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화라는 이름의 우민화
2022학년도 대학입학 제도를 정하기 위한 이른바 국민 공론화 위원회가 활동을 마쳤다. 대학생 뽑는 방법을 각 대학이 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육당국이 정하는 것도 아닌 숙의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국민 여론조사로 정하는 나라가 지구상에 또 있을까 싶다. 미국이나 유럽은 물론 우리나라만큼 대학입시 경쟁이 치열한 일본, 중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등에서도 도무지 이와 비슷한 사례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대입 제도를 선발 주체에게 일방적으로 맡기는 것이 아니라 국민 참여의 방법으로 정하는 것 자체는 긍정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렇게 여론조사를 하는 이유가 미래지향적이고 더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껏 전 세계적으로 점점 퇴조하고 있는 객관식 ‘시험’만으로 선발하는 수능 정시 비율 확대를 위한 요식행위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표리부동한 정서다. ‘수능 정시’ 비율 확대의 손을 들어 주었던 사람들조차 수능으로 대표되는 객관식 시험 점수 높은 학생들을 인재라고 부르는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걸 인정하면서도 수능을 늘리자는 이율배반적인 주장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그 이유는 오직 ‘공정성’ 뿐이었다. 학종과 같은 방식의 평가가 미래지향적이고 공교육 정상화에 도움이 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불공정할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험인 수능으로 뽑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공정성’에의 집착이 보여주는 가장 큰 문제점은 교육적 관심의 결여다. 교육이야 어떻게 진행되던 간에 아무튼 마지막에 대학생 뽑는 과정의 공정성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설사 그 공정성이 교육을 왜곡하고 시대에 뒤떨어지게 하더라도 말이다. 이는 어떻게 해서든 이른바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것만 중요하고, 그 대학에서 어떤 학생들을 뽑아서 어떻게 가르치고 어떤 사람을 만들어 내는가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교육에는 관심이 없고 선발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교육에 관심이 있었다면 장차 학생들을 어떤 사람으로 기를 것이며,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먼저 토론했을 것이다. 어떻게 선발할 것인가는 이 문제가 정해지면 저절로 따라가는 문제다. 가르친 방식대로 뽑으면 된다. 지식 전수를 중심으로 가르쳤다면 시험을 쳐서 전수한 지식이 얼마나 남았는가를 측정하면 되는 것이고, 문제해결능력 함양을 중심으로 가르쳤다면 거기에 맞는 과정평가와 정성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정하는 것이 바로 교육과정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입시제도에 대해 여론이 우왕좌왕하는 것은 봤어도 교육과정에 대해 여론이 형성되고 공론화를 요구하는 것은 본적이 없다. 사실 공론에 붙여야 할 것은 입시제도가 아니라 교육과정이며, 북유럽 등의 국가교육회의의 가장 중요한 역할도 바로 교육과정의 재개정을 연구하고 공론에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공론화 결과를 보면 일선 초중고 교사에게는 소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비하여 창조적이고 다양한 교육 방법을 개발하라는 압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제일 마지막 평가만큼은 객관식 시험으로 치르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만약 객관식 시험을 그토록 고수하고 싶었다면 객관식 시험과는 정 반대 방향의 교육을 표방하고 있는 ‘2015 개정 교육과정’ 자체의 고시 철회를 요구했어야 한다. 그러나 교육과정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언급도 없이 그저 마지막 시험, 대입 평가만 놓고 설왕설래를 펼쳤다.
교사들이 고루하게 지식 전수, 암기식 교육이나 하고 있다며 판에 박은 비판을 하는(이런 말 하는 사람들은 일선학교, 특히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한 번이라도 와 봤는지 의심스럽다) 그 입으로 교육과정 제일 마지막에 버티고 있는 대입은 역시 공정하게 수능정시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과정과 입시가 서로 반대 방향을 달리면 사교육이 융성할 수 밖에 없다. 교육과정을 준수해야 하는 학교는 당연히 입시와 거리가 먼 수업을 해야 하고, 결국 학생들은 사교육을 통해 입시를 준비해야 할테니 말이다. 그래서 막상 사교육이 융성하고 사교육비에 허리가 휘면 저 여론이라 불리는 입들은 학교를 욕하고 교사를 비난할 것이다. 공교육이 경쟁력이 없어서 사교육이 융성하네 어쩌네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할수 없이 학교에서 야자, 보충 편성하면 학생인권 유린이라고 또 비난하겠지. 도대체 이 어리석은 원환운동을 대체 언제까지 계속할 참인가? 이렇게 교육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하며 표리부동한 사람들의 뜻을 모아 그것을 ‘공론’이라고 말한다면 지하에서 키케로가 뛰쳐나와 가슴을 쥐어 뜯으며 “너희 나라도 이제 참주의 압제가 멀지 않았다”라고 말할 것이다.
키케로, 아우구스티누스, 마키아벨리에 이르기까지 공화주의의 터전을 닦은 위대한 사상가들은 한결같이 공화국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공의’가 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의가 있어야 인민이 있으며, 그럴때 그 인민은 집합으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공의’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숫자가 모여서 떠들어댄다 하더라도 다만 군중에 불과하다. ‘공론’이란 ‘공의’를 가진 시민이 모여 ‘공공’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지, 군중들이 모여 마구잡이로 자기 생각을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다. 그 ‘공의’는 단지 공화국의 시민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저절로 머릿속에 장착되는 것이 아니다. ‘공의’를 갖추기 위해서는 적절한 교육과 경험이 있어야 하며, 그 공의를 ‘공론’에 부치는 ‘토의’의 방법 역시 적절한 교육과 경험을 통해 획득해야 한다.
숙의민주주의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충분히 토의할 수 있는 충분한 숫자의 시민들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 무작위로 선발한 시민 샘플들에게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숙의민주주의가 가능하려면 만장일치가 될 때까지 토론을 해야 하며, 그게 불가능하다면 투표를 하되, 토론의 전과 후에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달라지거나 유지되었는지를 토론 과정에 제시된 각종 자료와 논거에 근거하여 정당화할 수 있는 상태에서 해야 한다. 그 정도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떠들어대다 투표하는 것은 공론이 아니라 다만 소란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소란의 결과에 따라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정하는 것은 숙의민주정치가 아니라 우민정치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우민정치의 길을 가고 있다.
여기에 모였던 사람들이 ‘공의’가 없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교육과정에 대한 고민, 교육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은 진지하게 논의되지도 못하고, 그저 공정한 입시제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사실 공정한 입시제도야말로 가장 불평등한 입시제도가 될 수 있다는 문제제기가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사실 교육학에서는 공정성(fairness)이라는 개념보다는 형평성(eqauity)라는 개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 둘이 때로는 충돌하는 경우가 많은데,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타당성(validity)과 신뢰성(reliability)인데 이런 개념들은 증발하고 공정성만 소리높여 외쳐대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논의가 밥먹듯이 익숙한 교사 등의 교육전문가를 배제하고 사교육업자 출신의 정체불명의 교육전문가 목소리가 귓전을 때릴 정도로 울려퍼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까?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사회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중학교에서 24년간 사회를 가르쳤고, 서울대, 상명대, 방송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에서 정책연구를 담당했고, 현재 계간 우리교육 편집위원이다. '학교라는 괴물', '그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등의 교육 비평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거짓말로 배우는 10대들의 경제학', '세상을 바꾼 질문' 등의 청소년 교양서들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