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공부
수학 공부를 시킨다.
수학 문제집을 들고 있는 아이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하다. 이미 분수를 다 배우고 나서 복습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도, 한 번씩 이게 뭔가 싶어 혼돈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이는 다만 분수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4학년만의 문제는 아니다. 분수의 곱셈을 시작한 5학년은 1/4 곱하기 3이 왜 1/12이 아니라 3/4인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어딘가에 3을 곱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이 왜 분자인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분수의 나눗셈을 넘어 비와 비율을 배우는 6학년들은 더욱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비와 비율, 그리고 분수의 관계는 무엇이고, 백분율이 왜 또 나타나서 자신들을 괴롭혀대는 것인지 그저 살맛이 안 난다는 표정들이다. 알 듯 말 듯 한 답답함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도 답답하다. 수학 공부를 하라고 했지 문제집을 풀라고 한 의미는 아니었는데, 이를 제대로 알아듣는 아이들은 거의 없는 듯하다. 물론 제대로 전달을 못했으니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콩떡같이 말해도 팥떡같이 알아들을 수는 없는 것인가 괜한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오늘도 아이들은 공부는 그저 의무일 뿐이라는 태도다. 그래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공부할 시간을 정해주면 시간만 때우며 슬슬 놀려고만 들고, 몇 장을 풀어야 하는지 장수를 정해주면 답지를 보거나 다른 아이들 것을 보고 얼른 베껴서라도 끝내버리려고만 드는 아이들이 없지 않다. 공부를 시키는 게 고역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물론 지역아동센터가 이렇게 아이들의 교과학습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는 게 맞을까 고민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교육과 돌봄을 엄격히 구분하고, 돌봄은 교육에 관여를 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교육은 교육전문가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철옹성을 쌓고 있는 사회에서는 언감생심 비전문가들이 학습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조심스럽고 눈치가 보인다. 물론 그것이 엄청난 비용을 내야 하는 사교육 시장의 교육기술자들이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돌봄 종사자들같이 ‘애들하고 놀기나 하는 사람’이 학습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역시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아이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센터에 머물고 있고, 지역아동센터 외에는 달리 또 학습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아이들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학습 문제를 그저 외면만 하고 있을 수도 없다. 더욱이 온라인 학습을 지원하면서 ‘도대체 뭘 알고 화면을 넘기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시간만 때우고 있는 것일까?’하는 고민이 절로 드는 순간들이 적지 않았기에 더욱 아동들의 학습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돌봄은 돌봄 나름의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수학 공부를 하더라도 단순히 문제를 많이 푸는 것보다는 수학을 보다 수학 공부처럼 할 수 있도록 돕는 데 목표를 두자고 혼자 결심을 했던 터이다. 그런 입장을 취하고 보니 수학 공부를 하는 것은 아이들이지만, 초등 수학 정도면 어른들도 성취감을 느낄 만한 좋은 취미거리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즐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이만큼 세상의 이치를 알고 나서 초등 수학을 접하고 보니, 수학이 전하고 있는 세상 이야기들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만의 깨달음과 이치들을 다양하게 아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수학 공부도 또 색다른 맛을 내게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수학 공부를 한다.
최근 아이들과 함께 수학 공부를 하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은 이 세상에 무한히 많이 존재하는 ‘수’들을 인간은 일정한 필요와 인식에 따라 부단히도 나누고 구분해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구분법이 수학 공부에서는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역아동센터의 1학년들은 사실 가장 자신만만하게 수학을 배우는 학년들이다. 수학책에는 자전거, 사과, 강아지, 장난감 등등 아이들이 일상에서 친근하게 보아왔던 사물들이 거의 같은 모습으로 나란히 도열하여 상징체계인 숫자와 대응관계를 맺고 있다. 사과가 하나면 1, 사과가 둘이면 2, 사과가 셋이면 3…..하나도 어려울 것이 없는 이야기다. 아이들에게 이 세상의 수는 어떻게 만들어지며, 얼마나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일까를 물어보면 그 어떤 아이도 막힘없이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직관적 이해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수를 만들 땐 하나씩 더해 가면 되는데 왜 그런 걸 모르냐고 아이들은 웃는다, 1에 1을 더하면 2, 2에 1을 더하면 3, 3에 1을 더하면 4….이렇게 수는 무한에 근접한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닌 내용이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이 수들이 다양한 기준에 의해 서로를 구분하는데 문제가 생긴다. 2나 3이나, 4 혹은 9의 배수들로 수를 묶으면 어떤 수들이 서로 한 패가 될 수 있는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구구단이다. 또 세상에는 1과 자기 자신의 곱으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수들의 집합이 있는데, 그것은 또한 소인수 집합이다. 아이들이 궁금한 것은 왜 그런 구분법들이 그리 많이 필요한가 하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세상 사람들의 수와 그 살아가는 법만큼 수들의 구분은 필요할 터이나 그런 것을 아직 이해하기는 이를지도 모를 일이다.
또 수들의 집합에서 그 출발점에 서 있는 “1”의 의미를 아이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지 여부도 궁금한 일이다. 1, 즉 하나는 온전한 것이란 의미로 강력한 기준점이 되어, 일종의 질서를 만들어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우리는 정말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독일 사상가 슈타이너의 교육 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아이들이 처음 수를 배울 때 수 하나하나의 의미를 새겨갈 수 있도록 충분히 공을 들인다고 한다.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교육에서 과연 1, 0, 10 정도의 수가 지닌 의미를 초등 저학년 때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여부는 정말 궁금하다.
센터에서 보면 아이들은 손 안에 무엇인가 한 개체가 쥐어진 순간 그것을 즉시 하나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전체 피자에서 내 몫이 얼마나 되는지 그 상대적 차이를 밝히는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 순간만 지나고 나면 즉시 내 몫의 피자는 다시 내 몫의 하나로 재인식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인식의 전환은 매우 자동적이어서 새롭게 환기되지 않는 한, 어릴수록 그런 전환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 같다.
그런 혼란스러움이 분수를 배울 때 처음 아이들의 인식 체계에 저항감을 심어주는 듯하다. 이 한 조각은 마치 하나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1”이 아니다. 진정한 “1”은 이 조각을 중심으로 한 보이지 않는 전체이다. 그 전체를 염두에 두고 이것이 전체의 얼마인지를 인식해야 하며, 동시에 이렇게 모여진 조각들을 헤아려 갈 때는 마치 그것이 하나의 온전한 1인 것처럼 헤아려 나가야 한다. 물론 그렇게 헤아릴 때조차 역시 전체와의 상관성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분수를 헤아려 나가야 하는 일은 아이들에게 힘든 과업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또 분수를 헤아릴 때 왜 6/5 다음은 6/6, 그리고 7/6 등의 가분수를 계속 사용하지 않고, 5/6. 1, 1과 1/6과 같은 대분수로도 표현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교과서에서는 가분수를 대분수로 바꾸면 분수의 이해를 돕고 연산을 쉽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냥 가분수를 가분수로 두는 것이 더 쉽지 않겠냐고 맞서기도 한다. 통분이 필요하지 않는 간단한 분수의 연산에서는 실제 일리가 있는 말이다. 또 공배수를 활용한 통분일지라도 곱셈을 잘 할 수만 있다면 복잡한 연산이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독 대분수라는 형식을 익히게 하는 것일까? 정말 단순히 연산의 편리함만을 위한 것일까? 실컷 계산해놓고 가분수를 대분수로 바꾸느라 또 끙끙거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또한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아이들의 질문을 붙잡고 끙끙거리길 한참이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겨우 가닥을 잡은 것은 이런 형식이 바로 수의 일정한 정열 방식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결론이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1”씩 늘어나는 수의 형태를 기본으로 하여 수들을 정리하고 있다. 따라서 분수도 일단 이 기본적인 수의 정열 형태를 참조하여, 기존 수 체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가분수보다는 대분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목적에 부합한 표현양식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수학 교과서 속의 분수는 수직선 위에 한 점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수가 얼마나 질서를 사랑하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수학은 재미있는 영역이다. 즐기기에 비교적 저렴한데다, 창조적이고, 쓸모 있으며, 일정한 성취감을 맛보게 하는 훌륭한 특성을 가진 영역이다. 아주 드물지만 머릿속에서 가지런히 정리해놓고 이리저리 헤아리다 보면 심미적 감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하는 생각인데, 정말 돌봄에서는 수학 공부를 하면 안 되는 걸까? 돌봄에서 돌봄답게 수학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걸까? 아이들의 학교 공부에도 도움이 될 수 있고, 보다 근본적으로 수학의 즐거움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어떻게 수학 공부를 하면 좋을지 돌봄을 받는 아이들이나 돌봄의 종사자들이나 모두 홀로 길을 찾아가고 있다. 공부는 혼자 해도 괜찮은 거니깐, 어쩌면 이 방법도 나쁘진 않을지도 모르겠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현) 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시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