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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마을교육공동체는 교육의 답이 될 수 있는가

#654 박제원, 전주 완산고등학교 교사 2021.06.30

최근 몇 년 사이에 교육에서 마을교육공동체 논의가 부쩍 늘어났고, 특히 교육청과 지자체의 관심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이를 대변한다. 이에 대한 교사들의 입장은 다양하다. “우리 보고 그 사업을 하라고요?”라고 하거나 “공동체를 이루는 게 아니라 사업만 하네!”라고 하는 교사도 있지만, 교육과정을 재구성하여 마을 체험을 해본 교사는 “이건 우리 교육에 아주 중요한 흐름이 될 수 있어.”라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수 교사는 마을교육공동체에 대해 아예 모르거나 알아도 무관심한 게 현실이다.

 

이 글은 마을교육공동체 전반에 대한 글은 아니다. 다수의 교사가 무관심하지만, 교육청이 마을교육공동체를 적극 추진하는 현실을 앞에 두고, 애정과 우려를 동시에 갖고 변질을 경계하기 위해 외부자의 의도로 쓰는 글이다. 근대로부터 탄생한 자본주의, 사회주의 체제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할 수 없고, 체제가 친밀성 등으로 내부화되어 역동성이 사그라지는 순간 인간을 억압하는 장치가 되어왔다는 역사적 경험을 1차·2차 세계 대전, 대공황, 구소련의 붕괴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이 학교와 마을에서 체제의 내부성을 외부성으로 바꾸거나, 외부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만이 교육기본법에 명시된 홍익인간과 민주시민의 양성이라는 교육이념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을교육공동체란 무엇인가

 

마을교육공동체는 “마을이 함께 키우고, 마을이 아이들의 배움터가 되고, 아이들이 주인이 되는 공동체”로 받아들여진다(김용련, 2014). 마을이 아이들을 함께 키운다는 말은 마을 구성원들이 교육에 대해 공동의 권한과 책임을 갖고 협력하여 아이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는 소극적 협력에서부터, 교육협동조합을 만들어 아이들의 교육, 복지, 생활 등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협력을 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마을이 아이들의 배움터가 되는 것은 아이들이 학교를 넘어 마을의 자연, 사회, 삶 속에서 배움을 실천할 수 있는 교육적 기회와 공간을 제공받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이 마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지역 사회에서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고 정주하고 다른 공동체에 민주시민의식을 확산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로서의 마을은 학교와 마을, 학교와 교육청, 교육청과 지자체, 교사와 교사, 학생과 교사, 학생과 학부모가 분리되지 않은 공간으로 민주주의의 학교이자 지역 사회 학교의 개념을 가지고 있고, 교육은 공동체의 가치 기반인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치는 일이 된다. 따라서 마을교육공동체에서 말하는 ‘마을’은 학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고 학교와 마을, 이 양자는 서로 교류하면서 함께 변화하는 공간이다. 즉 ‘마을’이라는 말 속에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간과 지속 가능한 시간, 그리고 고유한 마을의 현상이 들어 있고, 교사는 이를 마을에 담아야 하며, ‘욕망’이 아닌 ‘희망’의 빛이 되어야 하고 입시와 수능을 외면할 수는 없지만, 진학의 문제, 사교육의 문제, 학교 주체성의 문제 등 난마 같이 얽힌 문제들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마을교육공동체는 교사들에게 책무를 부여한다. 교사들은 마을 구성원들과 적극 협력하여 학교와 마을 사이에서 교육공동체가 형성되도록 활동해야 한다. 첫째, ‘마을에 관한 교육(learning about community)’을 해야 한다. 즉 학생들이 마을이나 지역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자연적, 문화적, 산업적 특수성과 발전 양상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 예컨대 교육청이나 지자체에서 마을지도를 만들고, 마을의 다양한 역사나 문화를 학교에 소개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둘째, ‘마을을 통한 교육(learning through community)’을 하도록 한다. 즉 그 지역 사회의 인적·문화적·환경적·역사적 인프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교수학습해야 한다. 이는 학생들이 마을의 교육 인프라와 자원을 통해 배움을 실천하도록 하고 재능기부자들이 학생들을 위해 직업교육을 하고, 문화·체육 시설과 기관들은 학생들을 위한 사회적 배움터가 되며, 마을의 생태계, 기업, 농장 등은 훌륭한 교육프로그램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함을 의미한다. 셋째, ‘마을을 위한 교육(learning for community)’을 해야 한다. 학생들이 지역 사회 발전의 훌륭한 자원이 될 수 있도록 미래 진로 역량을 키워줘야 한다. 즉 그 지역 사회가 갖고 있는 환경적 기반을 근거로 문화, 자원, 사회, 경제 등을 학습하도록 하고 지역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심을 유발하여 정주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교사는 마을을 위한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자신의 삶의 터전, 이웃과 공동체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하게 하고, 이러한 고민과 배움의 결과는 그 지역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되도록 해야 한다.

 

마을교육공동체의 목표가 학교 자체의 개혁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교육개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현재 마을교육공동체 사업의 목표, 재원 등 많은 활동과 내용이 학교에 집중되어 있지만, 앞으로 이 사업의 확대 발전된 모습은 학교가 아니라 지역 사회의 교육개혁으로 집중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존 ‘혁신교육 지구 사업’을 마을교육공동체 구축으로 전환해야 하며, 지역 사회 교육자원과 인프라 발굴과 개발에도 집중해야 한다. 즉 학교의 교육프로그램과 교육과정이 지역 사회 또는 지원센터의 역할로 이전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마을에서 학생들을 키워낼 수 있다. 협력적인 교육 거버넌스 체제 구축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명목상으로만 구축되어 있는 교육 거버넌스 체계를 새롭게 살피고 공고히 해나가도록 해야 한다. 교육청의 전문성과 지자체의 자원과 행정력, 지역 사회의 참여, 학교 개혁 등을 함께 아우르는 협력적 관계 형성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처럼 초중고 교육에서 혁신 교육으로 논의되는 마을교육공동체는 마을을 중심에 두고 자치, 배려, 상생적 삶을 추구한다. 그리고 2022 교육과정이 지역화, 분권화된 교육과정이 되어야 한다거나 초등학교의 돌봄이나 중고등학교의 방과후 학교를 지자체에 넘겨야 한다는 지향에 숨어있는 가치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와 교육관계자는 한국 초·중·고 교육과 관련해 마을 교육이나 마을교육공동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이와 유사한 원형을 역사적으로 추적하여 비판적으로 사고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마을 교육의 발전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마을교육공동체는 호혜적 관계를 교육하는 코뮨

 

마을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존재하는 공동체 집단의 군락으로 특정한 입지 조건을 가진 곳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살기 시작하는 데서부터 형성되었다. 계획을 세우고 조성한 것 없이 정말로 자연스레 생긴 마을들(주로 역사가 오래된 마을들이 많다)을 특별히 ‘자연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대에는 도시화가 진행되어 대도시 지역에서는 ‘마을’이라고 부를 만한 크기의 군락을 찾기가 쉽지 않고, 주로 시골에서 여러 집이 모여 사는 곳을 가리킨다. 그러나 마을교육공동체에서 마을은 이러한 보편적 정의와는 상당히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을은 보편적 공동체가 아니며 도시와 농촌이 보편적이다. 그런데도 공동체를 마을이란 언어로 통칭하는 것으로 볼 때 장소적 공간에서 벗어나 도시를 포함한 코뮨(commune)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코뮨은 공산주의적 공동체가 아니다. 공산주의적이란 생산은 물론 생활이나 활동 그리고 그것을 위한 조건 등을 함께 하고 함께 나눈다는 의미이지만, 코뮨은 참여와 분유(分有)의 의미로 어떤 집합적 과정에 참여하고 그것을 나눔으로써 집합체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코뮨이 함께 생산하고 함께 소유하는 경제공동체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이로 해석하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보수와 진보로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하는 일은 오해일 수밖에 없다. 이는 아주 다양한 공유와 공속 공생의 양상을 인정하는 개념이다.

 

코뮨은 특정한 공간보다는 선물을 주는 방식으로 결합된 관계이다. 하지만 타인을 배려하고 선물을 주는 관계를 일방적이라고 할 수 없다. 타자를 배려하여 얻는 기쁨은 곧 자신을 배려하는 일이다. 즉 코뮨은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을 세세하게 계산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상생적 삶을 추구하는 호혜적 관계이다. 따라서 교육청이 관여하는 마을교육공동체는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으며, 교육과정에서 민주시민교육이라는 별칭으로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것도 코뮨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뮨은 공동체와 동일하지도 않다. 공동체와 코뮨의 역사적 기원은 다르며 사회발전과 관련해 두 결사체를 동일시하면 공동체주의가 초래하는 근본적 위험을 감추게 되며 코뮨주의의 본질적 가치를 사라지게 할 뿐이다. 후에 설명하겠지만 외부성은 공동체주의와 코뮨주의를 구분하는 매우 결정적인 기준이다.

 

 

코뮨의 기원과 소멸

 

코뮨의 역사적 기원은 중세의 도시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도시는 자본주의의 발생지로 봉건제를 무너뜨리는 씨앗이 성장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즉 뱀이 독두꺼비를 먹었지만 두꺼비가 뱃속에서 뱀을 죽이는 것과 같다. 하여튼 당시 서양의 중세에서 도시는 기이하고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로 보면 마을학교 또는 마을교육 중심의 공동체는 전통적 교육의 입장에서 보면 중세의 도시처럼 새로운 교육이 배태되는 곳이고 독두꺼비로서 현재의 교육 문제를 해결할지, 아니면 뱃속에서 소멸될지는 쉽게 예단할 수 없다. 다만 중세의 도시가 이전의 도시와 다르듯이 마을교육공동체가 새로운 교육모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도시가 중세에 처음 등장한 공간은 아니다. 고대 때부터 존재했지만 그 성격이 전혀 다르며, 대개 공간적으로 혹은 직업적으로 가까운 이웃들의 집단이 조합을 형성하고 그러한 조합이 나중에 서약을 통해 형제적인 관계, 평등과 우애의 관계를 맺어 공동으로 활동하여, 영주나 외부인들의 억압이나 착취에 대항하는 방어적 결사체로 결성되었다. 구성원 간의 평등주의와 상호 부조적인 결합을 통해 계급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바로 이것이 도시라는 현상의 기이함과 새로움이었고 수직적인 봉건적 위계서열 사회를 수평적인 사회로 대체하려고 했으며, 왕과 귀족이 지배하는 수직적 계급구조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코뮨이라는 언어에는 자치도시라는 의미가 남아있게 된 것이며 코뮨의 주요 원리 중 하나가 자치에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같은 시기에 농촌에도 다수의 공동체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코뮨과 매우 다른 마을공동체일 뿐이다. 농촌공동체의 기초는 공유지라는 토지의 공동 이용이나 노동력의 공유였다. 따라서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하여 구성되지 않았고, 토지와 노동의 조건에 의해 불가피하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평등과 우애라는 관계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초기의 중세도시는 물론 나중의 많은 도시에서도 시민들의 직접적인 집회가 중요한 규칙과 법령의 입법 및 중요 안건을 결정하는 역할을 했고 자치적 법률에 따라 재판이 대부분 이루짐으로써 오늘날로 보면 자치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초기 중세도시가 코뮨적 성격을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도시의 역사는 오래가지 않아 몰락하게 되었다. 이는 마을교육공동체에 깊은 시사점을 준다. 코뮨의 몰락은 무엇보다 도시가 자기 경계에 집착하여 그 외부에 대해 배타적이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코뮨의 구성원들은 도시가 성장하면서 초기의 외부성을 잊어버리고 이방인과 관련된 제도와 개념을 적대시하고 선과 진실은 이웃으로부터 오고 악과 거짓은 이방인으로부터 온다고 여겼다. 도시의 실체인 동업자 조합이었던 길드도 내부 성원사이에는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관계에 따라 상호부조적 관계를 형성하였지만 사실 이는 외부에 대한 공동의 방어를 위해 결성한 이익집단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배타성은 이후에 외부자나 새로운 신입자들에 대해 특권적 힘을 독점하려는 태도로 변모한다. 그리고 길드는 확고한 특권단체가 되어 권력, 지위, 부를 독점하였다. 예컨대 나중에 자유도시로 들어온 외부자를 길드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소수의 가족이 거래에서 생기는 이익을 가로채기도 하였으며, 도시 경계선에 성벽을 쌓아 물리적으로 외부인의 자유로운 유입을 차단하기까지 하였다. 도시가 봉건영주나 왕으로부터 독립성을 방어하고 유지하기 위해 성벽을 쌓기 시작했기 때문에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주는 상황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성벽이 보호를 위한 것으로 만들어졌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신을 외부와 경계짓고 제한하는 한계였다. 성벽을 세우거나 재건하더라도 그것이 도시를 감싸고 또 도시를 제한하는 것은 언제나 같았다. 즉 코뮨의 구성원은 외부의 침입이나 순혈성을 보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으나 도시의 성벽은 당시에 알려진 경계 중에서 가장 넘나들기 힘든 경계였고 세계를 농촌과 도시로 갈라놓는 차별의 경계선이었다. 따라서 도시는 내부 구성원들을 해방했지만, 자신의 외부에 있는 농촌 또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영주나 귀족들을 대신하여 자신들이 농민들에게 재판권을 행사하고, 저렴하게 농산물을 구입하며 세금까지 붙여 생산한 상품을 농민에게 구매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요컨대 자유로운 개인들에 의해 평등하고 우애적인 결사체로 시작되었던 도시코뮨은 그 스스로가 만들어 낸 세계의 내부에 안주함으로써 그 외부에 배타성을 행사하고 외부자들을 부당하게 억압하였고, 내부에 그들이 들어왔다고 해도 착취하여 다른 종류의 배타적인 특권단체로 발전해 나갔다. 이로써 도시는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농촌으로 코뮨적인 관계를 확장해 나가지 못하였고 도시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영주와 이방인이라고 배제한 넓은 농촌에 둘러싸인 고립된 섬이 되어갔다.

 

 

마을교육공동체의 진실은 외부성이지 마을에 있지 않아

 

공동체와 코뮨은 동일하지 않다. 공동체는 오직 외부성을 유지할 때만이 코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외부성은 내부자에게 낯설음이고, 때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이질적이며, 고향의 편안함과 친숙함을 사랑하며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듯이 유지되는 공동체주의나 신봉자들에게는 둘도 없는 적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공동체가 내부성을 본질로 한다는 생각은 그것이 역사적이든 이론적이든 혹은 사실적이든 문학적이든, 그 어떤 장밋빛 미래를 표방하든 모든 종류의 공동체가 외부에 대해 적대하고 폐쇄적이 되는 것이며, 내부에서 자신들만의 동질적인 세계를 건설하려는 꿈과 직접 결부되어 있다. 공동체의 정체성 내지 동일성에 대한 집착, 공동체의 전통과 그것의 기원, 그것에 결부된 모든 고통의 기억, 이 모든 것이 외부에 대해 자신이 정한 문을 닫게 만들고, 자신들만의 내부적인 친숙한 세계에 정주하려는 순수하지만 배타적인 태도를 표현하게 한다. 내부 내지 내부성은 이러한 폐쇄적 공동체를 특징짓는 귀착점이자 분명한 특징이다. 그러나 외부성은 이질성과 혼혈성을 특징으로 한다. 외부에서 다가오는 것이란 언제나 뜻밖의 것이고, 우연적인 것이며, 내부에 있는 사람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오는 것이고, 그런 만큼 외부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은 이질적이고 우연적인 것들을 받아들여 하나의 공동의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외부자와 접속하고 결합함으로써 만들어지는 차이와 변화,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든 코뮨이든, 어떤 형태의 체제나 이념적 집단이든 외부에 대한 적대 속에서 내부성에 갇히는 순간, 그 내부성에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순간, 외부자를 배제하고 내부의 차이와 이질성을 억압하는 권력의 배치로 넘어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코뮨을 공동체로부터 구별하려는 것은 단지 공동체라는 말의 소박함이 싫어서도 아니고, 그것과 결부된 낭만적 뉘앙스를 벗어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집단 구성에서 동질성과 이질성, 순수성과 혼혈성, 정체와 변이, 존재와 생성의 차이라는 근본적으로 다른 원리의 차이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보수나 진보는 우리에게 중요하거나 고수해야 할 공동체나 이념적 토대가 아니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 연합에 의한 공동체를 추구하고 이것이 둘로 나눠지게 되는 외부성이 어떻게 소멸되게 되었는가를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 즉 역사적으로 혹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공동체나 코뮨이라는 말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을교육공동체는 그 자체로 코뮨이 아니다. 외부성을 원리로 하는, 혹은 적어도 외부를 향해 열려 있으며, 그 외부를 통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변이하는 그런 공동체가 의미 있을 뿐이며 이것을 유지할 때 마을교육공동체를 지지하든 부정하든 한국 사회의 보편적 교육공동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반면 내부성을 원리로 하는 적어도 외부에 대해 닫혀 있으며 자신만의 내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마을교육공동체는 배아를 갖출 수 있어도 성장하지 못하고 고사할 수밖에 없다.

 

 

외부성의 상실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아

 

토니 모리슨이 쓴 《파라다이스》에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공동체가 등장한다. 하나는 루비라는 이름의 흑인공동체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도 없고, 공동체라는 정체성도 없는 다만 수녀 없는 낡은 수녀원에 모여사는 여자들의 무리다. <루비공동체>는 백인들의 억압이 지속되는 나라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세계를 꿈꾸는 강한 염원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수녀없는 공동체>는 외부자들에게 열린 채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루비공동체는 코뮨이었지만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공동체를 창건했던 가족들 간의 친숙함은 더더욱 중요했으며, 흑색의 순수한 전통은 그 모든 외부에 대해 스스로를 굳건하게 결속하도록 했지만 외부의 이질성과 혼혈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냈다. 반면 후자는 어차피 외부인이 모여들기 때문에 친숙함을 뜻하는 내부성은 중요하지 않고, 필요한 친숙함이란 그때마다 새로 만들어내면 되었다. 즉 아무리 가까워도 외부자가 들어올 수 있는 여백이 있었으며 어떤 순수한 내부를 만들지도 않았다. 따라서 차별을 할 어떤 척도도 없었다. 예컨대 여성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지만 굳이 여성들로 제한하려는 뜻도 없었고 그러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 추가될 때마다 다른 것이 되는 끊임없는 변이와 생성만이 이들의 세계를 특징짓는 것이었다. 이로 보면 코뮨이 변질되거나 내부로만 유지되는 공동체는 인근에 후자와 같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불편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곳이고,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이며, 수긍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인 탓이다. 더구나 자신들 내부에 강하게 뭉쳐있는 그 순수성이 내부의 사고가 발생하고 금이 가고 지위와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있을 경우에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유입된 것으로 색칠하여 차단하려고 한다. 심지어 외부를 적으로 규정하여 제거하려고까지 한다. 그러니 이제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려는 노력은 장밋빛 미래라고 포장하고 호소한다고 해도 본질은 외부의 또 다른 소수자를 향한 억압과 단죄, 파괴의 선을 그리는 일일 뿐이다.

 

 

교육에서 옷을 지을 것인가, 바늘을 고집할 것인가

 

마을교육공동체는 코뮨을 지향하려고 한다. 그러나 코뮨이 유지되는가는 외부에 대한 적대 속에서 내부성에 갇히는 순간, 그리고 그 내부성에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순간, 외부자들을 배제하고 내부의 차이와 이질성을 억압하는 권력의 배치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교육단체인 전교조, 교총, 교사노조가 내부적 동질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교육계에서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리고 교육을 떠나서라도 보수든 진보든 시민단체들이 외부성을 지향하다가 내부성으로 돌아서버리는 경우도 흔해졌다. 그러므로 마을교육공동체가 추구하는 지향이 외부적인가, 내부적인가는 교육의 본질에 대한 구두적 선언이 아닌 이질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그리고 마을을 희구하거나 학교 밖을 나가야 한다는 교사들은 자신이든 마을의 주민이든 학생이든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라는 외부성을 상실하면 마을교육공동체는 내부적 폐쇄공동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을교육공동체 교육에서 교사의 책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에서 꼼꼼하게 성찰해야 할 대목이 있다. 교사들이 교육과정을 재구성하여 마을의 특성과 발전 양상을 이해하도록 하자는 교육 방향이다. 이는 코뮨의 본질을 오해한 탓이라고 보며 코뮨이 내부적 특성을 고수하며 외부를 이방인으로 보고 갈등함으로써 몰락하는 길로 빠질 수 있다. 마을의 본질은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이다. 그렇다면 교육과정에 공간적 한계를 두어 마을의 역사나 자연적 환경이 소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초·중·고 교육은 보통기본교육으로 아이들의 삶의 방향은 스스로 정하도록 하는 기초적인 주춧돌을 놓는 일이며, 그들이 마을이나 지역에 꼭 거주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교육과정에서 다뤄야 할 교육내용이 소속된 마을에 국한되어야 하는 발상은 아이들의 사고를 지역에 가두는 일에 가깝고 폐쇄적 교육을 하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에 대한 교육을 하여야 한다는 취지와 지역이 교육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연관된 정당성이 없다. 이러한 행위는 중세도시가 자치권을 획득하자 자치도시만을 정상의 상태로 보게 하고 외부를 보지 않게 했던 교육과 흡사하다. 또 교사가 교육과정에서 마을의 인프라를 활용하여 교육할 수 있지만 학교의 기능을 마을로 이관하여 마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역사발전을 거스르는 일이다. 현실적으로 실체적인 마을은 근대 이후 소멸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마을의 인프라를 활용하는 일은 보편적 교육행위로 당연한 일이지만 학교의 교육과정이나 인프라가 왜 마을로 이전해야 하는지를 타당하게 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마을의 쇠퇴는 자본주의 불균등 발전에 따른 일이며 불균등 발전의 차이를 학교의 기능을 마을로 이전한다고 해서 균등한 수준으로 회복할 수 없으며 회복된 적도 없다. 러시아 혁명 후에 농촌을 재편하여 코뮨으로 하려는 무리한 시도는 러시아 혁명 이전의 소규모 코뮨을 붕괴시켰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초중고라는 보편적 교육기관이 보편적 교육을 하게 하는 순기능마저 훼손할 수 있다고 본다. 도시와 농촌의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차이와 이로 인한 부당한 차별이 농촌과 도시의 원도심에 실제로 있으면 학교의 기능을 마을로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중심으로 교육적 기능을 강화하여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마을을 위한 교육을 통해 지역에 정주하도록 하자는 발상도 낭만적일 뿐이다. 인간의 의지가 세상과 삶을 바꾸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의지가 언제가 현실을 변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 대신에 변혁의 주체들이 객관적 상황을 고려하여 목표를 추구할 때 역사는 조금씩이라도 전진하였으며 시민의 삶은 자유롭고 평등해졌다. 마을교육공동체의 미래는 알 수 없다. 다만 외부성을 상실하는 순간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인 코뮨은 들어설 수 없으며, 남한산 공동체나 성미산 공동체도 소멸될 수밖에 없으며, 이재정 교육감이 추구한 꿈의 학교 등도 실현될 수 없다.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추구하는 교육은 마을의 특색을 학습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옷을 바늘로만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니듯이 한 수단이 모든 수단을 대체한다고 보는 것은 온당한 사고가 아니다. 시민은 도시와 농촌에 정주하며 바느질 수업을 통해 옷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바늘로만 지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옷을 짓는 교육을 할 것인가. 옷을 짓는 수단에 매몰될 것인가는 마을교육공동체에 남겨진 숙제이다. 다만 외부성을 버리지 않는 것, 이것만이 의심할 수 없는 혁신의 진실이며 이를 통해 갈 때만이 공동체에 머물지 않고 코뮨이 될 수 있다.

 

※ 본 글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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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완산고등학교 교사 박제원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일반사회교육을 전공하여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예탁결제원에서 10년 동안 근무한 뒤 전주 완산고등학교에서 사회 교사로 재직 중이다. 전북 교육청 사회문화 집필 위원, KDI 경제교육교재 집필 위원, 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자문단, 충남 지방공무원 임용시험 출제위원, 전북 및 전남 교육연수원 강사, 전북대학교 교사 연수 강사, <새전북신문>, <열린 전북>, <전북교육신문>, 인문 웹진 <아홉시>, 네이버 비즈니즈 블로그 <인터비즈>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지금은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의  교육저널인 「교육 제4의 길 」에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 <미래 교육의 불편한 진실, EBS, 2021>, <학교 속 문해력 수업, EBS, 2022>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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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1. 김태균 수정 삭제

    외부성과 내부성으로 표현을 해주셨지만, 그 둘이 무엇이 좋고 나쁨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을교육공동체가 생성되고 유지되는 동력은 내부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외부성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내부성도 굳건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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