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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SKY 캐슬’, 다시 이야기 ③ : 대입전형의 ‘공정성’에 대하여

#430 한닦, 교육자 2019.02.27

‘SKY 캐슬’은 대입전형이 불공정하다는 근거?

 

‘SKY 캐슬’은 우리나라 대입전형이 ‘공정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새삼 깨우쳐준 드라마가 됐습니다. ‘극상층’의 가정이, 서민 가정에서는 상상도 해보기 어려운 전략으로,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을 이용하여 ‘서울대 의대’ 같은 ‘극상’의 대학에 자녀들을 입학시키고 있다고 파헤친 드라마가 된 셈입니다. 지난 10년여에 걸쳐 우리나라 대입전형은 ‘수시’ 쪽으로 비중을 옮겨 왔고, 이제 수시의 선발 규모는 전체 대학 모집 정원의 70%를 넘어서게 된 바, 수시의 대종이 된 학종1 이 공정하지 못하다면, 대입전형이 점차 공정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고 비판할 만합니다. 실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은, ‘SKY 캐슬’을 근거로, 수시(‘학종’)의 비중을 줄이고 정시(수능위주 전형)의 비중을 늘리라고 청와대 앞에서 시위하기도 했답니다. 지금이라도 ‘공정한’(수능위주 전형을 늘리는) 방향으로 대입전형을 개선하라고 말입니다.

 

 

대입전형은 물론 공정하지 않다!

 

우리나라 대입전형은 공정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수능위주 전형(정시)의 비중을 늘리면 공정해질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학종을 줄이거나 없애거나 또는 고치면 공정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나라 대입전형 자체가 근원적이고도 총체적으로 공정하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능이 낫네 학종이 낫네 하고 논란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논란하는 바탕에는 이른바 ‘실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오롯이 ‘실력’에 근거해서 전형할 수 있다면 공정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마는, 그 믿음 자체가 허구이며, 그런 믿음 위에 대입전형 제도를 세운다고 해서 공정해질 리 만무합니다.

 

 

Meritocracy?

 

‘실력주의’가 허구이고 그 말 자체가 오용되고 있다는 점은 그 말(‘meritocracy’)을 지어낸 사람의 충고를 통해서 확인하는 게 낫겠습니다. Michael Young은 1958년에 ‘The Rise of Meritocracy’라는 책을 냈습니다. ‘meritocracy’라는 말을 처음 조어해 지은 이 책은 실력주의를 지지하거나 그런 체제가 근대사회의 불가피한 구도라고 알리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력주의 체제’(meritocracy)라고 불릴 법한 근대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저술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는 이미 학교교육이 공직에 들어서려면 피할 수 없는 격전장이 되고 있었습니다. 책을 출간했던 시점에서 보더라도 100년 이상, ‘오직 실력에 따라 직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원리 위에 사회가 구축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어져오고 있었습니다. Young은 그런 믿음이 지배하는 사회가 바람직하지도 않고 지속가능하지도 않다고 보여주려고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학자들을 포함해서) 그의 저술 의도와 책의 내용 자체를 곡해하거나 간과했습니다. 그가 풍자하려고 만들어낸 가상의(‘실력주의’) 사회를 오히려 긍정적이게 뒤집어, meritocracy라는 용어를 ‘개개인의 실력에 맞추어 보상하는 원리’를 뜻하는 것처럼 비틀어 놓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런 것처럼, 이제는 공정한 사회라면 마땅히 ‘meritocratic society’가 되어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게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Young은 자신의 책이 뜻했던 것과 달리 이런 사태를 초래하는 데 한 몫 해버린 것에 대해 매우 실망했던 차에, 영국 수상 Tony Blair가 노동당의 정책 초점을 진정한 실력본위 사회(genuine meritocracy)를 구축하는 데 두겠다고 연설한 것에 자극받아 아래와 같이 비판했습니다. 학교교육을 통한 사다리 오르기를 ‘실력’에 근거한 계층 결정이라고 포장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실력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것인 것처럼 여기는(주장하는) 행태를 힐책했습니다.2

 

개개인을 각자 나름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에 임용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그러나 특정한 부류의 ‘실력’[학업 성취도로 표출되는 실력]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이 하나의 ‘새로운 계층’을 독점하도록 하고, 다른 사람들에겐 들어설 여지도 주지 않는 것은,3 그 이치에[개개인이 실력에 따라 살 수 있게 하는 이치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태이다. 능력(ability)은 계층간에 어느 정도 고르게 퍼져있기 마련인데, 교육이라는 엔진이 그것을 특정 계층에게 몰려 있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교육이 가진 좁은 범주의 가치기준에만 근거해서 사람들을 체질하는(sieve) 장치로 학교와 대학이 둔갑함으로써, 하나의 사회 혁명이 일어나 버린 셈이다. 수많은 자격증과 학위를 손에 쥐게 된 ‘교육’은 소수에게만 ‘가’(approval)라는 인증을 내주면서 다수에게는 불가(disapproval)의 낙인을 찍고 있다. 7살 또는 그 나이도 되기 전에 성적이 바닥인 ‘열반’(劣班)에 처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의 가능성을 부인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 ‘새로운 계층’은 이런[교육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있고, 사실상 그것을 자기들의 통제 아래 두고 있으며, 그래서 자신들의 계층 자체를 [대대로 물려주게] 재생산하고 있다.
….
결과적으로 불평등은 해가 갈수록 비통하리만큼 커지고 있다. …
이렇게 ‘실력주의’ 사회가 더욱 양극화로 치닫는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론에서] 실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을 더 이상 쓰지 않는다면, 아니 최소한 그 용어가 가리고 있는 어두운 면만이라도 인정하게 된다면, 그나마 사회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Young의 비판은 대입전형이 이른바 실력주의를 바탕으로 삼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공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라고 일러줍니다. 위에서 읽을 수 있듯이, 교육(학교나 대학)에서 포착하여 점수로 매겨주는 협소한 범위의 능력 외에 다양하고도 요긴한 능력들이 사회 구성원들 전체에게 두루 퍼져있을 터인데, 실력주의 체제에서는 그 수많은 ‘능력자’들을(이른바 엘리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능력 없다’고 갈라 쳐버립니다. 이런 실력주의 체제가 공정할 리 없고, 그런 체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우리 대입전형 방식 또한 공정할 리 없습니다. 우리의 대입전형 양식은 태생적으로 공정할 수 없게 돼먹은 셈입니다.

 

 

대입전형의 공정성 이야기 전에 교육을 이야기해야

 

실력주의에 대한 Young의 비판과 한탄에 귀 기울여보면 우리 대입제도가 공정할 수 없다는 게 자명해 보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가 ‘실력본위’의 전형제도를 공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좀 더 들여다보면, 교육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니, 몰이해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교육을 지나치게 ‘상식적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습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개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것이 효과적이고도 지당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정부의 정책 문건들은 공공연히 교육을 ‘계층 사다리’라고 지칭하며, 대통령은 교육을 통해 계층 이동이 가능하도록 하겠다고 대놓고 공언합니다.(공약까지 내걸었습니다.) 교육의 역할이 ‘개천의 용’이 많이 나게 하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이런 말들을 거리낌 없이 내뱉고 그것들을 거부감 하나 없이 받아들이는 우리 통념에서 보면, 교육은 출세를 위한 경쟁의 장이고, 그 경쟁의 승패를 학업 성취도로 판가름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육은 그런 ‘수단’이 아닙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명문대학에 입학하고, 궁극적으로 돈 많이 벌고 권력도 쥐게 되고 사회적인 명예까지도 얻을 수 있는 자리에 오르기 위한, 그런 수단이 아닙니다.

 

교육이라는 세계에는 그 세계 고유의 가치와 절차가 있습니다. 예술의 세계에 고유의 경지와 단계가 있고, 경영의 세계에 또한 그 나름의 덕목과 원리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우리의 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하위 세계들은 각각 나름의 이상과 실천 양식을 구축하고 정련시킵니다. 이 다양한 세계가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함께 조화를 이룰 때 인간 사회는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 또는 소수의 부문이 다른 부문들을 구속하고 생활세계 전반을 전횡하게 되면, 사회는 통합과 조화의 근간을 잃게 됩니다. 교육을 계층 이동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결국 경제나 정치 같은 부문이 교육을 식민(植民)하도록 만들어버리는 꼴입니다. 교육을 ‘취업 가능성’(employability)을 높이는 일이거나 ‘사회 지도층’에 오르기 위해 ‘스펙’을 갖추는 일에 다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식민된’ 상황에서는 ‘교육’이 교육일 수 없습니다. 교육은 단순히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것이 될 뿐입니다. 세상이 그런 것 아니냐고 체념하게 됐을 정도로, 우리 사회의 교육은 이미 그렇게 돼버렸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 본연을 잃었다고 지적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4 교육에서 ‘성취’라면 교육적 가치와 원리를 존중하며 일궈내야 하는 것이 되어야 마땅하겠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하려들면 ‘교육’이 그렇게 ‘한가하게’ 추구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이제 학업 성취는, 돈으로 전략과 수완을 사거나 지위로 편법과 비리를 동원해서라도 쟁취해내면 그만인, ‘등급’이나 ‘점수’에 불과한 것이 되어 있습니다. ‘SKY 캐슬’이 그린 그대로입니다. 이렇게 된(‘교육’이 교육이 되지 못하는) 지경에서는 교육이 공정해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사다리 오르기’ 게임이 돼버린 교육에서 ‘공정’의 의미가 교육의 진정한 가치를 존중할 때의 ‘공정’의 의미와 일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길게 말할 자리가 아니기에, 예 하나로 논지를 세우겠습니다. 이를테면, 진정한 교육의 맥락에서는 그 기회가 ‘필요한’(상대적으로 성취가 미흡한) 사람에게 가도록 해야 온당합니다. 교육 기회는 이른바 ‘필요본위’(need-base)로 주어져야 교육의 정의(正義)가 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위 경쟁이라는 맥락에서는 교육 기회가 승자에게 가야할 것입니다. 언필칭(言必稱) ‘실력본위’(merit-base)로 기회가 주어져야 ‘공정하다’고 용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후자의 맥락에서만 교육의 공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입전형의 공정성을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교육을 이야기하는 맥락에서도 ‘공정’의 이야기를 할 때는 교육과 관계없이 하고 있습니다. 사실 Young의 비판도 그렇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실력주의 체제에서 교육 자체가 훼손된다는 점을 문제 삼지 않으며, 그 문제를 인지하고 있지도 않았던 듯합니다.5 ‘실력주의’가 교육 성취가 아닌 다른 부문의 능력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 지위를 배분하는 정의로운 원리도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실력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Young의 비판은 적어도 ‘사회’를 논의하는 맥락에서 타당하며, 그 점에서 우리 대입전형이 근원적으로(사회적으로)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판 역시 타당합니다. 그러나 저는 교육(대입전형 포함)에서의 공정을 이야기하려면 Young의 논지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 세계에서 공정은 교육을(경제나 사회 등이 아닌 교육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의 ‘멍석’을 깔아놓고 사회적 지위 배분의 공정을 요구하고 소득 배분의 공정을 요구하는 것은, 공정을 진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못 됩니다. 교육의 세계에서는 ‘교육다운 교육’의 기회 배분을 이야기해야 비로소 공정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순진하고 한가한 이야기?

 

저의 이야기에 대하여 두 방향의 반응을 짐작해보게 됩니다. 하나는 ‘현실에서 그게 먹힐 이야기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 세계에서 벌어먹고 있으니 교육밖에 생각을 못 하는구나’하는 것입니다. 우선, 교육만 생각하기 때문에 위에서와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교육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와 예술, 그리고 종교 등 사회의 모든 영역들이 독자적인 가치와 실천 양식을 피워낼 수 있을 때 사회는 사람답게 살만한 공간이 됩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씨름해온(앞으로도 좀체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이른바 자본주의의 문제는 요컨대 ‘경제’ 부문이 다른 모든 부문을 유린하게 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런 부조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인간 사회의 복지(well-being)는 꿈꿀 수 없습니다. 교육(대입전형)에서의 공정을 이야기할 때 교육의 본질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 ‘복지의 꿈’을 살려보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교육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영역들이 ‘자본’의 식민에서 독립할 수 있어야 그나마 건강한 사회를 꿈꿔 볼 수 있습니다. 저의 이야기가 ‘꿈’이라고 형용되고 있는 만큼 ‘현실에서 먹히기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을 미래로 그대로 미뤄두지 않으려면, ‘먹히지 않는’ 이야기를 거듭해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래도 ‘발전’의 역사라면, 그것은, 인류가 당대에 ‘먹히지 않는’ 이야기를 꾸준히 했기 때문에, 미래가 현실보다 더 나아져왔다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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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전국의 모든 대학을 두고 보면, ‘학종’(학생부종합전형)이 수시 전형의 대종을 이룬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수시에는 학생부교과전형이 가장 큰(70% 이상) 비중을 차지한다. ‘논술’이나 ‘적성고사’ 전형 등도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수시에서 ‘학종’은 학생부교과전형의 반 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일반적으로 학종을 수시 전형의 핵심인 것처럼 여기게 된 것은, 우리가 ‘주요 대학’에만 주목해서 대입전형을 논란하기 때문이다.(‘주요 대학’에 관심을 둘 ‘수준’이 되는 사람들만 대입전형 논란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이른바 서울의 ‘주요 대학’만 두고 보면, 학종이 수시의 대종을 이루고 있는 게 사실이다.​
  2. 2001년 6월 29일 ‘The Guardian’에 기고한 글(‘Down with meritocracy’)에서 따 왔다. [ ] 안의 구절이나 표현들은 원문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원문에 없지만 삽입했다.
  3. 이런 사실 진단을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언설로 놔둘 필요 없다. 우리나라에서 정부의 고급 관료, 검사 판사(그리고 변호사), 의사, 교사, 대기업 사원 등(그리고 이런 이력을 바탕으로 권력을 쥐기에 이르기까지 출세하는 ‘정치 지도자’들까지), Young이 이야기 하는 ‘새로운 계층’에 진입하는 사람들이 입증한 ‘실력’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충분히 납득하고도 남을 진단이다. 이 ‘엘리트’들이 가졌다는 능력은 ‘시험 치는 능력’이다. 시험을 잘 치지 못한(그 ‘특정한 부류의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 사람들이 ‘새로운 계층’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은 매우 좁다. Young의 지적은 그가 염두에 뒀던 영국보다 우리 한국 상황에 더 적절하다.
  4. 지난주 이야기(‘SKY 캐슬’, 다시 이야기-⓶)에서 우리 학교교육이 ‘점수위주’로 흐르게 되는 사태를 다뤘다. 그 이야기는 교육이 본연을 벗어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교육이 ‘사다리 오르기’ 게임으로 간주되는 우리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현상일 것이다.
  5. 이 점을 들어 Young을 비판할 이유는 없다. 그가 사회에 대해서보다 교육에 대해서 생각이 짧았던 것은, 그 역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외에 다른 결함이 아니다. 아무리 공부나 지혜가 탁월하다 하더라도, 인간인 우리는 생활세계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대해서만 정통할 수 있을 뿐이다.
교육자 한닦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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