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생’의 울타리를 넘어
| 최근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은 ‘갓생(God + 生)’ 열풍을 소개합니다. 이를 통해 ‘주도성’에 대한 세대 간 인식 차이를 확인하고, 청소년이 주도성을 회복하기 위해 시스템과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
새벽 6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뜬 고등학생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스마트폰 앱 ‘포레스트’를 켜는 일이다. 이 앱은 설정한 시간 동안 휴대폰을 만지지 않아야 가상의 나무 한 그루가 무사히 자라나는 것으로, 오늘날 대한민국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신앙이 된 ‘갓생(God + 生)’ 열풍의 단면을 보여준다. 책상 위 타이머는 ‘순공(순수 공부)’ 시간을 쉼 없이 기록한다. 이 모든 과정은 타임랩스 영상이 되어 SNS에 공유된다.
갓생 열풍은 단순한 자기 계발 트렌드를 넘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는 ‘#스터디그램’, ‘#스터디윗미’, ‘#갓생살기’ 해시태그가 수백만 건에 달한다. 새벽 5시에 일어나는 ‘미라클 모닝’, 하루 일과를 분 단위로 계획하는 ‘루틴 챌린지’, 공부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스터디윗미’ 방송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어떤 학생들은 오전 6시부터 자정까지 이어지는 18시간의 일정을 색깔별로 구분해 플래너에 기록한다. 그리고 이를 인증샷으로 공유하며 서로를 독려한다.
하지만 이 화려한 자기 관리의 이면에는 심각한 부작용이 도사리고 있다. 갓생에 실패한 날이면 아이들은 자신을 ‘인간 쓰레기’라고 자책한다. 계획대로 되지 않은 하루를 ‘망한 날’이라고 낙인찍는다. 잠깐의 휴식조차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갓생은 건강한 자기 관리가 아니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강박으로 변질되었다. 더욱이 이 모든 노력은 철저히 ‘보여주기식’이다. SNS에 올릴 만큼 완벽한 루틴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왜곡된 인식이 퍼지고 있다. 아이들은 진짜 자신의 성장보다 타인의 시선에 맞춘 완벽한 이미지 만들기에 집착하고 있다.
이 치열한 자기 통제의 이면에는 서글픈 역설이 숨어 있다. 아이들이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며 스스로를 감시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이것뿐”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에게 ‘주도성’이란 단어는 형용모순에 가깝다. 우리는 그들에게 자기주도학습을 권한다. 하지만 정작 무엇을 배울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은 박탈해왔다. 지금의 갓생 열풍은 진정한 의미의 주도성이 아니다. 거대한 무력감 속에서 찾아낸 ‘최소한의 자기방어’이자 고립된 생존 전략이다.
‘설계된 삶’과 대리 주도성의 함정
현재 대한민국 청소년의 삶은 고도로 설계된 알고리즘과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입이라는 최종 목적지를 향해 최적화된 경로를 강요받는다. 여기서 주도성은 오직 ‘성적을 올리기 위한 효율적인 시간 관리’ 정도로 협소하게 해석된다. 학교와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보호라는 명목 하에 아이들의 선택지를 ‘정해진 정답’으로 좁혀왔다. 그 결과 아이들은 높은 학업 성취도 뒤에 무력감이라는 그림자를 숨긴 채 성장하고 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은 ‘주도성(Agency)’을 핵심 역량으로 내세웠다. 학습자가 자신의 삶과 학습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변화를 만들어가는 힘을 기르는 것이 목표였다. 정작 이 개념은 학교 현장에서 외면받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주도성’을 둘러싼 세대 간의 뿌리 깊은 인식 차이다.
기성세대에게 주도성은 여전히 ‘주어진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 계획표를 짜고 시간을 관리하면 그것을 주도성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 계획표 안에 무엇을 채울지, 왜 그것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여전히 어른들의 영역으로 남겨둔다. “네가 알아서 해”라고 말하면서도 선택지는 “수학 학원을 언제 갈지” 정도로 제한한다. 이는 주도성이 아니라 ‘허용된 범위 내에서의 자율’일 뿐이다.
반면 청소년 세대가 원하는 주도성은 훨씬 본질적이다. 그들은 “왜 이것을 배워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스스로 답하고 싶어 한다. 진로를 직접 탐색하고 싶어 한다. 때로는 입시 경쟁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시도해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사치”나 “철없는 반항”으로 치부된다. 어른들은 “대학 가고 나서 네가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말한다. 청소년의 현재를 미래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만 한정한다. 이 괴리 속에서 교육과정이 아무리 주도성을 외쳐도 현장에서는 여전히 “성적 올리는 자기 관리법” 정도로 축소되어 해석되고 있다.
어쩌면 청소년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는 ‘갓생’ 열풍은 이러한 ‘주도성’에 대한 세대 간 인식의 차이를 비집고 나온 풍자일지도 모르겠다. 아스팔트 틈 사이로 온몸을 비틀며 자란 여린 싹의 슬픈 몸짓처럼 말이다.
청소년들의 ‘갓생’ 에너지가 개인의 루틴에만 머물 뿐, 사회적 실천이나 내면의 확장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아이들은 플래너를 스스로 채운다. 하지만 그 안의 콘텐츠는 기성세대가 정해준 국·영·수 문제집뿐이다. 이는 주어진 과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대리 주도성’일 뿐이다. 자신의 삶을 직접 기획하는 진짜 주도성이 아니다.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타인의 기대를 대리 수행하는 ‘수동적 완벽주의자’로 남겨져 있다. 우리는 그들을 좁은 공부방에 가두고 ‘완벽한 수행자’가 되라고 강요하고 있다.
주도성이 꽃피운 순간들과 관계의 힘
주도성의 놀라운 힘을 느낀 것은 행동이 극히 제한받던 코로나19 시기였다.
교장실로 A가 찾아왔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졸업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에 학생들이 한 장소에 모이는 일을 삼가라는 공문을 받은 직후였다. 학급별로 교문 앞에서 졸업장과 앨범을 전하자는 결정으로 굳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선생님, 저는 3년 내내 마스크만 쓰고 있었어요. 짝도 없었고요. 그런데 이제 졸업식마저 저 혼자 학교를 방문하고 졸업장을 받아간다면 고교 3년이 너무나도 우울할 것 같아요.”
A의 마음은 공감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자 A는 다른 학생들과 협의하여 공항 콘셉트로 꾸미자는 제안을 했다. 공항에서 사람들이 각자 게이트를 통과하여 목적지로 나가는 것처럼 각 학급을 게이트로 꾸미자는 것이다. 목적지가 ‘사회’로 표시된 티켓에는 고교 3년의 활동을 담은 영상을 볼 수 있도록 링크를 걸었다. A의 제안은 교사들을 움직였다. 교사들은 학교 인근 카페에서 이 티켓으로 음료를 무료로 제공받을 수 있도록 했다. 사연을 들은 카페 주인들은 학생들에게 졸업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A는 자신의 제안을 받아 준 학교 교사들 덕분에 사회생활에서도 매우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주도성은 단순히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스스로 정의하고 해결할 기회를 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청소년 B는 지역의 청소년 참여 예산제에 참여한 경험을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에는 ‘어차피 어른들이 다 정해놓은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제안한 ‘청소년 심야 귀갓길 안심 조명’ 사업이 실제로 시의회를 통과했어요. 우리 동네에 가로등이 설치되는 걸 보면서 진짜 놀랐어요. 내 목소리가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뿌듯했습니다.”
자신들의 제안이 현실화되는 과정을 목격하며, 아이들은 단순한 ‘보호 대상’에서 ‘시민’으로 스스로를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청소년 참여 예산제는 만 9세부터 24세 청소년이 지역사회에 필요한 정책을 직접 제안하고, 실제 예산 편성 과정에 참여하는 제도다. 청소년들은 지역 현안을 조사하고, 토론을 거쳐 사업을 기획한다. 주민 투표를 통해 우선순위를 결정한다.
서울 오디세이 학교를 경험한 학생 C(당시 17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1년 동안 ‘왜 사람들은 불행한가’를 주제로 철학 책 20권을 읽었어요. 노숙인 쉼터에서 봉사했어요. 직접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요. 처음 3개월은 방황했죠.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불안했어요. 그런데 선생님들이 ‘실패해도 괜찮아, 네가 선택한 거니까’라고 계속 말씀해주셨어요. 그때 처음으로 ‘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도 되는구나’라는 걸 느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은 주도성이 특별한 환경이나 거창한 프로그램 없이도, 일상 속 작은 기회에서 싹틀 수 있음을 보여준다. 청소년들은 구체적 공간에서 공동의 주제를 놓고 토론하고 실천했다. 결과물을 공동체와 나누며 책임감과 성취감을 동시에 경험했다. 이는 주도성이 혼자 일궈내는 고독한 성취가 아니라, 타인과 연대하고 제 목소리를 낼 때 완성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환경의 재설계와 시스템의 혁신
주도성은 거창한 이론이 필요하지 않다. 학교 텃밭 한 평, 선후배 간의 신뢰 한 조각만으로도 아이들은 충분히 자신의 삶을 주도하는 경험을 쌓아갈 수 있다. 청소년이 주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시스템과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교육의 패러다임을 ‘수행’에서 ‘관계와 설계’로 전환해야 한다.
첫째, ‘안전한 실패’가 보장되는 심리적 안전망이 구축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실패에 대한 비용이 너무 높다. 엉뚱한 시도를 해도 인생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줄 수 있는 교육적 배려가 우선되어야 한다.
둘째, 평가 방식의 근본적 혁신이 필요하다. 정답을 맞히는 객관식 평가는 주도성을 거세한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펼치고 정답이 없는 문제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성인의 역할 변화다. 부모와 교사는 ‘지시자’나 ‘감시자’에서 ‘촉진자(Facilitator)’이자 ‘파트너’로 그 역할을 전환해야 한다. 아이가 길을 잃었을 때 바로잡아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길을 찾는 법을 고민하는 동료적 관점이 필요하다.
주도성은 어른들이 허락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아이들이 스스로 삶의 운전대를 잡았을 때 느껴지는 해방감을 통해 발견된다. 이제 우리 기성세대와 교육정책 입안자들은 자문해야 한다. 언제까지 청소년을 ‘미완의 존재’이자 ‘보호의 대상’으로만 정의할 것인가.
아이들이 앱 속의 가상 나무를 키우는 데 안주하게 두지 말자. 진짜 나무를 심고 자신들의 숲을 설계하며 공동체의 주역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권한을 넘겨주어야 한다. 청소년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저당 잡힌 존재가 아니다. 지금 당장의 삶을 책임지는 당당한 시민이다. ‘학생답다’는 말로 그들의 입을 막지 마라. ‘미래를 위해서’라는 말로 그들의 현재를 빼앗지 마라. 청소년 당사자성을 전면적으로 인정하고 사회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판을 갈아엎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 교육이 직면한 가장 시급한 전환점이다.
더 이상 우리는 아이들에게 제한된 선택지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빈 노트를 건네야 한다. 그들이 자신만의 문장으로 세상을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도록 말이다. 청소년을 주체로 인정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미래도 ‘설계된 정답’이 아닌 ‘창조적인 가능성’으로 가득 찰 것이다.
|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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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인창고 교장을 마치고, 현재 경기도지속가능발전협의회(G-SDGs) 교육위원장, 온배움터(구 녹색대) 생태교육연구소 소장, ‘김덕년의 행복한 학교이야기’ DJ 등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꿈꾸고 싶은 교육낭만주의자로, 교육문제를 아이들의 시각으로 접근하려고 합니다. 연세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에서 국어를 공부하고, 온배움터(옛 녹색대) 생태교육과에서 생명이 중심이 되는 교육생태계를 고민했습니다. 저서로는, <주도성과 진로교육>(교육과실천, 2025)[신간], <주도성>(교육과실천, 2023), <아름다운 숲을 닮은 배움공동체>(케렌시아, 2022), <교사교육과정>(교육과실천, 2022), <포노사피엔스를 위한 진로교육>(교육과실천, 2021), <과정중심평가>(교육과실천, 2018), <교육과정-수업-평가-기록 일체화>(에듀니티, 2017) 등이 있습니다. 연구로는, <고교 교육 환경 변화 전망과 과제:학생들의 시선으로>(한국교육개발원, 2018), <학생부종합전형의 내실화와 교육과정-수업-평가-기록 일체화 연계방안>(한국외대,2018), <학교생활기록부 기반 면접 및 구술고사 연구>(서울대, 2017) 등을 진행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