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Y 캐슬’, 다시 이야기 ②
‘극상층’의 학종 유린?
‘SKY 캐슬’은 “상류층의 대학 입시에 대한 욕망과 실태”를 다루었다고 대체로 받아들입니다. 교육부 장관은, ‘SKY 캐슬’을 봤냐는 질문에 “하도 얘기를 해서 한 번 봤다”면서, “과도한 부분은 있지만 어쨌든 현실을 반영한 것 같다”고 대답했답니다. “수시 학종(학생부종합전형) 공정성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다”고 나름의 해석을 덧붙이기도 했답니다. 최근 취임한 서울대 총장도 ‘SKY 캐슬’에 관한 질문을 받고 “학생부종합전형에 대해 상당한 불신이 있다고 느꼈다”고 답했답니다. “예측 가능하도록 학종의 투명성을 높이는 일은 중요하다”고 첨언도 했답니다. 일반 사람들에서부터 주요 교육정책 결정자들에 이르기까지, ‘SKY 캐슬’이 우리 교육에 주는 시사점을 찾는 데는 큰 차이가 없는 듯합니다. ‘SKY 캐슬’은 ‘극상층’이 ‘극상위권’(서울대 의대와 같은) 대학에 자녀를 진학시키기 위하여 학종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들춰냈고, 학종이 ‘캐슬 주민’과 같은 계층에게 절대로 유리한(그래서 매우 불공정한) 전형이란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고 해석됩니다. 대입전형을 공정하게 만들려면 학종의 비중을 줄여야 하고(즉, ‘수능 전형’의 비중을 늘리고), 더 나아가, 그 전형 기준과 과정을 더욱 투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란 점을 확연하게 시사했다고 받아들여집니다.
학종이 투명하지 못하고 그래서 공정하지도 않다는 ‘사실’은, ‘SKY 캐슬’이 그리는 대로 보면 이런 것입니다. 첫 회를 보면, 서울대 의대 수시(학종)에 합격한 ‘영재’라는 학생의 ‘포트폴리오’를 얻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고1 신입생 엄마(아빠)들이 그려집니다. 그렇게 다투게 되는 연유는 ‘강예서’1라는 학생과 그녀 엄마 ‘한서진’의 대화에서 드러납니다.
예서: 영재 오빠 포트폴리오만 있으면, 엄마, 황금 로드맵이 생기는 거잖아 그치?
엄마: 그렇지. 목표에 골인할 수 있는 필살 전략이 생기는 거지.
예서: 나도 영재 오빠처럼 서울 의대 꼭 가고 말거야.
학종으로 합격했던 학생의 ‘포트폴리오’는 ‘불투명한’ 학종의 내막을 밝혀주는 등불이자 합격으로의 길을 안내하는 ‘로드맵’입니다. 고등학교 3년(실지로는 2년 반)에 걸쳐 그 포트폴리오를 자신의 이력으로 재현시키면, 서울대 의대 합격은 보장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대입전형은 “치열한 정보 싸움”2이라, 합격생의 포트폴리오를 얻게 된다면 미래의 합격을 손에 쥔 것이나 다름없을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SKY 캐슬’에서 ‘영재’의 포트폴리오는 누구에게도 넘겨지지 않습니다. 포트폴리오에는 영재와 그 가족의 ‘프라이버시’가 들어있을 터라 공개하기를 꺼렸을 것으로 짐작되기도 하지만, 그 포트폴리오 자체가 정직하게만 만들어졌을 리 없겠기에, 공개하는 것을 기대했던 것 자체가 순진했던 것으로 비쳐집니다. ‘SKY 캐슬’은, 이를테면, 영재의 “자소서 4번 문항… 고등학교 재학중 감명 깊게 읽은 책 세 권”에 대해 쓰는 것을 이웃의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도와주었다고 암시합니다.
‘영재 엄마’는 ‘예서 엄마’에게 포트폴리오를 건네는 대신 다른 ‘더 확실한 합격 비결’을 전수합니다. 영재를 도왔던 ‘코디’를 고용하라고 조언합니다. 은행이 ‘VVIP’들에게만 주선하는 ‘설명회’를 통해서 접할 수 있는 그 코디는 “서울대 입학사정관 출신”이며, “지난 8년간 서울대 의대만 16명을 합격시킨” 실적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 해 두 명 학생만 맡는데, 맡은 학생 모두를 서울대 의대에 합격시킨 이력입니다. 수십 억 원을 들이면서, ‘예서 엄마’는 이 코디를 고용하는 데 성공합니다. 들은 대로, 코디는 내신(교과) 성적을 극상으로 유지시켜 줄 뿐만 아니라, 교내외 모든 활동까지도 합격 맞춤으로 주선하고 안내해 줍니다. 그대로 가면 학종을 통해 서울대 의대에 진학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비칩니다.3 ‘SKY 캐슬’은 ‘극상층’이 그렇게 학종을 유린할 수 있으리라고 짐작하도록 만듭니다. ‘보통 사람’들이 학종의 불투명성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동안, ‘극상층’은 오히려 그 불투명성을 이용하여 선망의 대학교육 기회를 낚아채갈 수 있다고 그립니다.
학종을 문제 삼는 일은 새삼스러운 게 아닙니다. ‘SKY 캐슬’이 방영되기 전부터 학종은 ‘깜깜이’ 전형이니 ‘금수저’ 전형이니 비아냥거려져 왔었습니다. 전형 기준이나 과정 자체가 불투명하고 또 ‘스펙’을 중시하기 때문에, 가정 배경이 크게 작용할 수 있는 불공정한 전형이라는 비판이 전부터 계속 이어져 오고 있었습니다. ‘SKY 캐슬’이 한 몫 한 게 있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의혹에 실체를 부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SKY 캐슬’은 학종의 흑막 뒤에서 ‘극상층’들이 구사할 것이라고 수긍할 만한 전략을 극단적이고도 ‘드라마틱하게’ 실연(實演)시켜 보여주었습니다. 설마 했더니 ‘정말 그렇게까지 하는구나!’ 하는 확신을 심어주었고, 제도에 대한 배신감과 기회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강렬하게 느끼도록 자극했습니다. 심증만 가지고 끓고 있던 ‘서민’들에게 ‘물증’을 제공하여, 제도 불신의 뇌관을 터뜨린 셈입니다. 교육부가 그런 ‘사교육’에 대해 당장 ‘실태조사’에 들어가겠다고 황망히 발표했을 정도로, ‘SKY 캐슬’은 학종에 대한 문제의식을 크게 증폭시켰습니다.
학종의 투명성을 높인다?
학종의 문제를 다뤄가야 할 방향은 두 갈래로 이야기됩니다. 하나는 학종의 비중을 줄이고 수능전형의 비중을 늘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학종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교육부장관도 서울대학교 총장도, 이런 방향으로 정책이 가야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말합니다. 교육부는 이런 방향의 조치를 이미 취하기까지 했습니다. ‘공론화’라는 떠들썩한 과정을 거쳐 결론 낸 이른바 ‘2021학년도 대입제도 개편’이 바로 그것입니다.
과연 수능의 비중을 늘리거나 학종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대입전형을 ‘공정하게’ 만드는 길이고, 우리 교육을 바로잡는 길일까요?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학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되는 두 개의 ‘개혁’ 방향은 결국 하나의 전제 위에 존립합니다. 수능전형으로 가자고 하든 학종을 투명하게 만들자고 하든, 결국은 모두 ‘숫자’를 근거로 전형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고 바람직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전형 과정이나 결과(당락 판정) 모두 ‘객관적으로’ 누구나 확인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최선이라는 입장인 바, 이런 입장의 정점은 ‘계량화’에 있습니다. 능력(merit)을 객관적으로 측정해서 우열을 가리는 것이 대입전형의 최선 대안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대안은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교육을 전문적으로 연구한다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문제들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 일반에서도 인지하여 오랫동안 제법 심각하게 논의해온 문제들입니다. 그 가운데 핵심인 것을 지목한다면, ‘점수위주’ 교육의 문제를 거론해야 할 것입니다.4 이 지점에서 독자는 실망할지 모르겠습니다. 대단한 사안을 꺼낼 줄 알았더니 진부하고도 진부한 이야기를 꺼낸다고 실망할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점수위주’ 교육의 문제는 이제 진부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물정을 모르는’ 순진하고 비현실적인 짓으로 여겨질 만큼 됐습니다. 입학전형제도를 거론할 때마다 제기됐었지만, 최근으로 올수록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둔감해져 왔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간과해선 안 될, 교육의 본말전도를 가져온 어마어마한 문제입니다.
점수위주 교육을 사소한 문제인 것처럼 여기게 된 데는 정부 당국의 탓이 큽니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정부는 ‘사교육’을 줄이겠다는 일념으로 대입제도를 대놓고 ‘점수위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수능 방송’(선다형 문제풀이 방송)으로 수능에 대비하라고 권장하더니(2004년), 나중에는 수능 문제의 70% 이상을 EBS 수능 강의에서 출제한다는 정책까지 채택해서(2011학년도)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수능을 준비하는 모든 학생이 EBS 수능 강의 교재의 문제 풀이에 몰두해야 마땅한 사태를 초래했고, 이제는 학교에서도 공공연히 EBS 교재 문제 풀이를 수업의 근간으로 삼게 됐습니다. 학교교육이 그렇게 가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경계됐던 ‘입시위주’ 교육의 행태를, 결국 정부는 공식적인 학교교육의 모습으로 들여와 ‘정상적인’ 교육이라고 인증해준 꼴이 됐습니다.
이제 정부는 ‘시험위주 교육은 안 된다’는 말을 하기에 너무 제 발 저릴 것입니다. 학생들을 참고서 문제 풀이에 전력하도록 만들어 놓고, 그런 공부는 공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테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점수위주’ 교육의 문제는 정책 논의 수면 밑으로 눌리게 됩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정책논의에서 교육이나 대입제도 문제는 교육의 본연에 비추어 다뤄지지 않습니다. 정부는 교육 문제를 사교육비니 공정 경쟁이니 하는 ‘교육 밖’의 문제로 와전시켜버립니다. 학교에서 어떤 교육과정이 운영되건, 학생들이 무엇으로 어떻게 공부하건, 그 실상에 대해선 눈감고 오직 사교육비 통계가 어떻게 잡히는지, 그리고 경쟁의 공정 여부에 대한 시비가 얼마나 이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습니다. 우리나라에서와 같이 정부가 거의 독점적으로 정책 의제를 장악하고 그 논의를 위한 언어(시각)까지 지배하는 상황에서, 언론이나 ‘교육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정부가 유인하는 대로 교육담론을 만들어 갑니다. 교육 본연의 문제에 대한 촉수(觸鬚)를 스스로 제거한지 오래입니다. 이런 사태가 지속되면서 교육 실상의 문제에 대해선 관심이 떠나게 됐고, 이제는 점수만 겨냥하는 수업이 학교에 만연하지만 전혀 문제시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SKY 캐슬’을 두고 일어나는 논란도 이런 왜곡된 ‘공론’에 계속 연장되는 형국입니다. 마치 객관적이고 투명한 점수로 대입 경쟁을 판가름하면 교육이나 대입 문제가 상당히 해소될 것처럼 이구동성으로 떠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갈 때 학교의 교육 자체가 어떻게 될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즉응 휘몰이에 혼을 빼앗겨선 안 됩니다. 교육의 본연을 희생시키고 대입전형의 ‘공정성’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만) 그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그 허상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게임이 승자에게 어마어마한 보상을 약속하고 또 그 승자를 결정하는 방식이 ‘공정하다’고 느껴진다면, 다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고 게임에 뛰어들겠습니까? 그 게임의 와중에 참여자들 대부분의 지적 능력이나 도덕적 판단력이 흐려져 버린대도, ‘판돈’이 크고 ‘공정하다’는 이유로 그 게임에 흔쾌히 뛰어들겠습니까?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일반적인 교육정책 논의나 ‘SKY 캐슬’에 대한 갑론을박은 그런 게임에 빠진들 대수로울 게 있느냐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대입전형이라는 게임 규칙이 ‘점수로 투명하게’(‘공정하게’)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그 규칙 때문에 우리 교육이 심각하게 본연을 이탈하게 되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라는 식입니다. 그 결과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해서도 해악이 초래된대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식입니다.
점수위주 교육 불사?
이른바 능력을 숫자로 측정하여 그 숫자 크기에 따라 차례로 교육기회나 직책을 부여한다면, 그런 ‘능력’을 키우는 것으로 간주되는 ‘교육’은 숫자(점수) 위주로 가게 마련입니다. 우리 학교교육 상황이 그 사실을 충분히 입증해줍니다. 이런 교육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지, 세 가지 측면에서만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수많은 문제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핵심이라고 여기는 점을 추려봅니다. 여기 이야기하는 문제들이 야기되는데도 ‘객관적이고 투명한 점수’를 맹신해야 할지 재고해볼 수 있길 바랍니다.
교육(학업) 성과(능력)를 객관적인 숫자로만 재서 인정한다면, 잘 아시다시피, 교육이나 능력 신장은 지나치게 편협 되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흔히 인정하듯이, 교육은 ‘전인’을 키우고자 합니다. 지성과 인성 그리고 건강까지 갖출 수 있도록 사람을 키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전인’의 실체를 숫자로 드러내는 데는 한계가 너무 큽니다. 오늘날 아무리 측정 평가 기술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교육의 성과를 계량적으로 측정하려는 시도는 지극히 일부를 포착하는 데 그칩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측정 결과인 ‘점수’는 교육 성과(능력)의 모든 것을 표시하는 것처럼 간주됩니다. 점수가 높은 사람에게는 명문 대학의 교육 기회가 주어지고, 높은 연봉의 직장이 주어지며,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가 주어집니다. 이런 판국에서 ‘교육’은 오직 ‘점수’를 겨냥하게 됩니다. 숫자로 표시될 수 없는 도덕성이니 시민의식이니 하는 덕목은 교육에서 무시됩니다. 점수 경쟁이 치열할수록, 그리고 경쟁 결과에 따른 ‘배당 몫’이 클수록, 교육은 매우 좁고 편벽되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 영역은 교육의 실질적 정의(定義)에서 배제됩니다. 이를테면, 수능에 포함되지 않은 과목의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자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행위가 됩니다. 가르치는 교사도 교실에 앉은 학생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뒤틀려 버린 학교교육이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 전모를 파악할 길은 아직 없습니다. 파악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여 오지도 않았고, 실증적으로 파악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지위 ‘높은 사람’의 집단일수록 군 복무 의무를 제대로 이행한 비율이 낮고, 범죄를 밝히고 죄를 처단하는 자리에 ‘점수’로 오른 사람들에게서 비리와 협잡의 행태를 보게 되는 사례가 적지 않으며, ‘인술’이라는 덕목을 실천하는 의사가 뉴스거리가 될 만큼 희귀한 게 우리 사회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런 양상이 우리 사회의 교육(사람 키우는) 양식과 무관할 리 없습니다. ‘국영수’는 ‘도구과목’이고 역사와 사회는 ‘암기과목’이며, 과학은 과반의 학생들이 버려도 되는 과목이고, 윤리는 ‘옳은 말씀’만 가려내면 되는 쉬운(전략) 과목이 되는, 이런 학교교육 사태와 무관할 리 없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교육은 점수위주로 거듭 황폐해져 갈 것이고, ‘교육받은 사람’들의 행태는 더욱 추해져 갈 것이며, 궁극적으로 우리는 교육 아닌 것을 ‘교육’으로 규정하며 퇴락해 갈 것입니다.
점수위주로 흐른다면, 또한, 교육에서 과정(過程)은 주목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교육의 잘잘못은 오직 결과(점수)로 가려지는 만큼,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아무래도 그만인 것이 됩니다. 교과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바탕에서 문제를 해결하든, ‘찍어서’ 문제를 해결하든, ‘맞힌’ 문항에 관련된 성취도(실력)는 동등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래서 교육에서 과정의 관건은 원칙에 있지 않고 ‘효율’에 있게 됩니다. ‘잘 가르치는’ 학원 강사나 학교 선생님의 공통점은 과정을 중시하려는 노력을 비웃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직도 시와 소설을 감상합니까? 시와 소설을 감상해선 안 됩니다. 시는 ‘공식’이고 소설은 ‘구조’입니다.” 어느 세월에 시와 소설을 감상해서 점수를 올릴 수 있겠느냐는 충고입니다. 시나 소설에 관한 시험 문제의 답을 찾는 프레임을 만들어 줄 테니, 그것을 적용해서 정답만 찾아내면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가르침을 받아 ‘고득점’에 이르면 훌륭하게 ‘교육받은’ 학생이 됩니다. 이런 형국의 연장에서, ‘SKY 캐슬’은 좀 더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줍니다. ‘코디’가 자기가 맡은 학생을 세뇌하는 것이나 진배없는 행위를 보이며, 공부에 대한 동기와 자신에 대한 신뢰를 키우기 위해 엄마와 급우들까지도 적대시하라고 유혹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더라도 서울대 의대에 합격할 수준의 점수만 얻는다면, ‘교육’은 성공이 됩니다. 우리는 이런 ‘교육’을 훌륭한 교육이라고 갈구하고 환영하며, 우리 아이들을 기꺼이 그런 ‘교육’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점수위주 교육은 과정을 비교육적이게 변질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필경 부패까지 초래합니다. 점수를 노리는 행위는 정직이나 원칙보다 부패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점수를 얻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판도에서, 그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부패한 수단’의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시와 소설을 하나하나 읽고 음미하는 게 ‘시간 낭비’라는 조언에 수긍하며 문학 문항의 정답 찾는 공식을 익히려 드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시험 문제지 자체를 빼낼 궁리를 하게 되고, 학생부 기록을 조작할 궁리를 하게 되며, 대입 지원 서류를 거짓 작성하거나 ‘전문가’에게 맡기려고 하게 됩니다.
교육 행위는 교육적인 목적을 추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까지도 교육적일 때 비로소 교육일 수 있습니다. 교육을 잘 받았는지,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하려 한다면, 마땅히 교육의 과정을 검증해야 합니다. 교육의 과정에 대한 존중과 검증이 무시되는(‘교육받은’ 사람을 점수로만 평가하는) 사태에서는, 부패한 수단이 ‘실력’(점수)을 입증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도가 됩니다. 부패한 수단을 동원하여 고득점에 이르려는 유혹을 떨치기 어렵게 되고, 교육 세계에는 결국 부패가 만연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형국에서 우리 교육은 본색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공적인 제도와 기관에 대한 불신은 나날이 증폭되고 있고, 그런 불신을 처리하는 우리 사회는 어마어마한 공적 자원을 흘려버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점수가 실력?
이제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측정을 잘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점수로 나타낸다고 해서 ‘단편적인 지식’만 보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할지 모르겠습니다. 사고력과 창의력 더 나아가 도덕성이나 시민의식까지도 타당하게 측정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측정의 점수를 근거로 수업도 이끌고 대입전형도 한다면, 교육이 편협해지거나 과정이 묵살되는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강변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야말로 순진한 것이고, 건너들은 ‘전문가’ 이야기에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측정과 평가의 이론과 기술이 나날이 발전해오고 있지만, 전인교육의 전모를 점수로 포착해낼 수준에 이르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미래가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가능하기나 할지 모르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측정 못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과장하며 ‘점수의 신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점수(평가) 위주의 사회에서 이익과 권력을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삶 속의 주요 경쟁들이 점수로 판가름되고 또 경쟁에 걸려 있는 ‘몫’이 큰 경우가 많은, 한국과 같은 사회는 사실상 ‘평가자’들이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통치하고 있는 엘리트들이 대체로 시험 점수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며 지금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다고 본다면, 그들의 출세와 권력을 정당화해 준 사람들은 바로 시험을 출제하고 채점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시험의 전제체제(‘testocracy’) 아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체제에서 ‘평가자’들은 암암리에 막대한 통치력을 휘두르고 있으며,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점수의 신화를 꾸준히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실력’의 실체는 그들이 재는(점수로 표시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신화를 거듭 사회에 주입합니다. 학종 문제를 부각시킨 ‘SKY 캐슬’이 학종을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바꾸라는 것을 시사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가 이런 신화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증좌입니다. 이대로 계속 머문다면 우리의 교육 행태는 ‘점수’를 모시는 사교(邪敎)에 빠져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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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이야기를 학생부종합전형을 두둔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학종이든 다른 어떤 전형 양식이든, ‘객관적이고 투명해야’ 한다는 이유로, ‘공정해야’ 한다는 이유로 대입전형의 양식을(심지어 교육 전체를) 점수위주로 몰고 가야 한다는 주장(인식)에 대해서만 문제 삼은 것으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대입전형의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더 면밀하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 ‘신아고’라고 이름 붙여진 명문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 학생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의사이며, 할머니와 엄마가 ‘3대째 의사 가문’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쏟아 그녀의 대입 준비를 지원한다. 학교에서도 그녀는 서울대 의대에 합격할 것으로 기대한다.
- 포트폴리오를 얻기 위해 “유난 떤다”고 핀잔하는 남편에게 ‘한서진’이 던진 말이다.
- ‘SKY 캐슬’에서 ‘예서’가 실지로 서울대 의대에 합격하게 되는 결말까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코디를 고용해서 자녀를 서울대 의대에 진학시키는 것이 극상층의 사회에서는 공공연한 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 흔히 그래왔듯이, ‘입시위주’ 교육의 문제라고 해도 무방하다. 여기서는 교육이 ‘숫자’(점수)에 휘둘리게 된다는 점을 드러내려고 ‘점수위주’라는 말을 썼을 뿐이다. 입시(입학시험)는 결국 ‘점수’로 귀결되는 것이며, 입시위주나 점수위주 모두 교육을 심각하게 뒤틀고 훼손하는 경향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