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개혁의 실패를 어찌 교육부 탓만 하는가?

모든 교사는 아니지만 교육정책에 관심이 있는 교사들은 상당하며 교육정책에 대한 연구가 본업인 교육학자나 교육 관료도 한두 명이 아니다. 또 지난 수십 년의 한국 교육의 역사를 보면 그들에 의해 제언된 교육 정책도 셀 수 없다. 그런데도 교육부나 교육청이 주도했지만 국민 다수가 공감하고 받아들이는 정책은 제한적이었으며 교육관이나 이념적 성향에 따라 갑론을박은 여전하다. 그러다 보니 정부나 교육감이 바뀔 때마다 추진했던 교육 개혁이 성공보다는 실패로 귀결되었다고 평가받는 경우가 많았다. 즉 역대 정권이나 교육감이 추진했던 교육 개혁을 둘러보면 장기간 호평을 받았던 정책은 매우 드물다. 특히 고교평준화를 제외하고는 교육과정이나 대입과 관련될수록 호불호가 엇갈렸으며 갈등은 진행형이다.
그러면 새로움과 희망을 담고 시작한 교육개혁은 왜 자주 실패하는가? 그 원인에 대해서는 교사든, 연구자든, 교육 관료든, 교사 단체든 각자의 처한 상황이나 교육철학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다름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에 대한 원인을 정밀하게 진단하고 효과적인 대안을 내놓으려면 지켜야 할 기본 전제들이 있다. 이는 비판적 사고로서 정책을 정하는 의사결정의 기본원리이기도 하다. 또 교육개혁을 하겠다는 여러 정책에 담긴 진단이나 대안 및 제언의 합리성을 평가하려고 할 때에 유효한 기준이 될 수 있다. 특히 교사나 장학사 및 교육연구자들이 교육정책을 비판하면서 약방에 감초처럼 빼놓지 않고 교육부의 어설프거나 경직된 정책과 자치, 분권의 원리를 대비하면서 정책의 입안과 실행주체로서 교육청을 대안으로 내세우지만 매우 편파적이거나 정치적인 권력 게임의 틀에 머무는 경우도 많다. 즉 교육청도 정책을 수립하고 입안하는 과정에서 비판적 사고를 하지 않는데 일방적으로 참과 거짓, 선과 악으로 분할하고 상징조작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개혁은 자주 구조적 한계를 보이며 상대 기관에 책임을 전가하는 일이 허다하다.
교육정책이 성공하려면 의사결정에서 합리성, 대중성, 윤리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다수의 교육 관련 종사자들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직관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지만 정책을 수립할 때 흔하게 하는 오류가 있다. 이를테면 문제를 충분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그냥 먼저 생각나는 것을 실행하거나, 다른 대안이나 이로 인한 결과를 고려하지 않거나, 더 많은 정보를 찾아보려고 하지 않거나, 감정적으로 결정하거나, 윗사람이나 다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는 등이다. 이런 일들은 너무 흔했었고 자주 반복되었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려는 취지에서 정책을 입안하는 주체가 누구든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 좋은 의사결정과 정책을 기대하며 몇 가지 제언을 하려고 한다. 이는 교육 개혁과 관련된 제언에 그치지 않고 이미 제시된 교육 제언에 대해 평가하는 기준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본다.
교육정책에 관여하는 당사자는 첫째, 왜 그런 정책이 필요한지에 대해 분명히 해야 한다. 즉 정책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는 동기나 그런 동기의 근저에 놓인 가정, 맥락 등을 가능한 한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또 이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둘째, 합당한 대안을 제대로 생각해봐야 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선택이나 목표를 정한 다음 나중에 그런 선택을 합리화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따라서 적절한 해결책이 분명하게 있다면 의사결정을 할 때 잠시 멈추어 서서 대안이 무엇인지를 성찰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말로는 아주 쉬워 보이지만 개인이 낡은 사고습관이나 정치적 편향 내지는 어느 순간에는 사적 이익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바꾸기란 쉽지 않으며 새로운 습관을 체득하려면 훈련이 필요하고 훈련을 해도 비판적으로 대안을 생각해 내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어떤 결정이 양자택일이라면 한두 가지 대안만을 생각해도 된다. 하지만 사안이 복잡하고 중요할 경우, 어떤 대안이 있는지를 알려면 창조적이고 독창적이어야 한다. 물론 의사결정을 하거나 이미 수립되어 권고했던 정책을 평가할 때 우리가 얼마나 많은 대안을 혹은 어떤 대안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선을 긋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사안에 따라 다르며, 얼마나 중요한지,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 관련 정보가 현재 있는지, 정책 입안자나 평가자가 중간에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마음을 바꾸어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 등에 달려 있다. 중요한 점은 정책에 대한 의사 결정이나 권고가 정당하려면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 충분하게 대안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몇 가지일 수도 있고 오직 그것만이 합리적인 대안일 수 있으며, 아니면 거기에는 독창적인 방안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이는 우리 스스로가 내린 결정에 대해 “나는 그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흔하며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안에 대한 성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지만 반드시 탐구를 깊이 하려고 해야 한다. 탐구의 정도는 그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런 결과가 얼마나 어려운지 등에 달려 있으며 이런 탐구를 충분히 했다면 그 과정은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탐구 수준이 어느 정도여야 충분하게 했다고 할 수 있는지 말해 줄 수 있는 계량화된 수치나 일반적인 규칙은 없다. 셋째, 의도했던 결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을 경우에 어떤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실현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있고 아주 낮은 것도 있다. 또 바람직하지 않은 어떤 일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경우 보통 ‘위험’이라는 용어를 쓴다는 점도 주목해야 하며 이 점도 충분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넷째, 참여자들의 도덕적 책임이 정책결정과정에 고려되어야 한다. 즉 의사결정을 할 때 결과들의 목록에 도덕적 책임을 포함시키고 그것들을 위반할 경우 얼마나 나쁜 결과가 생길지를 가늠해보아야 한다. 다섯째, 결과에 비추어 어떤 대안이 최선인지를 비교해보아야 한다. 이런 방식을 따르려면 상당한 탐구를 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고 시간과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가능한 방안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렇게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사전에 가늠해 봄으로써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의사결정 절차를 잘 따르게 되면 흔한 잘못을 피할 수 있고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때보다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좋은 의사결정’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아주 잘 세운 계획도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절차를 따라야 하는 것은 여러 가지 고려 사항을 종합할 경우에 효과는 높이고 위험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의사결정의 질에 대해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판단하는 데는 두 가지 방안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하나는 결과를 보고 내리는 판단이며 다른 하나는 의사 결정을 하는 과정에 사용된 절차의 질인 과정의 타당성에 대한 판단이다. 특히 정책결정자에게는 과정의 타당성이 중요하다. 누구나 자신의 의사 결정이 좋은 결과를 낳기를 바라고 아주 합리적 절차를 따르더라도 일이 잘못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장한 절차를 따르게 되면 언제나 좋은 결과를 보장해 주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면 실수를 줄일 수 있고, 대체로 다른 절차를 떠올릴 때마다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더 좋은 의사결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교육정책에 대한 부당한 비판은 권력지도를 사이에 둔 영토전쟁에 불과하다
교육 개혁을 추진하거나 평가할 때에는 위에서 언급한 원리들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한국 교육 이곳저곳에 배회하는 여러 교육 개혁에 대한 담론을 보면 이와는 거리가 먼 주장도 상당하다. 특히 교육개혁이 실패하는 원인에 대하여 천편일률처럼 제기되는 몇 가지 주장 중에는 비판적 사고보다는 무 비판적이고 편협한 관료주의에 빠져있으며 교육청이 영토 전쟁을 하듯이 교육부와 권력 게임을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미신에 빠진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교육부에 대한 근거 없거나 빈약한 근거를 내세우는 주로 교육청에 우호적이거나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구성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말과 글이 여기에 해당한다. 필자가 교육부의 부당한 행정에 대해 옹호하려는 조금의 의도도 없음을 미리 밝힌다.
첫째, 교육부가 중심이 되어 정권 내 단기적 실적에 집중하는 정책이 좋은 의사결정이 갖추어야 할 여러 전제 없이 이루어져 왔다는 비판이다. 이를테면 교육 개혁의 방향이 객관적인 데이터도 없는데 교육부 관료에 의해 즉흥적인 정치적 판단으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교육부에 대한 이러한 비판의 취지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정책 입안자들이 지적받는 것처럼 그렇게 허술하게 정책을 입안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객관적인 데이터가 부족할 수는 있지만 아주 적거나 없지는 않다. 이는 이미 전술한 것처럼 데이터가 어느 정도여야 충분하게 했다고 할 수 있는지를 말해 줄 수치로 계량화되거나 일반적인 규칙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육부가 근거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여론조사 등을 통해 상당한 데이터를 마련하고 정책을 수립해도 교육은 단순하게 기업의 논리나 인기영합주의가 아닌 철학적 방향성을 고려해야 하므로 여론만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교육부는 대중의 의견을 무조건 추종하지 말고 교육적 측면에서 보정을 해야 하는 책무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교육적 전문성보다는 개인의 경험치로 교육을 이해하는 교육부 관료들이 교육개혁을 주도하여 발생하는 문제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의 기저에는 정권이 집권 기간 중의 실적에 치중하며 교육부 관료들이 이에 편승하여 승진에 집착하는 전시행정이 있다고 비판한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들은 점점 더 공교육을 불신하게 되고 그 대가는 오롯이 학교 현장에서 치루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지나치게 일방적이다. 교육부 관료들이 관료제에 기인하지 않고 정책을 수립할 수 있으며 교육부가 보정기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하지만, 교육부를 비판하면서 객관적 데이터의 부족을 들면서 여론 조사 등 대중의 의견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다시 말하면 서로 대립하는 근거를 한 주장의 근거로 삼게 되면 그 주장은 타당하지 않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교육부가 실적에 집착하는 정책을 수립한다는 비판은 사실은 비판 주체가 속한 기관이 교육청이든 교사단체든 자신들과 교육철학이 다른 정책을 수립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주장이 옳고 바람직한가를 검토하려면 교육부나 교육청이 아니라 전제한 의사결정과정에서 갖추어야 할 다른 필요조건 등을 세심하게 고려한 정책이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
둘째, 교육부가 지역적 격차를 고려하지 않는 획일적인 기준으로 정책을 수립한다는 비판이다. 이는 사실과 매우 다르다. 지역적 격차를 고려하고 있기 때문에 초중등교육법 제 23조에 따라 교육청이 주도하는 지역교육과정을 인정하고 있다. 즉 시·도 교육청은 초·중등교육법 제 23조 2항에 근거하여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을 지역에 있는 학교의 실정, 학생의 실태, 학부모 및 지역의 요구, 해당 지역과 학교의 수준에 맞게 재구성할 수 있다. 또 재정적으로 지역격차를 완화하기 위한 특별 교부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교육부에서 관리하고 있으나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에 의거한 재원으로 실제로 시·도교육청이 집행한다. 특별교부금의 구성을 보면 지역교육현안수요(30%), 재해대책수요(10%), 국가시책사업(60%)으로 구분되며 그 중 주로 교육시설사업에 투자되는 지역교육현안 및 재해대책수요는 교육청에서 직접 집행하고, 국가시책사업은 전국에 걸쳐 시행하는 교육 관련 사업으로 따로 재정지원계획을 수립하여 지원해야 할 특별한 재정수요가 있거나 행·재정 운용 실적이 우수한 교육자치단체에 지원한다. 그러면 이러한 제도를 통해 교육청이 어떻게 지역격차를 완화할 수 있느냐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교육청은 교육과정이나 교육과정 편성과 운영에 대해 상당한 자율권을 갖는다. 특히 2015 개정교육과정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지역격차를 거론한다면 여기에는 교육청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법령에 따르면 교육청은 지역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운영할 때 지역 학부모나 지역의 요구를 실제로 수렴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정책 설문조사를 전면적이고 객관적으로 시행한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즉 지역적 격차를 줄이기 위해 시도교육청에게 법적 권한을 줬음에도 그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해 교육부의 탓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또한 특별교부금도 마찬가지이다. 특별교부금은 지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중앙정부가 배정한 재원이다. 그래서 교육부가 지역 격차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 물론 교육청 관료나 교사들 중에 일부가 국가 시책사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다. 특히 차등지급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국가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교육현안에 대해 지역 격차를 완화하면서 시행하고자 하는 의도로 배정된 재원이고 그 목적이 교육과 학습에 기여할 수 있다면 성과에 따라 차등지급하는 정책이므로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이를테면 교육부가 특별교부금의 배분에 대해 남용하거나 전횡을 일삼았다는 증거로 국가수준학업성취도에 따른 기초학습부진비율 개선 정도에 따라 다르게 배분한 사례를 드는데 이는 교육부의 지역격차를 고려하지 않는 정책 사례로는 적절하지 않다. 그 까닭은 단순하게 기초학습 부진비율이 높다가 기준이 아니라 비교 시점에서 기초학습 부진비율이 감소한 정도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즉 전체적인 지역의 숫자가 아니라 지역의 격차를 인정하고 개선 비율을 기준으로 삼았다. 다시 말하면 이 사례를 들어 교육부를 비판하려면 지역격차를 고려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기초학력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로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왜 교육청의 입장이 옳은 지에 대해 학습과학을 근거로 논증해야 한다. 그런 전제를 하지 않고서 이런 사례를 들어 교육부의 정책결정권을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즉 그 책임은 교육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초학력 미달학생을 줄이려는 교육청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몇 년 전만 해도 많은 교육청이 기초학력에 대해 미흡한 근거로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지만 지금은 기초학력 미달학생에 대해 매우 고심하고 있는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더구나 교육부가 지역 격차를 고려하지 않는 경직적인 교육 정책을 강행한다고 비판하려면 먼저 교육청이 지역 격차를 줄이기 위해 제도적으로 보장된 권한을 행사하거나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를테면 지역 간에 나타나는 학력 격차를 줄이려고 해야 하는데 지난 10년을 보면 교육청은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즉 교육청이 좋은 정책이 구비해야 할 합리성, 대중성, 윤리적 정당성을 고려하지 않은 교육행정을 펼쳐 왔는데도 그 책임을 오로지 교육부에 전가하는 등 사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셋째, 교육부의 조직구조와 일하는 방식을 문제 삼기도 한다. 이는 교육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교육부의 조직구조나 일하는 방식의 경직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초중고 교육과 관련해 교육청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이 열려있고 이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도 문제의 근원을 교육부 탓으로 돌리는 처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자유학기제가 자유학년제로 확대 개편되었는데 그 취지를 살리지 못하는 원인을 교육부가 교육청이나 단위 학교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고 탓을 하는데 여기에는 설득력이 없다. 현재 자유학년제가 인기가 없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미 일본의 유토리 교육과정과 자유학기제의 실패에서 보듯이 교육부의 지원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제도의 내실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시도 교육청이 책임지고 해야 할 편성과 운영과 관련된 정책이나 집행에 있어 부실하여 지난 수년 동안 상당한 예산을 집행하였지만 교사도 학부모도 학생도 만족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 책임을 교육부가 실제로 행정적이거나 재정적인 지원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전가하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교육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개혁이 아니더라도 성공할 수 있다. 이를테면 민주주의를 포함한 근대화의 방식이 꼭 위로부터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고 아래로부터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영국과 프랑스는 아래로부터, 독일과 일본은 위로부터 이루어졌고, 한국은 위로부터 경제적 근대화가, 정치적 민주화는 아래로부터 이루어졌다. 영국과 독일의 근대화를 비교하면서 아니 지금의 영국과 독일을 볼 때에 어떤 방식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위로부터 이루어진 경우는 단기간에 성과를 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으며 아래로부터 이루어진 경우에도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청교도 혁명이나 프랑스 대혁명 등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변동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변해왔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위로부터 진행되든 아래로부터 진행되든 변화 과정을 면밀하게 탐구하고 장단점을 분석하여 적합한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취지이다. 그런데 마치 교육청이 주도하면 선이고 교육부가 주도하면 악이라는 논리는 맞지 않다. 교육부가 주도해서 악이 아니라 교육부가 의사결정에 있어 갖추어야 할 여러 조건인 이를테면 다양한 대안의 결과가 무엇인지,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클지, 그리고 결과가 얼마나 좋을지, 도덕적 책임을 적절하게 고려한 것인지 등을 지키지 않았을 때 문제가 된다는 말이고, 이러한 원칙은 교육청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 개혁에서 있어서 통제와 획일적 방식이 아닌 자율과 다양한 방식이 중요하다. 하지만 교육부는 통제와 획일이며 교육청은 분권과 자치로 대립하여 보도록 하는 말이나 글은 내적으로는 의사결정의 중요한 원리보다는 권력적 욕망 위에 주장이 놓이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즉 교육청이 분권과 자치를 말하기 전에 주도했거나 주도하는 여러 정책이 의사결정의 원리를 따르고 있었느냐를 반성해야 한다. 교육청 관료나 여기에 참여하는 교육학자나 일부 교사들이 의사결정의 기본원리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분권, 자치, 혁신, Bottom up은 하나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누구나 교육 정책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할 수 있고 교육청 관료에게도 그런 권한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그 칼이 생명의 칼로 유익하며 예리함 만큼이나 공감을 받으려면 사실적이고 객관적이며 교육현안과 깊은 연관성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비판이어야 한다. 교육과정에서 실제로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학력에 참이라는 정치적 접두사를 붙이거나 교육부에 대해 대중 추수적으로 정책을 입안한다고 하고, 그와는 모순되게 국민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는 객관적 데이터가 부족한데도 정책을 강행한다고 하면서 교육청을 교육의 예루살렘으로 두면서 교육적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은 교육개혁을 악용하는 처사에 불과하다.
교육부나 교육청이냐가 아니라 의사결정을 할 때 기본원칙을 지켜나가는 방향이 교육개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즉 교육관료들은 교육부나 교육청을 가리지 않고 의사 결정이나 어떤 행위를 권고할 때 하게 되는 사고에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바로 결정을 하고 나중에 합리화를 하려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따라서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해야 하며, 어떤 대안이 있는지, 대안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등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책을 통해 의도한 결과가 얼마나 나타날지, 얼마나 바람직할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며 도덕적인 요소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전체 의사 결정을 통해 합당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다수의 교육청이 지난 10년 동안 미래 교육이라고 내세우면서 정책적으로 추진했던 <새로운 학력>을 이 원칙과 비교하면서 성과와 문제점을 검토해보면 정책의 주체가 교육부냐, 교육청이냐가 아니라 어떤 원칙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교육 개혁을 하겠다는 교육관료들의 글이 무척 중요한 까닭은 그들이 바로 교육 개혁을 추진하는 당사자들인데 비합리적인 사고를 하게 되면 결국 교육 개혁은 교육 개악으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교육부든 교육청이든 관료들이 정책을 수립하거나 의사결정을 할 때 ‘합리성, 대중성, 윤리성’과 연관된 원칙을 따르지 않고 국민보다는 개인이나 조직의 이익에 따라 하는 행태가 문제인데, 이를 교육부나 교육청의 대립으로 상황을 설정하고 교육부 탓으로 돌리는 행위는 허수아비 오류에 불과하다. 교육 개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진정 교육 개혁을 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면 의사 결정이나 권고를 할 때 치밀하고 공의로운 태도로 책임을 다하는 일이 중요하다. 교육 개혁을 위해 분권, 자치, 혁신, Bottom up은 하나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없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일반사회교육을 전공하여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예탁결제원에서 10년 동안 근무한 뒤 전주 완산고등학교에서 사회 교사로 재직 중이다. 전북 교육청 사회문화 집필 위원, KDI 경제교육교재 집필 위원, 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자문단, 충남 지방공무원 임용시험 출제위원, 전북 및 전남 교육연수원 강사, 전북대학교 교사 연수 강사, <새전북신문>, <열린 전북>, <전북교육신문>, 인문 웹진 <아홉시>, 네이버 비즈니즈 블로그 <인터비즈>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지금은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의 교육저널인 「교육 제4의 길 」에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 <미래 교육의 불편한 진실, EBS, 2021>, <학교 속 문해력 수업, EBS, 2022>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