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과 통합 교육과정 도입 관련해서 드리는 10가지 질문
1. 머리말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 도입을 위한 일정이 발표되었고, 이를 뒷받침할 다양한 연구도 시작되었다. 현 정부는 소위 ‘수능3안: 문이과 완전 융합안’에 대한 여론이 긍정적이자 이에 힘입어 이를 빠르게 추진하고 있다.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이란 용어는 한국 교육개혁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표현인 만큼 해석도 다양하며 오해의 소지도 있다. 이번 교육과정 개정이 긍정적인 면도 많지만 추진과정에 등장하게 될 쟁점과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많다. 그리고 이번 개정은 총론의 변경, 교과목 재구조화 등을 수반하는 대규모 전면 개정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제대로 개정을 하지 않으면 향후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킬 소지도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여 이번 개정과 관련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 학교교육이 나아갈 방향, • 교육과정 개정의 원칙과 내용, • 수능과 내신, • 부정확한 용어사용의 문제』 라는 4가지 분야에 걸쳐 정부, 교육과정학자들에게 드리는 10가지 질문 형식으로 글을 써보았다.
2. 질문 10가지
▶ 학교교육이 나아갈 방향
[질문1] 10-20-30년 후 학교교육이 나아갈 비전을 먼저 설정한 후 이에 맞춰서 교육과정을 개정해야 합니다. 중장기적 비전을 고려하면서 개정하고 있다면 그 비전은 무엇입니까?
한국 학교교육의 비전은 학교교육이 ‘만들어가고 싶은 바람직한 미래상(an image of the future we seek to create)’이자, ‘꿈(dream)이 담긴 목표(goal)!’입니다. 현재 한국인 대부분은 10-20-30년 후 학교교육의 미래를 어둡게 보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상황을 이대로 방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의 학교교육이 도달하고 싶은 가슴 뛰는 비전과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핵심성공요인을 도출한 후, 이 성공요인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지혜와 에너지를 모아야 합니다. 정부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교육과정 개정도 이런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래의 도표와 같은 비전을 수립하고 그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목표달성 시나리오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교육부가 추진하고 있는 문이과 통합교육은 2020년도의 교육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면서 그때까지 학교교육이 반드시 실현해야 할 구체적인 비전과 목표가 모호합니다. 필자 개인적 의견으로는 교육을 통해 불평등을 줄이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제1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국 학교교육의 비전은 ‘2020년까지 새로운 학력개념 도입, 개별화 수업 전면 시행을 통해 하위계층 자녀와 상위계층 자녀의 성취도 격차 50% 완화’ 등과 같은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꿈이 담긴 비전 수립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이찬승, 2014)
이상과 같은 비전을 만들게 되면 이를 달성하기 위한 하위 핵심과제들이 추출됩니다. 만일 위 표의 내용처럼 비전을 잡았다면 지금 교육과정 개정의 초점은 ‘문이과 통합’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틀을 통해 교육과정을 개정하지 않으면 숲을 놓치고 나무만 보고 개정하게 됩니다. 지금의 개정이 딱 그런 상황이라 생각됩니다.
한국의 각 정권들은 제대로 절차를 밟아 각계각층의 열망을 담은 비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거용으로 급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두 5년짜리 목표이지 엄밀히 비전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한 국가의 교육비전은 최소 10~20년 앞을 내다보면서 만들어야 합니다.
싱가포르의 교육비전이 좋은 예입니다. 싱가포르는 21세기 지식기반 사회의 도래에 맞추어, “Thinking Schools, Learning Nation”이란 국가의 새로운 교육 비전을 1997년 수립하여 체계적으로 개혁을 추진해 왔습니다. Thinking School은 학교를 과거처럼 단편적 지식을 전수하는 곳이 아닌 창의력, 고등사고능력, 평생학습의 열정을 키워 개인 및 국가의 경쟁력과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곳으로 바꾸자는 것이고, 한편 Learning Nation은 학습을 국가 문화로 정착시켜서 창의와 혁신이 사회 곳곳에서 활발히 일어나게 하자는 꿈을 담고 있습니다(Lee et al., 2008). 이런 교육비전은 싱가포르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잘 나타내주고 있고, 실제 교육과정 및 교수학습도 이에 잘 조응하는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습니다. 이게 비전의 힘입니다.
한국도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 도입을 위한 교육과정의 대규모 개편 이전에 사회 각계각층의 열망을 담아 가슴 뛰게 하는 매력적인 비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교육과정의 개정이나 개혁은 한 치의 변명도 없이 이 비전 달성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현재 위기의 교육을 구할 ‘타당한 교육비전’을 만들고 문이과 통합도 이에 정렬시켜 개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번 교육과정 개정은 향후 교육발전에 큰 장애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질문2] 고교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는 것인가요?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의 도입을 고려하게 된 계기는 수능체제의 개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소위 제3안인 ‘문이과 완전 융합안(창의적이고 융복합적인 인재 양성을 위해 학생이 균형적인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자 문·이과로 구분되어 있는 수능시험 체제를 개선하는 방안)’이 공감을 얻으면서 시작된 면이 있습니다. 이 제3안은 아래와 같은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 문·이과 구분 없이 모든 학생이 공통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과목(국어·수학·영어·사회·과학)을 평가
• 국어·영어·수학 영역은 공통학업능력 측정을 위해 출제범위도 각각 동일하게 설정
• 사회·과학영역은 ‘사회’(사회 및 지리교과 내용요소 포함) 및 ‘과학’(물리·화학·생명과학·지구과학 내용요소 포함) 과목 중심으로 평가
이상의 내용으로부터 유추해보면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은 대학에 진학하는 계열에 상관없이 모든 고교생들이 공통필수로 배워야 할 과목 수와 이수단위를 늘린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만약 지금도 교육부가 고교 교육의 계열 구분을 없애고 붕어빵 인재를 길러서 대학으로 올려 보내고자 한다면 이는 시대착오적이며 교육과정 개정 역사상 가장 큰 오판의 사례를 남기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경제학과를 진학하려는 학생이 고교에서 상당한 수준의 경제를 배우고, 법대로 진학하려는 학생이 법과 사회를 배울 수 있게 하는 것의 장점을 살려야 합니다. 이는 고교가 대학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고 대학에서 자기 전공을 따라 가지 못하는 개인을 우려하는 것입니다.
고교 과정에서 공통필수의 지나친 강화는 개인의 욕구와 학습의 기본원칙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수학이나 탐구과목의 경우, 교과가 현재와 같이 내용별 세분화가 아니라 수준별 세분화의 방식으로 새롭게 개발되어야 합니다(현재 물리I과 물리II는 전체 내용을 1/2씩 나뉜 형태임). 이를 통해 능력과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예: 핀란드의 수학은 16개 수준으로 나뉨). 인지적 능력이 좀 떨어지는 아동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교재를 선택해서 배울 수 있게 해야 하고, 반면에 더 높은 수준의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들에게는 그런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선행학습금지법이 장애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선진 교육에서 어떤 나라도 고교 교육과정의 대부분을 공동필수로 운영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의 도입으로 선택중심 교육과정인 2009 개정교육과정의 기본 원칙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고교 교육을 기초교양교육으로 보고 가능한 한 동일한 내용을 배우게 할 것인가, 아니면 선진 교육처럼 각자의 희망진로와 적성, 현재의 수준, 흥미 등에 따라 개인의 선택의 폭을 넓히고 대학전공과 연계성을 높일 것인가의 결정은 충분한 연구와 논의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수능3안의 여론을 의식해서 하루아침에 기존의 방향을 180도 바꾸려는 태도는 경계되어야 합니다.
교육부는 충분한 연구와 사회적 폭넓은 논의를 거친 후 ‘여론’이 아닌 현재의 방향이 옳다는 ‘증거’를 기반으로 교육과정 개정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질문3] 융복합형 인재양성에 대해 비현실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융복합형 인재양성을 위해 융복합형 교과서를 개발하여 도입한다면 이는 융복합형 인재 양성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오히려 방해가 되는가에 대해 심각히 따져봐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융복합형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공감하지만 이런 인재를 어떻게 기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고민이 없었고, 방향도 잡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사탐과 과탐을 편식하지 않고 골고루 배우면 그런 인재 양성에 도움이 된다는 막연한 인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과목을 힘께 배운다고 융복합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란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여러 과목을 함께 배우게 되면 수박 겉핥기식 수업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고교 탐구과목 교사들은 우려합니다. 또, 융합과학과 공통사회와 같은 교과목을 만들어 전통적인 교과간의 엄격한 경계를 허무는 것이 창의적 융복합형 인재 양성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서, 개별 과목의 기초지식을 먼저 튼튼히 한 후 간교과적(interdisciplinary) 혹은 범교과적(multidisciplinary) 프로젝트 수업 등을 통해 융복합적 사고능력을 키우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현실적일 것이란 주장도 많습니다. 또, 과학은 기초개념을 충실히 배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므로, 개별과목을 학습한 후 융합과학을 학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현장 교사들은 말합니다. 아울러 융복합적 사고력을 키우는 것은 교과서가 핵심이 아니라 수업방식이 핵심이라는 주장을 교육부나 교육계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유념할 사항이 있습니다. 범교과 교육에 관한 선진 교육의 경험담입니다. 범교과적 프로젝트 수업 같은 것이 입시에서 평가되거나 내신에 비중 있게 반영되지 않으면 외면 받는다는 점입니다. 모든 국민이 융복합형 인재가 될 수도, 될 필요도 없습니다. 융복합형 인재양성이나 이를 위한 교육과정 개정은 좀 더 차분히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론에 영향을 받아 교육이 제 길을 벗어나 잘못된 길로 접어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 교육과정 개정의 원칙과 방향
[질문4] 대규모 교육과정 개정을 1년 반 만에 개발하는 것은 졸속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충분한 연구와 쟁점에 대한 논의를 위해 현재의 개정 기간을 연장하여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재 교육부의 교육과정 개정 추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 교육과정 개발: 2013.11.~2015.5.
• 교과서 개발: 2015.3.~2016.8.
• 교과서 검정: 2016.9.~2017.8.
• 교육과정, 교과서 적용(고1): 2018.3.
• 2021학년도 수능 반영(고3): 2020.11.
교육과정 개발을 내년 5월에 마치기로 되어 있습니다. 교육부의 의도대로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 도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해결해야 할 쟁점도 많고, 현재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복잡하고 세분화되어 있어서 교과영역 및 교과(군)의 체제를 재구조화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탐과 과탐 외에 국어, 영어, 수학 등도 다 해당됩니다. 특히 수학의 경우 문이과 공히 공통필수로 배워야 할 내용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쉽게 타결될 성격이 아닙니다. 그리고 과목수가 늘어나는 만큼 수준의 조절, 교육과정의 적정화, 그리고 고교 수준에서의 이런 변경은 필연적으로 초중 수준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대규모 방대한 교육과정 개정을 1년 반 만에 해내겠다는 것은 졸속개정이 될 우려가 높습니다. 교육과정 전문가들의 의견, 해외의 사례 등을 감안할 때 최소한 3년은 잡고 개정해야 합니다. 국가 교육비전까지 먼저 설정하고 주요 핵심역량을 통합시키기 위한 연구까지 감안하면 이 3년은 최소한의 기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질문5] 교육과정 개정 절차는 현재보다 획기적으로 민주화, 선진화되어야 합니다. 이번 개정부터 교육과정 개정 절차를 더 민주화, 선진화 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한국의 교육과정 개정도 선진적인 원칙을 가지고 이에 따라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수한 교육과정을 자랑하는 스코틀랜드가 2004년 도입한 ‘탁월성을 위한 교육과정(Curriculum for Excellence: CfE)’이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교육과정이 소개하고 있는 아래의 8가지 원칙은 국가수준의 교육과정이든 학교수준의 교육과정이든 공히 이를 적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① 도전과 즐거움(challenge and enjoyment) | ② 폭(breadth) |
| ③ 진전속도(progression) | ④ 깊이(depth) |
| ⑤ 개인화와 선택(personalization and choice) | ⑥ 통합적 연계성(coherence) |
| ⑦ 실제의 삶과의 관련성(relevance) | ⑧ 학습을 지원하는 평가(assessment) |
지금 한국은 기본적인 것도 안 되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 온통 ‘문이과 통합, 융복합 인재 양성’이란 다소 모호한 개념으로, ‘여론의 동향’을 의식한 교육과정 개정에 임하고 있는 듯 하여 이런 상황이 우려스럽습니다.
교육과정 개발 절차 중 또 다른 중요한 것은 정책결정자나 전문학자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개발하여 단위학교에 하향식으로 내려 보내지 않는 일입니다. 한국의 경우, 교육과정을 개정할 때 교사를 핵심 파트너로 참여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교사를 교육과정 개발에 적극 참여시켰을 때 새로운 교육과정과 관련된 교수학습법의 도입에 대한 열정이 매우 높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습니다. 또 교육과정에 대한 주인의식(ownership)을 심어주는 것은 교사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존중하는 일입니다. 교사의 풍부한 현장 경험과 전문성은 학자들이 대신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교사의 참여는 자문 수준의 consulting보다는 학자들과 함께 초안을 같이 잡고 시범운영에도 직접 참여하는 engagement 수준의 참여가 바람직합니다. 최근 Reinventing the Curriculum의 공동저자인 Jenny Reeves(2013)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교사들이 스스로 자율적 통제권(sense of agency)과 유능감을 바탕으로 스스로 학습하는 조건을 만들지 않고는 성과를 바탕으로 한 책무성의 영향은 기대한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 올 뿐이다.”
지금까지 교육과정을 개정할 때마다 현장 착근이 어려웠고 교사의 불만과 반발을 샀던 전례에 대한 원인을 위 리브의 결론으로부터 찾아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교육과정 개정을 할 때 핀란드의 개정 절차를 참고하였으면 합니다. 핀란드는 이해당사자들과 합의제 성격의 개정을 하는 것이 문화로 정착되어 있습니다. 한국처럼 하향식이 아닙니다. 핀란드가 올해 개정을 마치기로 한 기초교육(9년제 종합학교)을 위한 교육과정 개정은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우선 리서치 기반으로 초안을 만들고 무려 120개나 되는 이해당사자 단체들로부터 의견을 문서로 받습니다. 또 새로운 방향에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 13세 이상의 중고생 65,000명이나 인터뷰를 하였을 정도입니다. 또, 개정교육과정 초안에 대해 광범위한 피드백을 받는 것도 큰 특징입니다. 교사는 물론이고 학부모, 기업가, 지역 단체장, 대학 등으로부터도 피드백을 받습니다. 사회적 합의절차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한국도 이번 교육과정 개정부터는 초안을 만든 후 제대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해당사자들의 검토와 피드백을 받는 과정도 꼭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육과정 개정 절차의 선진화를 촉구합니다.
[질문6] 교육과정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개혁이 작동할 수 있는 학교 현장의 여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데 어떤 구체적인 계획이 있습니까?
학교 속의 문맹자들(엄훈, 2012)이란 책 속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 기계적이고 양적인 교육과정이 획일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현실
• 교육과정/교과서가 교육 내용, 교수학습 방법 및 평가까지 세밀하게 규정하는 상황
• 특히 고등학교에서는 문제집/문제풀이가 교육과정/교과서를 대체하는 현실
엄훈 선생님이 말하는 위와 같은 학교 현실 외에 학교 문화도 대부분의 경우 문제가 많습니다. 학교의 교사 공동체가 무너진 점, 교사들의 개인평가를 강조하게 되면서 교사 간에 협력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 집단 책무성과 집단 유능감이 낮은 문제, 학생이 교사를 평가하게 함으로써 학생이 이를 악용하는 사례 등도 건강한 학교문화를 무너뜨리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일반고의 학교 교무실은 예를 들면 <수학과, 과학과, 인문사회과, 외국어과, 예체능과>처럼 교육과정 운영 및 수업경영 중심으로 짜여 져야 바람직한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행정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교사가 교육과정 편성권과 평가권이 없다는 점도 교사의 자율성, 자주성, 전문성을 훼손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교사가 담당하는 학급과 학생들에게 맞게 교육과정을 재구성하여 가르치게 되면 당연히 선진 교육처럼 교사별로 평가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 전 현직 교사들 중심으로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 도입에 대한 원탁 토론회를 열었을 때 교사들은 아래와 같은 간절한 바램을 쏟아냈습니다.
“교사들에게 교육과정을 편성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면 교사는 열심히 하려고 할 것이다. 심화과목은 국가가 정하지 말고, 교사에게 권한을 주어봤으면 한다 (사례. OO고, “생활경제”, “1인 1프로젝트”). “아이들과 교사의 자발성을 움직일 수 있는 교육과정이 되어야 한다. 심화과목은 교사가 그 컨텐츠를 골라 뽑아서 재편성해서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으면 한다 (사례: OO고 “실험” 교과).”
교육부와 교육과정 학자들은 이런 교사들의 바람에 귀를 기울여 주셨으면 합니다.
개별화 수업이 이루어지고 교사별 평가가 자리를 잡게 되면 사교육이 줄어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금은 학교별, 학년별 시험문제가 같기 때문에 학원이 이에 대응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교사별로 가르치는 내용, 평가하는 내용이 각각 다르면 학원은 이에 대응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신 준비를 위한 사교육 의존도가 줄어들면 학생들의 수업 참가와 몰입도도 높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교사의 수업환경이 개선되는 것이며 선순환의 기제로 작용할 것입니다.
학생들의 수업 참가와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개별화 수업이 필수적이며 이는 학급당 인원수 감축과 학습량을 과감히 줄이는 적정화를 필요로 합니다. 이번 교육과정 개정에서도 교과이기주의 등에 밀려 교육과정의 적정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의 도입은 학습 부담을 늘리게 될 것이고 이는 진도빼기식 수업을 지금보다 심화시킬 우려마저 있습니다. 실생활과 연계된 수업, 깊이 있는 수업,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개별화 수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내용을 과감히 줄이고, 수준까지 낮추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아울러 중앙집권적 관료주의는 교사를 수동적 존재로 길들여지게 했습니다. 학교와 교사에 대한 신뢰를 키우기 위해 정부는 기존의 권력을 내려놓고 진정한 학교자치 문화를 키워주어야 합니다. 문서상으로는 자율화가 많이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성적을 공개하면서 외부 책무성을 강하게 묻고, 국가수준의 표준화시험으로 엄격하게 질 관리를 하는 한 진정한 교육과 교사의 자발성은 살아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정책의 연속성과 일관성이 부족한 것도 적당주의를 강화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을 바꾸고 뒤집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책도 5년만 지나면 끝난다는 학습효과 때문에 하는 척하는 것이 학교와 교사들의 생존 전략이 되었습니다.
선의의 좋은 정책만 만든다고 교육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정책이 작동될 수 있고, 교사가 춤출 수 있는 학교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교사를 변화의 주체로 세워야 합니다. 교사의 자율과 책임, 투명성, 전문성을 높이는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질문7] 지금의 학교교육은 학습부진아가 양산될 수밖에 없는 시스템입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수업에서 일상적으로 배제되고 있습니다. 이는 학습량의 과다와 진도빼기식 수업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교육과정 적정화는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낼 예정입니까?
교육부는 지난 2월 19일 ‘2014년도 기초학력 지원사업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시도별 공모를 통해 초등학교 420개교, 중학교 180개교 등 600개교를 두드림 학교로 지정해 정서행동장애, 돌봄 결여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학업 성취도가 낮은 학생을 일선 학교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지원하도록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심층 진단을 통해 학습부진의 원인을 파악한 뒤 교감, 담임, 학습보조·특수·상담·사서·보건·돌봄·영양교사 등이 다중지원팀을 구성해 해당 학생의 학습을 돕는다고 하지만 그 성과는 미미할 것이 분명합니다. 인풋(input) 중심이고 push 전략에 의존하는 질 낮은 접근은 오히려 학습부진 학생이 학습과 학교를 더 싫어하게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학습부진을 겪고 있는 아동청소년은 공통적으로 자존감이 낮고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낮은 학습 동기 및 주의력 결핍, 나아가 무기력 등과 직결됩니다. 이런 아동을 학습이 가능한 준비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 동안 받은 상처를 회복하고 교사와의 관계, 교우들과의 관계 회복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와 같이 교사 1인당 학생 수 비율이 높고, 교사의 상담전문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효과적인 문제 해결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교육과정을 개정할 때 문이과 간의 칸막이 제거에 그치지 말고 학습부진아 양산을 막기 위해 현재의 교육과정의 편제와 운영방식, 그리고 평가방법까지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절대평가의 도입을 계기로 모든 아동들이 자신이 가진 잠재력만큼 성취기준에 도달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가 성공시킨 ‘모두를 위한 교육(EfA: Education for All)’ 시스템은 한국에게 학습부진 해결의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보편적 학습설계 기법(UDL: Universal Design for Learning)과 개별화 교육(DI: Differentiated Instruction)의 대표적 도구의 하나인 반응중심개입접근법(RTI: Response to Intervention), 나아가 뇌친화적 교수학습방법(BBE: Brain-Based Education)을 활용하여 학습부진학생, 학습장애 학생들의 수업접근을 더 공정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현재와 같이 학습자를 ‘문제 있는 결핍된 존재’로 보는 기존의 병리관점에서 ‘시스템·환경·교육과정의 무능, 교수법의 부적합’ 등의 문제로 보는 인식의 대전환이 있어야 학습부진 예방과 해결에 희망이 있습니다.
학습부진 해결의 최선의 방법은 예방에 초점을 맞추는 일입니다. 학습부진 예방을 위해서는 인지적 역량, 사회성 및 감성 역량이 떨어지는 아동의 경우, 정상적인 아동보다 학습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의 교육과정처럼 모든 아동에 대해 동일한 내용, 동일한 수준, 동일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현재의 학교는 학습부진아를 양산하는 공장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교육과정 개정은 학습부진 예방을 위해 학습이 느린 아동에 대해서는 더 많은 시간의 확보와 질 높은 예방, 보정 시스템, 학습부진에 효과적인 교수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교사가 중상위권 학생을 대상으로 진도빼기를 하면 중하위권은 낙오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구조를 더 이상 유지시키는 것은 사회적 폭력이며 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절대로 용인되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가령 수업은 월·화·수·목 4일만 하고 금요일 하루는 별도로 빼서 지난 4일간 배운 것을 충분히 습득하지 못한 학생은 보정의 시간으로 활용하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배운 지식을 활용하여 개별과제를 수행하는 시간으로 삼는 등의 과감한 개혁 조치도 고려해야 합니다. 모르는 아동은 계속 모르게 하고, 실패하는 아동만 계속 실패하게 하면서 소수의 성공자를 위한 현재의 교육과정은 매우 폭력적입니다. 이번 교육과정 개정은 불평등을 완화하는 개정이 될 수 있도록 정부의 책임 있고 현명한 판단과 결단을 촉구합니다.
▶ 수능과 내신
[질문8] 2020년대에도 지금과 같이 5지 선다형 수능시험이 유지되고 이것이 중고교 교육과정을 지배하게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해결할 방안은 무엇이고 이를 고려해서 현재 교육과정이 개정되고 있습니까?
현실적으로 고교 3년은 입시준비 기간이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본질에 충실한 교육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실제로 고교 3년간은 입시준비를 위해 객관식 문제풀이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육부가 발표한 일정에 의하면 2021학년도부터 문이과 통합형과 연계된 수능을 볼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때의 수능도 현재와 같이 5지선다 객관식 시험이라면 고교 교육과정 역시 이런 시험 준비에 맞춘 교육과정 운영이 될 것이 자명합니다. 70%라는 EBS의 수능 출제비율은 이런 상황을 더욱 강화시킬 것입니다.
2020년대에도 고교 3년 동안 반복적인 문제풀이를 통해 실수를 줄이고 정답만 추구하는 교육을 한다면 이는 교육이 교육답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웃 일본도 고부담 표준화 시험의 폐해를 줄이고자 한국의 수능에 해당되는 센터시험을 폐지하고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려하고 있습니다. 어찌 한국은 창의성을 유난히 강조하면서도 모든 문제에는 하나만의 답이 있다는 사고를 고착시키는 시험을 10년 후에도 유지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수능과 같은 고부담 표준화 시험이 교육과정을 종속시키는 현상은 세계적으로 공통입니다. 따라서 고교 교육과정 운영을 정상화하려면 수능의 자격고사화 혹은 약 5등급화 하여 고부담을 줄이면서 대입전형에서 절대평가 방식의 내신 비중을 높이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당장 절대평가를 실시할 환경이 마련되지 않아 수능을 자격고사화 하기 어렵다면 선진 교육의 평가처럼 수능에 간단한 논서술형 문제라도 포함시켜 고교 3년을 객관식 정답 맞추기 훈련에서 벗어나 사고력을 키우고 민주시민의식을 함양하며, 궁극적으로는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은 늦어도 2020년대에는 고교 교육을 바르게 견인할 차세대 수능을 도입해야 합니다. PISA 2015부터는 협업에 의한 문제해결능력을 컴퓨터를 통해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평가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이미 차세대 평가를 개발해 금년 말부터 사용에 들어갑니다. 한국은 차세대 평가를 위한 투자나 연구 소식이 전혀 없습니다. 이번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 도입은 문이과 장벽을 허무는 것에 초점을 맞추느라 수능시험의 폐해를 줄이고 교육격차를 실제로 줄일 수 있는 근본적인 개혁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2020년대에 고교 교육을 바르게 견인할 대입전형이나 수능은 어떤 것이어야 하며 언제부터 준비를 할지 질문 드립니다.
[질문9] 공교육이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9단계 상대평가 방식의 내신제도를 폐지하고 5단계 성취평가(절대평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19학년도 이후 성취평가 결과의 대입반영은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이를 정착시킬 대책은 무엇입니까?
교육부는 작년 10월 24일 「대입전형 간소화 및 대입제도 발전방안」 중 2017학년도 대입제도를 확정·발표하면서 2014년 고1부터 보통교과에 대해 성취평가제를 적용하되, 성취평가 결과(A,B,C,D,E)의 대입반영은 ‘18학년도까지 유예한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아울러, ‘19학년도 이후 성취평가 결과(A,B,C,D,E)의 대입반영은 성취평가제 정착 방안을 마련·시행하고 그 운영 결과를 보아가며 ‘15년도에 결정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성취평가(=절대평가)의 성공적인 도입은 상대평가로 인한 지나친 경쟁과 스트레스를 줄이고 협력과 배려의 좋은 인성을 함양하기 위해서, 또, 과목 수강자의 수와 인적 구성에 따라 등급의 유불리가 결정되는 현재의 9단계 상대평가 내신제도의 문제점 때문에 소인수 과목 개설을 막는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의 도입은 기본적으로 <공통필수+선택>으로 운영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경우 공통필수에 해당되는 내용은 수능시험을 통해 평가하게 될 것이고, 선택과목에 대해서는 대입에 내신 성적을 사용할지 아니면 이 역시 수능시험에서 개인별로 선택해서 시험 보게 할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선택과목마저 수능을 통해 평가하고 이를 대학이 반영하게 된다면 시험의 신뢰성은 높아지겠지만 고교 교육과정은 수능시험에 더욱 종속되며 시험을 위한 교육(teaching to the test)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입니다. 고교 교육과정이 교육과정 목표 달성을 위한 교육(teaching to the standards)이 되려면 성취평가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성취평가의 정착 없이는 소인수 선택과목의 개선이나 진로집중과정 운영에도 큰 어려움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취평가의 정착은 학교 교육의 정상화와 교육의 본질 회복을 위해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교육 인프라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지적, 정의적 교육목표가 명확히 규정되고 각 목표별로 공통의 평가척도와 평가지침(rubric)을 마련해야 합니다. 또, 교사의 경험 축적을 통해 평가 전문성을 향상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각 과목별 수준별 동등화 기술 등도 축적되어야 합니다. 고교 수준에서의 성취평가가 제대로 정착되려면 초등학교, 중학교 수준에서의 성취평가가 정착되고 학생, 학부모의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이상의 상황을 종합하면 교육부는 학교 교육정상화를 위해 절대평가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데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 부정확한 용어사용의 문제
[질문10]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이란 부정확한 용어의 사용은 즉각 중단되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이란 용어는 애초에 쓰지 말았어야 합니다. 교육과정 문서에서 문이과 구분은 오래 전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이란 용어의 사용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부적절합니다.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의 도입’을 교육부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기술 창조력을 갖춘 인재를 키울 수 있도록 문이과 칸막이를 없애는 새 교육과정 개발”이라고 그 핵심 목적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문이과 칸막이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탐과 과탐의 편식 문제인데 이는 교육과정 때문에 생긴 칸막이라기보다는 이과는 사탐을, 문과는 과탐을 시험보지 못하게 되어 있는 수능시험 체제 때문에 생긴 문제에 가깝습니다. 이 칸막이는 수능체제를 바꾸어 지원 계열에 상관없이 사탐과 과탐 시험을 볼 수 있게 하면 해결됩니다.
만일,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이란 표현이 융합과학과 공통사회 과목을 개발해서 문이과 공통으로 배우게 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아직 교과서 체제 재구조화는 물론 융합과학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의 양성 및 수급도 준비가 제대로 안 된 상태입니다. 뿐만 아니라 융복합적 사고력은 교과 내용을 융복합시킨 것을 배우게 할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지식체계의 근간은 현재대로 유지하면서 간교과나 범교과적 교수학습방법을 통해 키우는 것이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란 주장들이 많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충분한 연구와 이해당사자들 간의 사회적 합의 과정도 없이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을 도입하겠다고 일정을 먼저 밝힌 것은 순서가 거꾸로 된 것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칸막이는 이과 수학의 부담이 너무 커서 이과 소질을 가진 학생도 이과계열 지원을 기피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과 수학의 수준을 하향 조정하면 될 일입니다. 이런 일련의 변화를 아우를 수 있는 용어가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인가라는 의문이 강하게 듭니다.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이란 용어는 수학의 경우, 마치 대학의 진학 계열에 상관없이 모든 학생들이 똑같은 수준의 수학을 배우고, 탐구과목 역시 문이과 구분 없이 모든 학생들이 동일한 교과와 수준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학생의 수준, 학생의 지원대학과 학과나 계열에 따라 각자가 공부하고 싶은 수학의 수준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이란 용어 사용은 또 다른 모순을 낳고 있습니다. 교육부가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개발과 관련해서 2014년 2월 13일 대통령에게 보고한 업무계획 보고 자료에 의하면,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의 기본방향(안)이란 소제목 아래 ‘꿈·끼를 키워줄 수 있는 다양한 선택과목 또는 진로과정 개설 검토’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문이과를 통합하면 계열이 없어지는 것이고, 진로과정 개설은 계열을 다양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정면 상충되는 용어이자 방향입니다. 진로과정 개설을 통해 계열을 다양화하겠다면 ‘문이과 통합’이란 용어의 사용은 즉각 중단되어야 합니다. 가령 어떤 고교가 <자연공학, 인문사회, 예체능>이란 3계열을 두고 각 계열 속에 다시 <자연과학, 공학, IT, 생명과학, 경제경영, 사회과학, 예술, 체육> 등의 과정을 운영한다면 이는 매우 바람직한 교육과정 운영방식의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진로과정의 개설은 문이과 통합을 통해 계열을 없애는 것과 정반대의 방향입니다. 계열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문과 이과란 낡은 용어를 버리고 새로운 계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봤을 때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도입이란 표현은 그것이 암시하는 것과 실제 일어날 변화와 일치하지 않아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이란 표현의 사용은 당장 중단되어야 합니다.
3. 맺음말
이상과 같이 질문형식으로, 이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소위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 도입’에 관해 10가지 문제제기를 해봤다. 사탐, 과탐의 편식을 줄이고 수학의 부담 때문에 일어나는 이공계 기피현장을 줄이기 위해서 교육과정의 개정 방향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찬성한다. 하지만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 도입’이란 섣부른 용어 사용이 탄력을 받으며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 우려스럽다. 앞으로 10~20년 후 우리의 나아갈 큰 방향을 먼저 설정하고 그 속에서 문이과 칸막이를 없애는 등의 일련의 작업이 이루질 수 있었으면 한다.
지금 학교교육을 개혁한다면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봤으면 한다. 단연 ‘비전의 설정’이라고 생각된다. 중하위권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수업에서 배제되는 문제, 여전히 수능 같은 표준화 시험의 영향력 때문에 고교 교육이 시험에 종속되는 문제, 이런 문제점들을 그대로 둔 채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 도입이란 담론이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을 가리고 있다. 이는 매우 우려스럽고 안타깝다.
참고로,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과 관련된 각종의 쟁점과 과제들에 대해 현장 교사들과 연속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의미 있는 성과가 도출되면 이를 정리해서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연구진들, 그리고 교육부와도 공유함으로써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연구를 담당한 학자들이 맡은 연구과제에 대해 교사들의 생각을 알고자 한다면 교바사 토론회에 직접 참석하실 수 있는 기회도 드리고자 한다.
정부는 애정과 사명감을 바탕으로 마련한 필자의 질문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옳은 지적에 대해서는 반영해주었으면 한다.
필자가 문제제기를 한 이상의 10가지 질문들에 대해 독자들께서는 댓글을 통해 함께 해주셨으면 한다. 아울러 필자가 생각하지 못한 문제나 혹은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보완이나 지적도 부탁드린다. 이를 통해 교육을 걱정하는 많은 시민들의 목소리도 정부에 전달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짧은 직장 생활을 경험한 후 지금의 능률교육(NE능률)을 창립하여 30년을 경영하면서 영어교과서와 참고서 등 다양한 저술활동을 했다. 2009년 회사를 매각하고,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이란 비영리 공익단체를 설립하여, 현재 이 단체 대표직을 맡고 있다. 국가 교육시스템 재 디자인과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동, 청소년들도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개혁에 특히 관심이 많다. 수업혁신과 교육격차 완화를 위해 학습과학의 연구와 전파, 그리고 교원 연수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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