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같은 검정’으로 붕어빵 교과서를 양산하지 않으려면…
교육부는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하려다가 심한 반대에 부딪쳐 검정으로 하는 것을 검토하는 듯하다. ‘2010년 교과서 선진화 방안’(2010.1.12.)에 따라 ‘인정 중심의 교과서 발행 체제’로 전환한 것은 획기적인 조치였다. 오랫동안의 염원이 현실화된 것이다. 이는 자유발행제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매우 바람직했다. 그러나 갑자기 이번2015개정 교육과정을 계기로 지난번에는 인정도서로 개발하던 것을 다시 검정으로 되돌리는 것을 기정사실화 했다. 창의성 신장, 다양한 교과서 등을 바라면서 교과서를 검정제로 다시 돌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고 납득하기 어렵다. 주요과목 교과서를 다시 검정으로 돌린다면 중장기적으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창의적이고 다양한 교과서 발행이 불가능할 것이란 점 때문이다. 어떤 교과서가 나오느냐는 집필지침과 검정제 운영 방식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 문제는 검정도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거의 동일한 교과서들이 나올 수도 있고, 인정제 하에서나 가능한 창의적이고 질 높은 교과서가 나올 수도 있다.
교과서 집필지침과 심사기준 어떻게 만들어야 질 높고 창의적인 교과서가 나올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이를 위해 다음의 5가지를 제안한다.
1. 집필지침과 심사기준은 너무 엄격하지 않아야 한다.
교과서는 교육과정 기준 문서와 교과서 집필지침에 따라 집필하게 된다. 이런 지침은 심사권을 가진 기관의 편수 전문가가 학자, 연구자들의 조언을 들어 정하게 된다. 인정도서는 시도교육청이 심사하고, 검정도서의 경우는 교육부가 심사를 주관한다. 2015개정 교육과정에 딸린 교과서는 대부분 검정도서로 개발될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집필지침과 심사기준을 너무 엄격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미국 텍사스 주처럼 검정 기준의 50% 정도만 지켜도 합격시키는 그런 파격적이고 유연한 발상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집필지침이나 심사기준을 만들 때도 예비 집필자와 출판사 편집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교과서를 만드는 당사자는 집필자들이다. 집필자들이 한결같이 바라는 바는 창의적이고 질 높은 교과서를 만드는 일이다. 질 높은 교과서를 만들어야 보람도 있고 많은 학교가 채택해서 투자금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검정 기준이 너무 엄격하면 창의적이고 학습자를 몰입시킬 수 있는 교과서가 탄생하기 어렵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필자의 30년 간의 출판 경험을 통해서 보면 통제를 강하게 해서 혁신적인 제품이 나온 예는 한 번도 없었다. 무난한 제품이 나올 뿐이다. 충분한 시간과 예산을 주고 아무런 제약을 주지 않을 때 책임감이 가장 높았으며 대부분 혁신적인 책을 만들어 낸다. 이런 원리는 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 개발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도 생각된다. 집필지침과 심사기준이 세밀하고 엄격하면 할수록 붕어빵 같은 교과서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집필자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 유연한 기준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럴 때만 창의적이고 개성 있는 교과서 구성이 가능할 것이다.
2. 질이 크게 문제되는 것이 아니면 다 합격시킨다.
교과서 심사는 검인정 제도를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심사본 심사 후 일부를 불합격 시킬 수도 있고,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게 해서 다 합격시킬 수도 있다. 검인정 도서의 경우, 모두 심사는 하되 불합격을 시키는 것은 극히 예외로 한정하는 것이 옳다. 만약 합격, 불합격이란 제도가 있으면 그런 제도 하에서는 혁신적인 교과서를 만들 생각을 하기란 매우 어렵다. 집필진과 출판사의 최우선적인 관심은 합격에 있다. 교과서의 질은 두 번째다. 창의적인 교과서를 만들려다가 심사위원의 마음에 안 들어 불합격한 사례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합격하는 날에는 교과서 집필자와 출판사는 엄청난 노력을 투자한 것이 허사가 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교과서 필진은 학생과 교사를 염두에 두고 교과서를 쓰기보다는 심사기준과 심사위원의 마음에 들어 불합격하지 않는 것에 최대의 목표를 둔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다양하고 질 높은 교과서가 많이 개발될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이런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으면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게 해서 다 합격시킨다. 대신 매년 품질 만족도 조사를 하여 그 결과를 공개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질이 좋지 않으면 해당 학교는 그 다음 해 바로 다른 교과서로 교체하려 할 것이다. 이런 제도의 도입만으로도 집필진과 출판사는 심사위원을 의식하면서 교과서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과 교사의 만족도를 염두에 두고 개발하게 될 것이다. 지금처럼 불합격을 우려해 한 출판사가 동일 과목의 교과서를 두 벌씩 개발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한 가지 교과서에 집중하면 더 나은 교과서를 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출판사가 두 벌씩의 교과서를 개발하게 하는 것은 엄청난 사회적 낭비다. 그리고 교과서 개발에 투자비용이 크면 클수록 교과서 정가를 높이려 할 것이다. 결국 그 부담이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정부가 제도를 잘 마련해야 한다. 필자의 이런 제안에 대해 제출된 모든 교과서를 합격시키게 되면 교과서 종수가 너무 많아 심사도 어렵고 채택 경쟁도 치열할 것을 걱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는 기우에 가깝다. 상황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벌써 교과서와 자습서를 사지 않는 학생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는 학포자, 대포자(대학진학 포기자)들이 늘어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인구 감소도 한 몫을 한다. 또 교과서 발행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도 주요 이유다. 그리고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경제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품질 경쟁에서 자신이 있는 소수 출판사들만 교과서 개발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심사기준에 어긋나는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수정한 후 모두 합격시키고 최종 평가는 학교 현장에 맡길 것을 제안한다.
3. 수정 여부에 대해 이견이 있을 경우 최종 판단은 집필자가 하게 한다.
사실 교과서 심사에서 수퍼 갑은 심사위원이다. 심사위원은 수정 지시를 내리고 이를 어떻게 반영했는지를 확인까지 한다. 그러나 이런 구조는 합리적이지 못하다. 집필자가 심사위원의 수정 지시 사항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할 때는 의견을 내보지만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수정을 거부하기 어렵다. 을의 입장에서 밉게 보이면 불합격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갑을 관계 속에서는 심사위원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대부분의 집필진과 출판사는 심사위원의 수정 지시를 따른다. 이는 집필진으로서는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큰 차별성 없는 붕어빵 교과서를 만들게 한다. 이런 불합리한 절차는 개선되어야 한다.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 경우, 집필진의 판단이 존중되어야 한다. 심사위원은 수정 의견만 내고 수정 여부는 집필진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다시 말해 검정제도지만 실제 내용은 인정제도처럼 운영할 필요가 있다. 만약 서로 양보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되는 점이 있다면 이를 제3의 심사위원단에게 판단을 의뢰하는 제도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4. 이전 교과서의 좋은 내용은 계속 사용될 수 있도록 한다.
지금까지는 교과서를 매번 완전히 새롭게 집필해왔다. 그렇다보니 가령 영어 같은 경우 정말 좋은 읽지 자료도 그 다음에 계속해서 쓸 수가 없다. 심사의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서인 이유가 클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교육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매년 우수한 내용의 새로운 읽기 자료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라도 현재의 교과서 심사제도를 보완해서 좋은 내용은 지속 사용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5. 뇌친화적 교수학습 원리를 적용할 것을 집필지침에서 요구한다.
21세들어 학습과학은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뇌친화적 교수학습 원리다. 이번 2015개정 교육과정은 빅 아이디어(=대개념, 핵심원리)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재구조화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런 단원 수업설계 원리는 철저히 뇌과학에 기반하고 있다. 지금의 교과서는 그 설계가 뇌친화적이지 않은 요소들이 매우 많았다. 심하게 표현하면 매우 폭력적인 교과서였던 것이다. 이제 2015개정 교육과정은 ‘학습은 어떻게 일어나는가(How People Learn)’란 뇌과학의 연구결과를 반영한 미국 차세대 과학 교과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뇌친화적인 교과서 집필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칼럼 제115회에서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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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짧은 직장 생활을 경험한 후 지금의 능률교육(NE능률)을 창립하여 30년을 경영하면서 영어교과서와 참고서 등 다양한 저술활동을 했다. 2009년 회사를 매각하고,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이란 비영리 공익단체를 설립하여, 현재 이 단체 대표직을 맡고 있다. 국가 교육시스템 재 디자인과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동, 청소년들도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개혁에 특히 관심이 많다. 수업혁신과 교육격차 완화를 위해 학습과학의 연구와 전파, 그리고 교원 연수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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