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수업, 해체의 눈으로 보자
내가 근무하고 있는 서울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은 남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청사 옆으로 서울 성곽터가 숭례문으로부터 남산 정상까지 길게 이어져 있는데. 몇 년째일지 모를 정도로 오랫동안 성곽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 복원 공사를 보면서 든 느낌은 ‘참 더디게 한다’였다. 일반적인 건축 공사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분주함이나 소음보다는, 느림과 조용함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공사 모습을 보면서 문득 교육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온라인 개학’ 논쟁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국민 모두와 연관된 일이다. 그렇기에 교육에 대해 온 국민이 한마디씩 한다. 개인적 걱정이 집단적 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교육 문제에 대해서 ‘지금까지 교육부와 교육청은 뭐 하고 있었느냐?’는 식의 힐책이 법칙처럼 언론의 보도나 칼럼 속에 등장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교육 문제를 남산 성곽 복원 공사처럼 천천히 그리고 소리나지 않게 처리하려는 담당자가 있다면 칭찬보다는 그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다.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쉬지 않고 우리 교육의 위기를 말한다. 내일도 그럴 것이다.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혁신을 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실제로 손에 잡히는 새로운 그 무엇이 없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 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 위기가 존재한다. 바로 이 공백 기간이야말로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출현하는 때다.”라는 그람시(A. Grammsci)의 위기론이 바로 현재 우리의 교육이 안고 있는 위기를 말해준다.
나는 이 위기의 주요 원인이 새로운 교육 콘텐츠의 부재가 아니라, 교육 문제에 대한 우리의 접근 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혁명적인(?) 교육 콘텐츠를 잉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육 현안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이로부터 ‘교육 깨기’에서 ‘교육 해체’로라는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교육 현안에 대한 논쟁과 비판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특히 ‘교육 깨기’의 모습이 경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게 깨지는 것은 많은데, 왜 그 자리에 새로 지어지는 건축물은 없을까? 그것은 ‘깨기’가 ‘해체’로 발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육 현안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과 처방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대부분 창조적 대안의 모색보다는 교육을 형해화(形骸化)시키는 깨기 작업에 열중이다. 우리 사회 전체와 미래, 그리고 교육의 본질 회복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존재가치를 높이기 위해 ‘도장 깨기’에 나선 싸움꾼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교육 ‘깨기’가 아니라 교육 ‘해체’가 필요하다.
그럼, 교육 ‘깨기’와 교육 ‘해체’는 어떻게 다를까? 나는 ‘깨기’와 ‘해체’의 이분법적 개똥철학을 남산의 성곽 복원 공사에 비추어 생각해보았다. ‘깨기’가 낡고 오래되고 불필요한 건축물에 대한 철거작업이라면, ‘해체’는 낡고 오래되었지만 필요한 건축물에 대한 복원작업이다. 남산 성곽은 깨기의 대상이 아니라, 해체의 대상이다. ‘깨기’의 작업과 ‘해체’의 작업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 작업의 목적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깨기는 기존의 것을 없애는 데에 목적이, 해체는 기존의 것을 분해하여 새로운 모습을 구축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깨기는 말 그대로 낡고 오래되어 불필요한 건축물을 깨뜨려 부숴버리는 것이다.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하지만 해체는 일부 흔적만 있거나 기록으로만 존재하지만 가치고 있고 소중한 것이기에 복원하려는 것이다.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의 존재로 재탄생시키려는 작업이다. 따라서 작업과정에서 나오는 잔해들은 전혀 다른 취급을 받는다. 깨기 작업에서 나온 잔해들은 버려져야 할 폐기물이지만, 해체 작업에서 나온 잔해들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보물이다.
둘째, 작업의 범위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깨기는 보이는 것 중심으로 작업을 하지만, 해체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고려하여 작업을 한다. 깨기의 목적은 깨뜨리고 부수어서 버리는 것이기에 눈에 보이는 깨뜨릴 대상만 신경 쓰면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깨뜨릴 대상도 아니고 깨뜨릴 수도 없다. 하지만 해체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 보이는 것을 해체할 때 아래(땅속)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이, 해체한 잔해들을 다시 쌓아야 할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해체 작업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끈끈한 연결이라는 바탕 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셋째, 작업의 속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깨기에서는 속도감 있는 작업 진행을 요구하지만, 해체 작업은 속도보다도 내용을 중요하게 여긴다. 깨기의 목적은 부수어 없애는 것이고, 이면에 있는 다른 것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기에 속도감 있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그리고 경제성 차원에서 속도감 있는 작업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체는 작업의 목적과 범위상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구축을 위한 해체의 청사진을 검토하면서 진행해야 하기에 작업은 느려진다.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 고려하여 작업해야 하기에 느릴 수밖에 없다. 얼마나 빨리 하느냐보다는 늦더라도 얼마나 충실하게 진행하느냐가 중요하다.
남산의 성곽이 재탄생을 위한 해체의 대상이듯, 교육도 깨기의 대상이 아니라 해체의 대상이다. 해체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 Derrida)는 단순한 부정이나 파괴가 아니라 토대를 흔들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숨겨져 있는 의미와 성질을 발견하는 것을 해체로 보았다. 즉,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재건을 전제로 한 ‘해체’를 뜻한다. 그에게 있어서 구조화된 지배적 이야기를 해체시키는 작업은 새로운 대안적 이야기(alternative story)를 발견할 수 있는 재구조화의 출발점이다.
지금 우리 교육에는 ‘깨기’가 아니라 데리다(J. Derrida)가 요구하는 ‘해체’의 문법이 필요하다. ‘교육 깨기’를 넘어 ‘교육 해체’의 문법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양한 교육적 논의 대상들이 깨기의 문법인 ‘싸울거리’나 ‘부술거리’가 아니라, 해체의 문법인 ‘생각거리’나 ‘만들거리’가 되어야 한다. 차분한 교육 성곽 쌓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갑자기 다가온 온라인 개학[수업]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 교육 해체가 아닌 교육 깨기의 모습으로 흐르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선생님 접속이 안돼요. 얘들아, 나도 못 들어갔어”, “특수교육 학생 9만 명은 어쩌나”, “엄마가 개학했다”, “교육부는 그동안 뭐했나”, “여전한 ‘천수답 교육행정’”과 같은 언론의 헤드라인을 보라. 이전의 수업 양태와 현재의 모습을 차분히 분석하여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해체의 문법이 아니라, 날 것 그대로 깨기의 문법이 지배적이다. 온라인 수업이 갖는 교육적 의미, 기존의 수업과 비교하여 온라인 수업이 추구해야 하는 방향성과 같은 새로운 교육학의 조명은 찾아보기 힘들다.
해체가 중시하는 본질, 토대, 기초에 대한 궁구(窮究)는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보이는 것만의 나열과 실시간 중계방송이다. 스마트 기기의 부족, 접속 과부하와 불통, 교사의 온라인 수업 능력, 학부모의 고충, 사회적 배려 대상자의 디지털 격차 등 모두 성공적인 온라인 개학을 위해 당연히 고려되어야 하고 충실하게 준비되어야 할 사항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의 준비 부족에 대한 비판과 신속한 대책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들은 누가 짚어주지 않더라도 쉽게 인지할 수 있고 예상되는 것이며, 한마디로 뻔히 보이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 보이는 것만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전부인가? 한 달여 넘는 온라인 수업이 실험실의 한 마리 모르모트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근본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예시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온라인 수업은 오프라인(교실) 수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궁여지책인가? 아니면 시대상황이 요구하는 새로운 교수-학습의 패러다임인가?’ 짧게 말하자면 ‘왜 온라인 수업인가?’
‘온라인 수업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정착된다면 교사의 위상과 역할은 어떻게 될것인가?’
‘미래 사회에서 오프라인 공간으로서 학교와 교실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도대체 배움이란 무엇인가?’
이 외에도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많다. 온라인 수업이 일시적인 경험이 아니라,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교육 개혁 방향이라고 주장하려면 이러한 질문 던지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교육 개혁’ 하면 항상 두 권의 책이 떠오른다. 『학교 없는 교육 개혁』(데이빗 타이악․래리 큐반, 2011)과 『학교 개혁은 왜 실패하는가』(마이클 풀란, 2017)이다. 『학교 없는 교육 개혁』에서 저자는 그 많은 교육 개혁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 교육의 기본틀은 놀랄 정도로 안정된 모습을 유지해왔다고 주장한다. 시간과 장소를 나누고 학생들을 분류해서 교실에 배치하고 ‘과목’에 대한 파편적인 지식을 전수하며 배웠다는 증거로 학점과 학년을 주는 방식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이러한 학교교육의 기본틀을 바꾸기 위해 혁신가들이 여러 가지 도전을 해왔는데, 대표적인 도전 사례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고 있다.
– 무학년제 학교를 만드는 것
– 시간과 공간, 학생 수를 유동적인 것으로 보고 획일적인 수업 시간과 교실, 학급의 인원을 다양하게 만드는 것
– 전문화된 교과목을 중·고등학교의 핵심 교육과정으로 넣거나 초등학교에 소개하는 것
– 교사들이 분리된 교실에서 고립된 개인으로 일하기보다 팀으로 일하도록 격려하는 것
이제 온라인 수업에 직면하여 교육 혁신가들이 학교교육의 기본틀을 변혁하기 위해 던졌던 도전 목록에 다음과 같은 것을 하나 더 추가할지도 모르겠다.
– 교실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학생과 교사가 어느 곳에서도 가능한 비대면 방식으로 수업이 이루어지는 것
『학교 개혁은 왜 실패하는가』에서 저자는 개혁의 이론이나 계획이 아니라 실행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교육 개혁 노력이 실패하는 이유는 실행보다도 계획 부분에 지나친 공을 들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저자의 용어대로 하자면 ‘변화(change)의 이론’과 ‘변화를 일으키는(changing) 이론’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변화(change)만을 주장하기보다는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기(changing) 위해서는 변화 주체인 교사들의 자발적인 동기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리고 개별 교사 차원이 아니라 교사들의 집단적 유능감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적절한 지적이다. 이러한 것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앞에서 예시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언스케일(UNSCALED)』(헤먼트 타네자․케빈 매이니, 2019)의 저자는 탈규모화되고 온라인화된 미래 학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상상하고 있다.
나는 전 세계의 개별 교실들을 연결해 가상으로 ‘학교’를 만들 수 있도록 해주는 새로운 앱들이 생기리라 본다. 과학을 좋아하는 미국의 5학년 학생은 같은 건물에 있는 1학년 학생보다 관심사가 같은 폴란드, 인도, 칠레의 5학년 학생과 더 공통점이 많다. 모바일, 소셜, 클라우드, 가상현실, 3D 프린팅을 활용하면 아주 멀리 떨어진 교실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를 위한 새로운 학교를 만들 수 있다면 학교 수만 채를 새로 짓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일 것이다.
이것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이제 온라인 화상 시스템 활용방법에 대한[보이는 것들] 문의만이 아니라, 학교, 교실, 교사, 수업의 본질과 미래에 대한[보이지 않는, 하지만 교육의 본질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면 보이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것은 우리 교육을 ‘깨기’가 아닌 ‘해체’의 입장에서 볼 때 가능하다.
교육부장관이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고 새로운 도전”으로 규정한 온라인 개학, 그리고 온라인 수업이라는 배낭을 매고 새로운 길을 나선 교사들, 그 길을 떠나는 자의 배낭에 ‘깨기’라는 단어가 아니라 ‘해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기를……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도덕적 삶을 위해 박사 논문으로 「비도덕적 행위의 유형에 관한 연구」를 썼다. 중고등학교 교사와 교장, 서울시교육청 장학사와 장학관(민주시민교육과장), 서울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 신서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편역), 「질문하는 십대, 대답하는 인문학」(공저) 「IB를 말한다」(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우리의 교육 문제는 사회적 도덕성과 교육철학의 회복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오늘도 그 이상을 향해 공학적 설계도가 아닌 윤리적 기획서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