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상태여도 괜찮아
| 봄이와 여름이를 만나고 우리가 자주 던진 질문은 ‘고립 상태는 나쁜 것일까’였다. 우리는 고민 끝에 고립 상태 그 자체가 나쁜 것일 수도 있지만, 더 나쁜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
학교와 불화했던 청소년들과 만나다
청년 고립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뜨겁다. 최근 분당 서현역 사건이나 SNS에 올라오는 협박성 글들에 대한 반응으로 쉽게 ‘고립 청년이 문제’라는 답을 내놓는다. 문제가 생기면 재빨리 ‘나쁜 놈’을 찾아 그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리는 못된 버릇이 또 나왔다 싶으면서, 내 주위의 ‘고립화하고 있는 청소년’ 몇이 떠올랐다.
나는 현재 공간민들레라는 비인가 대안학교와 전환학년제 오디세이학교에서 청소년을 만나고 있다. 어쩌다 보니 학교 안팎의 청소년을 두루 만나고 있는 셈이다. 그 계기가 좀 엉뚱하다.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은 학교에서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 일종의 연구모임이자 교육담론 생산지였던 민들레출판사로, 25년 전에 한 열일곱 청소년이 찾아왔다. 교보문고에서 읽은 ‘학교가 문제’라는 책 구절을 나침반 삼아 무작정 출판사로 찾아온 것이다. 그 아이를 시작으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듯 무슨 말이든 하고 싶고 또 무슨 말이든 듣고 싶다는 청소년이 줄을 이었다. ‘출판사를 찾아온’ 청소년은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에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절실하게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출판사를 그 무언가를 찾아 나서도록 돕는 비상구로 생각했던 듯하다. 실제로 민들레출판사가 그럴 역량이나 자격도 없었지만 청소년의 발길이 이어졌으니, 그건 당시 그들의 목마름이나 문제의식을 해소할 또는 해결할 곳이 전무했던 탓이었다.
20여 년 전 민들레를 찾아온 청소년은 거의가 교육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왜 학교를 거부하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대거나 논리적으로 잘 말하지는 못했지만, 학교가 하라는 공부도, 그곳에서 이뤄지는 친구 관계도 싫다고 했다. 무엇보다 선생님들은 믿음이 안 가 의논은커녕 대화 자체가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를 탈출하고 싶지만, 그건 또 안 될 말이라 결국 자기가 문제라며 자학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무렵 학교와 불화하는 청소년들은 대부분 가족과의 격심한 갈등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부모들은 자녀가 털어놓는 거부감을 수용하거나 공감하기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나무라기 일쑤였다. “그것도 못 견디면 어떻게 사회생활 할래?” “어쨌든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는 가야지” 하며 학교 가기를 강권했다. 가까운 이들의 이런 태도는 학교를 거부하는 청소년들의 자기부정감을 더욱 강화시켜 학교도 집도 그 어디도 마음 둘 곳 없는 상태로 전전하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 ‘네 잘못이 아니고 학교라는 시스템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는 책 구절을 만났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지 짐작이 되기도 한다.
그 뒤로도 출판사를 찾아오는 청소년들이 꽤 있었고, 그들과는 체계적인 상담이나 학습과정은 없었지만 때때로 벌어지는 토론이나 대화로 나름의 정리를 하며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나름의 정리는 대충 이런 것이었다.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가 어떤 구조나 문화에서 시작되는지, 그 부조리나 결함과 맞닥뜨리는 개인은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어떻게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각자에게 맞는 해법을 혼자서 독방에서 찾지 말고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나 도움을 줄 어른들과 같이 찾아야 한다’ 였다. 그래서 민들레출판사는 공간민들레를 만들었다. 청소년을 둘러싼 문제적 환경이 어느 날 완벽하게 좋아질 리는 없으니 그 해법을 같이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고립되지 않고 연결되어야만 했다.
청소년의 ‘고립화’ 현상과 마주하다
고립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 자리에서 20여 년 전 구멍가게 같은 출판사를 찾아온 청소년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그야말로 강한 격세지감 때문이다. 당시 이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 일본의 사례를 공부하며 일본의 실천가나 활동단체를 만나기도 했는데, <부등교 아이들을 위한 부모 모임>이나 도쿄슈레 같은 곳이었다. 그때 일본의 활동가나 부모들의 가장 큰 고민이 히키코모리로, 우리식 말로 하면 은둔형 외톨이였다. 도무지 집 밖으로 안(못) 나가고 방에 틀어박혀 꼼짝 않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거리였다. 그러면서 한국은 어떤지 물어왔다. 그때 나는 대충 이렇게 답했다. “한국에는 히키코모리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집을 좋아하지 않고 집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청소년은 누구보다 부모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지금 우리는 가출 청소년이 문제지 집에 있는 것은 고민거리도 아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일본의 가정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도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괜찮은가보다 하고.
이때 내가 간과한 것은 지금 우리가 들여다보고 있는 ‘고립화’였다. 일본의 히키코모리 아동청소년은 물리적으로는 집이라는 가족 공간 안에 있어 다소 안전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관계 면에서는 사회와도 가족과도 고립되어 있어 대단히 위험한 상태였던 셈이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의 상황도 크게 달라졌다. 20년 전 일본의 부모나 활동가들이 던졌던 그 질문은 지금 우리들이 풀어야 하는 당면 과제가 되었다. 아동청소년의 고립화는 분명한 현상으로, 그 문제를 개인이나 각 가정을 넘어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문제를 풀기 위해 출판사를 물어물어 찾아오던 20여 년 전의 열정적인 청소년을 그 이후 나는 만나지 못했다. 10년 전부터는 대부분 부모가 먼저 민들레 문을 두드리고 이어서 청소년은 그 부모 손에 이끌려 민들레에 온다. 부모 손에 이끌려 민들레 구경을 한 청소년이 스스로 민들레를 선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점점 늘어났다. 금방 그 자리에서 결정하던 것이 이제는 일주일, 한 달, 서너 달이 걸리기도 한다.
고립상태여도 괜찮아
‘봄(가명)’은 고1 나이의 여학생이다. 초등 때부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친한 친구도 있고 했는데 5학년 때 어떤 일을 계기로 학교 등교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난 보호자는 백방으로 물색해 아이를 미국의 학교로 보냈다. 학교를 안 가는 상태를 인정하지 못했던 셈이다. 왜 안(못) 가려 하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해법을 찾아야 하는데, 학교를 안 가는 현상만 해결하면 문제가 없을 거라 착각한 것이다. 그 이후 봄이는 다들 자기에게 관심 없고 제 할 일만 하는, 초 6학년 아이가 느끼기에도 나름 편안하고 합리적인 미국의 학교에서 그냥저냥 지냈던 듯하다. 하지만 아이는 그곳에서 그 나이 때에 경험해야 하는 관계 맺기나 갈등 해소하기 등을 전혀 겪지 않고 중2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한국의 학교는 아이에게는 거의 맹수들이 활보하는 정글이었고, 2학기부터 학교를 거부하고 자기 방에서 나오기도 거부하는 상태가 되었다. 올해 2월에 아이의 어머니는 지인 추천으로 민들레를 찾았고, 그 이튿날 아이와 같이 만났다. 봄이는 그림 그리기를 즐기고 혼자서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영어 공부도 하고 SNS로 바깥세상을 만나기도 한다. 봄이는 나름 편안하고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한숨과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죄책감도 들고 이래선 안 되는 거지 하는 불안도 올라온다고 했다. 그런 아이가 느끼기에도 민들레는 따뜻해서 민들레에 소속되어 ‘고립화’를 풀어보기로 작정했다. 하루 나오고 일주일 쉬고 그러다 또 하루 나오고.. 여행 기간엔 쉬고… 이주일이 흐르고…, 애써 고립화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여전히 힘든 봄이다. 민들레는 어떻게 봄이를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며 새로운 질문을 갖게 되었다.
“고립 상태는 나쁜 것일까?”
‘여름(가명)’은 중1 나이의 남학생이다. 학교를 안 가고 집에서만 지낸 지 1년 정도 되었다. 평소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부모는 민들레에서 발간하는 교육잡지 <민들레> 구독자였다. 한창 친구들과 뛰어 놀아야 할 사내아이가 집에 틀어박혀 아무 것도 안 하고 빈둥거리는 게 속상하지만 그래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혼자서 집에서 할 수 있는 과제를 주기도 하고 책을 권하기도 하며 매일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하루였다. 여름은 중학생이 되어 입학식 하루 가더니 중학교도 안 가겠다고 했다. 어떡하지 하던 때 중학교 담임이 찾아왔다. 의무교육대상이라 학교에 나오지 않는 아동청소년이 어떻게 지내는지 조사 차 온 것이었다. 담임은 외부의 어디엔가 소속되어 뭐든 하고 있다는 증명을 하지 않으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학교에 나와 상황을 보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마는 그 핑계 삼아 아이를 외부 어디로든 연결하고 싶었던 터라 아이에게 민들레를 권했다. 두 살 위 동네 형이 민들레를 다니고 있어 민들레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했다. 엄마 손에 이끌려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한 여름이를 3월 말에 민들레에서 면담을 했다. 집에서 뭐하고 지내는지를 물었더니 음악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린다고 했다. 아버지에게 작곡을 배우고 있고 그림은 유투브 등을 보며 하고 있다고 한다. 더 잘하려면 더 좋은 컴퓨터가 필요한데 엄마가 사주지 않는다는 불만을 살짝 드러내기도 했다. 좋은 컴퓨터만 있으면 집에서 혼자 있는 게 크게 불편하지도 슬프지도 힘들지도 않아 보였다. 아이는 혼자서도 무언가를 배우고 있다고 했지만 엄마의 관찰 결과는 달랐다. 무기력하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릴 때만 조금 반짝하고, 컴퓨터를 사주면 게임을 더 본격적으로 할 거라는 걱정이 컸다. 민들레에 와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청소년을 보고는 조급증도 생겼다. 담임의 말이 걸려서 학교에 가는 건 싫으니 민들레라도 나가볼까 하는 마음이 살짝 든 아이와 외부 세계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엄마는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조정하는 것으로 협상을 끝내고 민들레에 나오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도 한참 동안 민들레에 나오려 하지 않자 엄마는 걱정스런 문자를 보내곤 했다. 여름이의 고립 상태는 나쁜 것일까?
봄이와 여름이를 만나고 우리가 자주 던진 질문은 ‘고립 상태는 나쁜 것일까’였다. 우리는 고민 끝에 고립 상태 그 자체가 나쁜 것일 수도 있지만, 더 나쁜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메시지는 당사자는 물론, 당사자 주변의 사람들로 하여금 죄책감이나 불안감, 두려움 등에 시달리게 하여 오히려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고립화를 더욱 심화시킬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고립화 상태에 있는 아동청소년 당사자는 누구보다 그 상태를 불안해하고 있고 벗어나고 싶어 할 것이다. 방법을 모르거나 그럴 여력이 안 되거나 연결될 세계를 만나지 못했거나, 부모가 사회와 고립되어 있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상태로 아예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그럼에도 본인 안에는 현재를 벗어나고자 하는 불씨가 아주 희미하게라도 살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꺼져가는 그 희미한 불씨를 살려낼 수 있을까에 집중하여 해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 열쇳말은 “고립 상태여도 괜찮아!”였다.
봄이와 여름이는 여전히 민들레를 잘 나오지 못한다. 나는 지금까지 궁리해 얻은 민들레의 생각을 보호자들과 공유하고, 봄이와는 괜찮으면 가끔 줌으로 만나자고 제안했다. 요즘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혹시 도와줄 건 없는지 등을 나누자고 했다. 일주일에 두 번 전체 교사와 봄이가 줌으로 만나고 또 한번은 봄이가 좀 더 편하게 생각하는 교사와 만나기로 했다.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지 않고, 그 상태에서 어떤 긍정적 감각이 생겨 그것을 딛고 민들레와 만나기를 희망하며 그 작업을 차근차근 해보려고 한다. 여름이는 머뭇거리다 하루 나와서 오전 활동을 하고 같이 점심도 먹고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갔다. 그것도 꽤 피곤했는지 그 담날은 힘들어서 못 오겠다고 빠지더니 그 담날은 와서 오전 활동을 하고 점심을 먹고 교사에게 집에 가고 싶다고 ‘고지하고’ 집으로 갔다.
줌으로든 잠깐이든… 봄이와 여름이가 경험했던 정글 외에 다른 세상도 있다는 것을 그 아이들의 속도나 상태에 맞춰 접속시켜 주기를 최선을 다해 하려고 한다. 그 이유를 막론하고 아동청소년이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걸 딛고 그 다음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한다. 지금은 줌으로 만나거나 아이의 상태를 긍정해 주는 메시지를 보내는 정도다. 무언가로 상처 입었을 그들의 ‘관계와 연결에 대한 욕구’를 복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부터 우선 시도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지향하는 탈학교 학습공동체인 <공간 민들레>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