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 과정 중 빠뜨리지 않아야 할 것 : 선택하기, 생각의 과정 밟기
| “천천히 배우는 아이들도 배움 과정 중에 꼭 기르고 다져가야 할 것들이 있다.” /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생각하는 배움 과정을 꾸리려면, 교사가 먼저 가르칠 것을 준비하기 이전에 충실한 학습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 발췌) |
‘천천히 배우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를 고민할 때 자칫 그 시선이 단편적인 지식이나 이슈화된 영역에만 치우칠 수가 있다. 한글 해독, 사칙연산, 주의력, 이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중요한 것, 근본적인 것을 빠뜨릴 때가 있다. 이 아이들 또한 하나하나 겪으면서 배워야 하는 것들을 간과한 채로.
글자를 읽고 셈을 하게 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글자를 읽으며 삶을 더 풍성하게 가꾸고 글을 통해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며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고, 셈을 생활에 적용하며 합리적인 삶을 영위하고 논리적인 사고 과정을 익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러하기에 글과 셈을 배우기 위한 궁극적인 목적, 본질은 어디론가 내버리고 도구적인 측면에만 매진하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천천히 배우는 아이들도 배움 과정 중에 꼭 기르고 다져가야 할 것들이 있다. 마냥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절로 깨칠 수 없는 것들, 그러나 이 아이들의 특성으로 인해 곧잘 놓쳐버리고 마는 것들이……. 그 중 ‘선택하기’와 ‘생각의 과정 밟기’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흔히들 삶은 선택의 연속1이라고 한다. 작은 선택들이 모여 행동과 습관을 이루고 생활의 품격을 형성한다. 또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발을 떼느냐에 따라 생이 꼴 짓게 된다. 잘 선택하는 능력은 그만큼 중요하다. 선택은 주도성이나 동기, 책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천천히 배우는 아이들은 대집단 안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대개 선택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빠르고 능력 있는 아이들에 의해서 선택의 순간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은 스스로 선택하기보다는 남이 선택한 결과를 넘겨받는다. 아이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과제를 수행하게 할 목적으로 교사가 먼저 완료한 아이들에게 후속 활동의 어떤 요소를 선택할 기회를 부여한다고 하자.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오랜 시간을 요하는 아이들은 직접 선택하기보다 ‘남은 자투리’를 갖게 된다. 모둠 활동 안에서도 빠른 판단력을 가지고 결정하는 아이들에 의해 배정된 역할을 ‘떠맡고’ 다른 아이들이 선택한 결과에 ‘따라간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활동 안에서 주도적이기 어렵고 동기도 낮고 책임감도 떨어진다.
한편 천천히 배우는 아이들은 생각의 과정보다는 생각의 결과만을 강요받을 때가 많다. 자기 속도에 맞추어 차분차분 생각할 겨를 없이 제한된 시간 안에 산출물을 내기 위하여 베껴 쓰기라도 할 것을 권유받기 십상이다. 답안을 베껴 쓰고 친구의 글을 베껴 쓴다. 왜 이렇게 계산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이전에 그저 알고리즘을 외우는 데에 급급한 처지에 이른다.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면서, 아이와 일대일로 함께 하는 시간에 어떻게 하면 선택의 요소, 생각의 과정이 좀 더 살아있는 배움의 과정을 꾸릴 수 있을까 이리저리 따져 살피게 된다. 주어진 시간은 짧지만, 이때에라도 아이가 좀 더 선택하고 작은 것 하나라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선택의 힘을 기르다
내가 보통 아이들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기간은 1년 정도이다. 그 정도 시간이 흐르면 아이의 힘이 부쩍 자라서 지원을 종료할 때도 있고, 해가 바뀌어 새로운 선생님에게 연결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때로 어떤 상황들에 의해서 2~3년 길게 아이와 연을 이어갈 때도 있는데, 그런 아이 중 한 명이 해나(가명)다. 이 아이는 또래보다 작은 편이고 동글동글한 인상 탓에 5학년이지만 여전히 귀엽다. 내 눈의 콩깍지 탓일 수도 있지만. 해나는 내가 연을 맺고 있는 아이들 중에서도 이런저런 어려움이 적지 않은 친구다. 경계선보다 낮은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고, 발음이 부정확하며 탁성이어서 어릴 땐 아이의 말에 되묻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부모님의 역할이 미미하고, 실제 해나의 양육에 힘써온 사람은 해나의 이모이다.
방학이 끝나고 9월 첫 주, 해나를 다시 만났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고 근 두 달 만에 만난 터였다. 감정카드를 매개로 그동안의 생활을 서로 나누기로 했는데, 해나는 ‘설레다’ ‘속상하다’ ‘즐겁다’ ‘만족하다’ 카드를 선택했고, 이야기를 들려줄 첫 번째 카드로 ‘설레다’를 내놓았다. 아이는 카드를 보여주며 “2학기가 되면 어떤 공부 할지”라고 이 카드를 고른 이유를 설명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2학기에 어떤 공부를 하게 됐냐고 물으니 “사회, 역사”란다. 해나는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지난 1학기에 나와 만나는 시간에도 한 꼭지의 공부 주제를 역사로 정했더랬다. 알고 싶은 위인들을 서너 명 고르고 책으로 알아보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수업 시간에도 역사를 공부하니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생활을 나누고 이번 학기 이 시간에는 어떤 공부를 할지 의논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책 읽기, 『따스함』2, 단어 공부, 쓰기 공부’, 이 네 가지를 하나하나 떠올려가며 말했다. 지난 1학기 말, 다음 학기에 공부하고 싶은 것을 써 놓았는데, 그때 말한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큰 덩어리를 정한 다음, 세부 과정을 하나씩 결정해 나갔다. 첫째, 읽을 책의 주제를 ‘식물, 풀’로 결정하고 도감이나 인터넷 자료를 읽기 자료로 삼기로 했다. 둘째, 교재 『따스함』 중 읽을 부분과 순서를 정했다. 셋째, 단어 공부를 위한 책을 살펴보며 현재 잘 알고 있는 단어와 그렇지 않은 단어를 구분하고, 새로 익힐 단어와 차례를 정했다. 넷째, 기존에 쓰기 공부하던 교재가 얼마 남지 않아 새로운 교재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선택은 처음에 계획을 세울 때뿐만 아니라 계획을 실행해나가는 중에도 계속된다. 내 선택과 아이의 선택이 상호 존중되면서 배움 과정 가운데 꾸준히 일어나야 한다. 앞서 해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2학기 배움 계획의 틀을 세우고 난 뒤 일주일이 지나고 두 번째 날을 맞이했다. 함께 공부하기로 했던 것 네 가지를 점검하고 오늘은 어떤 순서로 공부할지 해나에게 물었다. 아이가 ‘『따스함』, 쓰기공부, 책 읽기, 단어 공부’ 순으로 하겠다고 해서 『따스함』을 꺼냈다. 이 시간에 어느 장을 읽을지는 이미 앞 주에 정한 터였다. 그런데 해나는 막상 글을 찾아 펼치더니 바꾸면 안 되냐고 물었다. 예전 상황에 비추어보면, 본문이 약간 길어서 부담을 느낀 것 같았다. 나도 순간 고민했다. ‘이유를 들어보고 타당하면 바꿀까, 하지만 그랬다가 아이가 자신의 선택을 가벼이 여기거나 소홀히 하면 어쩌지. 선택에 따른 책임을 느끼고 선택할 때 좀더 신중할 수 있도록 정한 것을 따르게 할까.’ 이에 대해 아이와 나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합의하는 시간을 거쳤다.
선택하기는 소소한 것들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아이는 그날그날 배울 거리의 순서나 글을 읽는 횟수, 글을 읽는 방식을 정할 수 있다. 색연필이나 색지의 색깔, 스티커의 종류 등 교육 자료를 선택할 수도 있다. 학습게임을 할 때면 어떤 방식으로 선후를 가를지를, 지금 우리의 상황에 맞게 어떻게 규칙을 바꾸어볼지도 생각해 보고 자신의 선택을 적용할 수 있다.
생각의 과정을 밟아 나가다
선혜(가명)는 수줍음이 많은 듯하면서도 잘 웃고 성실하게 만남을 이어가는 6학년 아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수용하는 스타일이라 선혜를 만날 때면 감정적으로 씨름할 일이 없어 나 또한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한다. 하지만 저학년 때 아버지의 폭력을 경험했던 터라 마음에 상처가 남아 있기도 하고, 다문화 가정에서 자라 어휘력이 부족하고 그런 만큼 이해가 더디다.
선혜와는 담임 선생님의 요청에 따라 수학 영역을 중심으로 배움 과정을 꾸려나가고 있다. 작년에는 기본 수개념과 사칙연산을 다루었다. 연초에 선혜는 ‘200에서 40이 늘어난 수’를 “이백 사”라 말하고, ‘1119의 다음 수’를 “이천”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곱셈 과정 중에도 더하기를 해야 할 때 빼기를 하거나, 뺄셈 과정에 곱셈 알고리즘을 적용하기도 했다. 문장제 문제를 풀 땐, 문장을 읽고 사칙연산 중 무엇을 적용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각각의 수·기호의 의미와 수학적 상황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형식만 익혔기에 방학을 지내고 나니 외웠던 과정들이 뒤죽박죽 섞여버린 것이다.
선혜와 만날 때는 수모형이나 연결큐브, 에그블록 같은 구체물을 사용하고 답과 풀이 과정을 자기 입말로 설명하도록 했다. 9월 즈음 되었을 때 선혜는 ‘45×36’이라는 수식을 보고 “‘45’는 십모형이 네 개 있고 일모형이 5개 있는 거예요. ‘곱하기 36’은 이런 게 36묶음이 있다는 뜻입니다.”라고 설명할 수 있었고 45×6, 45×30을 각각 구하고 더해서 바른 답을 구할 수 있었다.
다음은 2022년 ○월 ○일 선혜와 공부했던 과정을 기록한 것 중 일부이다.
| 1. 기호의 의미를 자기 입말로 설명하기
1) + : “모두 합해질 때”라고 함. 또 다른 경우를 물으니 “더 많아질 때”라고 함.
2. 같은 수로 이루어진 사칙연산 문제를 계산하고 연결큐브로 설명하기 1) 68+4 : “68이 있는데 연결큐브 4개가 더 있어서, 그래서 72가 됩니다.”라고 설명함. 세로셈 계산 과정 중 60 위에 쓴 숫자 1의 의미가 연결큐브에서 무엇인지 물으니, 제일 왼쪽에 놓은 십막대 하나를 빼내며 가리킴(오류임). 8+4가 12가 되는 것, 낱개 10개가 모여 십막대 하나로 바뀌는 과정을 다시 익히고 스스로 표현해 보도록 함. |
올해는 선혜와 분수를 공부하고 있다. 분수는 선혜처럼 천천히 배우는 아이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수학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난관이다. 수학에서 분수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수포자가 생긴다고 한다. 분수를 익히기 위해 선혜와도 여러 번 종이를 자르고 모으고 모형을 분리하고 합치며 이야기 나누는 과정을 거쳤다. ‘기준이 되는 1이 어느 만큼인지’ 염두에 두는 것, 아무렇게나 나누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나누는 상황’이 전제라는 것을 익히는 데에만도 여러 시간이 들었다. 이번 학기 들어서부턴 분모가 같은 분수의 덧셈을 다루기 시작했다. 보통 ‘분모는 바뀌지 않고 분자만 더한다’는 공식을 외워 답을 구하게 되지만, 선혜와는 왜 그렇게 되는 것인지 도형 조각을 오리고 그림을 그려보며 분모가 같은 분수의 합이 실제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애썼다. 지금은 이런 경우 분모가 바뀌지 않는 이유를 “조각의 크기가 변하지 않으니까.”라고 스스로 설명할 수 있다.
가르치는 이가 먼저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생각하는 배움 과정을 꾸리려면, 교사가 먼저 가르칠 것을 준비하기 이전에 충실한 학습자가 되어야 한다. 아이가 배워야 할 개념과 원리를 명확하고 또렷이 이해하고 그것을 위한 배움의 절차들을 세세히 밟아나가 볼 필요가 있다. 정해진 교육과정을 수동적으로 잘 전달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학습자로서 배우며 판을 새롭게 짜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전에 정해놓을 것과 아이가 선택하게 할 것, 전수해야 할 것과 시간이 걸리더라도 아이가 생각해 보며 탐구해 나가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따져보아야 한다. 특히 천천히 배우는 아이들은 어휘력이나 구문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 학습의 전이나 일반화가 또래 아이들보다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배움의 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이해를 위한 각 단계를 더 잘게 쪼개야 할 때가 많다. 각 단계에서 어떤 발문이 필요할 것인지 다양하게 상상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준비가 끝나고 아이와 함께 할 때는 깨어 있는 정신으로 아이와 배움의 과정을 함께 호흡해야 한다. 그래야 선택과 생각의 과정이 단선적이지 않고 풍부해지며 조밀해질 수 있다. 아이가 진짜로 아는 것과 외워서 말하는 것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고, 섣불리 알려주기 전에 아이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돕는 디딤돌을 놓아줄 수 있다. 아이와 내가 알고자 하는 대상의 초점을 향해 나아가며, 내가 배우고 익힌 것과 아이가 깨우친 것이 공감을 이루고 함께 ‘아하!’하는 경험을 할 때, 배움의 순간은 생생하고 창조적으로 빛나고 아이와 나 모두 배우는 맛을 즐거이 누리게 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 우리나라에 퍼진 가짜 사르트르 명언 ‘인생은 BCD이다’(Life is C (Choice) between B (Birth) and D (Death))도 한 예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끊임없이 선택을 하며 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부 보고에 의하면 사람들은 놀랍게도 하루 평균 35,000번의 결정을 한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7시간 정도 잔다고 한다면 이는 시간당 약 2,000번, 매 2초마다 하나의 결정을 하는 것에 해당한다. (출처: https://www.psychologytoday.com/us/blog/stretching-theory/201809/how-many-decisions-do-we-make-each-day)
- 읽기 유창성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교재
현재 전라남도 장흥교육지원청 학습종합클리닉센터에서 학습심리상담사로 또래보다 천천히 학습 과정을 밟아가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