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국제바칼로레아) 평가의 문제점과 대안

| “IB 도입에 대해 짚어보고 효과적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 “깊은 기억은 객관식 선다형 시험으로 기를 수 없는 데 동의한다” / “(IB 문제들을 통해 볼 때) 빈곤한 역사의식은 한국의 미래를 위태롭게 한다” (본문 발췌) |
이혜정 소장을 비롯한 IB 도입론자들은 “현 수능이 암기력 측정에 치우쳐 있으며 무엇보다도 정해진 답을 맞추면 고득점으로 보상해주기 때문에 학생 자신의 생각과 논리를 기를 기회를 잃게 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객관식 선다형 문제를 논리적으로 타당한 서술형·논술형 문항으로 바꾸고, 교차채점 시스템으로 평가의 신뢰성을 구축하면 비판적 창의적 사고를 기르면서 공정한 평가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시험의 형태를 서술형·논술형으로 바꾸자는 취지는 아니다. 그동안 한국에서도 서술형·논술형 고사를 치렀는데 출제자의 의도와 채점자의 기대를 예측해서 답안을 써야 하는 사실상 정답이 정해져 있었다고 본다. 즉 초·중·고나 논술고사에서 치렀던 서술형·논술형 시험은 또 다른 객관식 시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험으로 학생들 각자의 생각을 얼마나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제시했는지를 평가할 수 없었다. 하지만 IB시험은 매우 다르다. 외국을 보면 시험 시간을 몇 시간으로 하는지, 교과 및 과목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등의 세부 방안들에는 차이가 있으나, 시험 유형은 근본적으로 단순한 서술형·논술형 구성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도록 하는 구조였다.
깊은 기억은 객관식 선다형 시험으로 기를 수 없어
모든 학습은 뇌에서 이루어진다. 학습은 뇌의 사고 구조를 바꾸는 활동으로 어떤 과정이든, 기억을 전제로 인간의 뇌에서 일어난다. 기억은 부호화-저장-인출의 3단계로 이뤄진다. 즉 뇌가 기억할 수 있는 형태로 정보를 입력하고, 입력된 정보가 유지되며(박혀 있어야 하며), 필요할 때 끄집어내는 과정이다. 특히 인출은 중요하다. 뇌의 장기기억에 들어있던 정보를 다시 끄집어내는 인출은 뉴런의 시냅스를 지속 활성화하여 그 연결을 점차 강화한다. 즉 이 변화가 바로 작업기억에 놓인 단기기억을 시냅스를 공고화함으로써 장기기억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시험 등으로 외부로부터 들어온 정보를 장기기억에서 다시 끌어내는 인출은 학습에 필수적이다.
시험 효과란 인출의 인지 과정이 장기기억 형성을 촉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출은 크게 재인과 회상으로 나뉜다. 재인(再認)은 현재 접하는 정보들에 대한 일련의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전에 학습한 적이 있는지를 기억하는 것으로 그 정보가 익숙한지를 떠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회상(回想)은 단서 없이 스스로 기억에 저장된 정보를 끌어내는 과정으로 학습자가 깊고 정확하게 정보를 기억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답을 선택하는 객관식 선다형 시험은 재인을 요구하며, 서술형·논술형 시험은 회상을 요구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회상은 재인보다 더 많은 인지적 노력을 요구하므로 뇌의 활성화 정도도 더 크고 인출 난이도 또한 더 높다. 즉, 재인과 회상은 뇌 활성화를 비롯하여 본질적인 차이를 보이며 특정한 지식과 정보를 내면화하여 깊고 지속적인 기억으로 만드는데 회상이 재인보다 효과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재인이 회상보다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단서를 통해 기억을 떠올리는 능력 역시 필요하며 효과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위치정보, 자동화된 배열 등 표준화된 명백한 사실적 지식은 일일이 기억하기보다 단서를 통해 검색하는 방식(재인)이 뇌의 처리 부담을 줄이면서 문제해결에 효과적일 수 있다. 나아가 새로운 것을 처음 배울 때 학습자에게 인출의 중요성을 알려줄 수 있고 뇌에 인출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렇더라도 학습이 깊고 지속적인 기억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고, 이를 통해 뇌의 사고 구조를 바꾸는 신체적, 정신적 활동이라면 시험을 객관식 선다형 형태로 보는 것은 서술형·논술형에 비해 효율적이지는 않다. 그러므로 “우리 아이들에게 비판적 창의적 사고를 길러주기 위해 학교급이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시험을 객관식 선다형에서 서술형·논술형으로 바꿔야 한다.”라는 이혜정 소장을 비롯한 IB론자들의 지적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즉 학습 목표를 쉽고 빠르게 정보를 검색하는 수준에 둔다면 객관식 선다형 시험으로도 별 무리가 없지만 깊은 기억의 형성에 둔다면 객관식 선다형 시험으로는 역부족이다.
출제자의 의도나 채점자의 기대에 맞춰 답안을 작성하는 문제를 출제한 적이 없어
이혜정 소장을 비롯한 IB 도입론자들은 사실을 왜곡한다. 그들은 “그동안 한국에서도 서술형·논술형 고사를 치렀는데 이는 출제자의 의도와 채점자의 기대를 예측해서 답안을 쓰는 사실상 정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이다.”라고 말해왔다. 즉 초·중·고나 대입 논술시험에서 치렀던 서술형·논술형 시험은 또 다른 객관식 시험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학 입학시험에 논술고사를 도입해서 수십 년이 지났고, 특히 2005년 이후로 대입에서 논술고사의 비중이 높았던 2013년까지, 그 이후로는 대입전형에서 논술전형의 비중이 줄었지만, 현재까지의 출제경향을 보면 출제자의 주관적 의도와 채점자의 기대에 맞춘 문제는 단 하나도 없었으며 오직 고교 교육과정에 맞추어 비판적 사고를 평가하고자 했다. 즉 학생들에게 (a)문제를 인식하고, (b)문제를 해결할 적절한 수단을 찾고, (c)관련된 정보를 찾아 분류하고, (d)숨은 가정과 가치관을 파악하고, (e)언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f)자료를 해석하고, (g)증거를 판단하여, 주장을 평가하고, (h)정당한 결론을 도출하고, 일반화를 하며, (i)얻은 결론과 일반화를 적용해보고, (j)더 많은 경험에 근거해 믿음을 재구성하며, (k)일상에서 특정 문제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능력을 평가하려고 했다.
다음은 IB 국어 영역에서 출제되었던 시험 문제로서, 이는 학생들에게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작품을 주고 즉석에서 보고 해석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유형이다. 즉 신문 기사, 시, 소설, 편지글 등 지문을 읽고 푸는 문제이다.
(가), (나) 중 하나를 골라 문학적으로 해설하시오. (2시간)
| (가) 하나코, 그것은 그들만의 암호였다. 한 여자를 지칭하기 위한 그들 사이의 암호. 한 여자가 있었다. 물론 그 여자에게도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은 그들의 도시적 감성에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때문에 암호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나코 앞에서 그녀를 별명으로 부른 적도 없다. (……) 그들의 관심을 끈 것은 말이 없던 그녀보다는 가끔 재치 있는 농담도 하고, 모든 대화에서 오호! 하는 감탄사까지 유발시키는 발언을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할 줄 아는 하나코였다. 최윤 「하나코는 없다」
(나)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
첫째 지문은 최윤의 소설 <하나코는 없다>의 발췌문으로 1994년 이상 문학상 수상작이다. 워낙 유명한 소설의 한 부분을 발췌하였다. 둘째 지문은 비련의 시인으로 지금은 사라진 단성사에서 영화를 보다가 심근경색으로 요절한 전 중앙일보 기자였던 기형도의 시, <입속의 검은 잎>이다. 기형도 역시 시 애호가들에게 잊을 수 없는 작가이다. 이 문제를 풀려면 논제의 핵심어인 ‘문학적’, 그리고 ‘해설’의 의미를 명료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논리적으로 타당한 답안을 작성할 수 없다. 문학적이란 ‘문학과 관련된’ 이라는 뜻이다. 즉 ‘문학의 정의, 문학의 요소, 문학의 특성(본질), 문학의 기능 등과 관련지어’ 라는 뜻이다. 그리고 ‘해설하라’는 의미는 설명(해석), 즉 알기 쉽게 풀어 서술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가)를 선택한 학생은, (가)의 어느 부분이 소설의 요소, 소설의 특성(본질), 소설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으며, 나아가 이 지문을 통해 보여주려는 시사점(주제)이 무엇인지를 전제, 주장, 근거로 구성된 논증 틀을 바탕으로 명료한 개념과 유추·비유·예시·인용 등의 서술방식을 통해 논증해야 한다. 기형도의 시, <입속의 검은 잎>을 선택한 학생도 마찬가지이다. 시에서 어느 부분이 시적 요소, 시의 본질, 시의 기능을 보여주며, 시의 주제까지 논리적으로 추론해야 한다. 다시 설명하면 응시자는 (가), (나) 중에 무엇을 선택하든 임의적이지만 각 장르와 관련된 일반적 개념을 전제로 삼아, 주제를 추론하고, 그것이 왜 타당한지를 유추, 비유, 예시, 인용 등의 방법과 명료한 언어를 통해 밝혀야 한다.
다음은 이혜정 소장 등 IB도입론자들이 변형된 객관식 선다형 문제라고 비판한 한국의 대입 논술고사 중, 경희대학교 2022년 인문·체육계열 문제이다.
※ 다음 제시문을 읽고 논제에 답하시오.
| [가]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우리들은 모두
[나]
한국 사회에서 개인들은 자기 정체성이 희미한 가운데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비교하며 행복과 불행, 오만과 콤플렉스 사이의 왕복을 거듭한다. 귀천이나 우열의 가파른 위계 서열에서 상위 몇 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으로 자존감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실제 자신이 처한 현실이나 맞이하게 될 미래를 직시하면서 스스로를 투명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천박한 통념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힌다. 육체노동을 경시하던 조선 시대의 직업관이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위세 경쟁과 맞물려, 차별의식이 더욱 첨예해져 일상에서 스스럼없이 편견을 노출하면서 사람에게 모멸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나의 지인은 어느 중학교에서 급식 도구를 운반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교사 한 명이 멀리서 이분을 가리키며 “너희들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손가락질당하는 사람에 대한 모멸이자, 동시에 그런 일을 하면서 살아갈지도 모르는 상당수 아이들에 대한 저주이기도 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직업으로 쏠리는 가운데 행복의 본질은 점점 잊혀져간다. 그렇게 남의 이목에 신경을 곤두세우도록 자라나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일에도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일에 매우 방어적이 되고, 밀리고 눌리지 않기 위해 공격적인 언사를 퍼붓기 일쑤다. 바로 다음과 같은 말들이다. ‘나 무시하지 마!’ ‘내가 그렇게 우습게(만만해) 보여?’ ‘뒷방 늙은이 신세 취급하지 마라.’ ‘***면 다야?’ ‘나(우리)를 뭐로 보길래,’ ‘이래 봬도…….’ ‘내가 누군지 알아?’ ‘지가(제까짓 게) 뭔데,’ ‘어따 대고…….’ ‘너 도대체 몇 살이야?’ ‘말 다 했어?’ ‘눈에 뵈는 게 없어?’ ‘두고 보자.’와 같은 표현이 오갈 때 인간관계는 극도로 긴장 상태가 된다. 인간관계가 더 이상 개인에게 만족이나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닌, 피곤한 힘겨루기가 되는 것이다.
[다]
뉴올리언스는 재즈의 고향이자, 블루스의 발원지인 미시시피 삼각지의 중심지다. 블루스는 슬픔과 독창성과 다양한 음악적 전통의 혼합 속에서 탄생했다. 뉴올리언스는 백인과 흑인 간 빈부격차가 극심한, 분열된 도시다. 피부색에 따라 거주구역마저 분리된 이 도시에서 음악이라는 자산은 인종주의라는 깊은 결핍을 상쇄시켰다. 세컨드 라인 퍼레이드(뉴올리언스의 전통적인 춤이 곁들여진 브라스 밴드 퍼레이드)를 주관하는 ‘사회부조와 기쁨 클럽’은 남북전쟁 이후 장례식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지원과 우애와 안전을 제공하기 위해 신설된 ‘해방 흑인국(Freedmen’s Bureau)’에서 나온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제회’가 발전한 조직이다. 이 클럽은 지금보다 사람들의 관계가 긴밀했던 시절의 여러 상호부조 형태 중 하나로, 뉴올리언스에 여전히 잔존해 있다. 그들의 이름 자체가 상호부조와 기쁨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인간관계 안에서 서로를 묶어주는 유대가 의무인 동시에 축복임을 보여준다. 뉴올리언스 사람들은 잦은 축제 속에서 전통과 고향과 서로에 대한 유대를 새롭게 다졌다. 퍼레이드의 이러한 순기능을 경험한 대표적인 인물로 뉴올리언스 출신 재즈 거장인 루이 암스트롱이 있다. 그는 젊은 시절 퍼레이드 덕분에 뉴올리언스 전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외교적 특전을 누린 기억을 떠올리며 몹시 즐거워했다. 그는 경쟁 집단의 마을들, 특히 평소에는 출입이 제한되었던 백인 지구들을 누비고 다니며 연주를 했다. 퍼레이드는 당연히 곳곳을 돌아다니기 마련이고, 암스트롱이 젊었을 때 퍼레이드에 참가했던 연주자들은 거의 어디든 갈 수 있었고 가는 곳마다 환영받았다. 이것이 암스트롱에게 ‘턱시도 브라스 밴드’와 함께한 초기 퍼레이드가 가장 행복한 기억인 이유다. 암스트롱은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난 뭐라도 된 기분이었다.”
[라]
“다음 카드는 누군가요?” 레오가 퉁명스레 물었다.
[마]
• 줄리엣 : 그대의 이름만이 나의 적일 뿐이에요. 몬터규가 아니라도 그대는 그대이죠. 몬터규가 뭔데요? 손도 발도 아니고 팔이나 얼굴이나 사람 몸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니에요. 오, 다른 이름 가지세요! 이름이 별건가요?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건 다른 어떤 이름을 붙여도 같은 향기가 날 거예요. 로미오도 마찬가지, 로미오라 안 불러도 호칭 없이 소유했던 그 귀중한 완벽성을 유지할 거예요. 로미오, 그 이름을 벗어요. 그대와 상관없는 그 이름 대신에 나를 다 가지세요.
[바]
현대 사회에서 가족은 계급의 표식이 되었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구조와 같은 사회 변화가 어떻게 배우자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 경제구조의 변화가 가족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려면 결혼 및 그 밖의 친밀한 관계를 상품으로 보아야 한다. 즉, 관계는 교환의 결과로 발생한다. 물론 관계의 시장은 조금 특별하다. 이 시장은 신뢰를 기반으로 하며,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이 존재하고, 결혼제도와 같은 사회적 압력을 반영한다. 이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은 다른 종류의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수요와 공급의 변화는 신뢰의 바탕이 되는 요인들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사람들은 동반자에게 열정을 느끼는지가 아닌, 동반자를 믿고 의지할 수 있을지 묻게 되었다. 또한 그런 믿음직한 동반자를 만나기 위해 어떠한 조건을 고려해야 하는지 묻게 되었다. 좋은 동반자를 만나려면 학업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할까? 어떤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현실적일까? 이러한 고려 사항들은 우리가 가치라고 여기는 것의 일부로, 현실의 변화를 반영한다. 결혼 시장의 변화는 사랑을 할 대상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도 야기한다. 여기서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자 결과물이 아닌, 비슷한 조건의 동반자를 찾는 선택의 결과로 여겨진다.
[사]
큐피드의 화살은 제멋대로이며 이유를 댈 수 없는 감정인 사랑의 가장 오래된 상징이다. 그래서 기욤 드 로리스는 그 화살이 몸과 살을 파고들어오면, 화살을 뽑아낼 수 없듯이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다고 강조한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마당에 무슨 이유를 들먹일까. 사랑은 그 자체로 볼 때 누군가를 사랑하도록 강제하는 힘이다. 사랑의 경험은 사랑하는 사람이 경험하는 현실을 압도한다. 이탈리아로 진격한 프랑스군 최고사령관 나폴레옹은 1796년 3월 30일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지낸 날은 단 하루도 없었소. 당신을 품지 않고 보낸 밤도 없었소. 내 인생의 영혼, 곧 당신으로부터 나를 멀리 떨어뜨려놓는 명예와 야심을 저주하지 않고서는 차 한 잔도 마시지 못했소.” 멀리 떨어져서,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이런 글을 쓰다니. 여기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실존적 현실 자체를 통째로 장악하는 감정이다. 1812년 7월 6일 애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토벤은 자기 심경을 이렇게 간결하게 정리했다. “내 영원한 연인이여. 내 천사이자 내 모든 것이며, 나 자신의 자아여!” 이처럼 사랑받는 대상은 사랑하는 주체와 떨어질 수 없다. 사랑의 경험은 자아를 총체적으로 끌어들여 움직이기 때문이다.
[논제 I]
[논제 Ⅱ] |
연세대, 성균관대, 한양대, 중앙대 등 주요 대학 논술전형에서 비판적 사고 문제만 출제
경희대학교는 2022년 인문·체육계열 논술 전형에서 비판적 사고 중에 요약, 비교, 비판, 해석, 평가와 관련된 사고 기술을 평가하려고 했다. 경희대학교에서 밝힌 출제 의도에 그러한 내용이 상세하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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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제의도]
2022년도 경희대학교 인문·체육계열 수시모집 논술고사는 총 두 문제를 출제하였다. 고등학교 학력 수준에 맞추어 범교과적인 문제에 대한 이해력, 논리적・분석적 추론 능력, 비판 능력 등을 기반으로 한 종합적 사고 능력 및 서술 능력을 평가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본 논술고사는 현행 고등학교 교과서 『국어』, 『문학』의 ‘사회적 상호작용,’ ‘비판적·문제 해결적 읽기’ 영역, 『통합사회』의 ‘행복의 의미와 기준’ 영역, 『사회·문화』의 ‘사회문화 현상의 이해’ 영역, 『생활과 윤리』의 ‘사랑과 성윤리’ 영역, 『윤리와 사상』의 ‘인간과 윤리사상 및 사회사상’ 영역 등에 등장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출제하였다. 관계 맺음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는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에 ‘인간관계와 사랑’을 성찰해 보게 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가]에서 [사]에 이르는 제시문들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서부터 사랑과 같은 친밀한 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계 맺음’에 관한 논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선별되었다. 사회 구조 안에서 개인이 얼마나 자율성과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를 탐색하게 하는 것이 목표이다. 특히 한 조직이나 사회와 같은 공동체 안이나, 사적인 두 사람 간의 관계 안에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각기 다른 입장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하도록 의도하였다.
[논제Ⅰ]에서는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각기 다른 태도들을 보여주는 제시문들을 선별하였다. 하나는 관계 맺기를 가볍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에 대한 풍자적 입장(제시문 [가])이며, 다른 한 관점은 한국 사회의 인간관계가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어 모멸감을 느끼기 쉬운 것이 되었다고 말하는 부정적 입장(제시문 [나])이다. 이러한 관점들은 공동체 속 상호부조와 축제를 통한 관계 맺기 안에서 개인이 자유와 행복을 느끼는 것을 다룬 제시문 [다]와 대조된다. 이들 제시문들은 코로나19로 인해 관계의 양상이 변화한 오늘날 공동체와 인간관계 속 개인의 위치에 대해 다각도로 해석하는 능력을 묻기 위해 선별되었다.
[논제 Ⅱ]의 제시문 [라]에서 [사]는 포스트 코로나시대의 관계와 사랑에 대한 입체적 사유를 이끌어내기 위해 선별되었다. 주체와 낭만적 사랑을 강조하는 시각과, 현실적인 관점에서 사랑을 계층적 배경에 맞춘 선택으로 보는 시각의 차이를 파악해 비판할 수 있는 사고력을 평가하고자 하였다. 제시문 [라]는 낭만적인 사랑보다는 조건에 맞는 사람을 만나려는 의도가 강하게 드러나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제시문 [마]는 제시문 [라]와 달리, 낭만적 사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제시문 [바]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이 계급의 표식이자 불평등 이해의 중요한 메커니즘이 된 가운데, 배우자 선택을 시장상황에서의 상품교환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제시문 [사]는 합리화 이전의 감성이 지배하던 (근대) 시대에 마법과 같은 낭만적 사랑의 전형으로 나폴레옹과 베토벤을 소개하는 사례를 다룬다. 두 번째 논제를 풀기 위해서는 이들 제시문들의 핵심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제시문 [라]와 [바]를 같은 입장의 글로 파악하고, [마], [사]의 입장에서 비판하거나, 혹은 제시문 [마]와 [사]를 [라]와 [바]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 논술고사는 응시생들이 다양한 제시문들의 핵심을 파악한 후 논리정연하게 답안을 서술하는 것을 요구한다. 특히, 각 텍스트를 개별적이며 고립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와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입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본 논술고사는 성격이 다른 텍스트들을 관통하는 공통의 주제를 파악하고, 차이를 발견하는 능력을 갖추었는지 판단하고자 하였다. 또한 수험생이 특정 주제에 대한 사전 지식을 논술 답안에 그대로 옮겨 쓰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제시문의 관점을 다른 제시문의 내용에 비판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
경희대학교는 “수험생이 특정 주제에 대한 사전지식을 논술 답안에 그대로 옮겨 쓰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제시문의 관점을 다른 제시문의 내용에 비판적으로 적용(전이)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출제했다.”라고 명시했다. 그렇다면 이는 이혜정 소장을 비롯한 IB도입론자들이 “학생들에게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를 기르기 위해 시급히 IB를 도입해야 한다고 하면서 국내에서 출제된 논술문제는 출제자나 평가자가 의도한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하는 시험으로 본질적으로 객관식 선다형 문제이다.”라고 왜곡했던 주장과 전혀 다르다. 즉 경희대학교 2022 논술고사에서 보듯이 그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또한 논술전형을 실시하는 연세대, 성균관대, 한양대, 중앙대 등 여러 대학에서 지금까지 출제된 문제를 보더라도 경희대처럼 비판적 사고를 평가하려고 했다. 단지 국내 논술 문제는 채점의 신뢰도와 공정성을 위해 비판적 사고 요소를 구분하는 형태로 출제됨으로써 비판적 사고능력을 평가하려고 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논술 문제, 학생들에게 정답을 넘어 해답을 요구
IB 국어 시험에는 꼭 지문이 있는 문제만 출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교과서로 학습했던 작품을 기반으로 답을 찾도록 하는 문제를 출제하기도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어떤 작품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했는지에 대해 미리 채점 센터에 알리도록 한다.
| 다음 (가)∼(마) 중 하나만 골라 답하시오. 단, 수업 중에 공부한 작품 중 적어도 두 작품을 참고해서 써야 한다. 적어도 두 작품을 논하지 않은 답은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또한 여러분이 각각의 작품을 읽을 때 글의 언어, 맥락, 구조가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가 다뤄져야 한다. (시험 시간: 2시간)
(가) 문학가가 글을 쓰는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공부한 작품들 중 적어도 두 작품을 참조하여 쓰시오.
(나) 모든 사람처럼 문학가들도 서로 상반된 가치관을 지니고 있을 수 있고 이러한 가치관이 그들의 작품에 나타나기도 한다. 적어도 두 명 이상 문학가의 상반되는 가치관을 그들의 작품에 반영된 대로 서술하고 여러분은 어느 입장에 동의하는지 논하시오.
(다) 시대별로 각기 다른 사회적 혹은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문예사조가 나타난다. 각 상황이 어떻게 문학 사조에 반영되었는지 여러분이 공부한 작품들 중 적어도 두 작품을 참조하여 쓰시오.
(라) 독특한 문체와 개성 있는 언어 표현은 독자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는 요소이다. 여러분이 공부한 작품 중에 적어도 두 명 이상의 문학가의 작품을 참조하여 이러한 요소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쓰시오.
(마) 여러분이 공부한 작품 중 적어도 두 작품을 참조하여 아름다움의 가치와 태도가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논하시오. |
이런 출제유형을 자료가 제시되는 유형과 다르게 ‘단독 과제형 논술’이라고 부른다. 국내에서는 2000년도 이전의 논술고사에 가끔 출제된 유형이지만, 대입전형에서 논술고사가 본격 도입된 2000년도 중반 이후에는 자료 제시형 유형이 거의 100% 출제되고 있다. 이 유형은 임의적이지만 제시되지 않는 두 작품을 참고해야 하므로 학생들에게는 더 어려운 시험일 수 있다. 학생들은 단서 없이 스스로 기억에 저장해둔 정보를 끌어내야 하므로 교과서에서 배운 작품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 내용을 깊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야만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즉 이처럼 ‘전제가 붙은 단독 과제형 논술’은 ‘자료 제시형 논술’에 비해 인출이 어려우므로 깊고 지속적인 학습을 평가하는 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문제를 푸는 방식은 자료 제시형 논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응시자가 (마)를 선택했다면 미적 가치와 태도에 대한 개념(지식)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미적 가치는 미를 평가하는 관점인 미의식으로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으로 나눠지지만, 주관·객관 어느 한쪽에만 돌릴 수 없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대상의 성질이나 모양에 따르며 동시에 주체의 태도나 활동에도 의존한다. 이 두 조건이 작용할 때 미적 가치는 성립될 수 있고, 대상의 우열도 정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숭고미, 우아미, 골계미, 비장미 등이다. 미적 태도는 유용성, 경제성, 윤리적 판단 등을 벗어나 대상을 순수하게 미적으로만 바라보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응시자는 미적 가치와 미적 태도의 개념을 이해하고 교과서에서 이러한 개념들이 표현된 작품을 예로 들어, 그 작품의 어떤 내용이 미적 가치와 태도를 보여주는지를 설명하면서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
IB 영어 시험도 다르지 않다
| 다음 중 하나의 문제를 골라서 250~400단어의 분량으로 글을 쓰시오. (90분)
(가) 당신은 주인공들이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 함께 협력해서 일하는 영화를 보았다. 그 캐릭터들이 서로 어떻게 소통하는지 기술하고 언어를 공유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고찰하는 내용을 교내 잡지 기고문의 형식으로 쓰시오.
(나) 다른 전통들을 기념하기 위해 당신의 시 의회는 전통 복장을 입고 참여하는 파티를 개최한다. 당신의 친구에게 당신이 어떤 의상을 선택했고 왜 그것을 선택했는지 기술하는 이메일을 쓰시오.
(다) 우리 동네에 젊은 사람들의 경우 보조식품(보디빌딩 보조식품, 다이어트 보조식품 등)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경향이 늘어난다. 이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교장 선생님이 당신에게 교내 학우들에게 연설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이슈의 심각성을 논하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제안하는 연설문을 쓰시오.
(라) 당신의 학교 이사회는 오락을 통한 학습을 강조하는 대안적 교육프로그램을 도입하려고 계획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제안들을 새로운 프로그램에 반영하기를 원한다.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한 당신의 제안을 진술하고 학생들에게 어떠한 이점이 있는지 설명하는 제안서를 작성하시오.
(마) 최근 당신은 21세기에는 자연과학(화학, 생물학, 물리학 등)이 사회과학(경제학, 역사학 등) 만큼의 이로움을 주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읽었다. 그 주장에 대해 논하고 당신의 의견과 근거를 제시하는 블로그 글을 쓰시오. |
요컨대 국내에서 출제된 서술형 논술형 문제는 이혜정 소장이나 IB론자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자료 제시형이든, 단독 과제형이든 본질적으로 객관식 선다형 시험이라고 할 수 없으며 정답을 넘어 해답을 추구했다. 그런 까닭에 우리 학생들에게 비판적 사고의 결핍은 IB(국제 바칼로레아)를 도입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교육과 관련지어서만 보면, 교사의 교수법에서의 미숙함, 학생들의 장기기억에 배경지식 등을 전이해 본 경험의 부족, 학생들이 명료한 개념과 상반되는 오개념을 확실한 의미로 착각해 온 습관, 학습을 검색으로 받아들이는 세태 등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진단이라고 볼 수 있다.
빈곤한 역사의식은 한국의 미래를 위태롭게 해
IB 도입에 신중해야 할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다음은 대략 2010~2020년까지의 IB 역사 시험 중 한국 관련 문항을 일부 발췌한 문제이다.
| • 동학 혁명이 일본의 조선 병합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에 대해 얼마나 동의하는가? • 한국전쟁 발발에 외세의 영향은 어느 정도로 영향을 미쳤는가? • 냉전의 발달에 있어서 한국 전쟁의 의미를 평가하시오. • 20세기 후반에 경제 발전을 이룬 국가 하나를 들고 그 이유를 분석하시오. • 1945년 이후 교육의 변화와 그것이 사회 경제 개발에 미친 영향에 대해 한 국가의 예를 들어 논하시오. • 20세기 후반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적 성공에 국가의 역할이 어느 정도로 중요한 요인이었나? 두 나라의 예를 들어 논하시오. • 1950년까지의 상황을 참고하여, 중일전쟁(1937~1945)이 한국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시오. • 1860년~1894년 동안의 상황을 참고하여, 1876년 조선 개항의 원인과 효과에 대해 논하시오. • 한국전쟁은 남한의 기적적인 경제 발전에 어느 정도로 기여했는가? • 전쟁이 한반도에 미친 경제적 정치적 영향을 논하시오. • 일본의 조선 병합의 주된 목적은 경제적 이익이었다라는 주장에 대해 논하시오. |
제시된 문제 중에 “한국 전쟁은 남한의 기적적인 경제 발전에 어느 정도로 기여했는가?”는 IB의 문제점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런 문제로 우리 아이들의 학습을 평가한다는 것은 출제자가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아이들에게 한국 역사를 왜곡하는 가치관을 심어줄 우려도 다분하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국민, 심지어 북한마저 비판할 정도로 반역사적인 문제이다. 그 까닭은 이 문제출제자가 한국의 역사에 대해 깊은 역사의식이 없거나, IB를 통해 세계시민으로 성숙하는 아이들을 키우겠다고 하면서, 그것과 다르게 한국 전쟁이 한반도에 끼친 동족상잔의 비극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않거나, 미국 등 서구 선진국에 치우친 제국주의적 시각으로 한국 전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즉 IB 평가 문제는 각국의 역사적, 문화적 측면을 깊이 반영하지 않고 출제될 위험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시냅스가 왕성하게 만들어지면서도 가지치기(선별적으로 시냅스가 제거되는 모습)도 급속도로 진행되는 청소년기 학생들에게 정치, 사회, 경제적 이슈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을 형성하게 할 위험이 크다. 즉 우리 아이들에게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이 아니라 자본과 정치권력의 의도나 세계 지배 질서에 맞게 조작된 사고를 주입함으로써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무 비판적으로 추종하거나 성찰적인 사고를 기르지 못하게 할 수 있다. 특히 IB가 이런 식의 문제로 한국 학생들을 평가하고, 학생들이 충분한 성취 수준에 이르렀다고 인증 자격을 부여한다면 그로 인한 문제는 교육적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즉 고차적인 사고 의식을 기르지 못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의 주인인 청소년들이 한국의 미래를 제대로 끌고 갈 것이라고 기대할 수조차 없다.
이 문제를 ‘자비의 원리(principle of charity)’에 따라 더 고차적으로 비판적 사고력을 평가하려는 의도가 담긴 문제로 받아들이고, 세부 기준을 들어 문제점을 지적하고 논증할 수 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논리조차도 매우 빈약하며 잘못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자비의 원리’에 끼워 맞췄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문제를 보면 ‘한국 전쟁이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고 한다. 즉 한국 전쟁이 한국의 경제 발전에 좋은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객관적 사실은 다르다. 1950년 6월부터 시작되어 3년 동안 벌어진 한국 전쟁으로 남한이든 북한이든 전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해방 이후 근근이 유지되던 남북한의 생산기반시설은 거의 모두 파괴되었으며, 사상자는 얼마이고, 전쟁 중 또는 전쟁을 마치고 미국과 체결된 ‘전시작전권 양도’ 등 불평등한 협정은 한두 개가 아니었으며, 한국은 전쟁이 일시적으로 끝난 휴전협정을 체결하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전쟁 당사자인데도 휴전협정에 적극 의견을 내거나 휴전협정체결에 서명(署名)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경제는 정치, 사회문화적 요소와 상호작용하면서 변하는데 한국이 전쟁에서 주도권을 갖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피해를 본 상황에서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고 보는 태도는 사실을 왜곡하는 처사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즉 문제출제자가 진화론적 시각에서 한국을 종속적 자본주의 틀 내에서 하청국가로 보지 않고서는 이런 문제를 출제할 수 없다.
그뿐 아니다. 경제 발전이라니… 그것도 기적적이라니… 경제 발전과 경제성장은 다르다. 경제성장은 국내총생산 즉 GDP가 늘어나는 현상이며, 경제 발전은 GDP뿐 아니라 소득분배가 개선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일국 경제에서 양적으로 일국의 생산, 소비지표가 개선되었고, 질적으로도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간 격차가 줄어든 상태가 바로 경제 발전이다. 그런데 출제자는 한국 전쟁 이후에 한국경제가 양적으로 경제성장을 해왔어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기 전인 최소 2003년 이전까지 소득분배 격차가 지속적으로 벌어져 왔으므로 경제 발전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무시한다. 즉 1960년대 후반 이후에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경제성장을 해왔지만, 그것을 경제 발전과 동일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출제자는 문제를 출제할 때 경제성장과 경제 발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경제성장을 경제 발전으로 확대하여 받아들이는 근시안적 시각을 가졌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결국 이 문제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으므로 IB가 추구하는 비판적 사고력, 창의적 사고력, 의사소통 능력, 협업 능력을 기르는 문제로 적합하지 않다. 즉 이런 문제는 IB가 추구하려는 교육목표와도 맞지 않으므로 우리 아이들의 비판적 사고를 평가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인 한국 전쟁과 한국경제의 전개 과정에 대해 왜곡된 가치관을 심어줄 위험이 매우 크다. 나아가 출제자가 경제성장과 경제 발전의 차이를 아는데도 이런 문제를 출제했다면 “한국 학생들에게 고의로 매판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역사관을 심어주려고 했다.”라고 밖에 볼 수 없으므로 모든 교사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 분노할 수 있는 자격 미달의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출제한 IBO에게 1학교당 1억 원 가까운 돈을 주면서까지 IB 교육과정을 도입하고, 인증 자격 시험을 통해 성취 수준을 확인하겠다는 발상은 한 주권국가의 국민이자 평화와 공존을 지향하는 세계시민이라면, 특히 지성, 감성, 시민성, 심미성을 기르는 일이 직업인 교사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본다.
IB 평가를 채점하는 과정도 납득할 수 없다. 2023년 11월에 첫 IB 외부 평가를 치르는데 IBO(국제바칼로레아기구) 측과의 협약에 따르면 우선 영어가 가능한 한국인 채점관을 양성한 후, 영어 IB 채점에 투입한 후에 그 역량이 검증되었다고 판단되면 2023년 IB 외부 평가의 채점위원으로 참여하도록 되어있다. 이런 절차를 거치는 까닭은 영어 IB와 한국어 IB의 채점에서 그 질을 공정하게 관리하는 데 있으며 이 절차가 IBO와 제주교육청 및 대구교육청 간의 합의사항이라는 것이다. 물론 IB 평가의 신뢰성과 공정성을 위해 전문적인 채점관을 양성하는 데 동의한다. 그런데 왜, 채점관 자격에 영어능력이 들어가야 하나? 우리는 모국어인 한글이 존재하고, 한글로 교육과정이 구성되었는데 왜 외국어인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에게만 채점관의 자격을 부여하고, 나아가 영어 교과부터 우선 채점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이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를 기르는데 영어 능력은 선제적 조건이 아니며, 채점에서도 마찬가지고, 고차적 사고를 위해 가장 중요한 사고 기술은 논증인데 이와 무관한 영어구사능력을 조건으로 내세우면서 채점관을 뽑고 채점절차를 정하는 것은 아무리 봐도 납득할 수 없다. 나아가 그렇게 선발된 채점관이 역사의식이 결여되어 있고, 사회 문제를 비판적이고 성찰적이고 객관적이며 상대주의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IB는 우리 아이들을 협업적이며 소통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들의 뇌에 지배와 피지배를 정당화하는 시냅스를 더 많이 두껍게 만들어낼 뿐이다.
교육 당국이 어떤 곳에 시선을 두고 정책을 펴야 하는가는 굳이 거론치 않더라도 명백하다. 그런데도 IB와 관련해 쓴 앞의 1, 2편의 글에서 밝힌 것처럼 IB가 유일한 비판적, 창의적 사고를 기르는 교육과정이라고 볼 수 없고,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는데도 지금, 이 순간에도 IB 교육과정을 화려한 미사여구로 포장하면서 꼭 IB를 도입해야 한다고 밀어붙이는 일부 교육청의 행태를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며 안타까울 뿐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일반사회교육을 전공하여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예탁결제원에서 10년 동안 근무한 뒤 전주 완산고등학교에서 사회 교사로 재직 중이다. 전북 교육청 사회문화 집필 위원, KDI 경제교육교재 집필 위원, 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자문단, 충남 지방공무원 임용시험 출제위원, 전북 및 전남 교육연수원 강사, 전북대학교 교사 연수 강사, <새전북신문>, <열린 전북>, <전북교육신문>, 인문 웹진 <아홉시>, 네이버 비즈니즈 블로그 <인터비즈>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지금은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의 교육저널인 「교육 제4의 길 」에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 <미래 교육의 불편한 진실, EBS, 2021>, <학교 속 문해력 수업, EBS, 2022>을 출간했다.
그래서 대안은 뭔가요??????????????
완산고 학생들은 입시위주 교육에서 벗어나 있을까요?????????
무슨 이야기이신지 전혀 맥락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입시 관련한 관점에서만 IB를 바라보면 그렇지요.
IB가 부분적으로라도 도입이 되면 박제원선생님이 계시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변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현재 입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건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미래 교육, 세밀하게 접근해야지요. 저도 공감합니다. 화려한 미사어구, 공감해요. 그런데 변화해야 한다는 건 선생님도 공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교사가 변하기 싫어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 글의 논지는 교사가 변하기 싫어한다가 아니라 IB가 유일하게 비판적 ,창의적 사고를 기를 수 있는 교육과정, 그것도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사가 변하기 싫어한다라고 보시면 제 글의 논지와 많이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필자의 생각에 전적인 동의. 그리고 ‘입시’란 용어로 지칭하고자하는 바가 가령 점수따기위한 시험대비 암기식교육같은 부정적인 교육방향을 말하고자 하는것 같은데 1. 웃기는건 IB도입하고자 하는 교육청의 설명만봐도 빠지지않고 얘기하는게 명문대 실적임. 일선 학교들도 IB도입고민하면서 단순논리로 따지는게 입시에 도움되냐임. 2. 현재 학종을 예를 들자면 학종이 입시문제를 완화했느냐? 기본적으로 더 좋은대학을 들어가기위한 경쟁이 문제 근본이라면 전혀 완화된것 없음. 오히려 선발기준에 대한 논란만 지속되고 있지. 3. 그러니 IB도입해서 입시완화시키자는 발상이 말이 안됨. 결국 방법론의 문제일뿐 좁은문을 통과하기위한 과도한 경쟁구조는 없어지지 않음. 4.거기에 결론은 경쟁구조가 지속되는것이임에도 천문학적인 비용을 수반하는 방법을 왜 도입해야한다는건지?
우선, 논술의 출제의도만 놓고 봤을땐, 열린 답안을 허용한다는 인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채점 기준은 출제진이 예시 답안을 이미 정해놓고 그 틀에서 채점하게 됩니다. 한양대 입학처의 경우, 예시답안을 10년 전부터 공개하고 있지 않는데 학생들이 예시답안을 정확하게 맞춰 점수대가 올라간다는 이유에서 학생우수답안으로 변경한 바 있습니다. 채점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학생의 답안을 채점하기 위해 정답을 열어버리면 교수 한 사람당 하루 900장 넘게 채점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들어가야 할 문장이나 키워드는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물론 표현은 달리할 수 있죠. 대부분의 틀이 정해져 있고 그 틈을 비집고 자신만의 견해를 쓸 수 있는 공간 자체를 없애버렸습니다. 변별을 위해 틀 자체를 구상하기 어렵게 만드는 식으로 바뀐지 오래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출제의도만 보면 다양한 답안을 존중해주는 뉘앙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논술에는 제시문만 존재하기에 별도의 사전 지식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교과 지식은 필요하고 정답의 전체적인 틀, 심지어 일부 대학은 세부적인 틀까지 빈틈없이 막아놨다는 점을 인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출제하여야 채점하기 편하고, 대학이 만들어놓은 답안만이 정답이라는 출제자의 권위도 살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