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교육을 넘어 민(民)교육으로 -민교육, 그 역사적 의미와 전망-
민립학교의 역사적 흐름
20세기 초 이 땅을 휩쓸었던 학교 설립 붐이 21세기에 또다시 일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새롭게 문을 연 학교가 3백여 개가 넘는다. 20세기 초에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키고자 학교를 세웠다면 21세기에는 그 학교에서 쓰러져가는 아이들을 위해 다시 새로운 학교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20세기 초 학교 설립의 주체는 크게 세 흐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배재학당 등을 만든 미국 선교사들, 오산학교 등을 만든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육영공원 등 관립학교를 만든 정부를 꼽을 수 있다. 이 중 민간이 설립 주체가 된 학교는 두 흐름으로 나뉘는데, 미국 선교사들이 만든 학교들이 대체로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이후 대학으로 이어진 반면 민족주의자들이 만든 학교는 중고등학교 과정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소학교는 관립 학교가 대세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선교나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서는 나이가 좀 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근대 학교들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측면이 있지만,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미국 선교사들이 만든 학교들의 경우 친미적 성향을 부추겼고, 종교적으로도 개신교 중심의 배타적인 신앙관을 퍼트렸다. 한편 식민지 시절의 관립학교들은 일본제국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있었던 만큼 친일 성향을 띨 수밖에 없었다. 친미와 친일, 두 경향은 한국 근대 학교 속에 배태된 뿌리 깊은 속성이라고 볼 수 있다.
순수 민립학교라 할 수 있는 오산학교를 비롯한 민족 지향의 학교들은 친미나 친일 성향은 없었지만 국가와 민족 중심의 근대적 가치관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근대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20세기 초기에 설립된 근대적 학교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바탕에 깔고 표준화된 근대 교육과정을 충실히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일제식 소학교와 중고등학교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공헌을 한 셈이다. 민립학교든 관립학교든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 중 근대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한국의 경우 근대 학교는 표준화된 인적자원을 양성함으로써 근대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민간 교육기관과 국가 교육기관의 차이는 거의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종립학교들의 경우도 국가주도의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모들의 남다른 교육열은 국가주도 교육에 편승하여 경쟁 일변도의 교육환경을 만들어 내면서 마침내 사교육 시장과 공교육 현장이 별반 다르지 않은 양상을 띠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교육을 추구하는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대안교육운동이라 일컬어지는 이 흐름은 민간이 주도하는 교육운동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는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근대화 과정을 거친 거의 모든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항문화운동과 결부된 움직임으로, 1970년대 서구에서 시작된 이래 일본과 한국, 중국 등지에서 순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시간차는 대략 15년 정도로 나타난다.1
기독대안학교들의 흐름
새로운 학교 설립 붐이 일고 있는 한국 사회의 오늘날과 백여 년 전 흐름에 닮은 점이 있다면 기독교계가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년 동안 새롭게 문을 연 학교들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상당수는 교회에서 직접 설립한 학교들이다. 비인가 기독대안학교 수는 2백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중 100여 개는 대형 교회와 연계된 학교들로서 사실상 종립 사립학교라고 봐야 할 것이다. 국가로부터 재정결함보조금 지원을 받지 않는 순수 사립학교들인 셈이다.2 미국의 명문 사립학교들과 비슷한 양태라고 할 수 있다.
비인가 대안학교들은 재정 지원을 받지 않는 만큼 현재 학교 운영에서 최대한의 자율성을 누리고 있다. 특별교부금 형식으로 소액의 지원을 받는 현장들도 있지만, 교회와 학부모들이 모든 재정을 부담하고 있는 기독대안학교들의 상당수는 국가로부터 완전한 재정 독립을 이루고 있으며, 학교운영 방식에서도 귀족학교로 불릴 만큼 사회적 위화감을 낳고 있는 실정이다. 그 수가 늘어나면서 최근 정부도 규제의 필요성을 피력하고 있지만, 지역유지들이 신도인 대형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인데다 대다수 학부모가 교회의 핵심 신도인 만큼 쉽사리 규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3
국제학교를 표방하거나 엘리트 교육을 지향하는 기독대안학교들이 적지 않은데, 한편 사회적 소외계층 아이들을 위한 기독대안학교들도 있다. 기독대안학교연맹에 소속된 70여 개 현장들만 해도 상당히 폭넓은 스펙트럼을 이루고 있다.4 입시와 미국 명문대 유학을 목표로 삼고 있는 현장이 있는가 하면 소외계층을 향한 기독교 정신에 철저한 현장도 있다. 학생 수가 30명 미만인 현장도 다수 있는 반면 3백 명이 넘는 현장도 적지 않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처럼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의 협의체가 국가의 간섭을 막는 방패막이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갖출 수 있을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현재의 기독대안학교연맹의 성향으로 볼 때 기독정신에서 벗어난 국제형 대안학교들의 방패 역할을 맡지는 않을 것이다. 대안학교 관련 입법이 이루어진다면 인가형 기독대안학교들이 독자적인 협의회를 구성하여 사립학교의 자율성을 강력하게 옹호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현재의 미국처럼 사립학교협의회 우산 아래 다양한 대안학교들이 자율성을 누리는 양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간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국가의 간섭과 규제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민교육운동이 민간의 자발성과 자율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민간 현장 역시 부패하거나 부실하게 운영될 가능성이 열려 있으므로 법적 규제의 필요성도 있다. 공공성과 자율성을 조화시키는 것이 민교육운동의 성공 여부를 좌우할 것이다. 자유학교들의 자율적 정화장치와 법적 규제가 함께 작동하는 덴마크 모델은 민교육운동의 선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안학교와 민립학교
신앙을 기초로 하여 일정 부분 선교 목적을 띠고 있는 기독대안학교 외에 순수 교육운동 차원에서 설립된 대안학교들의 수는 1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5 이들 대안학교의 스펙트럼 또한 넓다 보니 민립학교와 대안학교가 일치하지는 않는다. 공립 대안학교들도 늘어나고 있고, 공립학교 병설로 운영되는 위탁형 대안학교들도 적지 않다.
대안교육의 정체성을 민주, 생태, 공동체 정신에 근거한 교육이라고 본다면, 민립학교라고 해서 모두를 대안학교로 보기는 어렵다. 민립학교는 설립 주체를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대안학교의 정의는 그보다 더 애매하지만, 설립 운영 주체가 누구든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생태와 공동체 정신에 근거한 교육 내용을 갖추고 있는 학교로 정의한다면 현재 한국의 자칭 타칭 대안학교들 가운데 절반 정도인 150~200여 개가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이는 매우 개인적이고 대략적인 추산이다.)
최근 대안학교 법제화와 맞물려 대안학교운동의 지형이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신고제와 등록제가 병행되면 등록하는 현장과 하지 않는 현장으로 대별되면서 대안교육연대와 기독대안교육연맹의 위상도 달라질 것이다. ‘대안교육’이라는 용어로는 더 이상 정체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이들이 늘어나게 되면 ‘민교육’을 쓰기가 쉬울 것이다. 민교육은 대안교육의 정체성을 보다 분명히 하는 명칭으로서 적절한 용어이다. 제도화 이후 비제도권으로 빠질 수 있는 퇴로 확보 차원에서도 ‘민교육’은 의미 있는 용어가 될 수 있다.
민(民)교육운동의 범주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학교 형태가 아닌 대안 현장들도 많이 있다. 유아교육과정이 공교육에 포함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동육아어린이집을 비롯한 다양한 민간 보육(또는 교육) 현장 또한 민교육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소외계층 아이들의 방과후를 책임지고 있는 4천여 곳의 지역아동센터들도 마찬가지다. 국가로부터 운영비를 지원받고 있지만, 민간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다면 유지되기 어려운 현장이 대부분이다.(급식비나 운영비 횡령으로 고발되는 현장도 없지 않지만.)
한편 사교육과 민교육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이익을 추구하느냐 아니냐의 기준도 사실상 애매하다. 드물지만 대안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학원들도 있다. 최근 성인들을 대상으로 생겨나고 있는 다양한 강좌들의 경우 학원과의 경계가 애매한 지점이 있다. 수강비나 참가비를 받는 모든 교육을 사교육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민교육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운영하는 교육(학습)공동체이다. 환경운동단체에서 운영하는 환경교실,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요가강좌 등이 바로 민교육이다. 민교육은 상설 강좌가 아니고 필요에 따라 즉각적으로 조직될 수 있다. 지리산 댐 건설이 문제가 되면 바로 ‘지리산의 자연’을 주제로 하는 민교육 모임이 결성될 수 있다.” 대구교육대학 정재걸 교수가 김희동의 민교육론을 언급하면서 한 말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시민단체가 기획하는 거의 모든 교육활동은 민교육의 범주에 든다.
김희동은 민교육을 정의하기를 “교육의 주체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아니면서도 그 내용에서 공공(公共)의 정의(正義)를 추구하는 교육”이라고 말한다(격월간 민들레 통권 14호). 이 정의에 덧붙일 말은 없을 것이다. 다만 ‘공공의 정의(正義)’를 어떻게 정의(定義)하느냐 하는 지점에서 많은 이견들이 있을 수 있다. 이 세상의 갈등이 대부분 정의(正義)와 또 다른 정의(正義)가 부딪히는 것이라고 볼 때, 민교육에 대한 이러한 정의(定義)는 애매한 면이 있다. ‘정의구현’까지는 아니더라도 공공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민간의 교육활동을 모두 민교육의 범주에 둔다면 그 범위는 매우 넓어진다. 민교육 담론이 깊이와 넓이를 더해가면서 정체성이 선명해지기를 기대한다.
탈근대 시대를 위한 교육운동은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서야 한다. 제도학교의 대안으로서 뚜렷한 실체를 갖고 있어 사회적 주목을 끌고 있지만 탈학교사회의 관점에서 볼 때 대안학교 또한 학교 울타리에 갇히는 한계가 없지 않다. 민교육운동은 대안학교운동을 넘어서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대안학교들이 교육운동에 미칠 영향이 적지 않을 터이므로 대안학교운동이 민교육의 정신에 부합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학교 안팎의 다양한 교육문화운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국가주도의 근대교육을 넘어서 공동체를 살리는 교육문화를 구현해가야 할 역사적 시기에 우리는 와 있다.
※ 본 원고는 한국교육연구소에서 주최한 ‘민교육 포럼’ 발제문을 수정했습니다.
※ 컬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 현재 중국에서 홈스쿨링 가구는 1만 정도로 추산되고 있고, 정부는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안학교라 할 수 있는 제도학교 밖 배움터들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 기존의 미션스쿨을 비롯한 사립학교들의 경우는 국가의 재정지원으로 운영되는 만큼 사실상 준공립이라고 봐야 한다.
- 자사고를 둘러싸고 현재 진보교육감들과 교육부가 갈등을 빚고 있는 양상을 볼 때 교육부가 실제로 국제형 기독대안학교들을 규제할 의향이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 기독교 대안교육 단체로는 기독교대안학교연맹. 기독교홈스쿨협의회, 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 등이 있다. 이 단체들은 일 년에 한 번 기독교 대안교육과 관련된 내용으로 컨퍼런스를 열고, 학교 설립을 지원하거나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일을 함께 하고 있다.
- 이 중 대안교육연대 소속 현장이 60여 개에 이른다. 기독대안교육연맹이나 대안교육연대에도 소속되지 않은 건강한 현장들도 있다. 기독대안교육연맹 소속 현장이라 해도 선교를 표방하지 않는 현장도 다수 있다.
교육 매체 계간 《민들레》 발행인. 저서로는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이 있고, 《대안교육 20년을 말하다》,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 외 여러 권을 함께 썼다. 옮긴 책으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 《소통하는 신체》(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