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고교학점제에서 과목 선택은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까?
| 고교학점제의 과목 선택 과정이 과목 정보 부족, 성적 부담 등으로 인해 ‘관심을 접는 법’을 가르치는 잠재적 교육과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학교는 충분한 정보와 대안, 변경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지금 학교에서는 2027학년도 선택과목 수강신청이 진행되고 있다. 학생들은 과목 목록을 펼쳐 놓고 자신의 다음 학년을 설계한다.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진로를 생각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더 배우고 싶은지 고민하며 배울 과목을 고른다. 고교학점제는 이러한 선택을 통해 학생이 자기 배움의 주체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대학도 전공과 연계한 권장 과목을 안내하면서 고등학교에서 어떤 과목을 선택하고 공부했는지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나 수강신청 현장에서 만나는 선택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학생은 자신의 흥미와 진로뿐 아니라 수강인원, 성적에 대한 부담, 과목 개설 가능성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배우고 싶은 이유가 분명하더라도 그 과목을 실제로 배울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이 상황을 하나의 뷔페식당에 비유해 보자.
식당에는 다양한 음식이 준비되어 있다.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음식이 있는가 하면,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어 맛을 짐작하기 어려운 음식도 있다. 손님은 그 가운데 여섯 가지 또는 여덟 가지를 골라야 한다. 여섯 가지를 고르면 음식마다 양을 조금 더 받고, 여덟 가지를 고르면 각각의 양을 조금씩 줄여 받는다. 정해진 전체 학습량 안에서 과목의 수와 과목별 학습 시간을 구성하는 모습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음식의 이름만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데 있다.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 어떤 맛이 나는지, 자신의 입맛에 맞을지 충분히 알지 못한다. 설명을 읽어도 실제로 한 입 먹어 본 경험을 대신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주문서에는 자신이 고른 음식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고 적혀 있다.
학생의 과목 선택도 이와 비슷하다. 과목명과 간단한 소개만으로는 실제 수업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질문을 탐구하며, 어떤 활동과 평가를 경험할지 구체적으로 그리기 어렵다. 아직 자신의 관심을 찾아가는 학생에게는 과목에 대한 이해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동시에 필요하다. 선택지를 제시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알고 선택할 수 있는 조건까지 마련되는 것은 아니다.
어렵게 음식을 골랐다고 해서 주문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식당은 주문을 모아 본 뒤, 신청한 사람이 적다는 이유로 어떤 음식을 메뉴에서 거둬들인다. 손님에게 이는 이미 자기 접시에 담았다고 생각한 음식을 다시 빼앗기는 듯한 경험이다. 나름의 이유로 고른 음식이지만, 그 이유만으로는 음식을 받을 수 없다.
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긴다. 학생이 관심과 진로를 고려해 신청했더라도 수강 희망자가 적거나, 담당 교사를 확보하기 어렵거나, 교사의 수업 시수와 시간표를 조정하기 어려우면 과목을 개설하지 못할 수 있다. 학교로서도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현실적 제약이다. 다만 학생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선택이 존중받을 것이라는 기대와 실제 경험 사이에 간극이 생긴다. 선택의 이유를 고민한 시간 끝에, 그 선택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만나는 것이다.
주문을 바꾸는 과정에도 제약이 따른다. 이 식당에서는 다른 음식을 먹고 싶어졌다고 해서 자유롭게 주문을 수정할 수 없다. 옆 테이블에서 자신과 반대 방향으로 음식을 바꾸려는 손님을 찾아 일대일로 교환해야 한다. 일부 학교에서 수강인원과 시간표를 유지하기 위해 과목 변경을 제한하거나 맞교환 방식으로 조정하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이때 학생은 새로운 관심을 발견했더라도, 그것을 자신의 교육과정에 반영할 기회를 얻지 못할 수 있다.
여기에 성적에 대한 고민까지 더해진다. 석차등급을 산출하는 과목을 고를 때 학생들은 수강인원은 물론 함께 수강할 학생들의 구성까지 살핀다. 인원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유리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학생에게는 누가 얼마나 신청했는지가 중요한 판단 자료가 된다.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라는 질문 옆에 “어디에서 더 좋은 등급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놓이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이 유불리를 따지는 것을 개인의 태도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자신의 선택이 입시에 영향을 미친다고 느끼는 학생에게 성적 상의 위험을 고려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는 쉽지 않다. 관심 있는 과목을 선택하라고 권하면서 그 선택에 따르는 불확실성을 학생 혼자 감당하게 한다면, 학생은 점차 흥미보다 안전을 먼저 살피게 될 수 있다.
여기서 돌아보아야 할 것은 수강신청 과정 자체가 학생에게 가르치는 내용이다. 학교는 수업 시간에만 학생을 가르치지 않는다. 과목을 안내하는 방식, 개설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 선택을 변경할 수 있는 절차도 학생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한다. 교육학에서는 이처럼 공식적인 수업 내용 밖에서 학교생활을 통해 익히는 가치와 태도를 ‘잠재적 교육과정’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학생에게 주도성과 책임을 가르치려 한다. 그러나 학생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관심도 충분한 사람이 함께 선택해야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배울 수 있다. 궁금한 것을 배우려는 마음보다 평가에서 손해를 보지 않는 판단을 앞세울 수도 있다. 진로를 탐색하며 생각을 바꾸는 일이 부담스러워질 수도 있다. 선택을 통해 성장하기를 기대했던 자리에서, 학생이 자기 관심을 접는 방법부터 익히게 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물론 교육에서도 모든 희망을 제한 없이 실현할 수는 없다. 교원과 예산, 수업 공간과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 학생도 공동체의 조건을 이해하고 자신의 선택을 조정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한 조정이 교육적 경험이 되려면, 제한의 이유를 충분히 설명받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원하는 과목이 열리지 않을 때는 그 관심을 이어 갈 수 있는 다른 학습 경로도 함께 안내받아야 한다.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려면 선택을 준비하는 과정도 충실해야 한다. 과목의 이름과 진로 연계표에 더해 실제 수업 자료, 탐구 질문, 활동과 평가 사례를 보여 줄 필요가 있다. 짧은 체험 수업과 상담을 통해 학생이 자신의 관심을 확인할 기회도 마련할 수 있다. 개설 조건과 변경 절차는 미리 안내하고, 소수 학생의 희망을 이어 갈 공동교육과정이나 온라인 수업 등이 실제로 이용 가능한지도 살펴야 한다.
최소 성취수준을 보장하려는 노력에는 학생의 배움을 끝까지 지원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 뜻은 학생이 과목을 선택하는 출발점에서도 이어져야 한다. 충분히 이해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돕고, 선택한 배움을 이어 갈 여건을 마련하며, 관심이 달라졌을 때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는 일까지 함께 필요하다.
수강신청서는 학생이 앞으로 배울 과목을 적는 문서다. 동시에 자신의 관심이 학교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경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 경험을 통해 학생이 “내가 궁금해하는 것을 배워 볼 수 있구나”, “내 선택을 설명하고 조정할 수 있구나”, “어려움이 생기면 도움을 받아 이어 갈 수 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2027학년도 선택과목 신청을 받는 지금, 우리는 학생이 무엇을 골랐는지와 함께 그 선택의 과정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도 물어야 한다.
|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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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학성여자고등학교 교육과정운영부장으로, 학생의 성장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그 출발점인 ‘질문’을 연구하는 교사다. 학생이 질문을 다듬고 근거를 확인하는 과정을 교실의 언어로 풀어내는 데 관심이 있다. 여행지리 수업에서는 눈에 보이는 풍경뿐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감촉, 그곳의 냄새와 소리도 장소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임을 강조한다.
학생들의 1년, 2년, 3년을 문장으로 옮기며 더 나은 기록을 고민하다 평가로, 평가에서 다시 수업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그 끝에서 ‘질문’을 만났다. 그에게 질문은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갈 길을 찾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배움 역시 텍스트를 익히는 공부에 한정하지 않는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기술을 익히고 방법을 터득하는 일도 배움이라고 믿는다. 학생에게 기대하는 배움을 자신도 이어 가며, 교실에 필요한 교육 자료와 웹 기반 도구를 만드는 일을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