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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담론(9): 인공지능에게는 동기와 의미가 없다

#485 권재원,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2019.09.18

인공지능이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무엇일까?

 

아마 “너는 왜 그 일을 하고 있느냐?”일 것이다. 혹은 인공지능에게 입력되는 정보마다 “왜 하필 너는 그 정보를 입력하느냐?”라고 물어본다면 회로가 엉켜 버릴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대해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라고 하니 하며, 주어지니 입력한다 외에는 딱히 없다. 이것이 인공지능의 한계다. 인공지능은 인간 두뇌에서 대뇌피질의 특정 영역만을 모방한 기계이기 때문에 변연계의 활동, 그리고 대뇌피질과 변연계, 나아가 신체까지 포괄하는 복잡한 상호작용 및 그 상호작용이 창출하는 ‘느낌’을 알지 못한다.

 

사람은 다르다. 사람의 지능은 단지 대뇌피질이 담당하는 합리적인 추론과 연산만의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지능은 대뇌피질과 변연계는 물론 신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지능까지 포괄하는 넓은 범위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작용과 과정을 과정 밖에 바라볼 수 있는 능력 , 즉 ‘의식’을 발현한다. 이는 사람이 지적으로 알기만 할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느끼기도 하는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사람은 단지 지적이지만은 않은 지적인 존재다. 사람은 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지적인 작용의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그 과정과 결과를 통해 ‘느낌’을 받는다. 이 목적과 의도는 단지 알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 대한”, “~을 위한” 앎과 생각이란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를 후설(Husserl, E.)은 ‘지향성’이라고 하였다. 심지어 사람은 지향할 뿐 아니라 그 지향까지도 의식할 수 있으며 그 지향 자체의 속성과 형식까지 탐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이 “~에 대하여”는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즉 사람은 왜 하필이면 “~에 대하여” 알고자 하고 생각하는 것일까? 즉, 사람의 동기는 무엇일까? 어떤 생각과 행동의 동기가 지적이기만 한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느낌을 동기로 삼아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 느낌에는 감정, 미적 취향, 그리고 가정, 공동체와 같이 일상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생활세계를 통해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전승된 가치와 문화가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사람은 논리적, 합리적으로는 납득하더라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경험을 하며, 때로는 이러한 취향, 감정, 문화 등으로 인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의 기억과 경험마저 왜곡하여 재생하며, 제3자의 눈으로는 말도 안되는 억지나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의 휴머니티를 이룬다.

 

인공지능은 이러한 휴머니티를 구현할 수 없다. 물론 딥러닝을 통해 인공지능은 스스로 학습하는 지적인 존재가 되었다. 지구상 유일한 지적인 존재라는 사람의 고유성도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변연계, 신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까지 포괄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행동의 동기를 얻고, 자신이 행하는 일에 대해 느낌을 가질 가능성은 없다. 물론 기술적으로는 어떻게든 구현할 수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수준 이상의 복잡한 시스템을 개발해야 하며, 천문학적인 규모의 시스템 자원이 소모되어야 한다.

 

하지만 복잡하게 느끼고, 문화와 가치의 영향을 받아 애매모호한 판단을 하며, 종종 논리적이 아닌 직관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하는데다, 자기가 “지향하는” 일에만 집중하려고 하는 인공지능을 엄청난 자원을 소모해가며 개발할 이유가 있을까? 묵묵히 딥러닝을 반복하는 인공지능에게 가치, 문화, 취향에 근거하여 학습하는 내용, 혹은 딥러닝 그 자체를 의문시하고 따져보라고 요구할 까닭이 없다. 이런 엉뚱하고 말썽 부리는 인공지능을 사용할 바에는 차라리 그냥 사람을 상대하는 게 훨씬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 보면 인공지능이 사람의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상당히 과장된 것이다. 인공지능은 사람의 노동 중 특정한 영역을 대체한다. 이론적으로는 다른 영역까지 확장할 수 있겠지만, 엄청난 투자를 요구하며, 그럴만한 유인이 없다. 인공지능은 동기와 느낌의 영역을 사람의 영토로 남겨 둘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인간 노동의 성격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인공지능

 

인공지능이 모든 일자리를 가로채지 않고, 구조적 반복적이며 논리적인 성격의 일자리를 집중적으로 대체하며, 동기와 의미를 창출하는 영역까지는 결코 진출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구조적 반복적 논리적인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영역은 가장 많은 경제활동 인구가 고용되어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전체 경제활동 인구의 40% 이상이 그러한 일에 종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빠른 속도로 인상된 최저임금이 오히려 이 영역의 인공지능화를 가속화 시켰다. 그러니 인공지능은 단지 편리한 도구이며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다며 한가하게 원칙론만 말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을 조금 달리해 볼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이 들어오기 전, 저러한 종류의 일자리에서 사람은 과연 행복했는가? 저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동기가 일에 있었는가, 아니면 그 일을 하도록 그들을 끌고 간 경제적 유인에 있었는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 영역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내재적 동기가 아니라 외재적 동기에 의해, 즉 임금을 받기 위해 일했다. 저 영역의 일자리들이 대체로 임금을 시간 단위로 계산한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언제든 싫증을 느끼고 그만둘 수 있는 일자리이기 때문에 그 외적 동기인 임금 계산의 시간 단위를 되도록이면 촘촘하게 설정한 것이다. 그래야 외적 동기가 계속 제공되면서 노동자를 일터에 붙들어 둘 수 있다.

 

단지 일이 고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저 영역의 노동에는 육체적 소모가 심하지 않은 일들이 많다. 반면 야구선수나 축구선수 같이 다른 누구보다도 신체적으로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내적 동기에 의해 일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수십억의 재산을 모은 왕년의 에이스 투수가 그의 기준으로는 푼돈에 불과한 연봉을 받고 패전처리 투수라도 좋으니 경기에 나갈 수만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가 그렇다. 왕년의 에이스가 중요하지 않은 경기에 나와 겨우 한 두 타자 상대하고 물러나면서, 하잘 것 없는 연봉을 받는데도 그 얼굴을 보면 선발 투수나 마무리 투수로 활약할 때 못지 않게 진지하며, 때로는 기쁨이 가득하다. 이 경우 이 왕년의 에이스를 움직이는 동기는 연봉이 아니라 야구 그 자체다.

 

하지만 저 영역의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 그러한 내적 동기를 가진 사람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임금을 시간 단위로 계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역시 장기간 근속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자리가 나오면 바로 이직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자발적 실업 상태로 돌아간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이 영역에서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그 사람들 역시 애초에 거기서 오래 일할 생각이 많지 않았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이 영역의 노동자들 중에서도 철저한 직업 정신과 내적 동기를 통해 일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역에서 그런 동기로 일하는 사람을 딱히 더 존중하지 않는다. 이 영역의 노동 시장에서는 노동자의 내적 동기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으며, 모두 시급이라는 연료를 집어넣으면 작동되는 기계로 취급했다.

 

이것이 바로 근대 산업사회의 병폐로 지적되어 온 ‘노동 소외’다. 구획하고 분리하는 근대성은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 속에서 거대한 기계의 부품과 결합하였다. 기계의 부품이 정해진 하나의 일만을 담당하여 끊임없이 반복하듯이, 사람의 노동 역시 세밀하게 해체된 업무의 한 토막 만을 담당하여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 되었다. 이로써 사람의 노동이 가지고 있던 종합적인 성격, 인간적인 성격이 사라지고 기계적으로 특정한 속성만을 반복하게 되었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사회적 기계, 즉 체계가 노동의 영역, 행정의 영역을 넘어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인간의 영역인 생활세계를 차례차례 식민화하고 있다고 했다. 가령 학교는 더 이상 교사와 학생의 인간적인 만남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다. 세밀하게 시간 단위로 나누어진 교육과정, 성취기준 등의 구획을 교사가 세밀하게 수행하고 확인 받아야 하는 분업화된 기계가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노동의 인공지능화는 결과적으로 그동안 인간 노동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체제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다소 엉뚱한 폭로다. 이를 계기로 노동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자각해야 하며, 노동에 인간성의 숨결을 불어넣고자 하는 강한 동기 부여가 되어야 한다. 단지 인공지능에게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는 것, 그 비인간적인 노동을 계속하는 것을 권리라고 마냥 지키는 것이 답이 아니다.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저항을 하건 안 하건 간에 결국 그러한 종류의 일자리는 인공지능으로 대체되고 말 것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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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권재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사회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중학교에서 24년간 사회를 가르쳤고, 서울대, 상명대, 방송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에서 정책연구를 담당했고, 현재 계간 우리교육 편집위원이다. '학교라는 괴물', '그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등의 교육 비평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거짓말로 배우는 10대들의 경제학', '세상을 바꾼 질문' 등의 청소년 교양서들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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