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도 별도 지도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의 교육
‘별이 빛나는 밤 하늘을 볼 수 있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 말은 헝가리의 유명한 철학자 루카치 죄르지가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 준 첫 저작인 ‘소설의 기법’ 머리말의 한 부분이다. 아마 이 책의 본문보다도 머리말의 이 한 대목이 훨씬 유명하며, 자주 인용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한 시대를 상징하는 경구이자 한 시대의 절규라 할만하다. 에두아르트 뭉크의 그림 ‘절규’를 배경으로 이 글을 써 놓으면 무척 잘 어울린다. 오랫동안 굳건히 지켜왔던 가치가 무너진 상황에서 삶의 지향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고뇌를 이처럼 간명하면서도 시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글이 무려 100년이 지난 다음 멀리 동쪽으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도 놀랄 만큼 딱 들어맞는 것을 보면 루카치도 깜짝 놀랄 것이다. 우리나라 사회 곳곳에서 그래도 별빛과 지도가 있었던 1980년대를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목가적으로 표현된 1988년의 등장인물들, 특히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 다들 놀랄 정도로 앞날에 대한 걱정이 없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운동권 학생은 있어도,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는 학생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지도가 있고 별빛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학생들에게는 어떤 길로 가야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길이 보였다. 그 길도 복잡하게 비비 꼬인 길이 아니었다. 그 길은 바로 교육이었다. 교육이라는 길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통과했느냐에 따라 별이 빛나는 곳까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가 결정되었다. 멀리 가고 싶은 학생은 더 많이 더 힘들게 공부하면 되었다.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는 않고 적당한 선에서 소박하게 살고 싶은 학생은 그 적당한 선까지만 공부하면 되었다. 공부 자체도 단순했다. 교육과정에서 주어진 내용을 달달 외울 정도로 익혀서 객관식 시험문제를 맞추면 되었다.
물론 그 시절 학교생활이 마냥 낭만적으로 회고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때도 입시경쟁이 치열하긴 마찬가지였고, 학생들이 고통에 허덕이고, 때로 성적 비관 자살 사고가 속출하는 것도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시절 입시경쟁에는 그 끝이 보였고, 자신의 삶의 수준을 소박하게 낮출 용의가 있다면 굳이 가담하지 않아도 되었다. 저 멀리 별도 빛나고 있었고, 지도도 있었다. 비록 지도 보는 법을 배우는 일이 만만치 않았고, 그 길을 비춰주는 별빛이 계층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졌지만, 빛의 부족을 노력으로 환치하면 어떻게든 가기는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학생들은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있다. 앞에 놓여있는 길은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그 끝도 잘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별이 빛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게 별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다. 지도도 믿을 수 없다. 지도와 길이 다른 경우가 자꾸 나타난다. 길이 바뀌는 속도를 지도가 따라가지 못한다. 또 지도가 바뀌는 속도를 지도 읽는 방법이 따라가지 못한다. 주어진 것만 익혀서는 이제 어떻게 헤쳐 나가기가 어렵다. 길이 바뀔 때마다 지도를 갱신해야 하지만, 지도 제작자가 그걸 갱신할 때까지 기다리기도 어렵고, 그렇게 자주 갱신되는 지도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이 길을 안 갈 수도 없다.
결국 두 가지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새로운 지형을 만났을 때 이를 지도로 그려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길이 없을 경우 스스로 길을 만들고 나아갈 수 있는 능력. 그런 일들은 혼자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 새로운 지형을 만난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정보, 그리고 그들이 그려낸 지도들을 공유하고 종합해야 지도가 항상 최신판으로 유지될 것이다. 그리고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뚫어내는 일은 함께 그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동료들이 많을수록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이제 교육도 바뀌어야 한다. 과거에는 교육이 학생들의 걷는 스타일, 체력 등등을 감안해서 너는 저쪽 방향으로 어느 정도 진행해라, 길은 지도에 이렇게 저렇게 표시되어 있다 하며 길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교육은 길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지도를 갱신하고, 길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되었다. 구체적인 길 자체는 학생들이 살아가며 스스로 찾고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교사 역시 지도 그리는 사람, 길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제 교사는 학생과 함께 길을 찾고 만드는 여정에 나서는 탐험가가 되어야 한다.
과연 우리나라는 이런 교육을 할 준비를 갖추었나? 두려운 마음이 든다. 오히려 우리나라는 길을 찾는 탐험가는 커녕 걱정과 두려움 속에 작고 안락한 둥지 안에 웅크리고 있는 소심한 소시민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철이 되자 페이스북 글 하나 공유하거나 좋아요 하나 누르는 것조차 덜덜 떨어야 하는 상황에서 무슨 교육이 가능하겠나 싶어서 하는 말이다. 지금도 지도를 그리고 길을 만드는 미래형 인재를 길러내라고 공문들이 계속 날아온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구시대적 규제의 칼날이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남아 있다. 이 칼날 좀 치워주던가 공문 좀 보내지 말던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사회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중학교에서 24년간 사회를 가르쳤고, 서울대, 상명대, 방송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에서 정책연구를 담당했고, 현재 계간 우리교육 편집위원이다. '학교라는 괴물', '그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등의 교육 비평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거짓말로 배우는 10대들의 경제학', '세상을 바꾼 질문' 등의 청소년 교양서들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