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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발행인 칼럼_1] 왜 우리는 교육의 근본을 묻지 않게 되었는가

#1523 이찬승, 교육을바꾸는사람들 대표 2026.05.20
한국 사회는 입시·생존 경쟁, 반복된 정책 실패, 디지털 환경 변화로 인해 교육의 근본을 묻는 담론이 사라졌으며, 이를 되살리려면 “학교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공적으로 꺼내려는 결단이 요구된다고 강조합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교육 이야기는 넘쳐난다. 입시, 교권, 사교육, AI 교육—어느 것 하나 뜨겁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질문들은 공론장에서 아예 꺼내지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왜 배우는가. 학교는 어떤 인간을 길러내야 하는가. 출신 배경이 배움의 한계가 되지 않으려면 학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AI 시대에도 인간 교사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단순한 제도 운영이나 학업 성취도의 문제를 넘어, 교육의 목적과 학교의 존재 이유를 묻는 질문들이다. 다시 말해 교육이 인간과 사회를 위해 본래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질문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논의 자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오히려 그런 질문을 꺼내는 일 자체가 어색하게 여겨지는 분위기마저 생겨나고 있다.

 

한때 교육은 한국 사회의 중요한 공적 의제였다. 당시 사람들은 교육을 단지 학교 안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와 연결된 문제로 받아들였다. 대학 입시만이 아니라 공교육의 역할, 교육 기회의 불평등, 시민교육, 인간 성장 같은 주제를 놓고 교사와 학자, 시민사회와 언론이 활발하게 토론했다.

 

그 과정에서 교육은 단순한 정책 논쟁을 넘어 사회의 가치와 방향을 묻는 영역이 되었다. 어떤 이는 경쟁 중심 교육을 비판했고, 어떤 이는 공교육의 공공성과 민주성을 강조했다. 또 어떤 이는 학교가 지식 전달을 넘어 학생의 삶과 인간다운 성장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로의 입장은 달랐지만, 교육의 본질과 방향을 둘러싼 논쟁 자체는 살아 있었다.

 

 

왜 담론은 사라졌는가

 

지금 교육은 그 언어를 잃어가고 있다. 교육은 더 이상 “어떤 인간을 길러낼 것인가”를 묻는 영역이 아니라, 점점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 축소되고 있다. 부모에게 교육은 계층 하락을 막기 위한 보험이 되었고, 학생들에게는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한 생존 장치가 되었다. 입시와 취업의 압박이 삶 전체를 지배하면서, 교육철학이나 인간 성장에 대한 질문은 점점 뒤로 밀려난다. 사람들이 교육을 덜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육이 너무 절박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무엇이 좋은 교육인가를 차분히 토론할 여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런 변화의 바닥에는 한국 사회에 깊게 자리 잡은 경쟁 구조가 있다. 수십 년 동안 입시제도는 끊임없이 바뀌었지만, 좋은 대학과 안정된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 구조 자체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제도는 바뀌어도 경쟁은 계속된다”는 체념을 학습했고, 교육을 통해 인간다운 성장을 이야기하기보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게 되었다. 교육의 본질을 말하는 담론보다 입시 정보와 전략이 훨씬 강력한 현실 언어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복된 교육개혁이 남긴 피로감도 이런 흐름을 강화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개혁 구호가 등장했지만, 현장의 교실은 기대만큼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는 늘 개혁의 대상이었지만 교사들은 실제 변화보다 반복되는 정책 실패를 더 많이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냉소가 쌓였고, 시민들도 교육정책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어갔다. 담론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있을 때 힘을 갖는다. 그러나 반복된 실망은 교육에 대한 근본적 논의마저 공허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디지털 환경의 변화 역시 이런 흐름을 더욱 가속화했다. 교육의 본질이나 인간 성장 같은 문제는 긴 시간 숙고하고 토론해야 하는 주제이다. 그러나 지금의 미디어 환경은 긴 호흡의 사고보다 짧고 즉각적인 반응을 선호한다. 복잡한 논의는 몇 줄짜리 찬반 구도로 압축되고, 자극적인 주장일수록 더 빠르게 확산된다. 사람들은 점점 깊이 생각하기보다 빠르게 반응하도록 길들여지고 있다. 교육 담론이 자라기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교육 담론의 실종은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경쟁 구조가 사람들을 불안 속에 몰아넣었고, 반복된 정책 실패는 교육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으며, 디지털 환경은 깊은 토론 자체를 어렵게 만들었다. 여기에 교사·학생·학부모 모두가 극심한 피로와 소진 상태에 놓이면서, 사회 전체가 미래를 상상할 힘을 잃어가고 있다. 오늘을 버티는 일이 급해질수록, “좋은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점점 더 사치처럼 밀려난다. 교육 담론의 실종은 단지 몇몇 지식인의 관심 부족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구조적 불안과 피로가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담론은 어디서 다시 시작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교육 담론은 어디서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아마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나 화려한 정책 슬로건만으로는 다시 살아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런 방식의 개혁이 얼마나 쉽게 구호로 소비되고, 얼마나 빨리 사람들의 냉소 속에 사라지는지를 반복해서 경험해왔다.

 

오히려 교육 담론은 정책 홍보나 이해관계 중심의 논쟁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 교육의 본질을 차분히 성찰할 수 있는 독립적인 논의 공간에서 다시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중요한 것은 규모나 영향력이 아니라, 입시 성과와 정책 효율을 넘어 인간 성장과 공공성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할 수 있는 분위기이다. 서로 다른 경험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교육의 방향을 오래 토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근본적인 담론도 살아날 수 있다.

 

결국 핵심은 얼마나 큰 공간인가가 아니라, 어떤 질문을 품고 있는가이다. “어떻게 하면 학업 성취도를 더 높일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학교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좋은 배움이란 무엇인가”, “공교육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같은 질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교육 담론의 회복은 결국 교육을 다시 인간과 사회의 문제로 바라보려는 노력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그런 담론이 본격적으로 살아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입시 경쟁과 정책 논쟁이 여전히 교육 논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교육의 본질을 차분히 토론할 공간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다만 앞으로 새로운 교육 담론이 다시 등장한다면, 그것은 거대한 정책 구호보다 현장의 문제의식과 작은 질문들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일부 교사들이 “왜 아이들은 배움에서 점점 멀어지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하고, 일부 학부모들이 성적 경쟁보다 아이의 삶과 행복을 더 중요한 문제로 여기기 시작할 수 있다. AI 시대가 본격화될수록 “학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 교사는 왜 필요한가”, “인간다운 배움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 역시 다시 중요해질 가능성이 있다. 교육 담론의 회복은 아마도 이런 작고 느린 문제의식에서부터 다시 시작될지 모른다.

 

 

앞으로 우리는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가

 

특히 앞으로의 교육 담론은 과거와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단순히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시대에 들어섰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왜 배우는가”, “무엇을 위해 배우는가”, “누가 배움에서 배제되고 있는가” 같은 질문이다.

 

어떤 아이는 풍부한 돌봄과 사교육 속에서 자란다. 독서가 생활화된 가정, 방과 후를 채워주는 학원, 감정을 알아주는 어른이 곁에 있다. 반면 어떤 아이는 가난과 돌봄 공백, 정서적 불안 속에서 학교에 온다. 아침을 굶은 채로, 어젯밤 집안의 소란을 안은 채로 교실에 앉는다. 이때 학교가 단지 똑같은 수업을 제공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동일한 출발선을 가정하는 교육이 실제로는 얼마나 불평등한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기초학력 지원, 정서 지원, 돌봄, 맞춤형 지원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교육의 본질과 연결된 문제다. 교육이 단지 입시 경쟁의 장이 아니라 모든 아이의 가능성을 지켜주는 사회적 안전망이어야 한다는 관점은 더 이상 이상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불평등이 심화되는 시대에 교육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AI 시대도 마찬가지다. 이제 학교의 존재 이유를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기능만으로 설명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학생들은 이미 스마트폰과 AI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빠르게 찾고, 요약하고, 문제 풀이 도움까지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학교와 교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마 더 중요해지는 것은 정보를 많이 아는 능력보다, 그 정보를 어떻게 해석하고 판단하며 자신의 삶과 연결할 것인가를 배우는 일일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대화하고,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며, 실패 속에서도 다시 배우는 힘은 단순한 정보 검색이나 정답 생성만으로 길러지기 어렵다.

 

특히 성장 과정의 학생들에게는 자신을 믿어주는 어른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교사는 단지 지식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게 되는지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떤 학생은 교사의 한마디 때문에 다시 도전할 용기를 얻고, 어떤 학생은 자신을 존중해주는 경험 속에서 처음으로 배움에 마음을 열기도 한다.

 

결국 AI 시대에 학교의 역할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어려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 일부는 AI가 대신할 수 있겠지만, 인간이 인간을 성장시키는 일까지 대신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근본을 묻는다는 것

 

우리는 이미 경쟁의 끝에서 깊은 피로를 경험하고 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앞서가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아이들은 지쳐가고, 교사들은 소진되고, 부모들조차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교육의 방향을 고민해온 시민사회와 교육 운동 역시 점점 현실 대응에 몰리며 긴 호흡의 담론을 이어가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중요한 질문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 아이는 지금 정말 배우고 있는가”, “학교는 이 아이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하고 있는가”, “경쟁에서 밀려나는 아이를 우리는 어디까지 책임질 것인가” 같은 질문들이다.

 

하지만 교육 담론은 바로 그런 질문을 다시 꺼내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결국 담론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아이 한 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질문에서 다시 시작된다. 수업이 끝난 뒤 조용히 남아 있는 아이 한 명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교사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성적보다 아이의 표정을 먼저 살피는 부모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입시 결과만이 아니라 아이들이 어떤 어른으로 자라고 있는지를 함께 이야기하려는 시민들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결국 교육의 본질을 묻는다는 것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를 묻는 일과 다르지 않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만 살아남는 사회를 원하는가, 아니면 느린 아이와 흔들리는 아이도 끝까지 품어내는 사회를 원하는가. 교육은 결국 사회가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빠른 답만 요구하는 시대일수록 더 느린 질문이 필요하다. 왜 배우는가. 학교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떤 아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있는가. 사라진 교육 담론은 어쩌면 거창한 이론 속이 아니라, 바로 그런 질문을 다시 공적으로 꺼내려는 조용한 결단 속에서 되살아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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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바꾸는사람들 대표 이찬승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짧은 직장 생활을 경험한 후 지금의 능률교육(NE능률)을 창립하여 30년을 경영하면서 영어교과서와 참고서 등 다양한 저술활동을 했다. 2009년 회사를 매각하고,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이란 비영리 공익단체를 설립하여, 현재 이 단체 대표직을 맡고 있다. 국가 교육시스템 재 디자인과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동, 청소년들도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개혁에 특히 관심이 많다. 수업혁신과 교육격차 완화를 위해 학습과학의 연구와 전파, 그리고 교원 연수에도 힘쓰고 있다.

  • 이메일 : eduinnovator@21eric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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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1. 교사 수정 삭제

    지난번 비판교육학 서평과 더불어 다시 한번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글입니다.
    글의 내용대로 한국의 교육계를 바라다볼 때 지금 한국의 학교 안에는 근본을 캐묻고, 관습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용기도, 그럴 여력도, 다른 의견을 포용하는 힘도 거의 없는 곳이라는 자괴감이 듭니다. 오히려 일반 사회보다 더 굼뜨고 세상과 유리된 관습적 집단에 가깝습니다. 교육부와 교육청이 내려보내는 정책과 연수에 성실히 참여하는 교사가 곧 ‘좋은 교사’로 통하고, 그 방향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교사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설령 그런 시도가 있어도 대개 보기 좋게 꺾이거나 무시당하고, 교육의 방향을 세우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학교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장은 사실상 전권을 쥐고 학교 정책을 일방적으로 끌고 가며, 교사들의 의견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늘 동시에 읽은 감옥에서의 편지 편의 저자 그람시가 지적한 헤게모니 자체를 규정해보려는 노력자체가 아주 의도가 의심스러운(?)괘씸하고 발칙한 의도입니다. (적어도 현재 제가 근무하는 학교의 경우에는 그렇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교사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늘 고민하고 주저하게 됩니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는데”라는 자기 검열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적어도 학생들에게만큼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고 아주 가끔이라도 스스로에게 주문합니다. 특히 AI 시대일수록 더욱 절실해지는 능력이 바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 당국은 여전히 “AI 시대이니 미래교육을 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돈이 아깝기만 한 소모성·전시성 정책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어제 한 유튜브 방송에서 서울·경기 교육감 후보의 발언을 들었는데, 솔직히 절망적이었습니다. 현장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더 두려운 것은 그런 비현실적 공약이 정작 현장을 모르는 일반 유권자에게는 그럴듯하게 먹힐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한 번 저는 AI 시대일수록 길러야 할 것은 근본적인 힘, 즉 사고하는 힘, 비판하는 힘, 지식을 쌓는 힘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학교를 만든다면 다양한 책을 읽고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는 소크라테스적 교수법으로만 가르치는 학교를 만드는 것이 더욱 미래형 교육에 부합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더욱 어려워져 갑니다. 교사로서의 교육주권은 오히려 더 줄어들고 있고, 주어진 헤게모니에 부합하는 것만 해야하는 의무만 더 늘어가는 여전히 학교는 그런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변화하는 세상과 동떨어진 우리들만의 리그속에서 자위하고 살아가고 있는 듯하여 정말이지 걱정이 됩니다.

    1. 이찬승 수정 삭제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현장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외롭고 소모적인지, 글 곳곳에서 느껴졌습니다. “내가 이런 질문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자기 검열은 선생님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질문 자체를 위험으로 간주하는 구조가 만들어 낸 반응입니다. 그 구조 안에서도 학생들에게만큼은 질문하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다짐을 놓지 않고 계신다는 것, 저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근본을 묻는 교사가 한 명이라도 교실에 있다는 것, 그것이 교육의 가능성이자 희망입니다. 함께 읽고 함께 고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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