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청 교육과정을 만들자!
새해가 왔지만, 구정은 아직 오지 않았고, 전통적 세시(歲時)의 관점에서 한 해의 전환점이 되는 입춘도 더 기다려야 한다. 겨울은 한창이고 봄꽃은 나올 기미가 없다.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에 칼럼을 쓰기 시작한 지 2년이 넘었고, 이제 이 지면도 새로운 목소리를 찾을 때가 되었다. 여기서 쓴 첫 칼럼 제목이 “정말 교육을 바꾸려는 것일까”(2017.7월)였다. 그 무렵 새 대통령의 공약은 새로운 교육을 통해 더 나은 미래 사회를 만들어갈 기대와 희망을 보여주는 듯했지만, 결정된 정책은 이내 “국민의 뜻”과 “공정”의 이름으로 퇴행하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었지만, 아직 해가 바뀌지 않았다. 정부가 바뀌었지만, 아직 정부는 바뀌지 않았다.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학교 수업 내용, 문제 풀이와 단순 암기 중심의 수업 방법, 학부모의 사교육비 부담, 학생의 비효율적인 대입 준비, 일반고 황폐화, 학력 저하, 계층 이동의 단절, 사회적 양극화”, 정부가 바뀐 지 3년째가 되었지만 이런 문제는 여전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입 정시확대 정책은 현 정부의 1호 공약이라는 고교학점제와 충돌하고 미래 교육의 방향과도 맞지 않는 근시안적인 선택이었다. 특목고와 자사고의 일반고 전환도 2025학년도 이후 서울 강남 중심의 새로운 서열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수시모집에서 경쟁은 더욱 심화되고, 정시모집은 강남, 특목·자사고, 재수생을 위한 잔치가 될 것이다. 정시모집에서 일반고 현역은 그저 들러리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정책 사이의 충돌, 정책과 현실의 괴리, 모순의 심화, 실효성의 결여, 지속 가능한지 알 수 없는 정책적 불확실성! 정부는 “공정성”을 강화한다고 말하지만, 국민 각자는 스스로 생존의 길을 도모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는 현재도 미래도 모른 채 결국 각자도생(各自圖生) 해야 한다! 개인, 기관, 제도에 대한 신뢰는 추락했고, 희망을 찾을 근거는 봄꽃처럼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지난 12월에 발표된 교육부의 <2020년 교육정책 안내>를 보아도 올해 뭔가 변화가 일어날 조짐을 찾아내기 어렵다. 4월 15일 총선이 끝나고 새로운 국회가 구성되더라도 국회에서 미래 교육을 위한 담론이 만들어질 개연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필자의 예상이 어긋났으면 좋겠지만, 진심으로 관심을 가질 의원이 없을 것 같다. 국가교육회의가 국가교육위원회로 전환하는 법률이 올해 국회를 통과하면 뭔가 새로운 출발을 기대할 수도 있겠으나, 이를 추진할 동력이 보이지 않는다. 국가교육위원회로 전환될 가능성도 크지 않아 보이고, 국가교육위원회가 구성되더라도 정책적으로나 정무적으로 실효성 있는 교육개혁을 추진할 수 없으리라는 게 세간의 평가이다. 정부와 “청와대 정부”와 “언더 정부” 사이에서 국가교육위원회가 숨이나 쉴 수 있을까.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개혁 추진 상황을 돌아보더라도, 대선 정국으로 들어서는 내년에 교육의 근본을 새롭게 정립할 교육개혁을 시작한다는 발상은 그저 철없는 생각일 뿐이다. 국가교육회의는 지난 2년간 매년 백서를 발간했다. 올해 국가교육회의는 총선을 앞둔 국회만 바라보며 가을을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세 번째 백서 발간을 준비해야 할까. 교육부, 국회, 국가교육회의, 어디에도 변화의 징후가 없다. 이렇게 우리는 긴 터널로 들어섰고 돌아갈 길은 없다. 우리 스스로 터널의 끝을 만들지 않으면 누가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강태공처럼 바늘도 미끼도 없는 낚시를 하며 시간을 낚을 것인가. 교육부는 조만간 교육과정 일부 수정안과 함께, 미뤄 두었던 일반고 고교학점제 종합계획을 발표할 것이다. 그리고 소프트웨어 교육, 인공지능교육, 과학교육, 수학교육, 평화통일교육, 인성교육, 독서인문교육, 민주시민교육, 미디어교육, 체육교육, 예술교육 등 거의 모든 영역의 학교 교육을 활성화하거나 새로 시작할 계획이라고 한다. 학생부 기록 신뢰도 제고, 공정한 학생평가도 업무 목록에 들어가 있다. 많은 교육청이 발표한 신년 사업계획과 교육감의 신년사에도 이와 같은 정부 정책과 함께 지역 이슈에 해당하는 교육감의 공약이 담겨 있다. 각 교육청은 작년처럼 올해도 여러 사업을 펼치고 예산을 집행한다. 그러나 정책의 방향성과 의지가 너무나 모범적이다. 아이를 위하는 교육, 모든 아이는 우리 모두의 아이 등 각 교육청이 제시한 구호는 너무 옳은 말이라서 오히려 비어 있는 언어로 읽힌다. 구호와 사업 사이의 논리적 인과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필자는 올해 우리 사회의 교육을 책임지는 위치에 계신 분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 각 교육청 단위로 <OO교육청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시행하고 있는 2015 국가교육과정은 학생의 과목 선택권 확대를 위해 학교의 자율적인 교육과정 편성과 과목 개설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교육부는 2022년 상반기에 2025학년도부터 전면 실시될 고교학점제 실현을 위해 새로운 교육과정을 공표한다고 이미 발표했다. 학생의 교과 선택권이 더 강화되고 학교는 더 많은 교과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무한정 늘릴 수만은 없다. 교육과정을 통해 학교가 감당할 적정 범위를 설정해야 하는데, 여기에 교육청의 역할이 있다. 이상과 현실의 완충을 통해 실현 가능한 교육과정을 구성하여, 학교 현장에서 교육과정을 실현할 책임을 교육청이 정부와 분담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교육 거버넌스가 지방 분권화·자율화에 있으므로, 교육청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 자율과 분권의 대상에서 교육과정과 평가는 가장 관심을 덜 받는 영역이다. 한 마디로 고생만 하고 그 성과는 알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별도의 교육과정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교육청이 교육과정을 설계하기란 매우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더구나 국가 교육과정의 이상(理想)과 일선 학교의 현실 사이의 괴리를 해결해야 하는 책임이 생길 수도 있다. 교육부가 만든 교육과정이 학교 현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교육부 탓을 하면 되는데, 교육청이 직접 교육과정을 만들면 책임지고 실행해야 할 부담이 생긴다. 그리고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여러 학교의 지원 요구와 민원에 직면할 수도 있다. 현재 교육과정 문서와 학교 현장의 괴리는 그만큼 심각하다. 과거에는 교육부와 국책 기관이 만들어서 매뉴얼과 함께 교육청에 “내려보내면”, 교육청은 상세한 세부 지침을 추가하여 다시 학교에 “내려보낸다.” 학교에서 적용할 때 문제가 생기면 교육부로 올려 보내거나 뭉개버린다. 그런데 이제 교육청 교육과정을 만들면 교육과정 편성과 운영의 책임, 국가 문서와 현실의 간극을 메워야 할 책임이 생긴다. 하지만 이 일은 교육청 본연의 고유 업무이며, 학교 교육의 본질이다. 그동안 암묵적으로 모른 척 했다면, 이제 교육청은 문제를 피하지 말고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현재 2015 교육과정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질 고교학점제 교육과정에서 개별 학교의 교육과정과 개설과목은 교육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교육청 교육과정은 현실 영역에서 개별 학교가 편성할 수 있는 교육과정의 범위를 정하고 이를 위한 지원 정책을 만들기 위함이다. 올해 교육청 교육과정을 설계함으로써, 2022년에 발표될 새로운 교육과정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가교육과정과 학교 현장의 간극을 좁히는데 교육청의 역할이 있다. 교육청이 교육과정을 실현할 학교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면,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학교 교육과정 문서가 현장에서 실현될 초석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각 교육청의 올해 사업계획에는 교육청 교육과정 설계가 업무로 이미 잡혀 있는 교육청도 있고, 관심이 없는 교육청도 있다. 그리고 비록 업무로 잡혀 있지만, 배정된 예산이 미약하여 그 예산으로 사업이 정상적으로 추진되기 어려운 교육청도 있다. 예산은 정성이며 의지이고 진정성이다. 교육과정을 하찮게 여기면서 어떻게 각 교육청이 더 나은 학교교육을 만들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교육청이 교육과정을 설계해야 학교 현장에서 교육과정이 작동한다. 미래를 위해 지금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나중에 논의하게 될 내신 평가의 공정성, 학생부 기록의 신뢰성, 수능의 분권화, 미래 대학 입시 등 여러 사안을 논의하는 출발점이 교육과정 설계이다.
수능과 대학입시 개편은 아직 머나먼 일이다. 교육부는 2028학년도에 실시할 수능 개편안을 연구하여 올해 내놓겠다고 했지만, 정답의 범위는 사실상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교육부가 정말로 그렇게 할지 아니면 단지 연구진의 의견 형태로 발표하고 말아버릴지 두고 볼 일이다. 아무리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더라도 “공정”을 강조하는 대통령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이번에 발표할 수능 안이 수능으로 한 줄 세우기를 탈피할 수 있을까. 수능 이슈는 결국 줄 세울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수능 개편의 목적은 학생이 학교에서 미래 사회를 살아갈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새로운 학교 교육을 만들기 위함이다. 새로운 학교 교육은 경제적 여건과 지역 환경에 따른 학력 격차를 줄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키우는 교육을 의미한다. 그렇게 하려면 새로운 학교 교육의 철학과 가치, 즉 학교 교육을 통해 아이를 어떤 어른으로 키울지 개념을 정립하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미래 사회에 필요한 역량을 정의하고, 누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지에 대한 총체적 청사진을 그리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철학과 가치를 실현할 구체적인 정책으로서 고교학점제, 고교 유형 재정립, 스마트학교, 학교 간 연합과 연계, 학제 개편, 학생·교사·건물을 공유하는 새로운 학교 모형, 새로운 수능과 대학 입시 등이 제시되어야 한다. 올해가 총선과 그 후속 마무리로 흘러가면 내년부터는 대선 정국이 시작된다. 2022년 5월에 들어올 새 정부는 2028학년도 대학 입시 기본방향을 일 년 뒤 2023년 여름까지 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결정과 시행은 연기되고 유보된다. 그렇게 시간이 가면 우리가 이미 들어가 있는 긴 터널은 다음 정부에서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다음 정부에게는 국민 절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총체적 개혁에 나서기보다는 적당히 이해를 조절해 가며 결정을 연기하는 게 쉬운 선택일 수도 있다. 비록 그 길이 우리가 공도동망(共倒同亡)하는 길일지라도.
하지만 삶은 계속된다. 우리가 스스로 버리지 않는다면 새로운 희망도 계속 이어진다. 밤이 밤에게 새로운 날을 전하듯, 희망도 그렇게 시나브로 우리 곁에 와 있게 될 것이다. 모든 게 바뀐다는 무상(無常)이 세상의 원리이다.
* 그동안 읽어주신 여러분께 두 손 모아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스페인 마드리드 꼼쁠루뗀세 대학 박사 (중세 및 황금세기 문학), 페루카톨릭 대학 석사,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학사, (전)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기금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