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칙을 부추기는 교육은 그만하자
참고서와 학원과 과외
《표준전과》, 《필승》, 《완전정복》…. 칠팔십 년대 참고서들은 그 이름부터 학교교육이 지향하는 가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표준화’와 ‘필승’은 근대화를 상징하는 두 낱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주도 교육이 지향하는 바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말이다. 국가 간의 경쟁에 승리하기 위해 산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계도 사람도 대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곧 표준화가 지향하는 바다. 이러한 대체 가능성은 학교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학기 중에 교사가 바뀌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교육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참고서는 사실상 교사용 지도서 역할도 해서, 많은 선생님들이 참고서를 ‘참고’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전과는 전 과목을 한 권에 다 담아 부피가 상당했는데, 이 한 권만 있으면 시험 걱정을 덜 수 있을 정도였다. 많은 선생님들이 전과에서 시험문제를 뽑거나 비슷한 문제를 냈다. 하지만 두꺼운 전과는 한 권 값이 만만찮아 가난한 집 아이들은 사기가 어려웠다. 중고등 참고서는 과목별로 나뉘어 있어 다 구입하자면 더 부담이었기에 대개는 취약한 과목 위주로 구입했다. 학원이 거의 없었던 당시에는 참고서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던 셈이다.
《수학의 정석》과 《성문 종합 영어》는 차원이 다른 참고서들이었다. 교과서 수준을 뛰어넘는 고급 과정의 학습서였다. 사실상 대학 본고사를 위한 참고서들이었는데, 본고사가 폐지되면서 그 가치가 떨어지긴 했지만, 공부를 좀 한다는 친구들에게는 필수 참고서들이었다. 《정석》과 《성문》은 학원에서도 인기 강좌 아이템이었다. 대도시에서도 몇 개 되지 않던 학원들에서는 이 참고서를 교과서 삼아 인기 강사들이 학생들을 끌어들였다. 또 개인과외를 하는 대학생들도 이 책을 교재 삼아 학비를 벌곤 했다.
학원이 기하급수로 늘어나면서 점점 일반 참고서들이 하던 역할을 학원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참고서를 사놓고도 거의 보지 않던 학생들이 학원강사의 족집게 강의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내신성적을 보장하는 것이 학원의 역할처럼 되면서 학생들은 학원 도움 없이는 시험 준비를 하기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내신성적을 위한 시험 준비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위해서는 한 달 남짓만 준비시키면 되었으므로 학원 입장에서는 나머지 기간 동안 아이들을 끌어들일 상품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 다름 아닌 선행교육이다. 처음에는 다음 학기에 배울 것을 방학에 미리 떼어주던 수준이었다가, 점점 일 년, 이 년 앞당겨 교육하는 풍조가 학원들 사이에서 경쟁적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학원이 공급 초과 현상을 보이자 차별화된 상품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일종의 고급화 마케팅 전략으로 심지어 11년 선행 영어교육 상품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아이들은 선행이라 하면 선행(善行)이 아니라 선행(先行)학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경제 형편이 나아지면서 참고서를 구입하는 데 그다지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된 사람들에게 참고서는 기본 장비에 속하는 것이 되었다. 학원이 보편화되면서 일반 학원도 이런 기본 장비에 포함되었다. 당연히 고급 장비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고 시장은 이를 공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때는 고급 장비이던 선행학습도 이제는 기본 장비에 속하는 것이 되다시피 했다. 이어서 등장한 고급 장비가 일대일 맞춤형 학습관리 시스템일 것이다. 개인과외의 장점과 학원의 체계적인 입시관리를 결합시킨 상품이다. 이제는 ‘자기주도학습’을 도와주는 상품까지 출시되고 있다. 시대 변화에 발 빠르게 부응하는 시장의 기획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서와 학원에 길든 아이들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원숭이 꽃신’ 이야기처럼, 신발에 길들여진 연약한 발바닥 때문에 신발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된 원숭이들이 비싼 꽃신을 울며 겨자 먹기로 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과 같은 형국이다. 교과서와 참고서, 학원 다시 말해 국가와 시장이 손을 잡고 표준화와 경쟁 시스템을 통해 체제 순응형 인간을 양성해온 셈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대학에 가서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학교와 학원은 진도와 시험에 맞춰 학습계획을 짜서 아이들을 훈련시키면서 인적자원 시장에서의 상품 가치를 높이도록 다그쳐왔다. 국가가 산업화를 주도하던 시기에는 국가가 길러낸 표준화된 교사들이 그나마 목에 힘을 줄 수 있었지만, 권력이 점차 시장으로 넘어가면서 교사와 교수들은 이제 스스로 지식을 파는 상인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학교와 학원이 상보관계에 있듯이 국가와 시장 역시 상보관계에 있다. 근대국가와 자본주의는 이란성 쌍둥이 같은 것이지만, 아이들이 학교보다 학원에 더 의지하기 시작했듯이 이제는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시장이 더 많이 갖기에 이르렀다.
반칙을 용인하는 사회
인간사회는 불평등한 사회다. 동물의 왕국도 불평등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불평등은 대개 유전적 요인으로 결정된다. 인간사회는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되면서 유전적 요인에 더해 제도적으로도 불평등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었다. 유전적 불평등은 종족번식과 진화를 위해 자연이 하는 일이니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일은 아니다. 미남미녀에게 세금을 더 물리자는 얘기도 있으나 기준을 정하기도 애매하고 유전적 불평등을 제도적으로 보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권투 시합을 체급별로 치르듯이 유전적 불평등을 감안한 사회제도를 만들 수는 있다. 더욱이 사유재산의 세습으로 인한 불평등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낸 불평등이므로 제도적으로 얼마든지 보완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은 권투경기 수준의 보완책도 갖추지 못한 상황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불평등으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제도이지만 이를 도입한 사회는 얼마 되지 않는다.
유전적 불평등에 더해 세습으로 인한 불평등까지 더해지면서 인간사회는 사실상 반칙을 용인하는 사회가 되었다. 반칙의 정도가 심한 사회일수록 후진 사회다. 헤비급 선수와 플라이급 선수를 맞붙도록 방치하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플라이급 선수더러 정정당당하게 싸우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욱이 헤비급 선수는 보호장구까지 갖추고 있는 마당에. 많은 플라이급 선수들이 아예 링에서 퇴장해버리는 것도 나무랄 수 없는 일이다. 재미없는 경기다.
인간사회에서 그나마 반칙이 용인되지 않는 세계가 있다면 스포츠 세계일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정의에 대한 감각이 내재해 있어 반칙에 대한 반감은 세계 공통이다. 스포츠 경기에서 심판이 반칙을 눈감고 넘어갈 때 관중은 어김없이 야유를 퍼붓는다. 유일하게 반칙이 용인되는 스포츠가 프로레슬링인데, 이는 사실 스포츠라기보다는 쇼에 가깝다. 프로레슬링에서 반칙은 의외성을 낳아 경기를 더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반칙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그런 의외성 때문이다. 더욱이 약자가 최후의 수단으로 행하는 반칙은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 공부를 해도 해도 안 되는 아이가 살짝 커닝을 하는 것처럼.
불평등한 관계에서 약자의 반칙은 어느 정도 용인되기도 한다. 불합리한 규칙에 반발하여 이를 어기는 행위는 실정법상으로는 반칙이지만, 자연법 관점에서 보자면 오히려 정의를 구현하는 행위일 수 있다. 홍길동이나 로빈 후드 같은 반칙왕 이야기가 인기를 끄는 것은 정의에 대한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반칙이 판치는 세상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는 역반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세상에서는 강자가 공공연히 반칙을 하는 것이 다반사이고, 심판도 강자 편을 들기 일쑤다. 약자의 통쾌한 반격은 이야기 속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계속 얻어맞다 링 밖으로 실려 나가는 것이 대부분의 약자들이 걸어가는 길이다. 이 불공평한 게임을 보완하는 장치가 교육제도인 것 같지만, 실제로 교육판의 룰도 불공평하기는 매일반이다. 격변하는 사회에서는 교육이 신분상승의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안정기에 접어들수록 교육은 계급재생산의 확실한 통로가 된다.
오늘날 한국사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교육이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해주기보다 심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교육현장은 오히려 일찍부터 반칙에 대한 무감각을 훈련하는 곳이 되다시피 했다. 그 옛날 전과에서 시험문제를 베껴 내던 교사들이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준 게 있다. 세상은 전과를 살 수 있는 아이와 살 수 없는 아이로 나뉘어 있고, 게임 규칙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70년대만 해도 담임선생이 몇몇 아이들을 데리고 그룹과외를 하는 일이 흔했다. 반칙 행위가 반칙인 줄도 모른 채 다들 순진한 얼굴로 살았다.
그래서인지 작금의 선행학습이 사실상 반칙 행위라는 사실을 요즘 아이들도 부모도 교사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너도나도 하기에 안 하는 사람이 바보처럼 여겨지는 상황이다. 감각이 무디어질 대로 무뎌진 것일까. 공정하지 못한 경기 룰에, 심판이 강자의 편을 드는 게 다반사인 현실이긴 하지만, 반칙이 반칙인 줄도 모를 정도로 도덕성이 무딘 사회는 드물다. 반칙을 공공연히 용인하고, 반칙을 하고도 부끄러워하기보다 오히려 당당해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는 참으로 ‘후진’ 사회다.
아이들에게 정정당당함을 가르쳐도 아쉬운 마당에, 뻔뻔함과 비겁함을 길러주고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주소다. 아이들 힘으로 할 수 없는 숙제를 내고 그걸 검사하는 교사는 사실상 반칙을 조장하는 셈이다. 엄마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아이에게 좌절감을 심어주고, 엄마 도움으로 숙제를 하고는 자기가 한 양 시치미를 떼는 아이에게는 비겁함을 길러주는 것이다. 인터넷 서핑으로 자료를 긁어다 짜깁기할 게 뻔한 숙제를 내는 교사도 마찬가지다. 정보검색 능력을 길러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검색하는 능력이 사고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남이 애써 정리한 자료를 도용하는 뻔뻔함을 길러줄 따름이다.
경쟁이 경쟁력을 길러줄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공정한 경쟁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우승 트로피는 반칙왕이 차지하기 마련이다. 독일사회에서 선행학습을 범죄시하는 것은 그것이 시민사회의 가치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반칙을 해서라도 이기고 보자는 심리가 내면화된 시민들이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의 선행학습 붐은 마치 영화관에서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보기 시작하자 뒷줄에 앉은 사람들도 울며 겨자먹기로 일어서서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비슷하다. 쓸데없이 모두가 피곤해질 따름이다. 게다가 교실은 뒷자리가 더 높지도 않다.
선행학습과 예습은 다르다. 예습이 영화를 보기 전에 그 영화에 대한 기본 정보를 조사하는 것이라면 선행학습은 줄거리와 결말을 미리 듣는 것과 같다. 선행학습을 한 아이들이 흔히 학교 수업시간에 딴짓을 하는 것은 스포일러를 접하고서 영화를 보는 도중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과 비슷하다. 결말을 미리 알려주는 것을 ‘망치는 사람’이란 뜻의 스포일러(spoiler)라 부르는 까닭은 그런 행위가 관객의 흥을 깨고 결과적으로 영화도 망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선행학습은 학습자의 흥미를 떨어트리고 교육을 망친다.
자유와 평등의 조화
지난 몇십 년 동안 우리는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목표를 위해 아이들을 인적자원으로 양성해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꽃피운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봉오리도 맺지 못한 채 시들어갔다. 그나마 그렇게 표준화된 인적자원을 양성하여 산업화에 성공함으로써 국가경쟁력을 키웠고 생활의 질은 몰라보게 높아졌지만, 삶의 질은 오히려 더 떨어진 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국가경쟁력이란 신기루 같은 것이다. 쫓아가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저절로 따라와야 한다. 국가 차원의 교육정책에서 국가경쟁력을 우선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과연 무엇이 국가경쟁력을 높여주는지에 대한 담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99퍼센트를 먹여 살릴 1퍼센트를 길러내는 데 주력할 것이 아니라 99퍼센트가 저마다 자기다움을 꽃피울 수 있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인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이상에 그칠지라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국가정책의 기본 방향이 되어야 마땅하다. 공동체성이 결여된 1퍼센트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이른바 선진국은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이기 이전에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사회다. 대한민국이 마침내 선진국 대열에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경제력만이 아니라 사회체제와 정치 문화 영역에서 선진을 이루어야 진정한 선진국이 될 것이다. 약자를 밟고 올라서는 사회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구성원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또 국가경쟁력을 위해서라도 약자를 지원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자의 선의와 배려보다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가진 자의 자유, 자본의 자유가 평등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견제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공생사회가 지속가능성이 더 높은 것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되는 사실이다. 적자생존이 자연의 법칙이고 경쟁은 당연한 것이라는 논리는 세상의 일면만 본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이 적자생존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진화론의 본질은 ‘최적자가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ittest)가 아니라 ‘적자가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itter)는 것이다. 최적자 1등만 살아남는 게 아니라 환경에 조금 더 적합한 생물이 살아남는다는 말이다. 1등 외에는 모두 도태된다는 최적자 생존 이론은 실제 자연계에는 맞지 않으며, 오히려 공생관계를 많이 맺는 생물일수록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 생태계의 속성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어린 시절은 보호받아야 한다. 벤처기업도 초기에는 인큐베이팅 기간을 두어 보호하다가 체력이 길러지면 경쟁을 하게 한다. 무한정 보호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청소년기에는 적절한 자극과 건강한 긴장이 필요하다. 경쟁이 필요한지 보호가 필요한지 잘 가늠할 필요가 있다. 경쟁을 할 때도 반칙이 용인되지 않는 합리적인 룰을 만들어야 한다. 소모적인 경쟁이 아닌 생산적인 경쟁을 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면 된다. 그런 점에서 상대평가제도보다는 절대평가제도가 낫다.
자유와 평등은 서로 배타적인 듯하지만, 두 가치가 조화를 이룰 때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해방 후 남한 사회가 자유를 우선했다면 북한은 평등을 우선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치를 융합시키는 것은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와도 통한다. 우리 사회는 이제 이 역사적 과제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무한경쟁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한 이 과제는 도달할 수 없는 꿈으로 남을 것이다. 무한경쟁이 심화되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약자들의 역반칙이 빈발할 수밖에 없다. 반칙 없는 세상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 할지라도 조금 더 공평한 세상을 만들 수는 있다. 갈등을 지혜롭게 조정하면서, 구성원들이 저마다 자기다움을 꽃피우기 위해 정진하는 사회를 꿈꾼다면, 교육은 그 꿈의 보이지 않는 증거가 되어야 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교육 매체 계간 《민들레》 발행인. 저서로는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이 있고, 《대안교육 20년을 말하다》,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 외 여러 권을 함께 썼다. 옮긴 책으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 《소통하는 신체》(공역) 등이 있다.
미래 사회의 지속가능성, 이 문제는 세계적 화두인 것 같습니다. 특히 교육이 이를 위해 큰 역할을 해주길 기대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현병호 선생님 말씀처럼 암울한 상황입니다. 다만, 반칙하게 만드는 교사나 부모도 문제지만, 이들을 이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우리 교육체제는 더 큰 문제로, 이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