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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야, 영어 하반 모여라!

#268 권재원,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2017.03.22

몇 년 전의 일이다. 성격 좋고, 예의 바르고, 매사에 성실하고, 외모도 빠지지 않아서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고 선생님들에게도 두루 사랑받는 학생이 있었다. 단 하나 흠이 있다면 공부를 못한다는 것,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공부를 못한다기보다는 시험 점수, 특히 영어와 수학 점수가 저조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두 과목은 수준별 분반 수업이 적용되는 과목이기 때문에 이 학생은 영어시간, 수학시간에는 급우들 중 2/3와 헤어져야 했다. 담임 선생님이 영어 담당이었지만 수업시간에 만날 수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성적이 제일 높은 학생들끼리 모인 반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학생이 여느 때의 그 밝고 씩씩한 모습으로 홈 베이스(라커룸)에서 “야, 영어 하반 다 모이래!”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 다시 들어보았다. 스스로 자신은 물론 다른 친구들까지 싸잡아서 저렇게 큰 소리로 “하반”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번을 들어 보아도 “야, 영어 하반 모이라니까!”하고 외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른바 영어 ‘하반’에 속한 학생들 역시 별 불만 없이 모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누구도 공공연하게 ‘하반’이라고 부르는 데에 대해 항의하지 않았으며, 기분 나쁜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다들 그 학생과 마찬가지로 해맑고 발랄한 모습으로 “뭔데? 뭔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하반’은 너무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물론 학교에서는 공식적으로 ‘하반’ 같은 용어를 쓰지 않았다. 수준별 분반 수업을 할 때 학생들의 자존심 등을 감안하여 ‘상중하’가 느껴지는 용어를 사용하여 학급 이름을 짓지 못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는 ‘비너스 반’, ‘머큐리 반’, ‘주피터 반’ 따위의 명칭을 썼고, 수학은 ‘가우스 반’, ‘피타고라스 반’, ‘데카르트 반’, ‘오일러 반’ 따위의 이름을 썼다.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했다. 이름만 그렇게 지었을 뿐, 성적순으로 학급을 편성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이름이야 뭐가 되었건, 결국 상반, 중반, 하반으로 불렀다.

 

이렇게 멀쩡한 학급을 찢어서 상중하 반으로 편성하는 수준별 이동수업은 7차교육과정 때 처음 도입되었다. 처음에는 보통반/심화반 정도 수준으로 분반수업을 하다 보충반/보통반/심화반(또는 하급반, 중급반, 상급반)의 세 등급으로, 더 나아가서 네 등급까지 분반하도록 바뀌었다. 최근에는 과학까지도 수준별 분반수업을 실시한다. 수준별 이동수업 도입의 근거는 단순하다. 다양한 수준의 학생들이 한 교실에 모여서 같은 수업을 받고 있으니 탁월한 학생과 부진한 학생이 모두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각자 자기 수준에 맞는 수업을 듣도록 하고, 그래서 학업성취가 올라가면 더 높은 수준의 수업을 듣도록 하자는 것이다. 한 마디로 상급반 학생들은 수월성 교육을 하고, 중급반, 하급반 학생들에게는 분발을 유도하여 전체적으로 학습 효율을 높이자는 것이다.

 

이런 단순한 논리로 도입된 수준별 분반 수업은 과연 학습 효율을 높였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전세계적으로 이 수준별 분반 수업은 장담했던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출 중이다. 특히 PISA 2012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분반 수업은 학습 효율을 높이기는 커녕 오히려 학업성취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수준별 분반 수업이 상급반 학생들의 수월성 교육에는 별 다른 효과를 보여주지 못하는 반면, 하급반 학생들에게는 “어차피 우리는 공부 못하는 학생”이라는 ‘낙인효과’만 발휘하여 학습의욕을 크게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영어 하반 모여라!”라고 천진난만하게 외치던 아이의 모습, 거기에 따라 너무 당연히 모여드는 아이들의 모습에 바로 그 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렇게 외친 아이와 그 소리를 듣고 아무렇지도 않게 모여든 학생들은 어느새 ‘하급반’이라는 정체성에 자신들을 적응시키고 있었다. 아이들은 분발하여 중급반, 상급반으로 갈 것이란 어른들의 생각과 달리 ‘하급반’ 이라는 정체성에 자신들을 맞춰버렸고, 그 결과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오히려 학습의욕과 동기를 상실하고 있었다. 단지 시험 점수가 나빴을 뿐인데, 거기에 ‘하급반’이라는 낙인을 찍어서 아예 공부할 필요가 없는 아이들로 내몰아 버린 것이니, 아이들을 두번 죽이고 모욕한 셈이다.

 

그런데 ‘각자 수준에 맞는 수업’이라는 말 속에는 교사가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내용을 전달하는 일제식 수업의 전제, 그리고 학생이 교사로부터 지식을 전수받는 수업의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이런 수업은 이제 중요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이들이 장차 살아가야 할 세상에서는 문제에 직면하여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창의성,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요로 하는 협력능력, 그리고 이와 관련된 소양들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력의 개념이 바뀐 것이다. 더구나 창의성은 여러 사람들의 활발한 상호작용 과정에서 튀어나오는 창발적 현상이기 때문에 이질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더 활발하게 나타난다. 다양성이 창의성의 바탕인 셈이다. 또 학생들이 장차 실제 사회생활을 하면서 직면할 여러 문제들 중에서 이른바 ‘공부’만 요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문제의 해결에는 서로 다른 특기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학생들은 이질적인 집단에서 협력을 유지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러한 창의성과 협력능력이야말로 미래를 살아갈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진정한 학력이다. 그런데 수준별 이동수업은 안 그래도 다양성이 부족한 우리나라 학교를 더 세밀하게 동질집단으로 재구성하여 얼마 있지도 않은 창의의 싹을 잘라버린다. 학력신장이 아니라 반학력 수업인 셈이다.

 

다행히 올해부터 일부 교육청에서 수준별 분반 수업을 폐지하고 이를 소규모 분반 수업으로 바꾸어 실시한다고 한다. 분반을 하기는 하되, 학생들의 수준에 따라 분반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희망에 따라 분반한다는 기묘한 방식이지만, 그래도 진일보한 움직임에는 분명하다. 물론 매우 탁월한 학생들과 학업이 매우 부진한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합쳐도 전체의 5%를 넘지 않는다. 이들의 특별한 필요는 별도의 프로그램이나 멘토링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 학교나 지역사회는 이런 소수 학생들의 특별한 필요를 충족시켜줄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준비해 두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 이질적인 집단 속에서 생활하며 협력능력을 기르고 창의의 순간을 즐겨야 하는 만큼, 정규 수업만큼은 다양한 재능과 수준을 가진 이질집단 속에서 학습해야 할 것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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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권재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사회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중학교에서 24년간 사회를 가르쳤고, 서울대, 상명대, 방송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에서 정책연구를 담당했고, 현재 계간 우리교육 편집위원이다. '학교라는 괴물', '그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등의 교육 비평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거짓말로 배우는 10대들의 경제학', '세상을 바꾼 질문' 등의 청소년 교양서들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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