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담론2: 이른바 역량이라는 것
지난 달에 인공지능 시대에 어떤 직업이 사라지고 어떤 직업이 흥하는지 미리 예측해서 준비시키는 교육이 불가능하고 심지어 위험하다고 결론 내렸다. 누구도 미래의 직업이 어떤 것인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교육은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 것일까? 그냥 교육은 미래에 대해 무력하며, 학생들은 그냥 되는 대로 각자도생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점점 줄어드는 전통적인 일자리를 놓고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에 몸과 마음을 갈아 넣어야 하는 것일까?
예측할 수 없는 미래, 고정되지 않는 능력: 역량, 창조성
예측할 수 없고, 미리 준비할 수 없다는 어려움 속에 바로 가야 할 길이 있다. 교육은 학생들이 문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인데, 이 경우에는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고 미리 준비하기 어렵다는 것 자체가 문제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갖추어야 할 능력은 ‘미지의 상황’에 던져지더라도 정신을 놓지 않고 그 상황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데서부터,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내고 그것을 얻기 위한 학습과 작업을 조직해내며, 이를 함께 수행할 동료를 모으고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을 모두 포괄한다.
이 능력은 어떤 특정한 분야나 영역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분야와 영역을 넘나들 수 있는 능력으로, 이런 포괄적인 능력이 바로 요즘 들어 교육과정에서 부쩍 강조되는 역량(competency)이다. 역량은 불확정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라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그런 능력, 이미 배운 것보다는 새로이 배움을 조직하고 수행할 수 있는 능력, 지금까지 해온 것의 누적이 아니라 앞으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의 크기 등으로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이 용어는 한때 ‘경쟁력’이라고 잘못 번역되어 교육과정에 도입될 때 많은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compete 때문에 비롯된 오해이며, 다투어 승부를 겨룰 수 있는 정도를 뜻하는 경쟁력(Competitiveness)과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역량과 대비되는 용어로는 능력(ability)과 잠재력(capacity)이 있다. 능력은 어떤 분야나 영역에서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보유하고 활용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며, 잠재력은 그러한 지식과 기능을 학습하고 향상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따라서 이 둘은 모두 구체적인 목표나 조금 포괄적이더라도 최소한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가령 “그 사람은 능력 있는 변호사다.”, “그 사람은 미술 분야에 잠재력이 있다.” 이렇게 말하지 막연하게 “그 사람은 능력 있다.”, “그 사람은 잠재력이 있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만약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대개는 분야나 영역을 생략하고 말하는 것이지 아주 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우는 이미 말하는 당사자 간에 어떤 분야나 영역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합의가 있는 경우다. 가령 변호사들끼리 모여서 “박변은 능력있는 변호사다.”라고 말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냥 “박변 능력은 확실해.” 이렇게 말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그런데 단지 적응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너무 수동적이라면 보다 능동적으로 문제를 찾아내고 나아가 만들어내는 방법도 있다. 즉 불확정성에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불확정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기존의 질서, 기존에 주어진 것을 일단 흔들어 보지만, 흔드는 본인도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미리 정해놓지 않고 모든 결과를 열어두는 것이다. 이렇게 불확정성을 창출하여 완전히 새로운 판을 짜는 능력, 이것이 바로 창조성(creativity)이다. 아주 간단히 정리하면 역량이 불확정성에 대처하는 힘이라면 창조성은 불확정성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불확정성에 대처할 수 있어야 미래사회에 적응하여 살아갈 수 있고, 불확정성을 창출할 수 있어야 정체된 상황을 넘어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역량과 창조성이 동 떨어져 있거나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미리 정해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역량을 발휘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존에 없던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야 하며, 이를 위해 창조성이 발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용어를 흔히 창의성이라고 많이 번역하는데, 이렇게 되면 그 새로움의 대상이 ‘생각’의 영역으로 한정되어 버린다. 하지만 여기서 크리에이티비티는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 상황을 새로이 창출하는 능력이니만큼 창조성에 더 가깝다.
확정성의 교육, 불확정성의 교육
그런데 역량 교육이든, 창조성 교육이든 공통적으로 닥치는 문제가 있다. 불확정성에 대처하거나 불확정성을 창출하는 능력을 기르는 교육의 프로그램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확정적 세계를 전제로 하는 교육이었다. 약간의 유동성은 있을지언정 우리가 알아야 하고 갖춰야 할 대상은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걸 다음과 같은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할 수 있다.

교육은 항상 목표로 하는 지식이나 능력이 정해져 있었고, 그 지식이나 능력을 갖추도록 학생에게 변화를 일으키는 의도적인 작용으로 이루어져 왔다.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이 작용은 사전에 계획될 수 있고, 매 단계마다 상황을 평가하여 계획을 수정하지만 처음부터 계획없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었다.
행동주의, 경험주의, 인지주의, 구성주의 등 교육학의 여러 논쟁들 역시 저 중에서 목표로 하는 지식이나 능력을 무엇으로 삼을 것이냐,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교육 작용을 어떻게 구성하며 교사의 역할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지 목표로 하는 지식이나 능력의 불확정성을 전제로 하지 않았다. 이것이 수천 년 간 내려온 교육의 대전제였다.
그러나 역량이나 창조성이 목표가 될 경우에는 이러한 교육의 대전제가 근본적으로 도전 받는다. 존 듀이가 지, 덕, 체의 교육을 분리하여 사고하는 관점에서 이들의 융합을 주장하며 ‘철학의 재구성’이라고 했듯이, 교육철학의 재구성이 필요한 것이다.
불확정성에 대처하고 불확정성을 창출하는 능력이 특정한 능력이나 지식이 될 수는 없다. 어떤 특정한 능력이나 지식은 그것이 필요한 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 함양하고 학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총체적인 역량을 기르는 교육이 구체적인 목표를 수립하고 일련의 학습 프로그램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형용모순이다. 목표가 불확정적이고 총체적이라면 교육 역시 불확정적이고 총체적이라야 한다. 이를 다음의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제 교사(혹은 교육자)는 더 이상 학생들이 목표로 해야 하는 지식이나 능력을 대표하지 않는다. 이 불확정한 세계 속에서 교사 역시 대처하고 창출해야 할 한 사람일 뿐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교사의 지식이 학생의 지식보다 많다는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의 많은 지식이 학생에게 필요한 지식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학습 공동체를 이루어 저마다의 지식과 능력을 보태어가며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불확정한 미래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갈 뿐이다. 따라서 교육을 한다는 것은 교사가 자신이 알거나 할 수 있는 것을 학생들에게 ‘전수’(transfer)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사가 학생들과 함께 불확정한 세상에 뛰어들어 우선 자기 자신의 역량부터 키워나가는 과정이다. “교육자도 교육받는 과정”이 교육이 되는 것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사회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중학교에서 24년간 사회를 가르쳤고, 서울대, 상명대, 방송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에서 정책연구를 담당했고, 현재 계간 우리교육 편집위원이다. '학교라는 괴물', '그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등의 교육 비평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거짓말로 배우는 10대들의 경제학', '세상을 바꾼 질문' 등의 청소년 교양서들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