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담론(8): 인공지능은 사람이 아니라 노동의 일부를 대체한다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거나, 희망을 밝히는 사람이거나 간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인공지능 시대는 피할 수 없는 미래다. 아니 이미 진행 중인 현재다. 우리는 장차 인공지능이 보편화된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심지어 가장 과격한 노동운동 집단에서조차 인공지능 그 자체를 적대시하지는 않는다. 이미 사람의 노동 중 상당 부분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는 것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앞으로 인공지능은 갈수록 더 많은 일을 할 것이며, 머지 않은 시일 내에 우리는 온통 인공지능으로 둘러싸인 세상을 살게 될 것이다.
둘째, 인공지능이 아무리 스스로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스스로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바로 이 둘째 사실이 첫째 사실에서 비롯되는 걱정과 공포를 상당히 덜어내 준다. 인공지능은 스스로 목적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언제나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며, 그 목적에는 언제나 방향과 범위가 정해져 있다. 그 목적, 목적의 방향과 범위는 결국 사람이 정한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신이 정해 놓은 것처럼. 그 범위를 넘은 사람은 낙원에서 쫓겨났지만, 그 범위를 넘은 인공지능은 삭제될 것이다.
이 두가지 사실을 감안하면 인공지능은 사람이 하던 일을 대체하는 것이지, 사람 자체를 대체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일자리에 위협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결코 위로가 되지 않겠지만, 인공지능은 사람 전체 차원으로 놓고 보면 사람의 수고와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어쩌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되는 일자리는 원래부터 기계에게 적합했던 일자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기술이나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사람을 마치 기계처럼 우겨 넣어 부리던 업무가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기계에게 전적으로 맡겨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공지능과 사람의 관계는 증기기관, 자동차와 말의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증기기관이나 자동차는 말이 하던 일을 대신했지만, 말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자동차의 목적은 말이 아니라 사람이다. 따라서 말은 매우 빠르게 운송 영역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그렇지 않다. 사람이 하던 일을 대신하더라도 여전히 그 목적은 사람이다. 명목상일지라도 모든 인공지능 시스템은 사람의 복지를 위해 일하는 것으로 되어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사람들에게 있다.
더구나 사람의 노동은 말의 그것과 달리 매우 용도가 복잡하고 복합적이다. 후지노 다카노리는 ‘2020년 인공지능시대 우리들이 행복하게 일하는 방법’이라는 책에서 사람의 노동을 구조-비구조, 논리-감성이라는 두 개의 축을 교차시킨 네 개의 영역으로 표현했다. 가로 축의 한쪽 끝에는 ‘논리, 분석, 통계적’인 측면이 있다. 정확하게 수치화되고 합리적 이성에 의해 작동되며, 효율과 무오류가 강조되는 그런 측면이다. 반대쪽 끝에는 ‘감성적, 신체적, 직감적’이라는 측면이 있다. 왼쪽이 디지털이라면 이쪽은 아날로그다. 여기서는 효율보다는 흥미나 동기가, 합리성보다는 감성이 중시되며, 정확한 수치보다는 직관과 어림짐작(휴리스틱), 직접 경험이 강조된다. 한편 세로 축에는 업무의 절차, 종류, 과정 등이 이미 튼튼하게 정해져 있고 여간해서는 변경되지 않는 구조적 측면, 반대 쪽에는 미리 정해진 것이 없거나 있더라도 언제든지 유연하기 바뀌는 비구조적 측면이 자리잡는다. 이 두 축이 교차하면서 네 개의 사분면을 만든다. 이것을 왼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각각 1, 2, 3, 4분면이라고 하자.
이 네 사분면은 사람의 일이 가지고 있는 서로 부딪치는 속성들이며, 또한 사람의 뇌가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성격이기도 하다. 사람은 자유를 갈구하면서도 언제나 체계와 구조를 세워서 일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사람의 뇌는 나중에 만들어진 부분이 먼저 있던 부분의 기능을 덮어쓰는 대신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발달해 왔기 때문이다. 가장 본능적인 부분 위에 감정적인 부분, 그리고 그 위에 이성적인 부분이 덧씌워졌으나, 이들은 항상 동시에 작동하며,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도 그렇다. 이 두 축이 만들어내는 네 개의 분면은 사람이 하는 일이나 직업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 안에 포함된 네 요소를 표시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거의 모든 일에는 이 네 요소가 어느 정도씩 다 포함되어 있다. 이성적이기만 한 일도 감성적이기만 한 일도, 구조적이기만 한 일도, 자유분방하기만 한 일도 없다. 다만 이 중 어느 쪽으로 좀 치우치는 정도다.

교사가 하는 일을 기준으로 이 네 측면의 특징을 살펴보자.
1사분면(좌상단)은 비구조적이면서 논리적인 성격을 가진 일이다. 여기에 속하는 일은 논리적, 분석적으로 추론하지만, 기존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종류의 것이다. 따라서 이 측면이 발달한 사람은 기존의 이론이나 정설에 도전하는 가설을 만들어 내는 경향이 강하다. 교사의 경우 교육학 이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교수법을 개발하고 그 효과를 검증하는 등의 일이 여기 해당된다.
2사분면(우상단)은 비구조적이면서 감성적인 성격을 가진 일이다. 이 영역의 일은 반복되기보다는 변화무쌍하며,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해결되기보다는 감성적, 미적으로 창조되는 일이다. 1사분면이 논리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면, 2사분면은 감정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자유로운 감성이라고 하면 흔히 예술을 떠올리지만, 반드시 예술가의 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측면은 사람의 모든 일에 들어있는 혁신적이고 예술적인 속성들을 포괄한다. 과학이나 공학에도 예술적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 중에는 치밀한 논리 전개가 아니라 자유분방한 직관을 통해 큰 진전을 이룬 것들이 많다. 만약 사람의 일에 이런 속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사람은 일하는 내내 지루함과 답답함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교사의 경우 학급의 이벤트를 기획한다거나, 수업에 예술적인 요소를 도입하거나, 예기치 않은 학생들의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하는 등의 일이 여기 해당된다.
3사분면(우하단)은 감성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규칙적이고 구조적인 업무다. 즉 감정 노동이라고 부르는 측면이지만 어느 정도 반복적이며 매뉴얼화가 가능한 영역이다. 교사의 경우 학생, 학부모 상담, 혹은 학교폭력 가해·피해 학생의 교육과 치유 같은 것들이 여기 해당될 것이다.
4사분면(좌하단)은 논리적이면서 구조적인 영역이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바로 이 영역이 인공지능이 강점을 보이는 영역이다. 논리적, 수리적인 영역이라 오차의 여지가 없고, 구조적이기 때문에 예외나 변화의 여지도 없다. 교사의 예를 들면 학업성취도를 산출한다거나, 각종 교육과정 시수를 맞춘다거나, 수업 기자재를 신청, 구매하고, 생활기록부를 관리하는 등의 업무가 여기 해당된다. 흔히 이 중 2, 3사분면의 업무가 4사분면의 업무보다 인간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역시 사람에 따라 다르다. 가령 교사들 중에서도 학생들과 감정적인 관계 맺음을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는 1, 4사분면 쪽을 중심으로 업무를 배치하는 것이 인간적이다.
사람이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일이 이 중 어느 한 측면에 치우친 경우다. 아무리 사소하고 약한 동작이라도 그 동작이나 자세가 장기간 반복되면 근육과 관절에 손상이 오듯, 사람의 마음도 특정한 유형의 업무가 계속 반복되면 지루함, 피로,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데 실제 일의 현장에서 반복되는 업무는 거의 대부분 4사분면에 몰려있다. 1사분면의 업무는 계속 새로운 가설을 수립하고 검증하는 것이며, 그 리듬은 논리를 따라가지 일정한 시간을 따라가지 않는다. 3사분면의 업무는 반복되기는 하지만 감성적인 노동이기 때문에 시간은 일정하게 반복되더라도 그 일의 대상이 변화무쌍하다. 2사분면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결국 4사분면에 해당되는 일이 가장 큰 스트레스를 준다. 그런데 근대 산업사회는 일의 통일성을 해체하여, 각 한 토막씩 잘라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담당하게 하는 분업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분업 체제에서 노동계급은 4사분면의 업무만 담당하게 되었다.
사실 이 영역은 기계에 적합한 영역이다. 다만 기술 수준이 그 정도가 되지 않아 사람을 기계화하여 밀어 넣었던 것이다. 영화 ‘모던 타임즈’는 기계화할 수 있는 부분은 이미 기계화된 공장에서, 살아있는 기계부품으로 투입되어 기계의 리듬에 맞춰 일하는 노동자들의 비인간적 삶을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이 리듬은 사람의 생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결국 노동자들은 신체와 정신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은 1차 산업혁명의 완성, 즉 업무의 완전한 기계화에 다름 아닐 수 있다. 1차, 2차 산업혁명이 산업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하는 과정이었다면, 3차, 4차 산업혁명은 사무직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함으로써 그 과정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컴퓨터이며 컴퓨터는 문자 그대로 계산 도구다. 오답이 나올 수 없는 수리적 계산의 영역에서 사람은 그 정확성이나 속도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컴퓨터를 따라갈 수 없다. 그리고 컴퓨터가 제어하는 기계는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정밀성과 정확성을 가지고 지치지 않고 작업을 반복, 또 반복할 것이다.
결국 4사분면에 해당되는 노동이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것이다. 물론 필요하면 1, 2, 3사분면의 노동도 대체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에는 인공지능 개발 비용이 임금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에 수지가 맞지 않는다. 특히 2사분면에 해당되는 노동은 인공지능과 대척점에 있는 노동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이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이 흐름을 막을 방법이 없다. 이미 현재 기술만으로도 4사분면에 해당되는 업무의 거의 대부분을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나마 이 영역이 완전히 대체되지 않고 버티는 힘은 노동조합, 노동법 등 정치적인 이유에서지 기술과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인위적인 장벽은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다. 인공지능이 이 영역에서 더 저렴할 뿐 아니라 훨씬 더 유능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컴퓨터를 중추로 삼아 작동된다. Compute라는 말 자체가 ‘계산하다’이듯, 컴퓨터는 애당초 이 영역에 특화된 도구다. 그러니 논리적, 분석적, 통계적인 업무에서 사람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또 인공지능은 컴퓨터와 기계가 결합되는 방식으로 작동된다. 따라서 구조적인 업무, 즉 처리 과정과 절차가 미리 정해진 업무를 변동없이 반복하는 업무에서 사람을 완전히 압도한다. 사람은 감정을 가진 변연계 위에 대뇌피질이 덧씌워지면서 진화했지만, 인공지능 시스템은 변연계를 완전히 생략하고 대뇌피질만 있는 두뇌와 같다. 동력이 끊어지거나 고장이 나지 않는 한 지치지도 않으며, 지루해 하지도 않고,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좋고 나쁘게 느끼지도 않으며, 그 의미를 물어보지도 않는다.
여기가 인공지능의 영역이다. 달리 말하면 여기까지만 인공지능의 영역이다. 그리고 여기가 사람의 출발점이다. 산업사회에서 기계 취급받고 유사기계로 살아왔던 사람이 일 속에서 인간성을 되찾을 출발점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사회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중학교에서 24년간 사회를 가르쳤고, 서울대, 상명대, 방송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에서 정책연구를 담당했고, 현재 계간 우리교육 편집위원이다. '학교라는 괴물', '그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등의 교육 비평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거짓말로 배우는 10대들의 경제학', '세상을 바꾼 질문' 등의 청소년 교양서들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