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전환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학생들에게도 안식년이 필요하다
자유학기제 또는 전환학년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조금씩 확대되고 있다. 정규 교육과정에 쫓겨 자기 삶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십대들에게 한 학기 또는 1년 정도 한숨 돌리며 쉴 수 있는 틈을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이는 ‘쉼’ 또는 ‘틈’은 앞만 보고 달리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 왜 달리는지, 이렇게 달려야만 하는 건지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 한편 달리기를 포기하고 널브러져 있는 아이들에게는 삶의 다양한 가능성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인생에는 하나의 코스만 있는 게 아니며 또 그렇게 선착순 달리기가 꼭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이 걷고 싶은 길을 여유롭게 걸으면서도 얼마든지 길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처럼 경쟁이 심한 교육환경에서 십대나 이십대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저만치 앞서 달리는 친구들을 날마다 보면서 자신은 ‘이미 늦었다’고 생각해 일찌감치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삼사십대가 되어 지난날을 돌아보게 되면, 뭘 시작해도 늦지 않은 나이에 왜 그렇게 일찍 좌절했던가 후회하게 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눈을 뜨기가 힘들다. 전환학년제는 무엇보다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그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한국 교육현실에 절실한 제도이다.
자유학기제와 전환학년제는 다르다. 현재 시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자유학기제는 국·수·영 시간을 줄이고 체험활동과 진로탐색 과정을 강화한 것으로, 기존의 학습 중심 교육과정을 조금 느슨하게 만든 것이다. 중1, 2 과정에 한두 학기 정도를 시험 압박 없이 자유롭게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유학기제는 30년의 역사가 있는 아일랜드의 전환학년(gap year) 제도를 모델로 한 것인데, 내용 면에서는 상당히 다른 제도이다. 기존 학제에 한 학년을 더하거나 기존 학제 안에서 한 학년을 별도로 운영하는 개념의 전환학년제는 자유학기제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다.
자유학기제는 사실상 모든 학년에 적용돼야 마땅하다. 시험이 배움에는 오히려 해가 된다는 점에서나 다양한 아이들의 개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지금 같은 교과서 중심의 학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유학기제가 전면적으로 시행되어 따로 ‘자유학기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학기가 없어지면 아마도 덴마크의 공교육과 비슷해질지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덴마크에는 수백 개의 프리스콜레와 애프터스콜레가 있다. 프리스콜레를 선택하는 아이들이 15퍼센트, 애프터스콜레를 경험하는 아이들이 30퍼센트가 넘는다.
덴마크의 애프터스콜레(Afterschole)는 그 이름 때문에 자칫 ‘방과후학교’로 잘못 번역되기도 하는데, 정규 교육과정과 별도로 운영되는 1년(또는 6개월) 과정의 별개의 학교이다. 아일랜드의 전환학년제와 유사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규 학제 속에 편입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다르다. 대개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에 한 해 동안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는 시기를 갖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이 과정을 선택한다.
대학교수들의 경우 6년을 일하면 1년간 안식년을 갖는데, 학생들은 12년, 아니 16년을 쉼 없이 달리도록 요구받는다. 학생들을 위한 안식년의 필요성에 일찌감치 눈을 뜬 사회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제도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자유학기제, 전환학년제라는 이름으로 이제야 본격적으로 논의가 시작됐다. 배움의 과정에서 한두 해 쉬는 것을 더 이상 ‘꿇는다’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규정하지 않는 사회가 돼야 한다.
십대 시절, 삶의 전환점 만들기
전환학년제를 위해서는 아일랜드처럼 기존 학제 안에 별도로 특별학년을 두는 방안1과 덴마크의 경우처럼 별도의 독립된 단기학교를 만드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특별학년제의 경우는 자유학기제와 마찬가지로 통학을 전제로 한다고 볼 때 학생들의 입장에서 확실한 전환점을 갖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일반 학생들은 사교육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가정환경과 주변으로부터 좋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는 학생들의 경우 환경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확실한 전환점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서는 기숙형 단기학교가 나은 방안이 될 것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아이들일수록 삶의 전환점이 절실하다. 비행청소년을 대상으로 벨기에의 오이코텐과 프랑스의 쇠이유에서 진행하고 있는 ‘2천 킬로미터 도보여행’도 백일학교와 유사한 일종의 애프터스콜레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소년원 대신 ‘정화학교’라는 나이브한 이름으로 정규 학교교육과정에 교정프로그램과 직업교육을 가미한 교육을 하는 것보다 실제적으로 더 효과가 높은 편이다.(소년원 출신 재범율이 평균 80%인데 비해 쇠이유 출신은 15%에 불과하다.)
문제는 전환점이 필요한 아이들이 전환점에 대한 욕구를 갖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소년원을 가게 될 아이들이 쇠이유의 걷기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것은 전환에 대한 욕구 때문이기보다 소년원에 가지 않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10명 중 한두 명은 석 달을 걷기보다 차라리 소년원을 택한다고 한다.) 하지만 삶의 전환을 이루기에 이보다 적절한 길은 또 없을 것이다. 막다른 길에 처한 아이들의 경우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런 길을 선택할 수 있지만, 어정쩡한 상태에 처한 아이들의 경우 이런 선택의 기회를 갖기도 어렵다. 삶의 의욕을 잃은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삶의 다양한 가능성에 눈을 뜰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이 시대 교육운동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자유학기제를 활용해 단기 위탁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구상해볼 수 있다. 일반 학교에서 자유학기 과정의 전체 학생들을 위해 다양한 코스를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단기코스의 다양한 학교들이 생겨나 자유학기 기간의 학생들이 취향에 따라 학교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방안일 수 있다. 짧게는 3개월에서부터 1년 과정까지 기간도 다양하고 교육과정도 다양한 학교들이 생겨나야 한다. 이는 현재의 위탁학교 제도를 활용해도 가능하다. 문제를 일으킨 학생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가서 시간을 죽이는 위탁학교가 아니라, 일반 청소년들이 자유학기 기간에 자유롭게 선택해서 갈 수 있는 위탁학교들이 필요하다.
삶의 전환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한 대안 마련에 대안교육 진영이 공교육과 손잡고 적극 나서야 할 때다. 기존의 대안학교가 나서기 어려우면 교육운동에 뜻있는 새로운 이들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일반학교 교사들 중에 뜻있는 이들이 힘을 모아 단기학교를 만드는 것도 시도해볼 만하다. 금산의 별무리학교처럼 교사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학교를 설립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학교에서 좌절해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교사로서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은 길이 아닌가.
학비와 기숙사비를 부담하기 힘든 학생들을 위해 공적 재원을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전환학년제도가 입법화되면 가능해지겠지만, 이미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지원법과 조례들이 만들어지고 있어 길이 없지 않다. 학생들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구태의연한 학교 시스템이 아닌 다양한 방식의 배움터를 만들면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청년들을 위한 단기 대안대학
학생들을 위한 안식년 제도인 전환학년제는 십대뿐만 아니라 대학생들에게도 필요하다. 산업 자동화의 여파로 노동력이 남아돌면서 세계적으로 청년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고 성인기로 진입하는 시기도 점점 늦춰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 대학진학률이 80%를 넘어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학이 취업준비소로 전락한 지는 오래됐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힘든 상황이다. 오늘날 많은 대학(대학원)들은 성인기로 제대로 진입하지 못한 청년들이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곳이 되고 있다. 고민이 깊은 대학생들 중에는 한두 학기를 휴학하고 여행을 하거나 어학연수를 떠나기도 한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시행착오 과정을 줄일 수 있다.
조한혜정 선생이 제안한 10-15-20 특별학년제처럼 15세 무렵에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20세에는 일 년 동안 공익활동을 하면서 그 세대가 당면하거나 앞으로 당면하게 될 문제를 스스로 풀어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기회를 갖는 것은 당사자들을 위해서나 세상을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일이다. 대학 진학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이런 과정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청년들의 경우 이미 개인적으로 이런 탐색기를 갖는 사례가 점점 늘고 있다. 지구마을청년대학 사람들이 함께 제주도에서 준비 중인 아시아평화학교도 좋은 모델이다.
청소년들이 대학을 가지 않고도 자기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은 대안교육 진영이 당면한 과제이다. 일반학교 출신들이 처한 상황도 다르지 않다. 특히 군입대를 앞둔 청년들의 경우 대학에 진학하지 않을 경우 고등학교 졸업 후 입대 전까지 매우 어정쩡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진로를 모색해볼 수 있는 단기 과정의 시민대학 같은 학교가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바로 덴마크의 폴케회어스콜레 같은 모델이다.
이 모델을 한국글로벌갭이어처럼 사회적기업 방식으로 꾸릴 수도 있다. 인턴십과 여행, 봉사, 강좌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기업이다. 15년 전 민들레 초창기에도 진로탐색을 돕는 교육사업을 구상하는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는데, 시기상조였던지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제는 때가 무르익은 듯하다. 제2대학과 유사한 ‘열정대학’ 같은 모델도 눈여겨볼 만하다. 기존의 대학 동아리를 인터넷 동호회처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확대한 모델이다.
길 찾기를 도와주는 단기대학과 달리 어느 정도 방향을 잡은 청년들을 위한 다양한 대안대학도 필요하다.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서 만든 풀무전공부, 디자인학교로 문을 연 파주타이포그라피인스티튜터(PaTI) 같은 전공부 과정들도 앞으로 다양하게 생겨날 것이다. NGO학교, 건축학교, 사진학교, 영화학교 등 다양한 배움터들이 2년제 또는 4년제 과정으로 구상되고 있다. 전공부 과정 속에 교양과정을 넣을 수도 있지만, 20-30명 규모의 작은 단위에서 수준 높은 교양과정을 꾸리기는 어려우므로 여러 배움터들이 네트워크해서 학점이수제 방식으로 교양과정을 꾸리는 방안도 함께 모색해볼 일이다. 자신들이 당면한, 또 당면하게 될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내용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교양과정이 되어야 한다.
졸업장이 더 이상 패스포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면서 학력(學歷)을 위한 질주는 점점 의미를 잃어간다. 진정한 학력(學力)을 키우기 위해서도 쉼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쉼’이 시대적 화두가 되어가고 있다. 걷기 바람이 불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바야흐로 우리 사회가 질주의 시대에서 성찰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는 듯하다. 초조해하면 판단을 그르치고 길을 잃기 쉽다는 것을 좀 살아본 이들은 안다. 십대와 20대 청년들이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자기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자. 그리고 함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마당을 열어주자. 이는 어른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다. 나머지는 그들이 스스로 할 것이다.
※ 본 원고는 ‘민들레 95호’에 게재한 글을 수정했습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교육 매체 계간 《민들레》 발행인. 저서로는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이 있고, 《대안교육 20년을 말하다》,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 외 여러 권을 함께 썼다. 옮긴 책으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 《소통하는 신체》(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