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가르치면 많이 배울까?
이 글의 요지는 유치원과 어린이집 교사가 가르쳐야 하는 누리과정 내용을 대폭 줄여서 유아들이 자유로운 놀이를 통해 더 많은 배움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교육부는 1969년부터 3-5세 유아를 위한 [유치원교육과정]을 고시하고, 보건복지부는 2007년에 0-5세를 위한 [표준보육과정]을 고시하였다. 이 두 가지 국가 교육, 보육과정은 그동안 유치원의 유아교육과 어린이집의 영유아보육을 실행하는 핵심 내용이었다.
그러다 2012년에는 만 5세, 2013년에는 만 3, 4세를 위한 교육과 보육과정을 [누리과정]으로 통합하였다. 즉 2013년부터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3-5세 대상 교육, 보육 내용이 같아진 것이다. 그러나 교사와 기관의 명칭 및 담당하는 정부 부처가 여전히 다르기 때문에, 속은 같아졌지만 겉은 아직도 다르다.
누리과정으로 통합한 것은 실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997년에 제안된 유아교육과 보육의 통합을 한 단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리과정 작업은 너무나 짧은 기간에 이행해야 하는 정치적인 과제였다. 절호의 기회였지만, 전문가들은 내용을 심도 있게 검토하고 숙고할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전문가 집단도 유아교육과 보육분야로 나뉘어 있었다. 그 결과 누리과정은 유치원 교육과정과 어린이집 표준보육과정을 교묘하게 병합한 형태가 되었다. 당연하게 내용의 양도 늘었다.
초·중·고등학교 교육과정처럼 누리과정도 유아교육, 보육 전문가들이 주도해서 정한다. 전문가 집단의 속성은 해당 분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알리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분야 내용을 줄이거나 빼지 않으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현행 우리나라 누리과정은 내용을 많이 제시하고, 그 내용을 다 가르치면, 유아들이 많이 배울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 같다. 많은 교육 내용이 많은 배움을 낳을까?
1. [누리과정]은
고시문에 의하면 누리과정은 국가 교육·보육과정으로,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만 3~5세 유아의 심신의 건강과 조화로운 발달을 도와 민주시민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누리과정 내용은 ‘영역-범주-내용-세부 내용’의 위계적인 체계로 조직되어 있다.
사실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국가 교육·보육과정이 적용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의무교육도 아니고 학제에 편입되지도 않은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해를 돕기 위해 친숙한 초중등학교 교육과정과 비교해서 말해보면, 영역은 교과목으로, 범주는 대단원 정도로, 내용은 단원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누리과정의 영역은 5개로 신체운동 건강, 의사소통, 사회관계, 예술경험, 자연탐구이고, 각 영역은 3-5개의 범주로, 또 각 범주는 2-3개의 내용으로, 또 각 내용은 2-3개의 세부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영역별 범주의 수는 3, 4, 5세 모두 동일하지만, 내용과 세부 내용은 연령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특히 세부 내용은 3세 103개, 4세 129개, 5세 137개로 연령이 올라갈수록 더 많아진다. 누리과정에 포함된 연령별 내용의 수는 아래와 같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예를 들어 신체운동 건강 영역은 신체 인식하기, 신체 조절과 기본운동하기, 신체 활동에 참여하기, 건강하게 생활하기, 안전하게 생활하기의 5개 범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만 3세를 위한 신체 인식하기의 내용은 2개, 세부 내용은 각 내용 당 2개씩이다.

위에 제시한 내용을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운영일 및 운영시간과 관계 지어 생각해보자. 일 년 52주 가운데 방학이나 휴가를 제외하고 약 45주 정도 교육, 보육과정을 운영하는데, 다양한 원내외 행사를 제외한다면 실제 일상적인 교육, 보육과정을 운영하는 주는 더 적다. 운영 시간은 기관에 더 오래 머무는 유아들이 많아져서 길어지고 있는 추세이지만, 누리과정은 주로 오전 시간에 운영하도록 권장되고 있다.
그런데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유아들의 생활 관련 주제를 중심으로(예를 들면, 가족, 우리 동네, 봄, 도구 등) 각 영역의 내용을 통합해서 교육, 보육과정을 운영하게 되어 있다. 초등학교 1, 2학년의 주제중심 통합교육과 유사하다.
유치원과 어린이집 교사들은 누리과정 내용을 다 가르쳐야 할 것으로 알고 있다. 더구나 평가를 통해 누리과정 세부 내용 포함 여부를 수업활동에서 확인하기 때문에 그 중압감이 매우 크다. 교사가 가르쳐야 할 내용이 많을 경우 유아들의 일상이 어떻게 전개될 지는 자명하다. 매우 구조적으로 촘촘하게 조직된 일상을 보낼 것이다.
그런데 고시문의 총론에 제시된 누리과정 편성과 교수·학습 방법을 살펴보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2. [누리과정]을
고시문에 의하면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는 누리과정을 1일 4∼5시간을 기준으로, 5개 영역의 내용을 균형 있게 통합적으로, 유아의 발달 특성 및 경험을 고려하여 놀이를 중심으로 편성하되, 반(학급) 특성에 따라 융통성 있게, 또 일과 운영 시간에 따라 심화 확장할 수 있도록 편성할 수 있다.
또 누리과정을 연간, 월간, 주간, 일일 계획에 의거하여 운영하고, 놀이를 중심으로 교수·학습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며, 유아의 흥미를 중심으로 활동을 선택하고 지속할 수 있도록 하며, 유아의 관심과 흥미, 발달이나 환경 특성 등을 고려하여 개별 유아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학습하도록 한다.
그러면 앞에 제시한 누리과정의 내용과 누리과정의 편성, 운영 및 교수·학습 방법을 관계 지어 살펴보자. 먼저 교사가 다 가르쳐야 할 내용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내용과 편성 방침은 다소 모순이 있다. 왜냐하면 유아의 특성과 경험을 고려하고, 놀이를 중심으로 편성하며, 학급의 특성에 따라 융통성 있게 누리과정을 편성하려면, 많은 내용이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많은 내용을 다 가르치려면 유아의 특성이나 경험은 후순위가 되고, 놀이보다는 교사의 가르침이 우선이 되며, 학급의 특성도 고려하기 어렵다.
두 번째 누리과정 운영은 매우 체계적인 계획안을 사전에 작성하여 계획안에 근거하여 운영하도록 하고 있는데 이는 많은 내용을 다루기에 매우 적합하다. 즉 교사가 사전에 계획안을 작성하면서 내용을 안배하여 배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교수·학습 방법을 생각해보자. 놀이를 중심으로, 개별 유아의 관심과 흥미 및 발달 특성을 고려한 적합한 방식으로 교수·학습을 하도록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하여 특정 내용을 가르쳐야 할 때는 이런 학습방식을 적용하기 어렵다.
이렇게 현행 고시문에 의하면 누리과정의 편성과 교수·학습 방식은 ‘교사가 가르쳐야 할 내용’보다는 ‘개별 유아의 놀이’에 더 초점이 가 있다. 반면에 누리과정 운영은 교사의 사전 계획안에 근거하도록 하여 내용을 충실하게 실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어디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까?
3. 앞으로 [누리과정]은
그러면 앞으로 누리과정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유아들이 무엇을 얼마나 배워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좋은지는 국가의 운영 철학이나 사회 일반인 및 부모의 기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유아교육, 보육에서 무엇이 우선이 되어야 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유아들에게 더 많은 배움을 창출할 수 있을까를 기준으로 논의돼야 한다.
먼저 누리과정 내용을 대폭 줄여야 한다. 즉 교사가 가르쳐야 할 내용을 줄여야 한다. 그래야 유아들이 중심에 놓일 수가 있고 놀이가 활성화 될 수 있다. 또 가르쳐야 하는 부담을 덜은 교사가 유아들의 관심과 흥미에 더 민감하고 더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지원해줄 수가 있다. 그러면 놀이는 일종의 작업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어떤 결과물을 산출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얻어지는 의미 있는 현상들은 재미, 몰입, 행복감, 협동, 문제 해결, 인지적인 학습, 정서적 유대감 등 우리가 기대하는 그 모든 것들이다.
다음으로 사전에 작성한 계획안에 근거한 누리과정 운영이 달라져야 한다. 이번 주, 오늘 나타난 유아들의 관심과 흥미, 그리고 놀이를 관찰하고, 그 안에서 발견한 것들을 누리과정 내용과 관련시켜 보면 놀랍게도 너무나 연계가 잘 된다. 발현적 교육과정을 지향하고 실제로 운영하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운영을 들여다보면, 사전에 작성한 계획안 운영과는 차원이 다르게 더 많은 배움을 창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많이 가르친다고 많이 배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치원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유아들의 자유로운 놀이는 가치있는 배움을 가장 많이 창출해 낼 수 있는 보물 같은 시간이다. 교사가 가르쳐야 할 누리과정 내용은 줄이는 것이 마땅하다.
* 고시문의 유아교육과정 내용을 줄여한다는 주장은 필자가 2006년도 유치원교육과정 개정 총론 연구진으로 참여하면서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함. 이 내용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2017.12.21에 국회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열린 [누리과정 운영의 자율성 강화를 위한 개선방안 토론회] 자료집을 참고하기 바라며, 이 칼럼은 본인의 평소 생각에 토론회 발표자 세 분의 원고를 참고하여 작성한 것임.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유아교육 전공으로 한국교육개발원에 오랫동안 근무하며 유아교육정책을 연구했으며, 현재는 동국대(경주)에 재직하고 있다. 그동안 저출산고령화사회위원회 위원, OECD 유아교육과 보육정책 국가조정관, 교육부 정책자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유치원교육과정 개정 등에 참여하였다. 대표적인 정책 제안은 유아교육-유치원-교육부, 보육-어린이집-복지부로 이원화된 유아교육과 보육체제를 단일부처로 통합하자는 것이며, 이 안은 지금까지도 미완의 가장 뜨거운 이슈이다. 최근에는 미래를 위한 배우기와 익히기에 쏠려있는 유아기를 아이들이 주도하는 생동하는 놀이 중심으로 되돌리는 것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