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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여러분~ 공부는 왜 하지요?”

#69 나병현, 홍익대학교 강사 2014.05.13

Ⅰ

 

오래도록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장면이 있다. 십년 전 쯤 일까 아니면 더 오래 전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무심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 초등학교 교정에서 교장선생님이 5, 6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교장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공부는 왜 하지요?”
그러자 그 초등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무어라고 대답했을지 생각해 보시라.)

 

교육학 강의 시간에 대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서 같은 질문을 하곤 한다.

 

“여러분~~ 공부는 왜 하지요?”

 

그들은 우리나라 여느 교실의 여느 학생들처럼 처음에는 대답을 잘 하지 않는다. 대답을 하도록 여러 번 다시 물어보면 너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대개 이렇게 대답한다.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경쟁에서 이기려고……. 어떤 학생들은 “잘 살기 위해 공부한다.”는 답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라고 다시 질문하면 대부분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답한다.

 

그러면 이제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서 그 초등학생들이 뭐라고 대답했을지 상상해보라고 한다. 그러면 대학생들의 답은 대개 이렇다. 엄마가 하라고 해서, 혼나지 않으려고, 좋은 성적 받으려고……. 혹은 초등학생도 그들처럼 답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좋은 학교 가려고, 좋은 데 취직하려고, 성공하려고, 부유하게 살려고…….

 

교장선생님의 질문에 초등학교 5, 6학년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한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여러분은 짐작이 되는가? 그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대답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요.”

 

 

Ⅱ

 

어떤 일을 “왜 하는가?”는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목적을 들어 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기를 들어 답하는 것이다. 공부는 왜 하는가라는 똑같은 질문에 그 초등학생들은 공부의 목적을 답한 데에 비해, 대학생들은 공부를 하는 동기를 열거하였다.

 

목적을 말할 때 보통 내재적 목적과 외재적 목적으로 나누어 말하며, 어떤 일을 하는 동기에도 내적 동기와 외적 동기가 있다. 그 일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내재적 목적이라면, 외재적 목적이란 그 일을 수단으로 삼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공부한다는 대학생들의 대답은 바로 교육의 외재적 목적이나 외적 동기를 말한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경쟁에서 이길 수 있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도 경쟁에서 질 수 있고,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할 수 있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지 못할 수 있고,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 공부를 잘 했다고 해서 반드시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공부를 한 결과일 뿐이며, 따라서 그것을 위해 공부한다는 것은 외적 동기를 말하는 것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목적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교육의 외재적 목적을 추구한다는 것은 교육을 수단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교육 본래의 가치를 도외시하게 된다. 그 대학생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좋은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교육을 받는 동안 교육 본래의 가치를 추구하도록 배우지 못한 것이다.

 

이에 비해, 교육처럼 가치지향적인 일이나 그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할 경우 그 가치를 추구하거나 그 중요한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며, 이를 내재적 목적이라 한다. “공부를 왜 하는가?”, “교육을 왜 하는가?”와 같은 질문을 목적을 묻는 질문으로 이해하면, 그 일이 어떤 일인지, 그 일 자체의 특성에 집중하게 된다. 교육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며, 사람을 훌륭하게 키우려 한다. 그리고 훌륭한 사람을 키우는 일, 그것이 바로 교육의 내재적 목적이다. 학생 입장에서 보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공부를 하는 목적, 교육을 받는 목적인 것이다.

 

 

Ⅲ

 

여기서 말하는 “훌륭함”이란 그리스어의 “아레테(arete)”와 같은 의미이다. “아레테”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대상에 적용될 수 있으며, 각 대상이 자신의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가령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하고,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제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고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인간의 아레테이며 거기에는 지적인 측면과 도덕적인 측면이 다 포함된다. 그래서 “아레테”는 흔히 “덕(德)”이나 “수월성” 혹은 “탁월함” 등으로 번역되지만, 도덕적인 측면과 지적인 측면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훌륭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훌륭한 사람은 교육을 통해 길러질 수 있는가? 플라톤의 대화편 『메논』을 보면, 첫머리에 메논이 소크라테스에게 “훌륭함은 가르쳐질 수 있는지, 또는 훈련을 통해 습득되는지, 아니면 타고난 자연적인 소질에 의하거나 그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인지” 질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질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훌륭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훌륭함이 무엇인지조차도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이보다 앞서 저술된 대화편 『프로타고라스』를 보면,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에게 많은 교육비를 내고서라도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아테네 청년을 대신하여 그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묻는 장면이 있다. 이때 프로타고라스가 자신은 “훌륭함(아레테)”을 가르친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훌륭함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저는 이제까지 훌륭함은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라고 하면서 훌륭함의 교수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프로타고라스』와 『메논』, 이 두 대화편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제기한 문제는 사람이 어떻게 훌륭하게 되는가이며, 훌륭함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가이다. 이 주제는 두 대화편에서 대단히 난해하게 전개되고 표면상 결론이 없이 끝나지만, 두 대화편을 종합하여 이해할 때, 그리고 플라톤의 대화편을 통해 드러난 소크라테스의 입장을 고려할 때, 흔히 영어로 “Virtue is knowledge.”(virtue는 arete의 번역어)라고 하듯이, 훌륭함은 지식이며 앎이고, 그것이 지식인 한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배워서 훌륭해 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간단치 않고 더구나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소피스트들이 하듯이 지식을 상품처럼 사고파는 식으로 가르쳐서는 절대로 가르칠 수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

 

 

Ⅳ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는 그동안 “훌륭함”이란 단어를 잃어버린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 이 단어를 마주치는 일은 드물다. 특히 “공부는 왜 하지요?”라는 질문에 초등학생이 이구동성으로 한 대답,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요.”라는 대답을 들은 대학생들은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듯, 그런 대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듯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 옛날 초등학생도 알았으나 오늘날 대학생은 모르는 것, 아니 어쩌면 대학생이 되려고 열심히 공부하다가 놓쳐버린 것, 그것은 공부를 하는 목적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우리사회가 잊어버린 것은 교육은 훌륭한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놓쳤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왜 공부하는지도 모른 채, 공부한 결과 올 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결과를 좇으며, 결과만을 위해 공부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공부가 사람의 됨됨이를 키우는 공부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교육은 항상 수단시되고 결과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교육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인식이 팽배하게 된다. 아이 대신 숙제를 하고 자원봉사를 하는 학부모,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도록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하는 학교, 학생이야 수업을 듣든지 말든지 진도만 나가면 된다는 식으로 진행되는 수업,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비교육적 행태들…….

 

그러나 공부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하는 것이며, 교육은 훌륭한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 할 때, “훌륭함이란 무엇이며,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가? 훌륭함은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는 앞서 소크라테스의 예에서 살펴보았듯이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이에 대한 나의 답은 교육이야말로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는 것이다. 즉, 교육을 통해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하고 또한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훌륭함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인가 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그것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야 한다. 그것은 잘 사는 것, 가장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훌륭함이 무엇인가?”란 질문은 열린 질문이며, 사람은 교육받는 동안, 교육받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답을 찾으면서 그 답이 가리키는 바를 실천하며 살아가야 하며, 그렇게 사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일 것이다. 교사는 학생에게 지식을 전달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훌륭함을 추구하고 훌륭하게 사는 시범을 보이고 있는 사람이다.

 

“좋은”이든 “착한”이든 영어로는 둘 다 “good”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람의 특성을 서술하는 형용사인 “착한”이 처음에는 장난처럼 사용되더니 이제는 일정한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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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강사 나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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