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교육감들의 집단적 목소리를 듣고 싶다
새해를 맞았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제1야당이 두 동강 나면서 집권당의 무능과 실정을 심판할 수 있는 호기마저 위기로 바뀌었다. 정치환경 탓에 기분이 우울할 때면 가끔 1년 반 전 진보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되던 날의 벅찬 감격을 떠올린다. 만약 그날의 쾌거가 없었다면 지금쯤 어디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지 더 막막하겠다 싶다. 진보교육감의 2010년 약진과 2014년 석권은 민주주의의 역주행으로 몸살을 앓는 보수정권 집권기의 한가운데서 일어났고 그래서 더욱 값지다.
진보교육감들은 작금의 퇴행 일변도 정치판도 안에서도 그나마 의미 있는 변화와 개혁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다른 곳은 몰라도 교육계만큼은 이분들의 리더십 아래 진일보하며 희망과 활력으로 꿈틀댄다. 진보교육감들은 특히, 진보성향의 시도지사나 시군구장이 있는 일부지역에서 지방행정자치와 전례 없이 탄탄한 협치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서울을 위시한 그런 지역에서는 학교를 매개로 한 마을공동체 만들기의 열정으로 지역사회가 들썩거린다. 한마디로 전국에서 진보교육감발 조용한 교육혁명이 진행 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상급식과 학생인권, 혁신학교와 학교혁신 등의 대형의제를 던졌던 1기에 비해 진보교육감 2기는 소리가 크게 나지 않는 편이다. 초선들도 1기의 경험과 성과에 터 잡아 시행착오와 혼선을 최소화하고 있는데다 재선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조직분위기와 강화된 지지율을 바탕으로 차분하게 개혁의 착근과 확산을 도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계의 핵심의제를 봐도 서울교육감의 자사고 폐지추진, 정권의 누리과정 재정 강요와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등 신규 대형의제가 추가되긴 했지만 대체로 1기의 핵심의제를 둘러싼 대치전선이 여전히 강고한 상태다.
물론 2기 들어서도 이재정 경기교육감의 9시 등교제 전면실시 등 주목할 만한 혁신정책 실험이 적지 않았다. 보기 나름으로는 13인의 진보교육감 각자가 형편에 따라 조금씩 특색 있는 교육혁신기지를 선보이며 서로를 자극하는 가운데 공교육의 새 표준을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지방선거를 통해 진보교육감 시대가 활짝 열릴 때 기대했던 것만큼 진보교육감의 집단적 목소리와 사회적 영향력이 더 커진 느낌은 들지 않는다. 진보교육감 시대가 활짝 열렸지만 뭔지 성에 차지 않는 미진함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점은 진보교육감들이 공교육의 중장기 철학과 비전을 설득력 있고 권위 있게 집단적으로 내놓는다든가 공교육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정치, 경제, 노동,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강력한 집단적 목소리를 내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작년 7월 1일 취임 1주년 기념일에 공교육 관련 공동선언이 나오기를 은근히 기대했지만 결과적으로는 13인의 공동기자회견조차 없이 지나갔다. 진보교육감들은 금년 7월 1일 취임 2주년을 맞으며 임기 반환점을 지나게 된다. 진보교육감들이 지금부터 철저하게 준비해서 2주년 기념일에는 역사에 남고 인구에 회자될만한 교육개혁 공동선언을 해줄 것을 기대한다.
따지고 보면 진보교육감은 대통령과 시도지사 다음으로 권한과 책임이 큰 선출직 지방정부 수반이다. 대통령을 보수정당이 차지하고 시도지사를 여야가 웬만큼 나눠가진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에서 시도교육감이 진보일색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전체적인 권력구도를 이해하고 개혁 전망을 세우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자 변수다. 진보교육감들이 하기 나름으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도교육감은 광역지방교육 정부의 선출직 수반으로서 대통령과 시도지사 다음으로 민주주의의 강력한 기관이다. 사실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해서는 대통령과 시도지사보다 교육감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기관인 선출직의 임무는 다른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적 실천을 통하여 민주주의를 실질화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실질화는 유권자인 보통사람들이 민주시민성을 체득하는 정도에 정확하게 비례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감의 1차 책무도 학생을 민주시민으로 길러내는 것은 물론 민주시민을 길러내야 하는 교사를 성숙한 민주시민으로 성장시키는 데 있다. 교육감은 평생교육의 지원주체로서 학부모에 대해서도 적절한 시민교육을 제공해서 민주시민성을 강화해야 할 책무가 있다.
다행히 진보교육감은 교사와 학생, 학부모에 대해 학교교육을 매개로 얼마든지 접근하며 발언하고 대화할 수 있다. 21세기 생태민주주의 사회의 공교육에 걸맞은 미래비전과 철학을 공론화하고 그에 필요한 정책을 펴고 예산을 지원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다양한 권력집단과 이익집단, 여론주도층 누구와도 공식적 대화와 협의가 가능하며 민주주의적으로 구성된 정치권력으로서 유권자와 직접 대화하고 토론하고 설득해야 한다. 현상유지와 개량조치에 만족하는 보수교육감이 아니라 구조개혁과 의식혁명을 꿈꾸는 진보교육감이라면 교육행정관료기구의 최고책임자를 넘어 민주주의의 기관에 고유한 민주주의 발전책임을 적극적으로 껴안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도교육감은 한두 명이 움직일 때보다 집단적으로 공론을 모아내고 협의하고 대안을 제시할 때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비교적 단일한 영역을 다루기 때문에 진보교육감 사이의 이해충돌은 다루는 범위가 다양한 시도지사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 공통의 뜻을 형성하고 추진할 수 있는 사항이 시도지사나 시군구장보다 많다는 뜻이다. 언제나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은 함께 해야 한다. 중앙정부의 전국적 방침에 대해서는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누리과정 재정 문제와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대표적이다. 전국 단위의 협상파트너가 있거나 전국적으로 일관성을 갖춰야 하는 경우에도 함께 움직여야 효과적이다.
진보교육감들이 우선적으로 나서야 할 분야는 물론 교육의제들이다. 나는 진보교육감들이 교장승진제도, 장학사제도, 교원양성제도, 교·사대교육과정 등에 대해, 영어교육, 수학교육, 과학교육, 예술교육, 체육교육 등에 대해, 인성교육과 노동인권, 학생자치와 민주시민교육 등에 대해, 특성화고 개혁과 일반고 혁신 등에 대해, 권위 있고 설득력 있게 집단적 목소리를 내기를 기대한다. 이를 통해 공통의 인식과 행동 계획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해관계자들과 전문가들, 관련 기관들과 집중적인 대화와 협의 과정을 거치기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절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대전환기의 공교육 비전과 전략이 뚜렷해지기를 기대한다.
교육은 교육계만의 힘으로 풀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당장 대학입학제도, 대학서열구조, 노동시장, 기업구조, 경제체제, 사회보장제도 등이 모두 교육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 따라서 직선교육감은 이런 사안들에 대해서도 교육적 관점, 미래적 관점,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당당하게 견해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자칫 정치적 발언으로 치부될 수 있는 이런 사안일수록 교육적 관점에서 전문적 연구조사를 통해서 설득력 있는 집단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 단순히 목소리를 내는 것을 넘어서 핵심관계자들과 지속적이고 정례화된 협의의 장을 마련하여 하나하나씩 합의의 폭을 넓히면서 교육친화적으로 개선할 여지를 찾아야 한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진보교육감들은 각개약진에서는 성공했을 수 있어도 집단적 목소리를 내는 일에는 다소 소홀했다고 할 수 있다. 진보교육감 13인이 똘똘 뭉치는 모습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있을 수 있다. 얼핏 보기에는 가급적 교육감 17인이 한목소리를 내는 게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 13인의 진보교육감은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의 학생과 교사, 학교와 교육예산의 85%를 책임진다. 만약 시대와 사회가 교육감에게 객관적으로 기대하는 일을 못 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절대다수파 진보교육감들의 책임이지 절대소수파 보수교육감들의 책임이 될 수 없는 구조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보수교육감에 동참할 기회를 주되, 합의를 이루지 못할 경우에는 진보교육감들만의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에 주저해선 안 된다.
13명이 따로 움직이는 것을 망설이거나 겁낼 이유가 없다. 어차피 진보교육감 시대의 주역은 진보교육감이다. 언론도 보수교육감은 안중에 없다. 지금까지 어떤 의제 형성 능력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수교육감 4인이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의제는 많지 않다. 더욱이 보수교육감을 다 끌어안으려면 너무 많은 부분에서 절충과 희석이 이뤄지며 힘이 빠지기 쉽다. 그보다는 진보교육감표 교육철학과 사회인식, 대안처방을 뚜렷이 보여줌으로써 보수교육감 지역에서도 다음에는 진보교육감을 뽑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편이 낫다. 만약 13명의 진보교육감이 공동의 입장과 행동 계획에 따라 책임 있고 당당하게 움직이면 교육적 파장은 물론 정치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문제는 진보교육감 13인이 하나로 뭉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각자가 유권자에게만 책임지는 고도의 독립기관이다. 또한 지역특성과 유권자집단이 다르고 성품기질과 처지가 다르다. 당연히 온건파와 강경파, 급진파와 점진파가 있을 수 있다. 시도의회의 상황이 다르다. 예를 들어 경남과 부산의 새누리당 일색 지방의회는 교육감의 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한다. 이것이 교육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일부 교육감은 2015년 내내 선거법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이것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서울 부산 인천 등 대도시교육감과 경기 경남 충남 등 도교육감 간에도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교육청별로 예산을 나눌 때 학생 수와 학교 수에 어떤 가중치를 줄 것인지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교육감들은 교육부의 일괄방침에 대해서도 대부분의 경우 집단적 대응보다는 각자가 개별적으로 판단해서 치고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우선은 상황과 처지, 기질과 철학이 미묘하게 다른데다 여러 사람의 의견과 처지를 감안하려면 조직비용이 들고 결론도 물타기가 불가피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경험은 교육감들이 집단적으로 한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상 중앙정부의 잘못을 바로잡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제 과감하게 집단적 대응에 나서고 여간해서는 이탈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까지처럼 중앙정부의 정책과 조치에 수동적으로 반대와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공통의 대안적 철학과 비전, 정책을 만들어내고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 교육개혁의 큰 그림을 갖고 관계집단과 협의를 계속해야 한다. 교육부와 대교협, 국회와 여야정당은 물론 대학총장이건, 전경련과 경총이건, 교·사대학장이건, 문화예술위원회건, 노사정위원회건 다 만나서 협의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래야 감동을 주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래야 진보교육감이 책임을 다할 수 있다.
진보교육감들이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는 방식을 바꿔보면 어떨까. 의장단이 교육부장관을 만나거나 기자회견을 하는 종래의 방식으로는 별다른 효과가 없다. 판을 더 키워서 가시성을 더욱 확보해야 한다. 획기적인 선언과 가이드라인 발표, 전문적인 입장 표명과 무게 있는 보고서 공표, 1천인 원탁회의나 대규모 협의체 구성, 또는 가장 영향력 있는 여론주도층과의 회의나 포럼개최 등 모든 효과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교육의제의 공론화에 앞장서야 한다.
교육계에는 아주 강력한 중앙집권행정의 잔재들이 법과 제도, 관행으로 구축돼 있다. 교육감의 업무수행 기본 틀은 교육부가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부에 대해서도 공동의 전선을 펴지 못한다면 교육개혁은 바로 한계에 부닥친다. 더욱이 교육이 노동, 경제, 복지와 긴밀히 얽혀있는 상황에서 교육만 얘기해도 한계가 너무나 뚜렷하다. 이런 일들은 교육감이 개별적으로 수행하기에는 벅차다. 사실 교육감들은 지방교육에 매진하며 전국단위로 사고하거나 중앙정부를 상대로 행동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예외가 있다면 중앙언론의 집중적인 관심과 감시의 대상이 되는 서울교육감 정도다. 한마디로 직선교육감들은 여러 가지 속성상 집단적 인식공유나 행동 계획에 친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교육감 2기는 이런 타성을 돌파하지 않는 이상 교육개혁의 진전을 확보하기 어려운 시점과 상황에 이미 와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한국교육은 21세기 생태민주주의에 걸맞은 패러다임 혁명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교육감들의 각개약진이라는 것은 매우 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사안별로 간헐적으로 이뤄지는 집단적 반대와 저항을 넘어 대안적인 교육철학과 교육비전을 권위 있게 제시하며 교육관련 영역의 시대적 현안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진보교육감 2기에 기대한다. 우리들의 진보교육감들은 이렇게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서울법대와 펜실베니아대 로스쿨에서 수학한 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교수로 재직하며 노동법, 사회보장법, 공정거래법, 인권법을 가르쳤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과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5.18 시민상을 수상했다. '행복한 교육혁명'을 가치로 2010년 6월 2일 서울교육감으로 선출돼 공교육의 표준 교체와 교육행정 혁신을 시도했다. 대표적 교육정책으로는 체벌금지와 학생인권, 문/예/체 교육과 혁신학교가 꼽힌다. 인사, 사학, 시설, 구매 등 모든 교육행정에서 시민참여와 투명성을 북돋으며 사회적 책임을 불어넣기 위해 애썼다. 701일이라는 짧은 교육감 재임기간에도 불구하고 공교육 2.0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를 놓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2014년 4월부터 펙트TV에서 '곽노현의 나비프로젝트, 훨훨 날아봐'로 진보적 관점의 교육전문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징검다리 교육감> 등이 있다. 본래 강자를 법의 지배 아래, 약자를 법의 보호 아래 두는 법치주의의 전사였으나 이제는 교육계 사람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