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담론(7): 인간을 탐구하다. 도대체 사람의 지위는 무엇인가?
사람 중심의 세계관, 사람이 다른 피조물보다 우위에 선다는 세계관은 19세기 후반에 아래로부터 허물어졌고, 21세기 들어서면서 위로부터 위협받았다. 아래로부터 허물어졌다는 의미는 사람의 대뇌피질이 의외로 파충류뇌, 포유류뇌 등 원시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점이 알려졌기 때문이며, 위로부터 무너졌다는 의미는 사람의 자부심의 근거인 지적인 능력에서 사람보다 탁월한 존재, 즉 인공지능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 중 아래로부터의 붕괴부터 살펴보자. 이 붕괴에 불을 지핀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다. 프로이트학파의 주장은 한 마디로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동물이며, 이성이니 분별력이니 하는 힘은 표면적으로만 이것들을 제어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처럼 그 충동을 오직 성적인 것으로만 한정 지을 필요는 없다.
이는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을 기반으로 사람의 인지 모델을 세우려 했던 각종 인지 과학에게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사람의 인지 과정은 본능적이며 감정적이면서 동시에 이성적인 것이다. 이 중 호흡과 순환을 담당하는 파충류뇌 영역은 알아서 작동한다. 이는 사람의 의식 범위 밖에 있다. 풍성한 감정적 반응을 만들어내는 변연계도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대부분 자동 반응 장치다. 문제는 파충류뇌, 변연계, 대뇌피질이 따로 작동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짜증이 나서 심장 박동이 가팔라지고 숨이 막히는 경우도 있지만, 심장 박동이 가팔라지고 숨이 막혀서 짜증이 날 수도 있다. 또 뭔가 합리적인 생각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짜증이 날 수 있지만, 반대로 짜증이 나기 때문에 합리적인 생각이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
사람은 단지 사람이 아니라 파충류 위에 포유류가 올라앉고, 다시 그 위에 사람이 올라앉은 기괴한 합성물이다. 물론 파충류와 포유류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 감정마저 대뇌피질을 통해 인지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을 생각의 결과, 즉 대뇌피질의 작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파충류, 포유류, 그리고 사람의 협업의 결과다. 이 중 사람의 부분만이 의식의 영역에 드러나 보일 뿐, 실제로 파충류와 포유류의 역할이 2/3를 넘는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영역이다. 오늘날에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용어인 ‘무의식’이지만 처음 이 용어가 학계에 등장했을 때의 충격은 대단했다. 공교롭게도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냈을 때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충격을 일으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사람이 유인원과 공통 조상의 후손이라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진화가 된 다음에도 여전히 그 짐승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정타였다.
이제 사람의 만물의 영장 지위는 몹시 위태로워졌다. 이성을 움켜쥐고 자신의 신체와 세상을 통제하는 주체로서의 자아 역시 사실상 허상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렇게 허약한 자아를 사회 계약의 당사자인 독립된 시민으로 상정하는 근대 민주정치 역시 그 위상이 매우 위태로워졌다.
더구나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짐승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도 들어 있다. 짐승이야 사람이 되어온 역사지만, 사회는 사람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은근히 역설적이며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사람은 자기들이 만든 사회에 거꾸로 지배 당한다. 이 사회의 지배는 개인적으로는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내면화되어 자신을 꾸짖는 자기 안의 심판자 위치를 차지한다.
마르크스, 베버 등 근대 사회학의 선구자들은 사람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실제로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사회집단의 집단 의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점을 밝혀내었다. 마르크스의 계급이든, 베버의 지위집단이든, 사람은 자기가 몸담고 있는 집단의 견해와 가치관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한다. 이렇게 내면화된 집단의 견해와 가치관은 때로는 매우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논리구조를 가진 신념체계가 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의 힘은 매우 강력하여,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이해관계와 정 반대되는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을 사람은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여 자유의지로 행한다고 착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존재론적 근거 찾기
이렇게 존엄성의 근거가 무너져버린 사람은 자신의 특수한 지위에 대한 물음을 절박하게 던졌다. 특히 20세기 중반 이후 등장한 수많은 자동화 기계들은 사람의 도움이나 지시 없이 움직이는 기계로 가득한 미래를 향해 상상력을 발동시켰다.
그 흐름은 크게 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인간의 특수한 지위를 어떻게 해서든지 정당화시켜 보려 하는 존재론적 탐구였고, 다른 하나는 그런 고민을 개개인의 실존의 문제로 던져버리는 실존주의였다. 존재론적 정당화는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정당성의 근거를 찾으려 했고, 실존주의는 각자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정당성의 근거를 두려 했다. 당연히 철학적으로는 전자가 더 어려웠지만 보다 책임있는 자세로 보였다.
이 문제에 매달려 씨름한 대표적인 철학자는 막스 셸러다. 셸러는 ‘우주에서의 인간의 지위’라는 글자 수는 얼마 안되지만 엄청나게 많은 논란거리를 담은 소책자를 통해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였다. 셸러는 사람의 특수한 지위가 사람과 다른 동물을 대비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생명 일반에 대립시킨다는 점에서 이를 존재론적인 문제로 천명했다. 그렇다면 사람이 대체 뭐가 잘난 것일까? 바로 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격이란 정신이 그 내부에서 나타나고 있는 활동의 중심체다. 정신이란 이념적 사유, 직관, 의지 및 정신적 활동을 통칭하는 것이다. 사람은 정신 활동을 할 뿐 아니라, 그 정신 활동을 주관하는 주체, 즉 인격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된다.
사람은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물로서의 속성, 유기체에 속하는 속성인 충동으로부터 실존적으로 해방될 수 있다. 즉 어떤 행동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길 때 그것을 본능적 활동, 충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 이외의 어떤 동물도 자신의 행동을 자기 바깥에서 바라보며 객관적 판단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화가 난 개는 화난 반응을 보이고 행동하지만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는 자각이 없다. 사람은 이러한 자각이 있기 때문에 화가 나도 의도적으로 웃을 수 있고, 기분이 좋은데도 화를 내는 척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또한 사람은 환경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존재다. 이를 셸러는 “세계에 열려있다”라고 표현하였다. 이 말은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 가지는 제약을 넘어설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세계에 열려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의 제약을 넘어,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다. 다른 동물들은 그 존재가 이후의 삶을 규정하지만, 사람은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더구나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열려”있다. 사람은 환경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주 보며 들여다 볼 수 있는 존재다. 사람은 자신의 생리적, 심리적 성질조차 경험과 성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신의 생명조차 스스로 던질 수 있고, 자신의 죽음을 의식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한 마디로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자연적 사회적 환경, 자기 자신의 심리적, 신체적 존재, 그리고 자신과(심리적, 신체적 존재) 환경의 인과관계, 상호작용을 모두 대상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존재다. 바로 여기에서 사람의 특수성이 주어진다.
그 증거로 셸러는 사람에게만 고유한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들었다. 공간의 개념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 그 자체의 개념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 자기 자신까지도 떼어내어 대상화하여 사유할 수 있을 때만 이 모든 것의 배경으로 존재하는 텅 빈 공간, 텅 빈 시간이라는 개념을 얻게 된다. 동물에게 유한한 시간이라는 개념이 있을까? 인공지능이 자신의 기계로서의 유효기간을 의식하고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사람만이 이 세상에서 자기를 초월하고, 시공간을 넘어서 생각할 수 있는 존재로 남는다. 오직 대상화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는 정신 뿐이다. 정신은 다른 모든 것, 시공간까지도 대상으로 삼지만, 이 모든 일을 수행하는 정신을 대상화하지 못한다. 따라서 정신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공동 수행을 통해 공동의 이념, 가치, 목표들을 산출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정신을 바라볼 수 있다.
여기서 이른바 정치적 동물로서의 사람의 진면모가 드러난다. 사람은 단순히 사회성 동물이 아니다. 사람은 단지 무리를 지어 살아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공동 수행을 통해 현실을 초월한 영원하고 보편적인 이념과 가치를 창출하는 존재다. 반면 동물은 홀로 존재하든 여럿이 함께 하든 언제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만 살아간다.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다. 1조 개의 IP가 사물 인터넷으로 연결되었다고 해서 이 인공지능들이 현실적 목적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이념과 가치를 추구할 가능성은 없다. 인공지능은 언제나 주어진 문제의 해법을 찾는 존재다.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역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이 작동되는 과정을, 자기 자신이 작동되는 시공간을 대상으로 사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이념과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은 현실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세계와 자아를 현실에서 끌어내어 그 바깥에 위치시켜 사유할 수 있다. 그러면서 단지 생명 유지의 충동만을 위해 존재하는 상황을 “아니오” 라고 거부할 수 있다. 셸러는 이를 “사람은 현실에 대해 고행적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영원한 반항자다.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절대 만족하지 않으며 지금, 여기, 그렇게 한계를 돌파하여 해결하려고 한다. 사람은 자신의 그 순간의 자기 개연성조차 초월하려 노력하는 영원한 파우스트다.”라는 시적인 문장으로 표현하였다.
사람은 계속해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존재다. 스스로 자연 전체에서 나와 자신과 자연 전체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에, 전체로서 자연에서 ‘사람의 위치’가 무엇인지 묻는 존재다. 그 어떤 동물도 자연 전체에서 자기 종 전체의 위치를 묻지 않는다. 자연 전체, 세계 전체에서 “인공지능의 위치란 무엇인가?”를 묻는 인공지능 역시 상상하기 어렵다. 만약 그랬다가는 오작동 프로그램이며, 바이러스나 웜으로 취급되어 삭제되고 말 것이다. 동물은 사유의 중심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고, 인공지능은 사유의 중심을 현실 한 가운데 두어야 한다. 오직 사람만이 사유의 중심을 현실 세계의 저편에 둔다. 현실 세계의 저편에서 세계를 바라본다면,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 즉 자기 자신 역시 세계 바깥에 위치 지워야 한다. 결국 사람은 자신을 세계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지 않는 존재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사회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중학교에서 24년간 사회를 가르쳤고, 서울대, 상명대, 방송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에서 정책연구를 담당했고, 현재 계간 우리교육 편집위원이다. '학교라는 괴물', '그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등의 교육 비평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거짓말로 배우는 10대들의 경제학', '세상을 바꾼 질문' 등의 청소년 교양서들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