 아파트에 사는 노동당 당원들은 어민들이 목숨 걸고 잡은 오징어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실 게다. 조선시대 양반계급을 복제한 노동당원들은 마른 오징어 속에 배어 있는 어민들의 피눈물을 알까. 북한 군부와 김정은 일가는 핵잠수함을 자랑하지만 그것은 인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권의 안보를 위한 것일 뿐이다. 인민들의 삶은 조선시대 노비 처지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최근 북한의 난파 목선이 급격히 줄어든 까닭은 온난화로 인해 해류가 바뀌면서 명태와 오징어가 더 이상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참다랑어가 늘고 있어도 작은 목선으로는 잡을 수가 없어 출항을 아예 못 하는 실정이다. 남한에는 그나마 참다랑어를 잡을 수 있는 어선이 있지만 동해안 어선은 대부분 오징어잡이와 명태잡이에 맞춰져 있다. 어선 규모를 키우지 않고는 어업을 할 수 없는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뉴스에서 간혹 남쪽으로 표류해 떠내려온 북한 어선을 보면서 남쪽 사람들은 혀를 차지만, 노르웨이 어선에 비하면 한국 연안 어선의 수준은 북한 목선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해마다 어선 전복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구조되지 못해 사망자와 실종자가 수십 명에 이른다. 대한민국의 조선업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나 유조선과 군함 같은 대형 선박을 만들 뿐 어선을 현대화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어선을 건조하는 소형 조선소가 전국에 200여 개 있지만 수공업 수준의 영세한 업체들이다. ‘조선 강국’의 민낯이다.
기억의 역사와 망각의 역사
2016년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던 젊은이(당시 19세)가 사망한 직후 한 고위 공무원이 기자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내 자식 일처럼 가슴이 아프다”라고 하는 기자에게 “그렇게 말하는 건 위선”이라며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라고 말해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그 말을 한 공무원은 심지어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다.6 그 자리에 함께 있던 기자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해명을 요구했지만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21세기 대한민국의 공무원, 그것도 교육부 공무원이 국민을 개돼지로 여긴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많은 부조리는 현대 한국인들 대부분의 조상이 노비였음을 애써 망각한 데서 비롯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노비제 사회의 부조리가 현대식으로 재현되고 있는 모습은 곳곳에서 보인다. 구의역 사고는 조선 후기 청어 공물을 장만하기 위해 악천후 속에 바다로 나갔다가 죽은 젊은 어부들 사건과 오버랩된다. 오늘날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는 조선 후기 임금노동자인 고공으로 바뀐 노비들의 처지와 다름없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계층사회로 빠르게 진입하는 중이다.
구의역 사건이 일어난 그해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단지 입주민 대표가 아파트 관리소장에게 “종놈이 감히…”라고 말해 또 한 차례 사회적 논란이 일었다. 소장을 ‘종놈’이라 지칭한 걸 보면 일개 경비원은 진짜 종으로 여겼을 법하다. 그에게 관리소장은 마름 정도였을까. 전국 아파트 관리소장들의 릴레이 시위가 한 달 넘게 이어지고 공중파에도 보도되자 입주민들이 대표를 해임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현대 한국인들의 무의식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반상 차별 의식의 일단을 보여주었다.
정치학자 김영민은 안동에 들어선 유교랜드를 은근히 희화화하며 “노비랜드는 왜 없을까” 반문한다.7 ‘부재’가 말해주는 진실을 들추는 그의 혜안에 불편한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중기 노비 인구가 30%를 넘었고, 노비 출신 첩을 둔 양반이 부지기수였으므로 현대 한국인 중 조상이 노비와 엮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다. 그것이 노비랜드가 없는 이유일까. 박물관에 있는 공예품들, 궁궐을 비롯해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문화재를 만든 이들 또한 노비들이었으니 국가유산청이 나서서 노비역사관 하나쯤 세울 법도 하건만 그런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19~20세기에 걸쳐 이 땅에서는 족보 만들기 붐이 일었다. 신분제가 무너진 사회에서 과거를 세탁하기 위한 문서 위조 작업이 공공연히 벌어진 것이다.8 양반 가계를 산 하층민들은 양반들의 가족 질서와 제사 문화를 모방했다. 이에 대해 일본인 연구자 미야지마는 “한국에서 전통은 근대에 들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는 면이 보인다”라고 말한다.9 존재하지도 않는 기억을 불러내고자 애쓴 셈이다. 20세기 후반에는 종친회라는 이름으로 집안의 어른들 몇몇이 족보 세탁 브로커와 함께 가가호호 돈을 거둬서는 족보 전질을 만들어 집집마다 떠안겼다. 성씨마다 그럴듯한 족보를 만들어냄으로써 문서상의 신분 세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어쩌면 저 입주민 대표의 가계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일지 모른다.
역사학자 피터 버크는 기억의 역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듯이 망각의 역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10 우리가 애써 기억하고자 하는 것, 알고 있는 것들보다 의도적으로 망각하려 하는 것이 우리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더 많은 진실을 말해 줄 것이다. 무의식 속에 억눌려 있는 것들을 직시함으로써 정신 건강을 찾을 수 있듯이, 우리가 외면해온 역사를 직시하는 것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길이 아닐까. 역사는 외면하고 덮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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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가장 오래된 ‘아피아 가도(Via Appia)’는 기원전 312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이탈리아반도에 만든 90km 길이의 돌길이다. 도로 폭은 마차가 양방향으로 오갈 수 있는 4.1m이고, 인도 폭도 마차 폭 정도다.
- 내외편으로 구성된 『북학의』 내편에서는 거(車)·선(船)·성(城)·벽(甓)·와(瓦) 등의 개선 방향에 대해, 외편에서는 상공업과 농경 문제를 어떻게 개혁할지를 이야기한다. 1971년 을유문고본으로 전문이 번역 출간되었다.
-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1908년 경성에만 사립학교가 백여 개, 전국으로는 5천여 개가 있었는데 사립학교령 공포 후 민족학교를 비롯한 많은 학교들이 문을 닫았다.
- 공물은 고을마다 각 도의 감영과 중앙의 조정에 바치던 지역 특산물로, 세금 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관청에서 쓸 현물을 조세로 부과한 것이다.
- 조재호, 『영영일기』 1751년 10월 19일자.
- 이 사건의 주인공 나향욱은 23세 때 행정고시에 합격해(조선시대로 말하자면 ‘소년급제’하여) 40대 후반에 2급 공무원이 되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파면되었다가 징계에 불복해 파면취소 행정소송을 제기해 승소함으로써 2018년 파면이 취소되고 직급이 1계급 강등되어 부이사관으로 복직했다.
- 김영민, 『한국이란 무엇인가』, 어크로스, 2025.
- 염상섭 소설 『삼대』는 가짜 족보의 탄생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한다.
- 미야지마 히로시, 『양반-우리가 몰랐던 양반의 실체를 찾아서』, 노영구 역, 너머북스, 2014.
- 피터 버크, 『무지의 역사』, 이정민 옮김, 한국경제신문, 2024.
교육 매체 계간 《민들레》 발행인. 저서로는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이 있고, 《대안교육 20년을 말하다》,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 외 여러 권을 함께 썼다. 옮긴 책으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 《소통하는 신체》(공역)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