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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13) – “중등학교의 평준화”

#1475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2026.03.18
우리의 교육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중학무시험제’ 정책(1969년)과 ‘고교평준화’ 정책(1974년), 이들이 등장한 배경과 주요 정책 내용 및 그것이 한국 교육에 미친 영향을 차례대로 살펴봅니다.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문교정책은 새롭게 학교로 밀려드는 거대한 파도였던 베이비붐 세대를 대상으로 한 초등 ‘의무교육제’ 실현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중등교육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심했던 종전의 방침을 1960년대 말이 되면 견지하기 어렵게 된다. 초등교육의 의무화로 인한 완전 취학은 필연적으로 중등학교 진학을 둘러싼 경쟁을 격화시킬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여지없이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그에 대한 정치적 대응의 차원에서 연쇄적으로 등장한 두 정책 즉 1969년의 ‘중학무시험제’ 정책 및 그로부터 5년 후인 1974년의 ‘고교평준화’ 정책은 1970년대 한국인의 교육행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었다. 여기서 이 두 정책을 ‘중등교육의 평준화 정책’으로 일괄하여 그것이 등장한 배경과 주요 정책 내용 및 그것이 한국 교육에 미친 영향을 차례대로 살펴본다. 특히 정책 배경과 관련해서는 종전에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일본의 ‘학교군제’ 정책의 영향을 검토한다.

 

 

평준화 정책과 일본의 ‘학교군제’

 

오랜 기간 문교부를 출입했던 한 교육신문 기자는 고교평준화 정책의 구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흥미로운 언급을 했다.

 

당시[1973년 고교평준화 정책 발표 이전에: 인용자주] 민관식(閔寬植) 장관은 일본 도쿄에 사람을 보내 고교배정 입학제도의 실상을 알아보도록 했다. ··· 공주대 체육과 윤석병 교수와 홍익대 부속초등학교 김동연 교장이 선발됐는데, 이들이 조사한 도쿄의 고교배정제는 공립고교에만 적용되고, 사립고교는 자율선택제였다. 이것을 우리 정부가 국·공·사립 구분 없이 무차별 적용해 ‘고교평준화’라고 부른 것이다. 종교계 학교에 배정된 학생들이 문제였다. 그러나 정부는 우리나라에 국교(國敎)가 없다는 구실로 학교의 방침을 따르라며 학생들의 불만을 억눌렀다.1

 

이에 따르면 민관식 문교부장관이 주도한 고교평준화 정책은 일본 도쿄도(東京都)의 공립고교 대상 ‘고교배정제’를 도입하여 이를 사립고교에까지 확장 적용하는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쿄도의 고교선발 제도에 주목한 것은 민관식 장관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중학무시험제 정책을 구상할 때도 이 제도가 참조되고 있었다. 1966년에 권오병(權五炳) 문교부장관이 일본의 제도를 참조하여 중학교 입학시험과 일류학교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학교군제’를 구상하고 있었음을 1966년 9월의 한 일간지 기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입시지옥과 학교격차를 해소해 보려고 부심해 오던 문교부는 중학교의 ‘학교군제’ 실시를 구상 중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30일 권오병 문교부장관은 “신년도 문교부사업계획에 중학교군제를 삽입, 본격적인 연구를 거쳐 적(합)성이 발견되면 실시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나라에도 언젠가는 중학교군제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짙어졌다. ··· 중학교군제를 실시하고 있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아직 한 나라도 없다. 오직 1948년부터 중학교[이는 고등학교의 오기로 보인다: 인용자주]에 학구제를 해오다가 실패한 이웃나라 일본이 학구제의 모순을 개혁하기 위해 오랜 연구 끝에 명년부터 비로소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도 도쿄도의 도립중학(都立中學)[여기서 도립중학은 도립고교의 오기로 보인다: 인용자주]에 한해서만 ··· 입시지옥, 월경지옥(越境地獄), 출신교의 ‘네임·밸류’ 위주 등 우리나라와 교육환경이 비슷한 일본이 치밀한 계산 끝에 도입하려는 제도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에도 이식이 가능하다는 당국자들의 견해.2

 

권오병 장관 자신은 중학무시험제 정책이 일본의 정책을 참조한 것이라 밝힌 바 없지만, 그럼에도 위의 기사는 일본의 정책이 ‘우리나라에도 이식이 가능하다는 당국자들의 견해’를 분명히 전하고 있다. 실제로 1968년에 발표된 중학무시험제 그리고 1973년에 발표된 고교평준화 정책의 주요 골격은 일본 도쿄도의 학교군제라는 당시로서는 일반적이지 않았던 특이한 정책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 도쿄도의 학교군제는 어떤 제도였을까. 이 제도 출현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1945년 이후 일본에서 새롭게 출범한 신제(新制) 고등학교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1945년 이전에 일본에 존재했던 이른바 ‘구제(舊制)’ 고등학교는 중등학교가 아니라 제국대학의 예과로 기능한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그런데 1945년 이후 새롭게 출현한 고등학교는 6-3-3 신학제 안에서 소학교·중학교의 9년간 의무교육 위에 3년제로 설정된 후기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이것이 신제 고등학교다. 신제 고교는 의무교육기관은 아니었지만 발족 당초에는 진학을 희망하는 사람 전원을 선발을 거치지 않고 전원 입학시키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기회 개방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이른바 ‘고교삼원칙’ 즉 남녀공학·종합제·소학구제가 기본 원리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이 세 원리 중에서 결과적으로 남녀공학만 실현되었을 뿐, 일반계 교육과 실업계 교육을 한 학교에서 통합하여 실시하는 종합제 고교나 학구 내의 진학 희망자를 무시험으로 받아들이는 소학구제는 용이하게 실현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며 고교 진학 희망자가 급증하자 1951년에 문부성은 고교의 입학선발시험을 다시 인정하는 방침으로 전환했으며, 1963년에는 「학교교육법시행규칙」을 개정하여 지원자가 정원을 초과하지 않는 경우에도 선발을 위한 학력검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른바 지원자 전원을 받아들인다는 당초의 ‘전입주의(全入主義)’에서 적격자만을 받아들인다는 ‘적격자주의(適格者主義)’로의 전환이었다.3 또 문부성은 1966년에 중앙교육심의회의 ‘후기중등교육 다양화’ 방침을 수용하여 각 도도부현(都道府縣)이 고교 입시제도를 독자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도쿄대학 등 명문 대학에의 입학 성적이 우수한 일부 고교 입학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고 고교 간의 서열화, 중학교에서의 입시 위주 교육 등이 사회문제화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도쿄도는 1967년부터 고교 2〜3개로 구성되는 학교군을 만들고 학교군별 종합선발 방식으로 선발을 행함으로써 각 학교의 입학자 성적이 균등하게 될 수 있게 만드는 혁신적인 제도를 취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원자는 학교군은 선정할 수 있으나 특정 학교를 희망할 수는 없도록 함으로써 학교 간 격차를 해소하겠다는 것이었다.4

 

다만 여기에는 애초부터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학교군별 종합 선발이므로 입학시험 자체는 유지했으며, 지원자들이 거주지와 무관하게 원하는 학교군에 지원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학교군별 서열화 문제가 새롭게 나타났다. 더욱 중요한 한계는 적용 대상을 도립(都立)고교, 즉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공립고교로 한정하고 국립고교와 사립고교를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국립·사립고교 중에서 새로운 입시 명문학교가 탄생하여 학교 간 서열화가 새롭게 재편된 채로 유지된 점이다. 예컨대 도쿄도에서는 공립고교 중에서 도쿄대 입학성적이 종전까지 전국 최고였던 히비야고교(日比谷高校) 같은 고교는 학교군제 이후 최고라는 위상을 상실했지만, 그 대신에 가이세이고교(開成高校) 같은 사립학교가 신흥 강자로 부상했다.

 

그런데 도쿄도의 학교군제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70년대 후반에 도립고교의 이른바 ‘입학사퇴율’ 즉 자의에 반해 도립고교로 배정된 학생들의 자퇴율이 10% 이상으로 고정되고 도립고교 졸업생들의 도쿄대학 입학성적 저하 등 이른바 ‘도립고교의 지반침하’가 문제시되자 결국 1980년에 학교군제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했다.5 이후 오늘날과 같은 고교 서열화 체제가 도쿄도에도 성립하게 되었다.

 

권오병 장관의 중학무시험제나 민관식 장관의 고교평준화 정책이 도쿄도의 제도를 그대로 복제한 것은 아니었다. 도쿄도의 학교군제에서는 입학시험 자체를 폐지하지 않았으나 중학무시험제에서는 학교군제와 함께 시험 자체를 폐지했다. 한편 고교평준화 정책에서는 고교연합고사를 실시하기는 했으나 도쿄도와 같은 학교군별 선발고사가 아니라, 자격고사의 성격이 강했다. 더욱 중요한 차이는 한국의 중학무시험제나 고교평준화 정책이 공히 적용 대상에서 국립이나 사립학교의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 또 진학 희망자의 학교군 선택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거주지에 따라 기계적으로 진학교가 결정되도록 했다는 점 등이다.

 

이는 중등교육에서 사학의 비중이 너무 높아―예컨대 1968년 당시 전국의 중학생 중 사립중학교 학생은 50.3%였고, 1973년 당시 서울의 고교생 중 사립고교 학생은 무려 81.2%였다.6― 정책의 효과 면에서 사립을 제외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사실상 사학의 준공립화를 일관되게 추진한 한국의 중앙집권적 교육정책의 기조가 작용한 결과였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당시가 권위주의적 정치 체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학무시험제와 고교평준화 정책에 대해 사학들은 격렬히 저항하기보다는 대체로 순응하는 편을 택했다. 학생 선발권 및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포기하는 대가로 사학에 대한 정부의 재정 지원을 확보하는 식의 생존 방식을 취한 것이다. 한편 공사립을 불문하고 평준화된 학교들 간에 새로운 경쟁구도가 생겨난 것을 학교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로 여겨 환영하는 사학들도 있었다.

 

 

중학무시험제와 고교평준화 정책

 

1968년에 파격적으로 ‘중학무시험제’ 정책이 발표될 때, 국민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이른바 ‘일류중학’ 입학을 목표로 국민학교 고학년 학생과 그 학부모들이 전개하는 치열한 경쟁이 급기야 국민학생의 ‘아나뽕’ 같은 각성제 남용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고,7 중학 입시 과정에서 1964년 말의 이른바 ‘무즙파동’8, 1967년 말의 이른바 ‘창칼파동’9과 같은 정답 시비가 대대적으로 사회문제화되었기 때문이다. 1967년에 힘겹게 대통령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로서는 정치적 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해 국민들의 호감을 살만한 정책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박정희는 1965년에 문교부장관으로 임명해 한일회담반대세력을 성공적으로 제압하는데 활용한 권오병을 잠시 법무부장관으로 전직시켰다가 다시 문교부장관으로 복귀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1968년 5월에 다시 18대 문교부장관으로 복귀한 권오병은 두 달도 되지 않은 7월 15일에 ‘중학무시험제’ 정책을 발표한다. 이 정책과 관련하여 그는 그것이 ‘입시지옥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을 시급히 강구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서 비롯되었음을 언론에 밝히기도 했다.10

 

중학무시험제 정책의 도입에 대해 1980년의 ‘문교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중학교 입시제도는 해방 이후] 단독고시, 연합고시, 국가고시제 등을 전전하였고, 입시지옥은 해소하지 못한 채 세칭 일류교에 입학하고자 하는 입시경쟁은 그 정도가 극에 달하여 중대한 교육적, 사회적 문제로 등장했다. 그리하여 중학교 입시제도의 문제는 발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1968년 7월 15일 권오병(權五炳) 장관은 교육혁명이라 할 중학교 무시험진학제를 단행하였다. 이것은 대학입학 예비고사제도와 더불어 1960년대 후반기에서 가장 획기적인 문교시책으로 손꼽히고 있다.11

 

입시제도 문제의 ‘발본적 해결’이라고 평가되는 이 정책은 중학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을 추첨을 통해 배정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고 1969년에는 서울, 1970년에는 전국 10개 도시로, 그리고 1971년에는 전국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동시에 1969년도에는 경기중학교를 비롯해 세칭 일류중학교를 폐쇄하는 조치가 병행되었다. 문교사는 정책 시행의 성과로 1) 아동들의 정상적인 신체발달 촉진, 2) 과열된 과외공부 완화, 3) 극단적인 학교차의 해소, 4) 국민학교 교육과정의 정상화, 5) 중학교 의무교육의 필요 증대 등을 들었다. 동시에 파생된 문제점도 언급했는데 그것들은 학생 통학거리의 문제, 학급당 학생 수 증가로 인한 학생지도의 곤란과 학생들 능력차로 인한 학습지도상의 문제, 사립학교의 재정난 등 학교 평준화의 미비 등이었다.12

 

[그림 1] 1969년 중학입시 무시험추첨(1969.4.7.)
(출처: 국가기록원 사진자료)

중학무시험제와 같은 ‘입시 자체의 철폐’가 입시경쟁의 격화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도 아닐뿐더러, 그 방안이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아울러 갖추어져야만 하는 여타의 조건들도 정비되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사전 준비와 검토, 부대적인 정책 추진 등은 매우 미흡했다. 무엇보다도 중학무시험제는 전기 중등교육 단계에서의 선발 기능을 무화시킴으로써 그 선발의 시점을 3년 후로 순연시켰고 따라서 중학교 단계에서의 학교차는 사라진 대신에 고등학교 단계에서 새롭게 학교차가 두드러졌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고교 입시를 둘러싼 중학생들의 입시경쟁 문제를 야기했으며 언론은 여지없이 그것들을 사회문제로 부각시켰다. 예컨대 1971년 동안 서울시내 중학생들이 지불한 과외수업 비용이 260억 원에 달해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절반을 넘어섰다는 보도13도 그중 하나였다. 민관식 장관 스스로가 말한 대로 ‘소위 일류대학에 가려면 일류 고등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신음하는 ‘중3병이라는 미증유의 교육병’14 등, 중학무시험제 도입 이전까지 국민학교 단계에서 펼쳐진 난맥상이 이제는 중학교로 무대를 옮겨 반복되었다.

 

[그림 2] ‘입시고역…가족과 함께’
(출처: 경향만평 『경향신문』 1972.1.19.)

1969년의 3선 개헌, 그리고 영구집권을 위한 1972년 10월의 유신헌법 발포 등 정치적 폭거를 거듭하던 박정희는 교육정책을 다시 한번 포퓰리즘적인 지지 확보 수단으로 활용하게 된다. 박정희는 1973년 문교부 연두순시에서 “세칭 일류고교, 일류대학 진학에 따른 여러 가지 폐단을 없애기 위해 금년 안에 획기적인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것이 민관식 문교부장관에 의해 속전속결로 정책화되었다.15

 

고교평준화 정책에 대해 1980년 ‘문교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중학교 무시험제로 인하여 아무 제약 없이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기 때문에 중학교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여 그 인구의 파고가 고등학교로 밀어닥쳤고, 그것은 세칭 일류 고등학교에 집중됨으로써 고교입시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었다. 일류 중학교의 병이 일류 고등학교 병으로 옮겨진 셈이었다. ··· 민관식 장관은 ··· 새 입시제도의 확정안을 공표하였다.16

 

1973년 6월 28일에 발표된 고교평준화 정책의 주된 내용은 인문계 고등학교는 선발고사를 통해 입학자격자를 선발한 후 학군별 추첨을 통해 학교에 배정하며, 실업계 고등학교는 시 단위로 희망학교에 지원하게 하고 선발고사 성적으로 학교별로 선발하게 하며 그 합격자의 인문계 고교 지원을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평준화 정책은 1974년에는 서울과 부산, 1975년에는 인천, 광주, 대구 등으로 확대 실시되었고 1979년부터는 수원, 춘천, 청주, 대전, 전주, 마산, 제주 등 7개 도시 그리고 1980년부터 여타 8개 도시로 더욱 확장 실시되었다. 그 정책의 성과로는 1) 중학교 교육의 정상화, 2) 학생의 질 및 학력의 학교 간 평준화, 3) 실업교육의 진흥, 4) 지방 학생의 대도시 집중 억제 등을 들었다. 물론 이질적 학생 집단으로 인한 학습지도의 곤란, 인문고교 내 취업반의 열등의식, 교원의 직무 부담, 실업고교의 서열화 등의 문제점도 아울러 지적했다.17

 

 

평준화 정책의 영향

 

그렇다면 1960년대 말~70년대 초에 실시된 중학무시험제와 고교평준화 정책은 문교사에서 언급하는 자화자찬적인 성과를 넘어서서 한국 교육에 어떤 구조적 영향을 미쳤을까. 먼저 현상적인 차원에서 눈에 띄는 변화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경기중·경기고를 비롯한 일부 학교들의 독점적 지배 구조가 무너지고 이른바 ‘군웅할거의 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일대 혼전’이 전개되면서 입시의 신흥 강자가 부상하는 등 학교 현장에 새로운 활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예컨대 고교평준화 정책 이후 서울대학교 입학 성적에서 경기고를 능가하여 첫 2년간 최고의 성적을 거둔 사립 서라벌 고등학교, 그리고 대일고등학교, 명지고등학교 등이 부상하여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18 다만 이것이 말 그대로 고등학교 교육의 ‘평준화’를 의미하는지에 대한 반론도 없지 않았다. 즉 “평준화가 적용된 지역 내에 있어서도 이른바 급지별로 투입된 단위교육비에 현저한 격차가 남았고 동일지역 내에서도 공사립 간 교원의 자질의 격차를 비롯하여 학교차는 여전히 남았다”19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지적되어 온 이런 영향 외에, 여기서는 새로운 각도에서 평준화 정책의 영향을 살펴보자. 여기서 평준화 정책의 영향을 포착하는 키워드는 ‘교육열의 냉각/가열’, ‘차별교육관’, 그리고 ‘학교·학생문화의 균질화’ 등 세 가지다. 평준화 정책은 학생 선발 방식의 변화를 포함하여 한국 중등교육 제도의 특질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중등교육 제도는 그를 둘러싼 학생과 학부모들의 교육 관련 선택과 행위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학교 교육의 실제에 급격한 변화를 야기함으로써 교육에서의 차별과 평등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확산시키며, 중등학교와 그 안에서 삶을 살아가는 학생들의 문화에도 근본적 변화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이를 순서대로 검토해 보자.

 

평준화 정책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입시제도 개혁 차원에서 구상되고 집행된 정책이었을 뿐, 애초에 중등교육의 팽창을 의도하여 구상된 정책은 아니었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에는 중등 및 고등교육의 팽창에 대해 부정적, 소극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 그런데 중학무시험제 정책이 발표된 이후, 정부가 당초에 예상하던 수준을 넘어서서 중학교 진학 희망자가 폭증했다. 정책 발표 직후 권오병 장관은 “막상 중학 입시를 철폐하고 나니 아예 진학을 단념했던 학동들이 1만 8천 명이나 번의하는 통에 큰일났다”20고 난처함을 고백할 정도였다. 이는 중학무시험제 정책이 애초부터 교육팽창정책의 일환으로 구상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 점은 고교평준화 정책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당국의 예상을 넘어서서 중학교 및 고등학교 진학자가 증가했고 1970년대에 중등교육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교육팽창의 지수로, 취학률의 변화를 보자. 중학교의 경우, 1966년도에는 42.3%에 불과했으나 중학무시험제 도입 직후인 70년에는 56.1%, 그로부터 5년 후인 75년에는 75.2% 그리고 80년에는 94.7%에 달하여 불과 1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사실상의 완전 취학을 달성했다. 고등학교의 경우에도 1966년도에는 27.5%, 1970년에는 30.5%에 불과했으나 평준화 정책 도입 이후인 75년에는 43.6%, 그리고 80년에는 69.7%에 달하여 이미 보편화 단계에 들어섰다.21 평준화 정책 시행 시기인 75년에서 80년까지 5년 동안 취학률이 무려 26.1% 높아진 셈인데, 이러한 단기간의 놀라운 중등교육 팽창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었다. 예를 들어 중등교육 팽창의 속도에서 세계적으로 매우 빠른 것으로 평가되던 일본의 경우에도, 1950년에 42.5%였던 고교 진학률이 1965년에 70.3%에 도달하여 약 27.8%가 높아지기까지 15년이 걸렸던 것이다.22

 

다만, 그러한 팽창의 이면에는 역시 초등교육의 의무제 실현과 마찬가지로 그늘이 존재했다. 중학무시험제 정책은 중학교 진학자의 급증에 대한 대비책 없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중학교의 교육여건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예컨대 학급당 학생 수의 변화를 보자. 중학무시험제 시행 직전인 1968년에 전국의 중학교에서 16,333개 학급에 1,013,494명이 재학하고 있어 학급당 학생 수는 60.9명으로 이미 국민학교 못지 않은 초과밀 학급이었다. 그런데 중학무시험제 실시 이후에 학급당 학생 수는 69년에 61.2명, 70년에 62.1명, 71년에 63.8명으로 갈수록 늘어나 1979년에는 36,460개 학급에 2,394,620명이 재학하여 65.7명으로 최고에 달했다. 요컨대 중학무시험제 시행으로 인해 교육여건은 훨씬 더 악화되었던 것이다.23

 

고등학교의 평준화 정책은 중학무시험제 정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전 준비는 충실했으나24 그렇다고 해서 교육여건이 결과적으로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고교평준화 정책 시행 직전인 1973년에는 전국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6,747학급에 411,106명이 재학하여 학급당 학생 수가 60.9명으로 최고에 달했는데 평준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74년에는 60.6명, 75년에는 59.8명, 76년에는 59.0명으로 미세하게 줄어드는데 그쳤고, 1980년이 되어도 전국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15,577학급에 932,605명이 재학하여 학급당 학생 수는 여전히 59.9명에 달했다. 후기 중등교육의 여건으로서는 매우 열악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중학교 및 고등학교로의 진학 희망자 및 진학자 급증은 평준화 정책 이후 교육비의 급등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 국고의 부담을 줄이면서 평준화 정책을 추진하다 보니 공납금은 계속 인상되었다. 중고등학교 공납금은 소득 증가분을 훨씬 앞질러 올라만 갔다. 1965년부터 1979년까지 12년간 중학교 공납금은 평균 4,320원에서 8만 6,800원으로 20배가 올랐고, 고등학교 공납금은 평균 5,760원에서 12만 8,000원으로 22배가 올랐다. 같은 기간에 국민소득이 8.5배 증가한 것보다 2배 이상 오른 것이다.”25

 

평준화 정책은 국민들의 교육열이 빚어낸 이른바 ‘입시지옥’ 문제에 대한 대응책으로 도입된 것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교육열을 더욱 가열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일본의 교육사회학자 아마노 이쿠오(天野郁夫)는 시험제도의 존재와 작동이 교육 포부의 ‘냉각’(cooling out) 혹은 ‘가열’(warming up) 기능을 발휘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본에서는: 인용자주] 일류대학을 목표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제1단계로 6년제 사립중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유리하다. ··· 사립중등학교를 목표로 격렬한 수험 경쟁이 펼쳐진다. 제2단계로 고교 진학 시에도 동일한 경쟁이 전개된다. ··· 이 두 단계의 수험 경쟁에 참가하는 아동들은 수험준비 공부를 하는 동시에 수험 산업이 행하는 모의시험을 반복하여 치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 결과는 컴퓨터로 처리되어 아동과 부모에게 통보된다. 아동과 부모는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아동 학력의 상대적 수준을 극히 정확하게 알게 된다. 예전에는 포부를 ‘가열’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시험 제도가 이제는 거꾸로 그것을 ‘냉각’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26

 

이런 지적은 수험 경쟁 자체를 일거에 없애버린 평준화 정책 이후 한국인의 교육열 가열을 설명하는 데 시사를 준다. 한국의 중등교육에서 선발 기능의 폐지 혹은 무력화는 바로 ‘교육열’―즉 아마노의 용어로 ‘포부’― 냉각 장치의 기능 부전 효과를 발휘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중등교육의 단기간 급격한 팽창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평준화 정책으로 인해 학생들이 추첨을 통해 학교로 배정되자 학교 현장에서 즉각 난점이 발생했다. 능력 분산의 정도가 매우 높은 이질적인 학생들이 한 학교에 모여 동일한 교사로부터 동일한 교육과정을 배우게 되는 현실이 학습지도 및 생활지도 상의 어려움을 야기했다. 더구나 입시를 통한 선발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 학교의 입학 시기로 미루어진 만큼, 중학무시험제 실시 이후에 고교 입시경쟁의 과열, 고교평준화 실시 이후에 대학입시경쟁의 과열이 불가피했다. 이런 상황에 처한 대부분의 학교는 학생들의 능력에 따라 학급을 달리 편성하여 가르치는 방식을 앞다투어 취하기 시작했다. 이 방식은 학생들을 우수생의 반과 열등생의 반으로 분반하는 방식이라는 의미로 당시에는 ‘우열반’으로 불리었다. 이 ‘우열반’이라는 용어가 언론에 최초로 출현한 것은 1969년 2월, 즉 중학무시험제 실시와 정확히 같은 시기였다.27

 

중학무시험제 이전에도 일선 학교에서 우열반과 유사한 학급 편성이 존재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우열반’으로 명명되고 더구나 언론에서 사회문제화로 다루어진 것은 중학무시험제 정책 도입 이후라는 점이 중요하다. ‘우열반’이라는 명칭 자체가 학생들을 우수반과 열등반으로 나눈다는 의미여서, 자의와는 다르게 ‘열등반’으로 분류된 학생과 그 학부모들의 심리적 반발과 저항을 부를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리고 당연히 ‘우열반’ 도입과 동시에 그에 대한 학부모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서울시교위는 우열반 편성에 대해 ‘교육상 좋지 못하다’면서도 당장은 다른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28 이듬해인 1970년에는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우열반 편성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29 중학교 현장에서 횡행하게 된 우열반 편성 시에 우수반에 들기 위해 국민학교 고학년 학생들이 영어와 수학 등 중학교 교육과정에 대한 과외수업을 받는 일까지 문제시되었다.30

 

피교육자의 적성에 적합한 개별화된 교육방식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는 능력별 학급편성이 이렇게 터부시된 이유는 “교육적 견지에서 우열반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고교입시에 합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다시 말해 학교의 명예를 높이고 새로운 명문교를 낳기 위한 목적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31에 있었다. 중학무시험제 실시 2년 후인 1971년 3월 당시 서울시내 169개 중학교 중 우열반을 편성하지 않은 학교가 2~3교에 불과할 정도로 우열반이 급속도로 광범하게 확산되어 갔다.32 이에 대해 문교부는 묵인하거나 때로는 금지 방침을 형식적으로 반복하여 표명하다가, 또 한때는 종래의 우열반 개념과는 다른 ‘학생능력별에 의한 학급편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승인하는 입장33을 취하기도 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그리고 우열반 문제는 고교평준화 정책 도입 이후에도 장을 바꾸어 고질적으로 계속되었다. 예컨대 1977년 4월 조사에 의하면, 서울의 경우, 50개 인문계 남자사립고교 중 80%인 40개교가 우열반을 두고 있다34는 보고가 있을 정도였다.

 

우열반에 대한 문교부의 갈팡질팡하는 대응이나 애매한 입장의 배후에는 학부모들의 여론이 작용하고 있었다. 상당수의 학부모들이 우열반에 반대했던 것이다. “‘열반’ 학생들이 가지는 열등의식은 누가 책임지겠는가. … 같은 학부모이면서도 누구는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것이다”35 라는 이유에서였다. ‘우반’에서 배제된 다수의 학생과 학부모들이 보이는 이런 반발은 우열반 편성이 노력이나 선택의 결과가 전혀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욱 강했다. 즉 “당초 노력의 대가로 진학했다면 열반도 감수하겠지만 같이 배정받은 마당에 다시 우열로 나뉘어 차별 대우시키는 게 평준화냐”는 것이었다.36 능력별 학습 집단 편성은 평준화 정책 이후에는 ‘우열반’으로 부정적인 맥락에서 규정되었고, 그것이 ‘차별 대우’이므로 ‘평준화’ 원리에 반한다는 이유로 반발을 초래했다. 이러한 여론이 대세가 되어 가자 문교부는 결국 다시 1977년에 전국적으로 우열반 편성을 전면 금지하는 보다 강력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런 우열반 편성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식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를 확인해 보자. 평준화 정책이 실시된 지 10여 년이 지난 시기인 1986년 조사에서는 능력별 반편성에 대하여 일반인은 전체 341명 중 55.3%가 찬성 의견(그와는 별개로 학부모는 전체 543명 중 42.6%가 찬성 의견)을 보인 데 반하여 교원은 전체 528명 중 55.8%가 찬성 의견을 보였다.37 그런데 그로부터 8년 후인 1994년 조사에서는 능력별 반편성에 대하여는 일반인은 전체 1,515명 중 34.6%가 찬성 의견을 보인 데 반하여 교원은 전체 1,577명 중 49.7%가 찬성 의견을 보였다.38 능력별 반편성에 대해서는 일반인이나 학부모에 비해 교원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찬성하는 의견을 보이고 있지만, 동시에 시간이 흐를수록 우열반으로 불리는 능력별 반편성에 대한 반감이 확대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고교평준화 정책에 대한 여론 조사 결과를 보자. 1987년 조사에 따르면 일반인은 전체 1,069명 중 26.4%가 폐지, 10.6%가 현행 유지, 32.2%가 확대 의견, 그리고 학부모는 전체 1,186명 중 13.0%가 폐지, 8.7%가 현행 유지, 54.6%가 확대 의견을 보인 데 반해, 교원은 전체 1,069명 중에서 38.4%가 폐지, 7.9%가 현행 유지, 26.4%가 확대 의견을 보였다.39 그로부터 7년 후인 1994년 조사에 따르면 일반인은 전체 1,524명 중 27.7%가 폐지 혹은 축소, 22.7%가 현행 유지, 49.6%가 확대 의견을 보인 데 반해, 교원은 전체 1,578명 중에서 43.5%가 폐지 혹은 축소, 21.4%가 현행 유지, 35.2%가 확대 의견을 보였다.40 또 그로부터 5년 후인 1999년 조사에 따르면 일반인은 전체 1,500여명 중 23.5%가 폐지 혹은 축소, 20.9%가 현행 유지, 55.6%가 확대 의견을 보였다.41 즉 일반인의 경우 평준화 정책에 대한 찬성과 지지 경향이 32.2%→49.6%→55.6%로 시간이 흐를수록 강화됨을 알 수 있다. 한편, 평준화 정책에 대해 교원은 일반인이나 학부모보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점도 알 수 있는데, 이는 평준화 정책 이전에 비해 급격하게 이질화된 학생 집단을 여전히 과밀한 학급 단위로 가르칠 수밖에 없게 된 교원들의 난점을 보여준다.

 

이상의 조사 결과는 평준화 정책의 실시 이후 대중들 사이에 학교교육에서의 차별과 평등에 대한 독특한 인식이 성립하고 그것이 점차 확산되어 갔음을 방증한다. 우열반에 대한 반대 여론과 평준화 정책에 대한 지지 여론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열반은 명문학교 폐지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형식의 학교 내 ‘작은 명문학교’로 인식되어 반발을 불렀을 것이고, 같은 인식이 학교 단위로 존재했던 이른바 ‘큰 우열반’으로서의 명문학교를 폐지한 평준화 정책에 대한 지지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일단 국가에 의해 위로부터 만들어진 평준화 체제가 그 이후의 교육을 경험한 대중들의 인식을 통해 유지되고 재생산되어 간 것이다.

 

그 인식이 어떤 특질을 지닌 것인지를 좀 더 따져보자. 여기서 참조가 될 만한 것은 일본의 교육사회학자 가리야 다케히코(苅谷剛彦)의 이른바 ‘능력주의적 차별 교육론’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능력(주의)에 따라 다르게 제공되는 교육을 차별 교육으로 간주하는 관점’을 의미한다. 그는 일본의 경우 1960년대 이후에 “학력에 따라 서열화하고, 성적에 따라 다르게 처우하는 것은 ‘차별’이며 ‘나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이미 ‘상식’의 일부가 되어 있다”42는 현상을 문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서구에서는 계급이나 인종·민족 등 ‘사회적 범주’의 차이에 따른 부당한 대우를 ‘차별’로 간주하지만 개인의 능력차에 따라 대우를 달리 하는 것을 ‘차별’로 보는 논의는 거의 없다.43 그런데 일본에서는 “교육에서 서열 상으로 하위에 위치하는 아동들의 차별감을 문제 삼아 그것을 없애야 한다고 보는 시각, 나아가 차별감을 일으키는 교육을 ‘차별’ 교육으로 간주하는 시각”44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능력주의적 차별 교육관’은 차별감을 일으키지 않는 ‘획일적 평등화’를 추구하는 지향을 낳게 될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교육 기회를 부여하려는 지향을 강화하고, 나아가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의 범계층적 확산을 의미하는 ‘업적주의의 대중화’, 그리고 누구에게나 동일한 기준에 따른 공평한 선발 형식의 추구를 유발한다고 그는 덧붙인다.

 

이상과 같은 가리야의 ‘능력주의적 차별 교육관’ 개념은 평준화 정책 이후에 강화된 우열반에 대한 한국 대중의 반감에도 적용될 수 있다. 물론 이 관점이 일본에서 대중적으로 확산된 원인이 한국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의 경우는 일본교직원조합의 독특한 ‘교육 평등관’이 이 개념의 확산에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이 관점의 확산은 정부의 평준화 정책의 영향으로 보는 편이 옳다. 정부가 이런 교육관을 확산시킬 목적으로 평준화 정책을 구상하고 집행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준화 정책은 결과적으로 대중들 사이에 이런 교육관을 확산시켰고, 그것이 이번에는 다시금 여론으로 결집되어 평준화 정책의 지속을 요구하는 압력으로 작용하는 과정이 전개되었다. 정치민주화 이후의 대통령선거에서 각 후보들의 공약 중에 고교평준화 정책 관련 내용이 포함되는 것은 이 점을 뚜렷이 보여준다.45

 

한편 평준화 정책은 학교차의 근절을 의도한 것인 만큼 그것은 이전까지 학교별로 독특하게 형성되어 왔던 문화·학생문화의 변용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평준화 정책 이전에는 학생 구성의 차이, 학교 전통의 차이에서 비롯된 현격한 학교차가 존재했다. 예컨대 1962년 서울중·고등학교는 자기 학교 학생들의 평균 IQ 검사점수가 128.65인데 이는 같은 해의 서울대학교 학생 평균 125.5보다 높다고 자찬46할 정도였고, 한편, 경기고등학교의 학교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목도 볼 수 있다. “··· 본교는 이 해에[1961년: 인용자주]에 가장 수치스러운 경험을 해야 했다. 그것은 전년도만 해도 서울대학교에 335명의 합격자를 내고, 전체의 수석, 두 단과대학의 수석 합격자를 내어 그런대로 체모를 유지는 했었지만, 이 해에는 329명의 합격자만 냈을 뿐 수석 합격자는 단 1명도 없었다는 사실이다.”47 단일한 고교가 한 해에 300명이 넘는 서울대 합격자를 배출하고도 수석 합격자가 그 해에 없었다는 이유로 ‘가장 수치스러운 경험’으로 학교사에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긍심에 바탕을 둔 학교문화를 만들어 낸 요인을 학생 구성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 내적인 요인으로 이른바 ‘전설적인’ 교장이나 ‘베스트’ 교사진도 작용했다. 예컨대 서울고등학교에 대한 다음 회고 자료는 이들 요인의 강력함을 잘 보여준다.

 

그때 선생님들은 교장선생님께서[창립초기의 김원규 교장] 직접 모셔왔는데 당시 서울 등지에서 고명하신 분 또 이북에서 반공 투쟁하시다 월남하신 선생님들, 정말 그때의 교사진이라는 건 ‘베스트’의 ‘베스트’였습니다. ··· 시시한 대학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48

 

초창기 서울중·고교 교사들 중에는 평준화 정책 이후라면 불가능할 정도로 오랜 기간 근속한 교사들이 적지 않았으며 그들이 서울고의 이른바 전통을 만들어내고 전승시키는 주된 주체였다.49

 

그러나 이렇게 카리스마를 지닌 교장과 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전통’은 평준화 정책 이후 유지될 수 없었다. 문교부는 학교차를 줄이기 위해 교원의 정기 전보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평준화 정책 이후 교사들은 4년 혹은 5년마다 정기적으로 다른 학교로 전보되는 단기적, 임시적 존재가 되어 더 이상 학교문화의 계승자가 되기 어려웠다.

 

학교의 고유한 문화를 근절하려는 시도가 국가에 의해 노골적으로 추진되기도 했다. 중학무시험제 발표 이후 권오병 문교부장관은 각 중학교의 아이덴티티의 상징인 교복과 교모를 통일하고, 교모에 다는 모표를 똑같이 ‘中’자로 통일하라고 지시했다.50 고교의 경우, 고교평준화 정책 이후에 교복과 교모의 통일 조치는 취해지지 않아 각 학교별로 고유한 교복 착용은 허용되었지만, 대신에 1968년 이후에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군사훈련 교과 즉 ‘교련’이 도입되면서 이른바 ‘교련복’이라는 군복에 준하는 제복이 획일적으로 채용되었다. 이런 조치들은 학교별로 만들어진 학교·학생문화의 고유성을 급격하게 무너뜨렸다.

 

한편, 평준화 정책 이후 중등학교 학생운동의 양상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 시대, 삼일운동의 전위에 중등학생들이 나섰던 것이나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으로 대표되듯이 중등학교 학생운동에는 오랜 역사적 전통이 있었고, 이는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 절정은 1960년 4·19 혁명이다. 4·19 혁명은 같은 해 초인 2월 28일 대구의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에서 발단하여 그것이 전국의 주요 고등학교로 확산되면서 혁명적인 규모로까지 성장한 것이었다. 경북고등학교 교지에 실린 다음 회고를 보자.

 

4월혁명의 발상지는 경고[경북고등학교: 인용자주]인 것이다. 2월 28일 경고 학생들이 학원의 자유와 민주 수호를 절규하고 봉화를 든 것이 발단이다. ··· 과연 경북고등(구 대구고보)은 민족사에 빛나는 두 개의 대혁명을 선구한 희귀한 학교다. 경북은 경북고등을 가졌다는 명예를 천하에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51

 

경북고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명문 고등학교의 문화가 고교 학생운동의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고교생의 학생운동은 5·16 군사정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63년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는 거의 모든 고등학교에서 일어났다.52 또 1967년에는 전국적인 부정선거 규탄 시위로 인해 219개 고교에 휴교령이 내려질 정도였다.53 1969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영구집권을 위한 삼선개헌 시도가 드러나자 이에 대한 반대 시위가 상당수의 고등학교에서 일어났으며, 경기고등학교의 경우는 삼선개헌 반대 시위로 17일간 학교가 휴업 처분을 받기도 했다.54 심지어 유신체제 하인 1974년에도 광주제일고교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경기고에서는 유신철폐를 주장하는 유인물이 배포되기도 했다.55 이상과 같은 고등학교 학생운동의 배경에는 ‘학교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작동했으며 이는 이른바 ‘명문’학교의 학생일수록 강했다.56 따라서 고교 학생운동은 학교 간의 위신 경쟁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평준화 정책 이후에는 고등학생의 의식이 급속히 탈정치화되면서, 학생운동은 고등학교의 학생문화에서 거의 소멸되었다. “유신체제 전까지 고등학교 교지에서는 학생들의 다양하고 비판적인 견해들이 확인된다. 그러나 유신체제 수립 이후 교지에서는 학생들의 정부, 사회, 그리고 학교에 대한 비판을 찾기 어렵다. 반면 1975년 학도호국단이 설치된 이후 후반기로 갈수록 학도호국단 운영 소감이나 교련 검열 소감, 자매부대 입소 경험담이 늘어났다.”57

 

일제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지닌 중등 학생운동은 그것이 ‘학교’ 단위로 전개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달리 말해 자신이 속한 학교에 대한 공속 감정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아이덴티티가 시대적인 과제에 대한 책임의식과 결합하여 학생운동으로 발현되었다는 뜻이다. 그러한 학생운동의 기반 자체가 평준화로 인해 와해되었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국가주의적·전체주의적 교육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학습자 측의 주체적인 저항 가능성이 그만큼 약화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총체적으로 볼 때, 평준화 체제는 국가주의 교육의 확산과 순조로운 실현을 위한 학교문화의 균질화 및 학생 의식의 획일화의 토대가 되었다. 평준화 정책 이전까지 나름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온 특유의 학교문화는 계속 유지되지 못했고, 학생들은 자신이 우연하게 속하게 된 고등학교에 대해 공속 감정을 느끼기 어렵게 되었으며 고유한 아이덴티티 형성의 기회도 크게 상실했다. 이렇게 균질화된 의식과 문화라는 지반 위에서 국민교육헌장 발포와 동질적인 국가주의적 아이덴티티 형성 교육이 전개되었다.

 

끝으로 평준화 정책이 사회 평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 일본의 연구자 아리타 신(有田伸)은 평준화 정책이 ‘교육 기회의 형식적 평등화’ 정책이고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저렴한 비용으로 이행할 수 있는 ‘분배의 평등화’ 정책이었다고 해석한다.

 

‘선성장, 후분배’라는 슬로건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당시의 정권은 경제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했으며 분배문제 해결을 위해 충분한 정책을 이행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등교육의 입시제도와 학교체계의 개혁을 통한 ‘교육 기회의 형식적 평등화’는 당시의 박 정권에게는 매우 낮은 비용으로, 그리고 경제개발이라는 최우선 과제와 마찰 없이 이행할 수 있는 ‘분배의 평등화’ 정책이었다.58

 

즉 평준화 정책은 단순히 입시제도의 변화를 통한 교육 기회의 평등화를 넘어서서 사회적인 분배의 평등화를 의도적으로 추구한 정책이었다는 평가다. 그런데 여기서 정책의 ‘의도’와 ‘결과’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과연 ‘평등’이 평준화 정책이 애초에 추구했던 의도 혹은 이념이었을까. 일단 평준화 정책의 의도 차원에서 뚜렷이 확인되는 것은 사회문제화된 입시지옥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입시 선발 자체의 철폐라는 것이었다. 평등과 관련되는 측면은 오로지 학생의 무작위적 배정을 통한 학교차의 축소, 그리고 그를 위한 사후적인 보강 조치로서의 교사의 정기 전보 및 예산 배분 조정이었을 뿐이다. 본래적 의미의 교육 기회 평등과 관련되는 쟁점, 즉 교육 기회의 배분이 학생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같은 계층 요인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이 문제로 간주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이 모색되는 과정은 부재했다.59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모두에게 동일하게 추첨의 기회를 부여한다는 의미에서의 균등이기는 해도 교육 기회에서의 계층적 불평등의 시정을 추구한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평준화 정책이 어떤 평등 개념이 전제로 깔려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해도, 그것은 앞서 말한 능력주의적 차별 교육관이 전제하는 독특하고 제한된 의미의 평등 개념에 가깝다. 능력의 차이에 따라 학생들을 학교별로 혹은 학급별로 분류하는 방식은 차별감을 주기 때문에 그것을 폐지하는 것이 평등이라고 하는 관점 말이다. 평준화 정책은 평등을 명시적인 이념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정책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적으로 불만의 초점이 되던 과열된 입시경쟁에 대한 ‘대증요법적’ 차원의 급진적인 정치적 대응 정책, 바꿔 말하면 포퓰리즘적인 정책이었다. 평준화 정책이 집행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차별감을 유발할 수 있는 우열반 같은 주제가 뜨겁게 쟁점이 되기는 했지만, 사회경제적 배경과 같은 계층 요인이나 성별 차이와 같은 귀속 요인에 의해 야기될 수 있는 학력 격차 문제 등이 평등 관련 이슈로 부각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편, 평준화 정책의 현실화가 단지 정치권력에 의한 위로부터의 강제를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일반 대중의 교육재정 부담 의지와 선택이 평준화 정책의 실현을 가능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건이었다. 그리고 대중들은 대체로 평준화 정책에 지지를 보냈다. 그들은 평준화 정책을 자제들이 입시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기회의 제공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경쟁 기회가 열리는 것으로도 받아들였다. 따라서 특정 교육 단계의 입시경쟁이 약화되는 동시에 그것이 보다 상위 단계의 입시경쟁을 강화시켰다. 이는 평준화 정책을 구상하고 집행한 국가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대중의 교육 관련 선택과 행위가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아래로부터의 요인은 국가의 정책 의도와는 다른 방향의 교육적, 사회적인 사태를 초래하는 식으로 작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 선발 체제의 특질 형성과 관련하여 평준화 정책의 영향을 보다 총체적으로 포착해 보자. 한국의 선발 체제가 지닌 특징에 대해 아리타 신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입론을 제시한 바 있다.

 

각기 독자적인 정책 의도에 기반한 특징적인 중등·고등교육정책으로 인해 한국의 선발시스템은 ‘대학 진학 단계 집중형·국가관리형·일원적 선발’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선발시스템의 특징은 196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명확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후에도 약간의 변동을 거치면서 기본적으로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 유지되고 있다.60

 

그가 말하는 대학 진학 단계 집중형, 국가관리형, 일원적 선발이라는 한국형 선발제도의 특징을 만들어낸 가장 핵심적인 요인 중 하나는 의심할 바 없이 평준화 정책이었다. 그에 따르면 평준화 정책은 한국의 선발 시스템에 다음과 같은 특질을 부여했다. 즉 “한국 사회에는 ‘적령인구 집단의 대부분이 경쟁에 참가하여 동일한 학력시험을 치르고 그 결과가 명확한 형태로 서열화된다’고 하는 근사한 선발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 ‘개인의 교육 달성은 본인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결정된다’는 업적주의적 교육달성관을 더욱 침투시키는 결과가 된 것으로 보인다.”61 한국인 대부분이 학력 경쟁에 참여하며 그 서열화된 결과가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어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는 선발 시스템이 만들어졌다는 명제는 달리 말하면 학력 획득 경쟁의 결과에 따라 사회적인 지위 배분이 결정된다고 하는 믿음이 한국인들 대부분에게 공유되는 사회, ‘교육열의 사회’가 형성되었다는 의미다. 요컨대 평준화 정책이 한국 교육과 사회의 특질을 창출해낸 핵심 요인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교육정책은 평준화의 이름으로 기존의 입시를 폐지한다고 하는 ‘소극적’인 조치에 그치지 않았다. 동시에 1960년대와는 달리 국민들을 대상으로 보다 ‘적극적’인 교육적 ‘공세’에 나섰다. ‘중학무시험제’ 정책이 발표되던 1968년 말에 ‘대통령 박정희’의 이름으로 교육장전 즉 「국민교육헌장」이 발포되었다. 그것은 이후 1970년대에 ‘평준화된’ 중학교와 고등학교만 아니라 ‘의무화된’ 국민학교 교육의 내실을 결정짓는 가장 강력하고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를 계기로 형성된 ‘국민교육헌장 체제’는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오랜 기간 ‘평준화 체제’와 함께 한국 교육의 중추를 구성하는 기둥으로 작용하게 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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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김병옥 (2006),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부장관 48인論」, 『新東亞』, 6月, 東亞日報社, 239-240쪽.
  2. 「學校群制 學校의 格差를 없애고 入試地獄 勉케 한다는」 『京鄕新聞』 1966.9.3.(3).
  3. 金子養正 (1992), 「高校入試制度の變遷と問題點」, 門脇厚司·飯田浩之(編), 『高等学校の社会史』, 東京: 東信堂, pp.141-168.
  4. 國民敎育硏究所, 木下春雄(編) (1988), 『高校入試制度の改革』, 東京: 勞動旬報社, p.173.
  5. 伊藤正次 (1997), 「公立高等學校入學者選拔政策の比較分析」, 『本郷法政紀要』, 6, 東京大學大學院法學政治學硏究科, pp.63-94.
  6. 1968년 당시 전국의 중학생 1,013,494명 중 사립중학생은 510,016명이었고, 1973년도 서울시내 고교생 150,586명 중 사립고교생은 122,330명이었다. 『文敎統計年報』 1968년과 1973년에 의함.
  7. 1967년 당시 보건사회부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서울 국민학교 6학년생의 20%, 5학년생의 15%가 습관성불면증이나 구토 증상을 일으키는 10여 종의 각성제를 복용하며 과외공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될 정도였다(「中毒性覺醒劑 상습濫用」 『東亞日報』 1967.10.31.(7).).
  8. 「高官감투 벗긴 끈덕진 무우즙」 『東亞日報』 1965.6.30.(3).
  9. 「말썽이 된 입시문제」 『東亞日報』 1968.3.30.(7).
  10. 「爆彈宣言이 있기까지」 『京鄕新聞』 1968.7.17.(6).
  11. 韓國敎育三十年編纂委員會 (1980), 『韓國敎育三十年』, 文敎部, 119쪽.
  12. 韓國敎育三十年編纂委員會 (1980), 『韓國敎育三十年』, 文敎部, 120-122쪽.
  13. 「弊習 (24) 과외 過熱」 『東亞日報』 1972.8.14.(6).
  14. 閔寬植 (1993), 「고교평준화조치―내가 경기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다」, 월간조선(편), 『한국현대사 119대사건―체험기와 특종사진』, 조선일보사, 206-207쪽.
  15. 「社說 入試改革의 基調는 民族生存을 위한 敎育의 開發ㆍ伸張에 있어야 한다」 『京鄕新聞』 1973.1.24.(2).
  16. 韓國敎育三十年編纂委員會 (1980), 『韓國敎育三十年』, 文敎部, 123쪽.
  17. 韓國敎育三十年編纂委員會 (1980), 『韓國敎育三十年』, 文敎部, 126-127쪽.
  18. 「高校平準化 5年 (2) 새명문의 등장」 『東亞日報』 1978.2.3.(3).
  19. 金鍾喆 (1979), 「平準化교육과 엘리뜨敎育」, 『新東亞』, 5月, 東亞日報社, 227쪽.
  20. 「發言權强化된 疎外與黨」 『京鄕新聞』 1968.7.24.(2).
  21. 경제기획원조사통계국 (1982), 『한국의 사회지표 1982』, 경제기획원, 114-115쪽.
  22. 門脇厚司, 飯田浩之(編) (1992), 『高等学校の社会史』, 東京: 東信堂, p.104. 중학교 졸업자 중에서 고교로 진학하는 학생의 비율인 고등학교 진학률은 학령인구 중에서 취학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인 취학률 자체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 시기 일본의 중학교는 의무교육제였으므로, 취학률과 진학률 사이에는 큰 차이는 없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23. 이상의 진학률 및 학급당 학생 수 수치는 각년도의 『문교통계연보』에 의거했다.
  24. 권오병 장관이 취임 후 두달도 되지 않아 중학무시험제 정책을 발표한 것에 비하면, 민관식 장관은 1971년 6월 4일 취임한 이후 2년이 지난 1973년 6월 28일에 고교평준화 정책을 발표했고, 그 기간만큼 정책 준비와 검토가 가능했다.
  25. 이기훈 (2018), 『무한경쟁의 수레바퀴―1960, 1970년대 학교와 학생』, 서해문집, 95-96쪽.
  26. 天野郁夫 (1996), 『日本の敎育システム―構造と變動』,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pp.63-64.
  27. 「中學 신입생 生活指導」 『東亞日報』 1969.2.20.(7).
  28. 「신입생 지도방안 논의」 『京鄕新聞』 1969.3.12.(8).
  29. 국회본회의, 『국회회의록』, 7대, 73회, 7차, 1970.5.19.
  30. 「國校生에 變則課外」 『東亞日報』 1971.2.4.(7).
  31. 「社說 高校入試出題 개선문제와 중학교 優劣班 是非」 『京鄕新聞』 1971.2.26.(2).
  32. 「中學 優劣班편성 是非」 『東亞日報』 1971.3.3.(5).
  33. 「文敎部 中學優劣班 편성 양성화」 『京鄕新聞』 1972.4.19.(7).
  34. 「고교 優劣班是非」 『朝鮮日報』 1977.4.20.(4).
  35. 「均等교육 원칙 벗어나」 『朝鮮日報』 1977.4.20.(4).
  36. 「高校平準化5年 (4) 優劣班시비」 『東亞日報』 1978.2.7.(3).
  37. 裵天雄 외 (1986), 『韓國人의 敎育觀 分析』, 硏究報告RR86-15, 한국교육개발원, 113쪽.
  38. 김영화 외 (1994), 『한국인의 교육의식 조사 연구』, 연구보고RR94-08, 한국교육개발원, 171쪽.
  39. 全慶甲 외 (1987), 『敎育에 대한 國民意識 調査』, 硏究報告RR87-8, 韓國敎育開發院, 112쪽. 고교평준화 정책에 대한 이 조사에서는 폐지, 현행유지, 확대 외에 ‘시·도교육위원회 재량에 맡김’이라는 선택지도 설문지에 포함되어 있었다.
  40. 김영화 외 (1994), 『한국인의 교육의식 조사 연구』, 연구보고RR94-08, 한국교육개발원, 171쪽.
  41. 성기선 외 (1999), 『한국교육개발원 교육여론 조사』, 연구보고RR99-5, 한국교육개발원, 15쪽.
  42. 가리야 다케히코 (2023), 오성철(역), 『대중교육사회의 형성』, 학지사[苅谷剛彦 (1995), 『大衆敎育社會のゆくえ―學歷主義と平等神話の戰後史』, 中公新書, 東京: 中央公論新社], 150쪽.
  43. 가리야 다케히코 (2023), 오성철(역), 『대중교육사회의 형성』, 학지사[苅谷剛彦 (1995), 『大衆敎育社會のゆくえ―學歷主義と平等神話の戰後史』, 中公新書, 東京: 中央公論新社], 153쪽.
  44. 가리야 다케히코 (2023), 오성철(역), 『대중교육사회의 형성』, 학지사[苅谷剛彦 (1995), 『大衆敎育社會のゆくえ―學歷主義と平等神話の戰後史』, 中公新書, 東京: 中央公論新社], 158-159쪽.
  45. 당시의 대통령선거 후보 중에서 권영길 후보는 전면강화, 노무현 후보는 유지, 이회창 후보는 점차적 완화, 정몽준 후보는 폐지 등의 서로 다른 공약을 내걸었다(「갈림길에 선 평준화 정책」 『중앙일보』 2002.12.17.).
  46. 편집부 (1962), 「정신적 바탕」, 『경희』, 제12집, 서울중·고등학교, 88-96쪽.
  47. 京畿高等學校七十年史編纂會 (1970), 『京畿七十年史』, 京畿高等學校同窓會, 239쪽.
  48. 우남용 외 (1961), 「좌담회 형제는 경희를 이렇게 키웠다」, 『경희』, 제11집, 서울중·고등학교, 121쪽.
  49. 편집부 (1960), 「경희학원을 키운 옛스승들」, 『경희』, 10집, 서울중·고등학교, 129-132쪽.
  50. 「中學 校服·校帽·帽標통일」 『東亞日報』 1968.8.2.(3).
  51. 김은경 (2018), 『학생문화사―해방에서 4월혁명까지』, 서해문집, 365쪽에서 재인용.
  52. 이기훈 (2018), 『무한경쟁의 수레바퀴―1960, 1970년대 학교와 학생』, 서해문집, 259쪽.
  53. 李在五 (1984), 『해방후 한국 학생운동사-1945년부터 1979년까지』, 253-254쪽.
  54. 京畿高等學校七十年史編纂會 (1970), 『京畿七十年史』, 京畿高等學校同窓會, 247-248쪽.
  55. 이기훈 (2018), 『무한경쟁의 수레바퀴―1960, 1970년대 학교와 학생』, 서해문집, 260-261쪽.
  56. 김은경 (2018), 『학생문화사―해방에서 4월혁명까지』, 서해문집, 363-364쪽.
  57. 허은 (2016), 「유신시대 학교와 학생의 일상사」, 오제연 외, 『한국현대생활문화사 1970년대』, 창비, 33-59쪽.
  58. 有田伸 (2006), 『韓国の敎育と社会階層―学歴社会への実証的アプローチ』,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p.90.
  59. 다만, 평준화정책의 성격과 관련된 민관식의 다음 발언은 확인할 수 있다. “일류고교를 존속시키는 것이 엘리트교육을 위해 목전의 효과는 있을 수 있으나 최근 20년간 세칭 일류고교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가정환경을 면밀히 검토해 보았다면 머리가 좋아서 일류고교에 들어가는 것은 옛이야기이고 과외공부를 얼마나 많은 교육비를 투입하여 시켜왔느냐, 또한 얼마나 학생을 효과적으로 암기를 시킬 수 있었느냐는 것이 일류고교의 입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그때 그일들 (273) 閔寬植 (21) 文敎長官시절 개탄할 入試病弊」 『東亞日報』 1976.11.24.(5).). 그런데 이것이 고교평준화 정책의 애초 의도로 작용한 인식인지 아니면 사후에 그 정책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맥락에서 동원된 언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책 구상 단계에서 이에 상응하는 인식의 예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후자에 가깝다.
  60. 有田伸 (2006), 『韓国の敎育と社会階層―学歴社会への実証的アプローチ』,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p.86.
  61. 有田伸 (2006), 『韓国の敎育と社会階層―学歴社会への実証的アプローチ』,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p.296.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식민교육사 및 교육역사사회학, 동아시아근대교육의 비교사회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교육과학사, 2000),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서해문집, 2018), 역서로는 야나기 하루오의 『학급의 역사학』(교육을바꾸는책, 2026), 가리야 다케히코의 『대중교육사회의 형성』(학지사, 2023), 고마고메 다케시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공역, 역사비평사,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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