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논설] 교육감들이 말하는 ‘교육의 본질’이 과연 본질인가?
| 교육감들이 내놓은 취임사에서 그들의 교육관을 읽습니다. 한결같이 ‘교육 본질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는 오히려 본질을 흐리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
교육감들의 취임사를 들여다볼 이유
지난 7월 1일 전국 시도(市道) 교육감이 일제히 취임했다. 당사자들의 말마따나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 마땅한 직무를 시작했다. 교육감의 영향력은 강하고 깊다. 인사나 재정과 같은 면에서 행사하는 ‘파워’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일상 생각과 행위를 몰아갈 암묵적인 위력 또한 대단하기 마련이다. 관할 ‘지방’의 “교육, 과학, 기술, 체육, 그 밖의 학예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면서, 교육감은 공공연하게 또는 암암리에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규제할 수 있게 된다. 특히, 교육이 어떤 일이고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빚으며, 궁극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과업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단 지성’을 축조하게 된다. 우리가 겪는 교육 현실은 바로 이 집단 지성이 승인한 정책과 제도들의 현현(顯現)이다.
교육감의 직무와 그 성패가 중대하다고 핏대 올리면서도, 교육감 선거 논란에서 흔히 듣게 되듯이, 우리는 교육감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선출한다. ‘깜깜이 선거’라고 비아냥거리며 선거제도를 탓하지만, 앞뒤 안 맞는 우리 행태부터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교육열’은 이기려고 분출하는 에너지일 뿐, 그 ‘게임’의 장(場)인 교육을 보살피려는 열의로 타지는 않는다. ‘정치’에는 일상이듯 눈과 귀를 기울이면서도, 교육에는 ‘아이가 학교에 다닐 때’가 아니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세태에서는, 제도를 아무리 다듬어도 교육감 선거가 ‘밝게’ 이루어질 수 없을 테다.
선출된 교육감들이 일을 시작한 이제부터야 우리는 그들이 어떤 ‘지도자’인지 알아가게 될 것이다. 취임사는 그 첫 ‘소스’일 듯하다. 방식과 성의에 차이가 없지 않지만, 거기에 교육감들은 왜 어떤 일을 하려는지 밝히고 있다. 대부분 자찬(自讚)과 과장 또는 미화(美化)의 언어로 얼룩져 있긴 하지만, 그 이면과 행간을 읽으면 교육감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일을 도모하려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교육감들이야 당연히 호감을 끌게 되도록 작성했겠지만, 글은 결국 글쓴이를 드러낸다.
취임사마다 ‘교육의 본질’을 언급하는데
취임사들을 읽으면서는, 바로, 교육감들이 한결같이 시체(時體)에 즉응(卽應)한다고 느끼게 된다. 취임사들은 예외 없이 ‘AI 시대’를 언급하며 ‘미래 교육’과 ‘교육 대전환’을 외치고, ‘교육 공동체 신뢰 회복’을 이야기한다. 그런 시쳇말들에 얹는 의미가 서로 같지는 않지만, 인공지능을 둘러싼 가십들이나 교권의 위기를 알리는 사건과 일화들에 스민 ‘밈’이란 점에서는 다른 데가 없다. 교육을 이끌 교육감들이 시류에 휩쓸리지 않을 줏대를 지니고 있지는 못하다고 먼저 느끼게 된다.
취임사에서 읽어 내게 되는 교육감들의 인식과 태세의 포인트들은 관심에 따라 다를 테다. 학교 교육과 관련해서라면, 그 대강(大綱)은 그들이 교육 자체를 어떻게 보는지 짚어보는 것일 듯하다. 흥미롭게도, 취임사들은 대부분 ‘교육의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 그 문구 자체를 썼고, 쓰지 않은 소수 경우에도 ‘본질’에 대한 논급을 사실상 담고 있다. 그 이야기는 대체로 “위기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교육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논지의 맥락에서 나오고 있다.
‘교육이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할 때, 교육감들이 담은 뜻은 문맥상 세 가지로 유추된다. 첫째는 토대에 해당하는 교육 요소를 중시해야 한다는 뜻이고, 둘째는 학생의 고유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며, 셋째는 ‘인간다움’을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이 세 함의는 물론 서로 중첩되는 점이 있지만, 교육 실행의 면에서는 차이가 사소하지 않다. 첫째에는 개인의 삶이나 교육 층위에서 바탕이 되는 ‘기초학력과 마음 건강’과 같은 부문에 우선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고, 둘째에는 학생 개개인의 고유한 ‘결’ 또는 ‘가능성’에 교육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으며, 셋째에는 AI가 압도해 오는 시기에 인간 고유의 역량이나 속성을 함양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이와 같이 분석으로는 의미가 구분되지만, 취임사를 쓰면서 교육감들이 그 차이를 의식했던 건 아닐 듯하다. ‘교육의 본질’이란 어구를 쓰기는 했지만, ‘교육이란 본디 무엇인가?’하고 진중하게 자문(自問)한 결과를 그 말에 담았다고 짐작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들은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말을 찾았으며, 그것을 나름의 논리로 엮어 놓은 듯 보인다. 흔히 교육이 ‘위기’라고 규정되는 요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구호들이 나도는 시류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본질적인 교육’을 내세우는 맥락에서 교육감들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동원하고 있다: ‘인간다운 교육’, ‘사람을 키우는 일’, ‘더 나은 사람으로 이끄는 과정’,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의 [고유성]이 빛을 내도록 하는 교육’, ‘나다움과 인간다움을 지켜 내는 교육’. 교육 본질을 이야기하는 언어로는 너무 모호하고 상투적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교육감들이라면, 위에서 분석해 본 것과 같은 의미 차이를 분별할 만큼 치밀한 교육관을 갖추었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교육감들의 교육관은 본질에 배치(背馳)해
교육감들의 취임사는 대체로 정합하지 못하다. 교육의 본질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본질’을 짚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무수한 공약을 내걸면서 그 사이 상충이나 모순을 보지 못한 듯 버려두고 있다.
여러 갈래 교육 사상에서 ‘본질’에 대해 합의하는 바를 찾을 길은 물론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수단이나 도구로 취급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규범을 교육 본연의 ‘소극적인’ 요건으로 인정하는 데서 불화는 거의 없을 듯하다. 또 하나, 실천의 측면에 좀 더 다가가서 본다면, 교육은 ‘주입과 조형’이기보다는 ‘자아실현’ 또는 ‘주체적 성장’을 도모하는 일이라는 생각도 ‘본질적’이라 받아들여질 법하다. 이 두 가지만 인정하더라도, 교육감들의 취임사는 교육의 본질에 배치한다. 교육받는 학생들을 상투적으로 ‘인재’라 이름하는 데는 도구화의 습성이 짙게 배어있고, 생존 경쟁에서 ‘성공’하도록 이끌고 특히 미래에 AI에 맞서 생존할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고 선의를 내세우는 데서는 학생을 ‘주물러질 재료’로 전제한다.
본질과 모순되는 ‘본질’ 언급의 예는 취임사들에 많다. 예컨대 “위기의 시대일수록 교육 본질에 충실하며 시대가 요구하는 미래 인재를 길러야 합니다.”라는 언사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는 말이라 무심코 썼을지 모르지만, 여기에서 학생은 ‘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수단 또는 도구이며,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맞춤 제작되어야 할 재료이다. 다른 취임사에서는 ‘지역 소멸’ 문제를 거론하며 ‘지산지소(地産地消)의 원칙’을 교육에 적용하겠다는 공약도 볼 수 있다. ‘지역에서 생산한 것을 지역에서 소비한다’는 뜻을 표방하고 있는데, 말하자면 학생(인재)은 지역을 살리기 위한 ‘소비재’로 전제되어 있다.
취임사에는 또 호소력을 노리는 비유들도 있다. 학생들을 목재나 꽃으로 빗대고 있다. 목공(木工)이 나무의 결을 따라 이루어져야 하듯이 ‘교육도 결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며, 저마다 피어나는 때가 다른 꽃들이 있듯 아이들의 다양한 성장의 때도 충분히 포용해야 한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다. ‘개인차’나 획일적인 평가와 차별의 문제를 강조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교육의 본질을 역설하려는 비유로는 적절하지 않다. 나무나 꽃과 달리 사람은 스스로 정체를 이루어가는 존재이다. ‘자아’로서의 정체는 ‘잠재력’ 같은 요인으로 이미 예정되어 있지도 않다. 이런 본질의 요체는 지나가는 비유에서라도 간과하거나 약화해선 안 될 것이다.
사회 문제마다 ‘신종 교육’으로 해결하겠다고 큰소리치지만
요컨대 교육감들은 교육이란 그물의 벼리를 거머쥐지도 못했으면서 어마어마한 수확을 장담하고 있다. 온갖 교육을 시행하겠다고 공약하며, 그 낱낱의 교육은 세상의 거의 모든 문제, 교육 문제만 아니라 지역과 국가 심지어 지구의 문제까지 해결할 것이라고 큰소리치고 있다. 실감을 위해서 교육감들이 거명한 ‘교육’들을 일부나마 나열해 보면 이렇다. 인간다운 교육, 행복 교육, 미래 교육, 학생 생애 책임 교육, 초개별화 맞춤 교육, 민주주의 교육, 윤리 교육, 사회정서교육, 디지털 인성교육, K-인성교육, AI 교육, 리터러시 교육, 문예체 교육, 진로 교육, 생태 전환 교육, 생태 시민교육, 인성·생태교육, 안심 교육, 해양 교육. 교육감들은 이런 ‘교육’들로 ‘국내 최고’ 또는 ‘세계 최고의 교육’ 그리고 ‘위대한 교육 대전환’을 가져오겠다고 외쳤다.
어떤 과업에서든 그 ‘본질’이라 한다면, 그 일을 이뤄내는 데 동원해야 할 복합적인 과제들에 일관하는 심지(深旨)를 뜻할 것이다. 위에서 굳이 나열해 보았듯이, 교육감들이 그렇게 수많은 ‘교육’들을 나열할 때 그것들을 관통하는 뜻(즉, 본질)을 헤아려 보았다면, 과연 그것은 어떤 것일까? 그 잡다함을 포용하거나 조직해 낼 규범이나 원리를 짐작하기는 실로 어렵다. 적어도 취임사에서 보건대, 교육감들은 본질 아닌 ‘본질’을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한 채 상정하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말하자면, 교육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게 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인식 같은 것이다.
교육감들의 취임사에 공약수가 있다면, 그것은 해결책을 다급히 찾아야 한다고 법석대는 최근의 ‘핫한’ 문제들을 감당하겠다는 호언이다. 그 문제들이란 게 사람에서 비롯되고 사람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게 상식이듯, ‘인재’를 만드는(사람을 주무르는) ‘교육’으로 대응할 수 있고 또 대응해야 한다고 으레 믿는다. 이런 ‘상식적인 믿음’에는 인간의 존엄과 교육의 본질을 헤아리는 분별이 없다. 거듭 짚건대, 사람을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는 사람을 사람답게 키우는 대업으로서 교육에서도 전제해야 할 규범일 터이다. 이 점이 우리 교육 이야기에서 잊혀 가고 있기는 하지만, 교육감들에게도 그런 망각이 만연함을 보게 되는 사태는 실로 유감(遺憾)이다.
교육의 본질 이야기 이대로 두지 말아야
우리가 선출한 교육감들은 심각하게 비틀린 교육관을 지닌 듯하다. 우리나라 교육이 본질을 회복하는 길은 더욱 멀어져 가리라 걱정하게 된다. 이런 형국은 사실 어제오늘의 것이 아니다. 이 형국을 타개할 필요도 새삼 부각한 게 아니다. 우리 교육 이야기는 거듭 타락해 왔고, 그 타락은 교육을 다루는 집단 지성의 부박함으로 이어져 왔다. 교육 정책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그런 ‘지성’이 고르기 마련으로, 취임사로 드러나는 교육감들의 안목은 실망스럽다.
우리 교육의 타락은 악순환에 갇혀 있다. 일상의 교육 이야기가 비틀리고, 교육을 다루는 집합적인 지성(知性)이 조야해지며, 그 지성이 빚어내는 교육 현실(정책과 제도)은 본질에서 더욱 멀어진다. 그런 현실에서 교육 이야기의 타락은 여전히 피하기 어렵다. 이런 악의 고리를 끊을 길은 달리 없다. 오래 걸리더라도 우리 교육 이야기부터 바꾸어야 한다. 교육 상식을 뒤집어야 하리라는 뜻이다. 이 과제는 정부나 권력자에게 촉구하고 미룰 사안이 아니다. 우리가 자각하고 숙의해 가야 할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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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제4의 길> 편집실에서는 논급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안에 대하여 적절한 형식으로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