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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스승의 날 특집] 어느 교사의 교권(敎權) 연대기

#1056 전종옥, 양서중학교 교장 2024.05.14
“교권은 그 사회가 인정하고 합의한 명시적 또는 암묵적 사회 계약이기에 완료형이 아니라 늘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교권에 관한 문제 제기나 논의가 생산적이고 지속 가능한 것이 되려면 어떤 방향이어야 하겠는가?” (본문 발췌)

 

 

퀴즈 하나 풀고 시작하자. 국민 모두가 첨예한 이해 당사자로서 모두가 전문가를 자처하는 분야는 무엇일까? 그렇다, 교육(입시)이다. 이토록 국민의 관심과 이해 수준이 높다면, 어떤 교육 문제든 척척 해결할 수 있어야겠지만 현실은 정반대인 걸 어찌하랴. 이 절묘한 아이러니! 그중 하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권’이다.

 

최근 1년간 언론에 오르내린 교권 관련 기사 헤드라인 몇 개를 보자.

 

교권 추락에 교대 합격점 급락…수능 6등급도 합격
교대생 51% “서이초 교사 사건 이후 진로 고민”
”교권침해로 교실붕괴“…‘학생인권조례’로 번진 논란
”서울 교육 목표는 공동체 학교…존경·존중·협력 필요”

 

‘교권 추락’으로 세상이 뒤숭숭하더니, 급기야는 교사가 되겠다는 이들이 줄어들었다. 한때 부러움의 시선을 받으며 교대에 들어간 이들 절반 이상이 진로를 고민한다. 교권 침해가 심각한 상황인데, 이를 학생인권조례 탓으로 돌리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학교의 공동체성 회복과 존중과 협력이 중요하다는 의견 또한 제기된다.

 

 

‘교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람들이 생각하고 이해하는 ‘교권’의 의미는 제각각이다. 그래서 표준국어대사전의 도움을 빌려보니, ‘교권(敎權)’을 교사로서 지니는 권위나 권력이라고 풀이한다. 교사가 지니거나 인정을 받는다는 권위는 그렇다 쳐도, ‘권력’이라는 단어는 학교 현장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교사의 권리나 권한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기도 한다. 요컨대, 교권은 교사의 권리, 권한, 권위에 관한 문제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먼저, 권리의 문제부터 짚어보자. 권리는 기본적으로 수평적이고 평등하다. 직위와 신분 고하와 관계없이 누구나 보장받아야 할 자격이다. 교사나 학생이라고 하여 행복할 권리, 안전한 환경에서 일하고 배울 권리에 차등을 두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헌법에 ‘모든 국민은 ~’으로 시작하는 조문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그런 까닭이다.

 

우리 헌법은 교사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하고 있을까? 우리 헌법에서는 교육 영역의 특성에 기인한 조항과 일정한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다는 노동자의 보편성에 기초한 조항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

 

제31조 4항에서는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선언해 두었다. 국회가 입법을 통해 법률로 보장하라는 것이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내가 교사로 일한 지난 30여 년 동안 일부 개선이 되기도 했다. 교육의 자주성은 교육감이 임명직에서 선출직으로 바뀌고, 국가 교육과정-국정교과서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던 학교 교육과정이 학교별 또는 교사별 교육과정과 검·인정 교과서로 다양해지면서 제법 달라졌다. 하지만, 교사의 전문성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할 뿐 학교 안팎에서 숱하게 침해를 받고 있으며, 정치적 중립성은 민주국가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교사의 피선거권 제한과 정당 활동 금지라는 뚱딴지같은 모습으로 둔갑한 현실이다.

 

또, 제33조 2항에서는 ‘공무원인 근로자는 법률이 정하는 자에 한하여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라고 하여, 제한적으로나마 법적 근거를 마련해 놓았다. 하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하여 1,500명이 넘는 교사들을 교단에서 거리로 쫓아내고, 감옥에 가두기까지 한 적이 있다. 교사 노동자의 단결권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던 지난날에 이어, 지금도 교사들의 단체행동권을 전혀 보장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며, 이것이 교사 권리의 현주소이다.

 

이어, 교사의 권한 측면을 살펴보자. 흔히, 권한은 어떤 사람이나 기관의 권리나 권력이 미치는 범위, 영향력이라고 말한다. 즉, 권한은 권리, 권력이 있어야 발생하는 것으로서, 흔히 교사는 교육과정 편성권, 수업권, 평가권과 징계권을 가진다고 한다. 이때 교육과정 편성권은 교육기본법 제2조에서 표명한 교육이념1을 달성하기 위하여 어떤 교육과정을 운영할 것인가에 관한 권한이다. 또 수업권과 평가권은 수업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권한과 학생들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권한이다. 이 권한이 어떻게 변화해 왔고, 교권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자.

 

이제 마지막으로 권위의 측면에서 교권의 문제를 살펴보자. 권위란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과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한다.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권위주의’와는 달리, ‘권위’는 상대의 인정과 존중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대체로 권위가 미치는 영향력의 범위는 학생으로 제한되지만, 그 학생의 뒤에는 성인 보호자가 있기 마련이고 현재의 학생들도 머잖아 성인이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범위를 더 넓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만, 권위의 속성이 인정과 존중을 기반으로 하는 점을 고려할 때, 교사의 권위라는 측면의 교권은 학교 공동체에 직접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구성원은 물론이고, 그 외곽의 사회 구성원과의 지속적 상호작용을 통하여 살펴보아야 할 문제가 된다. 따라서, 권위 측면의 교권은 교사의 권리나 권한과는 달리 명문화가 쉽지 않다.

 

이상이 대강 살펴본 교권의 여러 측면이다. 물론, 이 셋이 교권에 관한 모든 것일 리 없으며, 또 여기에서처럼 셋이 하나하나 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 나눠 살폈음을 충분히 감안해 주시리라 믿는다.

 

 

지난 50년, 교권에 무슨 일이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교직을 시작했다. 평교사로 35년을 보내다 불과 2년 전에 교장 공모에 지원하여 2년째 교장 일을 하고 있다.

 

잠시, 내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이어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로 가 보자. 그땐 사실 교권이라는 말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엔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수직적으로 아름답게(?) 정렬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도 교장·감을 정점으로 교사들까지 위아래가 분명했으니, 교사와 학생 사이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선생님 말씀은 학교에선 적어도 법률 수준의 효력을 발휘했고, 크고 작은 학생의 잘못은 교칙을 적용할 것도 없이 대개 체벌로 바로잡아졌다. 사랑의 매는 양반이었고, 손발을 사용한 체벌도 달게 받았다. 정말 특별한 부모를 둔 아이(흔히 ‘빽’이 좋다고 표현되는 아이)가 아니라면, 학교에서 체벌을 받았다며 집에 가서 고해바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진 않았다. 괜시리, 집에서 매를 더 벌 각오가 아니라면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교권은 적어도 학교(교실)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군림했다. 그 누구도 딴죽을 걸지 않았다. 교사의 권리가 1987년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권한과 권위만은 당당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교사가 된 직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교사의 손에는 사랑의 매, 또는 ‘정신봉’이 들려 있었고, 그것이 곧 교권의 상징이기도 했다. 체벌을 목격해도 동료 교사는 물론이요, 교장·감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고, 가끔 어떤 학부모는 체벌 안하는 교사를 인기 영합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숙제를 해 오지 않거나 자잘한 규칙을 어기면 손바닥이나 엉덩이를 내줘야 했고, 간혹 시험 점수가 낮아도 몽둥이 찜질을 당했다. 학생의 본분인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교사의 ‘정당한’ 교육적 지도를 받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계인권선언이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건 1948년이었건만 ‘학생 인권’은 아직 생경한 단어였고, 권한과 권위를 앞세운 교권은 기세가 등등했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했을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으로 교사의 권위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퍼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까지 교사는 특정 분야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상대적으로 많이 소유한 집단이었고, 지식 중심의 사회에서는 그 비대칭, 불균형에 따라 자연스레 권위와 복종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 아날로그가 대세였던 시대, 교과서 중심의 수업을 제공하고 평가권을 거머쥔 교사와 학교에 맞서는 데에는 직접적 불이익과 사회적 낙인을 감수하는 남다른 각오가 필요했다. 교권, 특히 교사의 권한과 권위에 도전장을 내미는 이들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다.

 

20세기 후반, 21세기 초반에 접어들면서 급속한 변화의 조짐이 일어났다. 인터넷의 급속한 확산으로 세계는 한순간에 어디든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교실과 교사들을 통하지 않고도 지식과 정보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접하고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이를 흔히 ‘유비쿼터스(ubiquitous)’라 했다. 또, 독재 권력에 맞서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을 내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합법화로 교사의 권리에 진전이 있었고, 정보의 편중, 독점적 제공을 기반으로 한 교사의 권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입에 올리기 꺼리던 체벌 문제가 전면적으로 제기되었고, 강제 야간자율학습, 두발 규제, 화장 금지 등과 같은 개인의 자율권, 선택권도 수면 위로 올라와 공론장의 치열한 논쟁을 거쳤다. 교사의 일방적인 권한은 하나둘 적정 수준을 찾아갔고, 지식 중심의 권위는 새로운 권위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교실 붕괴, 교권 추락, 교육 포기와 같은 극단적인 말을 쏟아냈지만, 다른 쪽에서는 민주적 학교, 시민교육, 학생 자치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러한 변화의 여파는 이른바 민주시민교육 시대를 선포한 ‘진보교육감’의 대거 당선과 7개 시도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 제정으로 이어졌다. 그 대표격인 서울학생인권조례2는 2012년 서울시의회에서 제정된 조례로, 학생의 기본적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학교 내에서의 차별 금지, 학생 참여권 보장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이러한 정책적 변화를 바탕으로 학교 현장은 공동체 중심의 학교 운영, 학생 중심 수업, 자율과 책임의 학교자치로 빠르게 자리를 잡아나갔다. 교사만이 아니라 학생, 학부모의 목소리가 더 커졌고, 지시, 전달 위주의 일방통행은 설 자리를 잃었다. 신학년도 준비 집중연수, 토론이 있는 교직원 회의, 전학년 공개토론회 등과 같은 숙의 문화가 하나둘 자리를 잡았다. 수업도 교과서 중심에서 교육과정과 성취기준 중심, 삶과 연계한 교육과정 운영, 제시하는 교육과정에서 만들어 가는 교육과정으로 변화하며 결과보다는 과정, 성과보다는 학생의 배움과 성장을 중시하는 교육 흐름이 대세가 되었다.

 

물론, 부작용이나 시행착오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커진 학생, 학부모의 목소리가 공동체 질서의 훼손, 과도한 민원, 제 자식 감싸기로 흐르기도 했다. 숙의와 토론 문화는 우왕좌왕과 우유부단으로 비칠 때도 있었다. 배움과 성장을 중시하는 교육과정 운영은 반복적 문제 풀이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현 입시제도와 양립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방향이 잘못된 것과 가는 도중의 부작용, 시행착오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방향이 올바르다면, 우여곡절을 겪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원하는 항구에 닿을 수 있다. 비록, 교사의 권리 차원의 진전을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교사의 권한을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와 적절히 배분하고 조정하는 중이다. 지식 중심, 강요된 권위를 하나둘 내려놓고, 존중하고 배려하며 합의하는 권위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그러던 중, 지난해 여러 교사가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사건이 있었다. 유사한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표면화되지 않다가 이번 일로 마침내 폭발했다. 전국의 교사들은 여의도, 광화문 등에 모여 10차례 이상 추모와 항의 집회를 열고, 책임 있는 대책을 요구했다. 그 원인은 대체로 학부모의 과도한 민원과 교육의 사법화와 관련이 깊었다.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을 헌법에만 적어놓고 이를 법률 등으로 제대로 뒷받침하지 않아 벌어진 예견된 인재였다. 지난 50년, 교사의 권리, 권한, 권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으며, 이에 우리는 어떤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지 신중한 논의와 숙고가 필요한 시점을 맞이했다. 시급히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했기에 교사 집단 내에서는 그에 관한 요구가 빗발쳤건만, 이를 엉뚱하게 학생인권조례 탓으로 돌리는 이들도 나타났다. 난데없이 그 상황을 ‘교권 붕괴’ 한마디로 진단하고, 학생인권조례 폐지라는 극약 처방을 내던졌다. 그들이 교권을 다루는 방식을 보자.

 

 

학생인권조례 폐기해 교권 확립?3

 

서울시의회는 교육위원회 소속 김혜영 국민의힘 의원(광진4)이 대표 발의한 ‘서울특별시교육청 학교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조례안’이 26일 본회의를 최종 통과했다고 30일 밝혔다.

 

그간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성적(性的) 지향·성별 정체성 등을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포함한 것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휴식권, 사생활의 자유 등 특정 권리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견제 장치가 미비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김 의원은 현행 학생인권조례가 부작용과 폐단을 촉발했다고 보고 교육부가 마련한 학생인권조례 대체 조례 예시안을 모델로 이번 조례안을 입안했다.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되면 교권이 올라가고, 갑질 학부모가 사라지고, 학생들은 예의를 배우게 될까? 요즘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주로 학생인권조례 때문일까? 이 질문이 유의미한 것이 되려면 학생인권조례에 교권 침해나 갈등을 유발할 만한 조항이 제법 있어야 할 터. 교사가 학생의 성적 지향을 알아내고, 제대로 휴식 시간을 보장하지 않고, 머리 색깔이나 꾸미기, 휴대전화 사용 등에 있어 학생 의견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교권이라는 것인가? 교사들이 그것 때문에 힘들었고, 그걸 원한다고? 이는 우리 교사의 수준을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이다.

 

학생인권조례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뿐이다. 보호자를 동원하거나 교사에게 무분별하게 대드는 학생을 위한 게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설 땅을 없애는 제도이다. 뒷배경이 없는 가장 약한 자, 그래서 억울한 이를 위해 존재하는 보호막이다. 지금은 조례를 없애는 게 아니라, 악용을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조례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학교 현장을 교권과 학생 인권이 충돌하는 각축장으로 보고 싶은 모양이다. 학교 폭력이나 교사에게 대드는 학생의 행동은 학생 인권을 경시하는 학교에서 훨씬 빈번하게 일어난다.

 

교육부 발표에 따르면, 2023년 유·초·중등 학생 수가 무려 5,783,612명이다. 이들이 보내는 하루하루가 크고 작은 일이 전혀 없이 지나가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신체적, 정서적, 지적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의 아이들 578만 명을 모아놓은 곳에서 일어나는 소수의 불협화음, 일탈행동으로 교권이 붕괴되고 있다는 주장을 내놓다니. 그런 논리라면 그보다도 훨씬 심각한 일로 나날이 뉴스 도배가 되는 대한민국은 진작에 망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평소 교사의 권리나 권한, 권위에 별 관심도 없던 이들이 뜬금없이 교권을 지켜주겠답시고 가장 발언권 약한 학생들을 희생양으로 지목하고 나섰다. 평소 아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배우고 성장하는지 제대로 지켜보거나, 교사와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왔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정말 그렇게도 교권에 관심이 많다면,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인 어른들의 문제를 건드려야 한다. 현재, 학교 교육의 어려움은 학생들보다는 일부 무분별한 보호자나 그들을 부추기는 사법 시스템으로 인한 경우가 훨씬 심각하다.

 

 

교권, 학생인권과 함께 걸어가야

 

교사들이 바라는 교권은 학생에게 마음껏 물리력이나 강제를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애꿎은 학생의 권리, 이를테면 학생인권조례와 같은 함께 공존, 동행해야 할 대상을 골라 드잡이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법적 권리와 거기서부터 나오는 권한, 그리고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가 인정하고 존중하는 권위를 바탕으로 더디더라도 한 발짝씩 나아가야 한다.

 

“친구가 될 수 없는 자는 스승이 될 수 없고, 스승이 될 수 없는 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 중국 명나라의 양명학자 이탁오의 말이다. 무슨 뜻일까? 교사인 나는 앞 문장에 더 주목했다. 스승이 되고 싶다면, 먼저 그들의 친구가 되라는 말. 진정한 교권은 그 언저리에 있을 것이다.

 

21세기 초,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휩쓸던 때 ‘고객 만족’이란 말이 유행했었다. 그 말이 학교로 들어와서는 교사는 주요 고객인 학생, 학부모가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둔갑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학생이 교사를 선택하게 하자거나, ‘명품 교사’와 ‘명품 학교’를 정해 학부모와 학생들의 존경심을 유발하고 나아가 학교와 교사 선택권을 늘리는 등 수요자 중심의 공교육을 실현하자는 움직임도 일었다. 선택의 자유라는 교묘한 논리를 내세워 교육을 쇼핑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교육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려 시도한 적도 있다.

 

“그런 ‘자유’에 휩쓸리면, 시민이 고객화되는 거예요. 고객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나 자유가 아니라 구매력이에요. 구매력만 있으면 돼요. 학교와 학생·학부모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잖아요. 주체성, 비판성, 연대성을 찾을 이유가 없어요. 자문해 봐야 해요. 우리는 민주시민인가, 고객인가.”

 

이는 얼마 전, 세상을 뜬 홍세화 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권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우린 고객이 아니라, 시민(친구)이 되어야 한다는 그 말.

 

일방적인 지시와 전달, 수직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교사들만의 합의로 만든 틀 안에서 아이들이 뛰놀기를 바라는 교권이라면 하루빨리 무너져야 마땅하다. 진정한 교권은 학교 공동체 구성원 각자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비판, 연대를 주고받는 것이어야 한다. 만고불변의 무엇일 필요도 없다. 어딘가는 무너지고, 그곳에서 또 새로운 배움과 변화가 일어나는, 그렇게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며 날로 나날이 새로워지는 교권이어야 한다.

 

 

교권 논의가 생산적이고 지속가능 하려면

 

교권은 그 사회가 인정하고 합의한 명시적 또는 암묵적 사회 계약이기에 완료형이 아니라 늘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교권에 관한 문제 제기나 논의가 생산적이고 지속 가능한 것이 되려면 어떤 방향이어야 하겠는가? 아무래도 구조에 관한 논의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먼저,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교사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협소한 해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 EP)는 의원 705명 중 약 80-100명(13-15%)이 교사 출신4이다. 이는 유럽의회 의원 중 두 번째로 큰 직업군으로, 법조인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체 300명의 국회의원 중 불과 한두 명으로, 1%에도 못 미치는 우리와는 딴판이다. 교육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룰 교육 전문가가 대표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왜 우리는 교육 문제를 비전문가인 국회의원에게 가져가서 자료를 제공하고, 이해와 설득을 구하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가? 다른 소수 집단(대표적으로 법조계와 의료계)은 인구수 대비 비율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대표자를 국회로 보내 자신들의 이해를 탐욕적으로 대변함에도 불구하고, 교육계는 최소한의 통로조차도 막아놓았다. 정말 교권 보호에 관심이 있다면, 가장 먼저 교원의 피선거권 제한과 정당 활동의 전면적 금지부터 풀어야 하지 않을까?

 

다음으로, 새로운 권위가 필요하다. 교사는 더 이상 더 많이 알고, 더 잘하는 사람일 수 없다. 그리고 내가 해마다 교실에서 만나는 이들이 하나같이 나보다 더 모르고, 못하는 아이들로만 채워진다는 것 역시 가능하지도 않고, 교사 자신을 위해서도 몹시 불행한 일이다. 지식 폭발의 시대인 현재에 자신이 지닌 지식의 양과 질로 교사의 권위가 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2030 학습나침반에 따르면, 지금은 배움을 통해 성공(success)이 아니라, 좋은 삶(Well-being)을 추구하는 시대다. 학생들은 교사만이 아니라 동료학습자, 지역사회의 지원과 협력 아래 각자의 학습나침반을 들고 행위주체성(student agency)을 길러나갈 것이다. 이제 교사는 ‘teacher’보다는 ‘coach’ 또는 ‘guide’, ‘planner’의 역할을 잘 해내는 게 중요하다. 교사의 권위에도 변화가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억지와 무리를 범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을 거쳐 교사 권리의 회복과 권위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이를 바탕으로 우리 시대에 맞는 권한의 범위와 영향력을 제도화할 수 있게 될 테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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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교육기본법 제2조(교육이념) :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2. 서울특별시 학생인권조례 (조례 제7888호)
    https://dgedu.sen.go.kr/CMS/support/support0703/support070302/1327248_6428.html
  3. 박우영 기자(뉴스1, 2024.4.30.) https://www.news1.kr/articles/?5401416
  4. 김누리 칼럼, 노예가 자유인을 기를 수 없다, 한겨레신문, 2022.5.31.
양서중학교 교장 전종옥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35년 동안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선생님과 함께 가는 고전 소설 여행』(공저), 『선생님과 함께 가는 현대 소설 여행』(공저) 등의 책을 썼으며,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세계문학) 서평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양서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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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1. 방정희 수정 삭제

    글을 읽는 내내 고개가 끄득여지고 중간중간 멈추고 생각하게 됩니다. 교사의 역할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2. 꼬치미 수정 삭제

    # 학생인권조례 있는 지역이 없는 곳보다 학교폭력 적었다
    https://blog.naver.com/hanuinuri/223593557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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