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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사또 마나부의 협력적 학습관은 비판적이지만 공허하다

#644 박제원, 전주 완산고등학교 교사 2021.06.02

사또 마나부에게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간의 협력은 수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교수학습법이며, 그는 공부와 배움을 구분하며 협력적 탐구를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학습자가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을 해도 협력하지 않으면 공부일 뿐이지 배움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사또 마나부의 협력적 학습관이 교수학습에서 협력을 주안점으로 두기 때문으로 프레이리의 지식관·학습관과 일치하기도 한다.

 

 

참된 지식은 대화와 협력으로만 생성되어

 

프레이리는 인간이 인간다워지려면 탐구하고 실천해야 하며, 타자와 협동적이며 부단하고, 의욕적이고, 희망적인 탐구를 통해서만이 지식이 새롭게 출현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은행예금식 교육개념에 따르는 지식은 지식이 있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내려주는 일종의 선물일 뿐이지 참된 지식은 아니라고 본다. 즉 다른 인간들이 완전하게 무지하다는 생각은 억압 관념의 한 특성으로 교육과 지식을 탐구과정으로 부정하는 행위이고, 교사는 학생들이 무지하다고 보고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며, 학생들이 세계를 변혁하는 주체인데도 비판적인 의식이 덜 발달되도록 할 뿐이라고 본다. 또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부여된 수동적인 역할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게 하고, 이를 수행함으로써 현실에 순응하여 만족하려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며, 일면적인 지식으로만 세상을 이해함에 따라 단편적이고 협소한 견해만을 표현하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결국 공부하게 하는 교수학습방식은 자기 주도성을 높일 수 있어도 억눌린 자를 억압하게 하는 사회 상황을 개조하게 하는 의식을 고양하게 할 수 없고, 지배체제에 순응하도록 관심을 쏟게 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교사와 학생이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가 되면 학생은 곧 억압의 힘이 침식되거나 종식되는 첫걸음으로 나서게 되어 계급 해방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은행예금식 개념 속에는 지배의 힘을 정당화하는 지식의 일방적 전수나 축적에 그치지 않고 인간과 세계 사이를 갈라놓는 분열이라는 전제가 암암리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고립되어 세계나 타자들과 함께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구경꾼이지 재창조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며, 단지 외부로부터 오는 현실의 지식을 받아들이도록 피동적으로 개방된 텅 빈 정신으로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교사는 수업에서 자기가 참된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정보를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채움으로써 받아들이도록 하면 교육받은 인간은 오직 적응된 인간이 될 뿐이고 인간의 창조성은 사라지게 된다. 은행예금식 교육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이론과 실제는 인간의 창조성이 발현되지 못하게 하는데 더없이 효과적인 작용을 하고 있고, 구두 수업, 독서물 과제, 지식의 평가 방식, 교사와 학생 간의 거리, 진급과 진학의 기준 등 이처럼 모든 것이 이미 만들어진 기성복 같은 교육 방법으로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기억되게 할 뿐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키워 주려면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나아가 학부모나 학교 밖 시민과 대화하고 협력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생각을 대신할 수 없고, 자기 생각을 강요할 수 없으며, 참된 사상은 은행예금식 교육이 아닌 오로지 대화와 협력의 근간인 소통할 때 생성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프레이리는 교사와 학생이 대화를 통해 서로 간에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가 될 때만이 참된 지식이 실현되며 이 지식만이 현실의 억압을 폭로하고 계급 해방의 터전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권력은 지식이고 지식은 권력이다

 

파울로 프레이리와 사또 마나부가 지식이 협력적 산물이라고 하는 데는 그 배경이 있다. 지식 중에 순수하게 객관적인 지식은 드물고 지식이 생성될 때 주관적이고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떤 지식이라도 다른 지식을 참고하고 해석하여 만들어지는 것은 분명하다. 전구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미국의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이 아니라 영국의 화학자 험프리 데비(Humphry Davy)였다. 그가 만든 전구는 탄소봉 전극을 이용한 아크등으로 지나치게 밝아 가정에서 쓰기엔 적합하지 않았을 뿐이다. 전구의 생명인 필라멘트 특허도 영국의 화학자 조셉 스완(Joseph Swan)이 에디슨보다 먼저 출원한 상태였다. 따라서 에디슨이 이들의 지적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보다 효율적인 전구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합리론이나 베이컨의 경험론이 없었다면 칸트의 근대철학은 완성될 수 없었고, 아인슈타인은 뉴턴 역학을 부정했지만 이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면 상대성 이론은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지식을 참고하거나 객관적으로 반영하여 새로운 지식이 창조되지는 않는다.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지식은 사물과 말로 구성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테면 생물학은 세포나 유전자를 생물학적 담론으로 구성한 지식이다. 따라서 어떤 지식이든 주관적이며 권력이 선택한 담론에 따라 새로운 의미로 바뀔 뿐이지 발전되지는 않는다. 권력은 오직 여러 담론 중에 자신에게 유리한 담론을 선택하고 이를 통해 개별 지식을 차등적으로 분류하며 일부를 배제할 뿐이다. 예컨대 우주가 생긴 이래 천체는 그대로지만 천체 운행에 대한 지식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변했다. ‘광기’라는 지식도 마찬가지다. 광기는 ‘정상이 아닌 미침’이라는 뜻인데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다른 의미였다. 중세에는 ‘예언적인 재능’으로,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성을 넘어선 영역’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러나 광기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정상’이라는 담론이 생겨나면서 ‘윤리적 결함’이라는 의미로 바뀌었고 광인은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심지어 19세기에는 이를 너머 광인을 잡아들여 정신병원에 가두고 타인과의 접촉을 차단했고 지식의 분류와 배제는 더 비인간적인 상황을 초래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정신병원은 관광코스 중 하나가 되었고, 관광객은 감금된 광인을 보면서 자신만이 이성적 존재라는 우월감을 느꼈다. 과거 한국 사회만 보더라도 시골의 작은 마을에는 꼭 지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한 명쯤 살았고 마을 공동체 구성원들은 그와 더불어 살아갔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서든 치료받아야 할 정신질환자로 낙인찍혀 함께 사는 풍경은 희귀한 일이 되었다. 요컨대 ‘정상’이 만들어지면 상대적으로 ‘비정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고 ‘비정상’은 필연적으로 배제된다.

 

지식이 권력에 의해 선택된다고 해서 수동적이지만은 않다. 지식은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바꿀수 있는 힘이 있다. 권력은 지식을 분류하고 배제하지만 거꾸로 지식이 없으면 권력은 작동될 수 없다. 다양한 지식 가운데 어떤 지식을 권력의 틀 안으로 포섭하고 다른 지식을 배제할지를 결정하려면 기준이 되는 지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권력은 꼭 정치적 권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치 권력은 상위일 뿐이며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은밀히 작동하는 모든 힘이 권력이다. 따라서 지배 집단은 권력을 유지하거나 확장할 때 굳이 법이나 물리적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특정한 지식 체계로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예컨대 의사는 법적, 정치적 의미에서 환자에게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의학 지식을 통해 환자에게 명령하고 복종하도록 만든다. 병원이나 의과대학도 다르지 않다. 톰 세디악(Tom Shadyac) 감독의 <패치 아담스(Patch Adams)>는 의료 체제를 다룬 영화다. 의과대학 학생인 아담스(로빈 윌리엄스 분)는 학장인 월콧(밥 건튼 분)과 자주 부딪친다. 월콧은 아담스가 엉뚱한 학생이어서 그럴듯한 의사로 성장할 수 없다고 본다. 수시로 아담스에게 “좋은 의사로 성장하려면 의학 지식이 환자들에게 얼마나 유용한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마음 쓰듯 충고한다.

 

“자네가 의사가 되기를 열망한다는 소리를 들었네. 사실 열망이 의사를 만들지 않아. 내가 의사를 만들어. 이 사실을 알겠나? 그리고 의대생은 3학년이 되기 전에는 환자를 대할 수 없어. 내 말의 뜻을 알아듣겠나? 우리가 병원에서 쓰는 의학적 방식은 수 세기에 걸친 경험에서 나온 성과이고 그에는 다 이유가 있어. 여긴 내 병원이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나는 알고 있어.”

 

그러나 월콧 학장은 아담스에게 의학 지식의 권위를 들어 무조건 권력에 복종하라고 명령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억눌린 자들이 협력하여 지배계급에 의해 정상이라고 정해진 지식에 반하는 지식을 참된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의 지식을 배제하게 되면 억압을 폭로하고 계급 해방을 도모할 수 있다. 요컨대 프레이리나 사또 마나부가 지식이 대화를 통해 생성되어야 한다고 본 것은 지식은 순수하게 객관적이지 않고 권력에 의해 선택되어지며 권력을 유지하는 여러 지식의 기준으로 작동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사회에서 지식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권력을 유지하며 여러 지식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보고, 이를 해체하려면 학교에서 억눌린 자들끼리 대화함으로써 교육받는 지식이 계급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고, 협동을 통해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삶의 경험을 반영하는 지식을 학습하도록 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교육에서 만남, 협동, 대화는 중요한 교수학습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지식은 언어로 드러나고 축적되며 인간의 고유성을 보여준다

 

프레이리나 사또 마나부 교육철학을 의심한다고 해도 교사와 학생 간, 학생과 학생 간의 만남, 협동, 대화를 주요한 교육 수단과 방법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 수업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적절한 방법이라고 본다. 다만 지난 10년간 초·중·고 교육에서 만남, 협동, 대화를 중요한 역량으로 보았고 교수학습에 도입하여 추진했지만 새로운 지식이 창조되고 더 나은 삶을 누리게 되었느냐는 여전히 의문이다. 의사소통은 개인 간의 생각이나 감정을 교환하는 총체적인 행위로서 타자에게 자신의 욕망을 전달할 수 있어야 불만족이나 좌절에서 벗어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문명의 도약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많은 국가들은 교육과정에서 소통을 중요한 역량으로 두고 교육하고 있다.

 

인류가 등장한 후부터 인간의 의사소통이 처음부터 원활하지는 않았다. 간단한 몸짓이나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하는 몸짓언어를 사용했지만 조금만 거리가 떨어져도 의사소통은 어려웠고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다윈은 그 원인을 몸짓언어로 소통하려면 신체 모두를 써야 하고 어둠 속에서는 실행될 수 없는 탓이라고 봤다. 인간은 문자 언어를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의사소통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다. 언어가 삶에서 필수도구라는 것은 언어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도구가 ‘제스처’나 ‘부르짖음’밖에 없다면 서로 생각이나 감정, 욕구를 제대로 전달하거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의사소통이 단절되면 사회적 협력 체제는 무너지고 우리의 삶은 사실상 원시 시대로 되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어릴 적부터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와 관련된 언어 기술을 가정과 학교에서 가르쳐 배우게 하고 있으며 비언어적 수단인 ‘몸짓’, ‘표정’ 등에 대한 교육도 중요하게 본다. 언어적 메시지가 ‘무엇’에 해당하는 내용적 측면이라면 몸짓언어가 보여주는 메타 메시지는 ‘어떻게’라는 방법적 측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언어적 소통의 유용성을 강조하더라도 인간의 고유성은 보편적 수단인 언어에 있고 언어는 사실적 지식이나 개념적 지식을 보여준다. 즉 지식은 언어로 드러나고 축적되므로 소통 역량에서 지식 교육을 빼놓을 수 없다. 또 온전하게 경험을 기억하거나 상상하는 ‘표상 능력’은 오직 개념적 지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의사소통을 잘 하려면 그 수단이 언어적이든 비언어적이든 기술을 배워야 한다. 가령 사랑이 식어가는 연인이 커피숍에서 만났고 어색하고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여자가 먼저 일어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이때 남자가 여자에게 어디로 가는지 묻고 여자가 주변에 산책하러 간다고 대답하면 남자는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것으로 의심할 수 있다. 만약 남자의 의심이 사실로 판명되면 여자가 말한 ‘산책’은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된다. 이로 보듯 언어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엄격한 소통 체계이지만 언제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 달라지며 상대방과 오해를 푸는 데 부족하거나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우리 중에 사회적 삶을 포기한다면 모르겠지만 인간적 삶 속에서 이런 문제에 맞닥뜨리지 않으려면 서로의 의도와 지적 수준을 고려하여 명료한 언어를 쓰고 경청하며 감정을 조절하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협력 성과를 공정하게 분배하며, 다양한 협력방식을 인정해야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우리 교육에서 이런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본다. 학생들이 명료한 언어를 쓰게 하는 논리주의적 비판적 사고에 대한 교수학습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경청하며 감정을 조절하는 기술도 구두 선에서 그치곤 했다. 협력이 소통 후의 행위라면 협력 또한 원활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사실적 지식과 개념적 지식에 대한 교육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를 통해서만이 만남, 협동, 대화 역량도 높아진다. 더구나 인간이 순수하게 이타적이지 않다고 보면 소통은 이익을 공유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타자에게 순수하게 이타적 협력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라도 나중에 상대방으로부터 도움받을 확률을 높이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보고 하는 행위일 뿐이다. 미국의 생물학 교수 제럴드 윌킨슨(Gerald Wilkinson)은 흡혈박쥐 간 친족 관계가 아닌데도 피를 나눠주는 현상을 추적했다. 과거에 A라는 박쥐가 B라는 박쥐에게 피를 토해내서 나눠준 적이 있다면 이후 A가 굶을 때 B로부터 도움을 받을 확률이 높았다. 이런 현상은 흡혈박쥐에게만 발견되지 않았다. 영장류 학자로서 침팬지 연구의 대가인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침팬지 사육장에서 수컷 침팬지 한 마리와 암컷 침팬지 여덟 마리를 대상으로 호혜성의 원리가 지켜지는지 관찰했다. 실험 중에 침팬지 간 서로 털을 다듬어주며 협력하는 장면이 자주 목격되었고 한 놈이 먹이를 달라고 하면 다른 놈이 먹던 먹이 중 일부를 상대방에게 나눠주는 현상도 보편적이었다. 이런 모습이 언제나 일어나지는 않았다. 다른 침팬지가 자신의 생존에 협력하지 않으면 그에게 먹이를 나눠주거나 털을 다듬어주지 않았다. 또 집단의 우두머리를 정할 때도 호혜성의 원리를 잘 따르는 침팬지는 그 지위를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즉 인간이 협동하려면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가능하지 않고 호혜적이어야 한다. 또 호혜적이라도 해도 다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984년 미시간대학교 정치학과 로버트 악셀로드(Robert Axelrod) 교수는 전 세계 게임 이론가, 컴퓨터 공학자, 경제학자, 심리학자를 대상으로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가장 높은 보수를 얻을 수 있는 전략을 공모한 적이 있었다. 이 공모전의 최종 승자는 사람들의 예측과는 달리 가장 간단해 보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 for Tat, 맞대응)’ 전략이었다. 악셀로드는 이 전략이 타당한지를 검증하기 위해 참가자들에게 2차 게임을 공모하며 1차 게임 우승 전략이 ‘맞대응’이었음을 미리 알려줬다. 2차 게임을 할 때도 수 많은 전략이 나왔지만 결국 1차 게임과 마찬가지로 맞대응 전략이 우승했다. 그렇다고 이런 전략이 언제나 유용하지는 않다. 협력이 지속되려면 당사자 간 상호작용이 단순히 일회성이나 몇 번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상당히 반복되어야 하고 게임에 참가한 누구라도 언제 상호작용이 끝날지를 알지 못해야만 한다. 따라서 협력을 보편적 생존 전략이라고 보기에는 여러 전제가 필요하다. 억눌린 자의 해방을 위해 억눌린 자들끼리 협력해야 한다는 교육이 정당하다고 해도 협력의 과정이나 협력을 위한 교수학습방식은 단순하게 협력 대 비협력, 대화 대 반대화 라는 형식으로 도식화할 수 없다. 협력은 내가 옳거나 상대방의 가치나 행동이 틀렸다고 확신하거나 신념을 저버리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앞서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런데도 협력만을 고집하면 집단 구성원들 간의 분열과 갈등만 키울 뿐이다. 지난 2002년부터 일본 교육당국이 학생의 자율성과 종합인성 향상을 목표로 내세웠던 ‘유토리 교육(餘裕敎育)’은 불과 5년 만에 폐기됐다. 유토리 교육을 통해 교육공동체 구성원들끼리 협력하여 창의력, 공감 능력, 의사소통 능력, 자율성을 높이려고 했지만 기본학력은 점점 낮아지고 개인 간 학력 격차는 더 벌어지고 역량 교육에서조차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또 억눌린 자 간에 협력을 내세우더라도 서로 협력하여 이뤄낸 지위, 권력의 분배는 불공정하거나 학연, 지연 등을 통해 규칙을 지키지 않는데도 우대받게 되면 협력은 본질적으로 생명력을 상실한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교육으로 호혜적으로 협력하는 의식을 높이려면 문해력을 높이도록 교육하고, 협력으로부터 나온 산출물이 공정하게 분배되게 하며, 협력방식의 다양성을 보장할 때 실제로 협력하게 할 수 있다. 즉 교육에서 협력이라는 보편 속에 협력방식의 특수성을 가두지 않을 때 파울로 프레이리나 사또 마나부의 교육철학을 효과적인 교육 담론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스트레치 방식만이 협력을 구호에서 현실로 정착하게 할 수 있어

 

세계적인 갈등해결 전문가 애덤 카헤인(Adam Kahane)은 ‘스트레치 협력(Stretch Collaboration)’을 제안한다. 우리는 거의 생각이 다르거나 호감도 신뢰도 없는 사람들과 일하기 때문에 보통의 방식으로는 타협할 수 없으므로 ‘상대방과 관계를 맺는 방식’, ‘상황에 참여하는 방식’,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방식’ 등 모든 틀을 바꾸면서 만나고 대화해야 한다. 특히 집단 구성원들 간 아무리 생각이 달라도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고 대화하면서 각자에게 이익이 크든 작든 돌아가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전통적 협력처럼 단순히 결정된 사안에 힘을 모아 따르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을 인정하고 통제를 받지 않으면서도 이익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협력하는 여러 주체 간에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의 상황 정보나 생각을 끊임없이 주고받는 유연성이 필요하고 소속 집단은 이를 인정하고 적극 지원해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도 이런 스트레치 협력을 적용할 수 있다.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배움의 목표를 정하여 가르치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이 어려움에 빠지면 조언해 주며, 학생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교육 당국은 교사들이 이런 배움의 조력자이자 연결자로서 역할을 잘 수행하도록 교육 시설 등 적합한 환경을 지원하면 된다. 즉 교육 주체가 유연한 자세로 서로의 입장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깊이 있는 협력과 배움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수년 동안 다수 교육청이 ‘협력’을 절대불변의 ‘교리’처럼 내세웠지만, 감동을 주지 못했고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교육 당국은 스트레치 협력보다는 이견이 있는 개인이나 집단을 마치 ‘적화 증후군’ 증세를 보이듯 적이나 개화할 대상으로만 대했다. 오직 교육 당국이 제시한 교육과정에 맞춰야만 모범이었고 교수·학습법조차 전부 같아야 하며 조금이라도 다르면 바꿔야 할 대상으로 밀어냈다. 또 참 학력 등 새로운 학력관만이 그 목적부터 과정, 수단에 이르기까지 모두 ‘선’이자 ‘절대적 신념’이고, 다른 접근 방식은 낡았다고 습관처럼 말해왔다. 한 마디로 협력을 핵심역량으로 삼기만 하면 모든 구성원이 동의하며 단 한 명의 아이까지 배움을 끌어낼 수 있다는 독단과 착각으로 교육 정책을 펼쳐 왔었다. 이랬기 때문에 아프리카 속담인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와는 다르게 교육 현장에는 분열과 갈등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프레이리 또한 다양한 지위와 역할을 가진 구성원들이 협력하려면 대화해야 하고, 억눌린 자를 해방한다는 구실로 대화에서 억눌린 자를 억압하여서는 안되고, 그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고 한다. 또 대화는 강요하지 않고, 조종하지 않고, 길들이지 않고, 슬로건화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진정한 지지는 서로 간의 교류를 통해 자유로운 선택의 지지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교육 방법은 사또 마나부 교육 담론과 분리될 수 없고 시급하게 필요하다

 

억눌린 자를 위한 교육을 한다고 교육과정을 이항적 대립으로 보는 일은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는 교사와 학생은 대립하게 되고, 가르침과 배움도 마찬가지이며, 교수학습방식도 일방적으로 우열의 관계로 재정립될 뿐이다. 더 우려할 문제는 대립 항으로 구분되어 같은 범주에 포함된 교수법, 학습법 간에도 차이는 사라지고 이항 구도만 남아 하나의 방식이 다른 방식을 포섭하고 포획하게 된다. 그러나 차이를 받아들이는 일은 이항에서 반대편 항을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항에 속한 여러 개체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학교 교육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 다른 자질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성적이라는 하나의 척도에 비추어 동일화하는 교육체제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관점이 정당하다고 평가받는 것은 내부적 차이를 인정한 탓이다.

 

교육은 무서운 힘을 갖고 있기에 교육과정에 어떠한 논리와 방식과 세계관이 적용되느냐에 따라 결과도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지배 엘리트들이 체제 순응적이고 현실에 적응하는 것으로 일관된 교육은 비인간화가 횡횡하는 국가와 사회를 만들 뿐이다. 이러한 억압과 지배가 횡횡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세계로의 현실 변혁을 갖게 하는 힘은 교육의 한 본질이며 교사의 숙명이자 책무이다. 다만 이 힘이 사또 마나부의 교육 담론이나 파울로 프레이리의 억눌린 자를 위한 교육이라는 언어만으로 학생들에게 갖추게 하거나 높아지게 할 수는 없다. 교육의 8할은 언어적 상호작용이며, 이 언어가 새로운 힘을 지니려면 추상적이거나 구호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학생들이 자기 말을 하고, 세계를 자신의 삶에서 명명할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수업에서 사실적 지식과 개념적 지식을 중시하고 이를 기억하기 위해 언어해독력, 문해력를 높이는 교수학습법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한다. 언제나 그래왔고 그렇듯이 중립을 지키는 교육과정은 없다는 의견에 적극 공감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를 넘어 인간이 현실에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대응해서 자기 세계를 변혁하려면 이를 위한 수단으로 일정한 수준의 보편적 지식을 습득하고 있어야 한다. 또 문제를 일깨우는 지식과 문제를 해결하는 지식 사이에는 상당한 간격이 있을 수 있고, 교육 의도와 교육 결과도 항상 동일하지는 않다. 따라서 선한 담론만으로 현실을 바꿀 수 없고 정교하고 과학적인 교육 방법은 담론과 분리될 수 없는 교육 요소이며 이에 대한 교사의 학습과 수업에서 적용은 어쩌면 교육의 본질 같은 거대 담론 이상의 시급한 과제라고 볼 수 있다.

 

사또 마나부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여야 하며 실제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수용되고 발전되려면 사또 마나부를 뛰어넘어야 한다. 교육을 통한 억압적 현실의 타파나 개선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하나의 방식을 고수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열 수 없으며 열어 온 역사도 없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 발전의 변증적 흐름을 외면하고 교육과 현실을 교조적으로나 주관적으로 이해하려는 발상은 몹시 위험하고 동의할 수도 없다. ‘지식 대 역량, 교사 대 학생, 강의 대 활동, 총괄평가 대 과정중심평가/형성평가’의 시각으로 교육과정과 교육을 이해하려면 단순하고 명확해 보이긴 하겠지만 풍선효과만 커질 뿐이다. 단순함의 미학은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였던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이 이미 지적하였듯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여러 대안을 놓고 절차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단순한 방식을 선택하라는 것이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단순화하거나 단순함을 우선적 선택기준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식을 중심으로 역량을 높이며 지식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자유, 평등, 정의 등 보편적 가치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이에 대한 학습은 국가적 책무이자 인간의 존엄한 삶을 위한 근간이므로 반드시 일정 수준 이상이 되도록 하여야 하며, 교수학습에서 과학적 학습원리는 교사의 수업역량으로 필수적으로 갖추도록 하고 수업에서 활용토록 함으로써 학생들에게 각자의 고유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배움이 이루어지도록 할 때 사또 마나부의 문제의식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유력한 교육 대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학생의 차이를 인정하는 교육이란 현실의 억압을 바꾸겠다는 담론으로 포섭하려면 더 많은 지혜를 모아야 하고 과학과 합리라는 두 축을 벗어난 사고는 독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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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완산고등학교 교사 박제원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일반사회교육을 전공하여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예탁결제원에서 10년 동안 근무한 뒤 전주 완산고등학교에서 사회 교사로 재직 중이다. 전북 교육청 사회문화 집필 위원, KDI 경제교육교재 집필 위원, 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자문단, 충남 지방공무원 임용시험 출제위원, 전북 및 전남 교육연수원 강사, 전북대학교 교사 연수 강사, <새전북신문>, <열린 전북>, <전북교육신문>, 인문 웹진 <아홉시>, 네이버 비즈니즈 블로그 <인터비즈>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지금은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의  교육저널인 「교육 제4의 길 」에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 <미래 교육의 불편한 진실, EBS, 2021>, <학교 속 문해력 수업, EBS, 2022>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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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1. 김태균 수정 삭제

    지식이 권력에 의해 선택되듯, 교육과정 역시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2022 교육과정 개정에서 충분한 고민이 필요한 지점 같습니다. 또한 구성된 지식을 균형되게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는 ‘억압과 지배가 횡횡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세계로의 현실 변혁을 위한 힘을 갖게 하는 것이 교사의 숙명이자 책무’라고 언급하신 필자의 글에서도 확인되는 것 같습니다. 항상 고민할 수 있는 글을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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