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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편집실 논설] 교육 백년대계는 꿈일 뿐인가?

#1620 편집실, <교육 제4의 길> 편집진 2026.10.15
국가교육위원회가 세우고 있다는 교육 계획을 걱정한다. 교육의 발전이 아니라 퇴보와 타락을 낳지 않을까 우려한다. 백년대계라는 진부한 용어에 빗대어, 교육의 미래를 바르게 추구할 길이 어디에 있는지 헤아려 본다.               

 

 

‘백년대계’의 바람에 부응해야 할 국가교육위원회

 

“개혁하지 않는 것도 개혁이다.” ‘개혁 피로감’에 절은 말이다. 거듭되는 교육개혁을 두고 흔히 뱉어진다. 실로 교육개혁은 잦다. 사건(문제)이 터지거나 정권이 바뀌면 으레 뒤따른다. ‘트렌드’를 좇아서도 이루어진다. 기존의 개혁을 비판하며, 더 이상 개혁이 필요 없게 할 개혁이라는 정당화가 으레 따른다. 그러나 버금 개혁이 꼬리를 무는 데는 보통 대통령 임기만큼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한국만 그런 건 아니다. 미국에서도 교육사가들은 교육개혁이 진전이 아니라 진자(振子)라는 말을 한다.

 

교육개혁이 오락가락하는 사태를 개탄하며 흔히 백년대계라는 말을 꺼낸다. 장기적이고 일관된 계획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는 그런 지적이 축적되어 생겨난 조직이다. 대선 후보들이 내걸었던 공약만 살펴보더라도 백년대계를 세울 기구를 두겠다는 말은 20년 이상 이어졌었다. 2021년 그 설치법이 제정되었을 때, 당시 교육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국가교육위원회는 ··· 우리 국민 모두가 바라는 백년대계 교육을 실현할 초석이 될 것이다.”

 

‘국가교육위원회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은 “교육정책이 사회적 합의에 기반하여 안정적이고 일관되게 추진되도록” 국교위를 설치한다고 밝히고 있다(제1조). 수행해야 할 ‘업무’에 대해선 가장 먼저 “교육비전, 중장기 정책 방향 및 교육제도 개선 등에 관한 국가교육발전계획 수립”을 규정하고 있다(제2조). 백년대계를 세울 직무를 부여하고 있다.

 

‘백년대계’는 진부한 관용구가 된 지 오래지만, 그 어원을 곱씹거나 실지로 그런 계획의 요건을 헤아려 본다면, 허투루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어원으로 치면, 그것은 평생을 바치려고 작정해서 달려들 최선의 계획이며, 사람 키우는(樹人) 과업을 가리킨다. 곡식을 키우는(樹穀) ‘일년지계’와 나무를 키우는(樹木) ‘십년지계’에 비추어, 또 그 연장에서 뜻을 새겨야 할 말이다. 관중(管仲)은 본디 종신지계(終身之計)라 했다. 생을 걸고, 생애에 걸쳐 그 결실을 추구할 계획인 셈이다. 계획 자체가 사람됨의 과정과 다르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함축된 듯도 하다.

 

 

‘국가교육 발전 계획’은 벌써 걱정스러워

 

국교위는 지금 “2028년부터 2037년까지 적용되는 중장기 국가교육발전계획”을 만들고 있다. 내년 3월까지는 그 결과를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문자 그대로 백년대계를 구상하는 건 아니고, 10년 계획을 짜고 있다. 그렇다고 시행 시한이 지나 바로 뒤엎어져도 무방하게 구상하고 있지는 않을 터이다. 공들여 마련해 2028년부터 10년 동안 꾸준히 시행해 나갈 작정인 만큼, 백년대계 못지않은 계획 수명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동정으로 보면 국교위 작업은 미덥지 않다.

 

국교위의 작업에 대해 우려하게 되는 건, 우선, 계획을 세워 나가는 접근이 이미 그른 듯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국교위는 여러모로 제기되는 ‘교육 문제’들 각각에 대해 별도로 해결책을 궁리하는 식으로 일하는 모양이다. 그 과정을 쉬쉬하며 숨기고 있지만, 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결정이나 언론 보도로 드러나는 활동만 보더라도, 문제별로 대책을 붙이는 틀을 따르는 건 틀림없어 보인다. 이를테면, 대입제도, 사교육, AI 교육, 인구 감소, 대학 경쟁력, 균형 발전 등으로 거론되는 문제들을 적절히 다듬어 등록시키고, 그 사안 하나하나에 이런저런 대안으로 대처해 나가겠다는 계획을 내놓을 듯하다.

 

과연 교육 문제인지 따져보아야 할 의심스러운 문제들까지 포함해서, 수많은 문제를 교육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노렸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교육 자체를 망가뜨린다. 새삼스러운 주장이 아니다. 교육정책 역사가 입증해 왔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교육이 유효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 교육을 ‘사회 개량’ 도구로 동원한 정책들은 결국 정부가 늘 애쓰고 있다고 내보이거나, 정권마다 공약을 지켰다고 홍보하는 데나 유용했다.

 

해낼 수 없는 일에 동원된, 그래서 정작 본디 책무에도 충실할 수 없었던 학교나 대학은 결국 ‘돈만 먹고’ 일은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비난만 사게 된다. ‘지역’을 살리기 위해 ‘지방 대학’을 지원한다는 정부 계획을 두고 생각해 보자. 그 정책은 국교위가 내놓을 국가교육 발전 계획에서도 십중팔구 한 항목으로 자리할 텐데, 그 실행이 정부 말대로 성과를 낼 가능성은 희박하다. 몇 년 후 실망스러운 결과를 받아안았을 때도, 계획 자체를 문제 삼는 논의나 성찰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원받았던 대학들만 제구실을 해내지 못했다고 성토하고 팽한 후, 새로운 ‘개혁’으로 때워 갈 것이다. 국교위 작업도 이런 사이클에 남아 있을 듯하다.

 

 

교육 전망의 사회적 구심(求心)을 구해야

 

국교위 작업이 불안스러운 것은 교육 사안이라고 볼 수도 없고 또 교육으로 풀 수도 없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어서만이 아니다. 교육상 절실한 문제에 대들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경우에도 제대로가 아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국교위는 여러 과제를 서로 다른 상자에 넣듯 분류하여 각각에 특정된 계획들을 부착시키는 방식으로 계획을 짜고 있다. 그렇게 과제들이 별도로 취급되고 있지만 교육 실제에서 그것들은 분절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국교위가 분류 등록한 과제들을 모아 놓는다면, 그것들이 하나의 궤로 정합되지도 않을 것이다. 과제들이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과제마다 붙여진 해결책(계획)이라는 것들은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기 십상이다.

 

국교위는 AI 시대에 대응하고 대입 제도를 개편하겠다고 하며, 사교육을 줄이고 대학 경쟁력을 높이겠다고 이야기해 왔다. 이런 취지를 반영하는 교육 계획은 서로 조화롭기 어렵고, 그렇기에 과제별 계획들이 함께 총체적 교육 성과에 상승(相乘)의 기여를 하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이를테면, ‘AI 시대 대응’과 ‘대입 제도 개편’이 개념상 같은 수준에 있지 않고, ‘사교육 경감’과 ‘대학 경쟁력 강화’가 같은 방향으로 교육을 발전시킬 리 없다. 이런 구도에서 국교위가 나열하는 과제마다의 계획은 서로 투합하여 교육의 궁극적 발전을 가져올 가능성은 없다.

 

교육 계획이 백년대계일 수 있으려면 구심(求心)을 갖춰야 한다. 어떤 교육을 추구할지 집합적인 전망을 공유한 바탕 위에서 계획을 구체화하고 조직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교위의 작업에서는 그 전망에 대한 인식의 기미를 볼 수 없다. 설치법에 따르면, 국교위는 “안정적이고 일관되게 추진”될 수 있는 교육정책(소위 백년대계)을 만들되, “사회적 합의에 기반하여[야]” 한다. 이때 ‘사회적 합의’가 바로 계획의 구심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라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국교위 상황에서 합의는 정치적 양극화 생태에서 이해 절충을 모사하는 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적인 타산에 구속된 ‘합의’ 절차로는 교육적 전망의 집합적 구심이 얻어질 리 만무하다.

 

백년대계의 구심을 마련하는 과업은 교육적 공동선에 사회적 의지를 규합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치적이거나 사적인 이해타산이 개입하면, 이런 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 당파적 지분을 넓힐 욕심으로 상생을 도모할 수는 없을 테다. 그런데 국교위는 ‘정치적 안배’의 원칙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운영에서도 정치적 씨름의 문법이 작용한다. 이런 조직이 어떤 합의에 이른다면 필경 그것은 정치적으로 계산된 타협일 것이다. 아니면 의사결정을 위한 절차적 대안이 없어서 채택한 기계적 다수결의 산물일 뿐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 어디로 가야 할지 뜻을 모은 위업이길 기대하긴 어렵다.

 

 

국교위가 말하는 ‘사회적 합의’는 의미 없어

 

국교위가 조직 자체를 넘어 범사회적인 합의를 모색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때 합의는 절차적일 뿐으로, 어떤 뜻(구심)을 구축할 수 없다. 국교위는 사회적 합의를 특정 의제나 대안(들)에 대한 여론 조사로 확인할 수 있는 사회적 표상 정도로 보는 듯하다. 이를테면, 얼마 전 사회적 합의를 위해 시행했던 대입제도 개편 숙의에 그런 인식이 투영되어 있다. 국교위는 그 숙의를 통해 수능 서·논술형 도입안에 대한 찬성률이 55.5%라고 확인하게 된 점을 중시한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국교위는 55.5라는 상대적 크기가 ‘도입’ 대안을 밀어붙이는 데는 미흡하다고 해석한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합의했다고 판단하려면 찬성률이 넉넉한 과반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아쉬워하며 대입제도 개편안을 교육 계획에 포함하는 걸 주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 틀에서 합의는 말하자면 다수결로 판정하는 절차일 뿐이다. 뜻을 모은다는 본디 의미는 온데간데없다.

 

찬반 조사로 합의 여부를 가늠한다면, 그 합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파악할 길은 없다. “OO에 찬성하는가?” 이렇게 표적을 분명하게 적시해 묻고 답을 받았으니 그 대답의 뜻은 명료하지 않으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해석은 그리 단순할 수 없다. 실제 사례를 두고 따져보자. 서·논술형 도입에 대해 찬반 의견을 표하도록 요구한 질문으로 그 도입 계획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여부를 확인한다고 할 때, 찬성이나 반대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하게 될까?

 

찬성과 반대의 비율을 비교해 어느 쪽이 더 우세한지, 그래서 ‘민주적으로’ 결정한다면 어느 쪽으로 선택해야 할지 알게 되었다는 정도의 뜻을 묻는 게 아니다. 숫자 읽기를 넘어서, 서·논술형 도입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합적인 아이디어가 어떤 것인지 얼마나 파악하게 되는지 묻는 것이다. 이런 파악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단순한 숫자 해독이 백년대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할 여지는 거의 없다.

 

국교위의 조사에서, 그 대상자는 찬반 어느 쪽으로 답했든 응답과 함께 수많은 가정을 받아들이고 또 피력한 셈이 된다. 학교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마땅한가? 학교 교육을 이수하고 대학에 진학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어떻게 평가받아야 하는가? 그 평가에서 수능이란 시험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가? 필요하다면 수능은 어떤 기능의 시험이어야 하는가? 그런 기능을 위해서는 서·논술형 문제는 도입되어야 하는가? 도입한다면 실지로 어떻게 출제되어야 하는가? 도입된 서·논술형의 부작용은 무엇인가? 등등 이렇게 한없이 이어질 수 있는 전제적 질문에 대해 응답자는 모종의 답을 한 셈이 된다는 뜻이다. 서·논술형 도입에 대한 찬반 표시는 그런 답을 논리적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이 총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나 조사 질문에 답하는 순간 그 알 길 없는 의견을 함께 내놓은 셈이다.

 

조사에 응한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의 대답이 그것에 전제되었을 수많은 질문에 모종의 답을 한 셈이라는 걸 깨닫지는 못했을 것이다.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 헤아려 궁리하고 나서 찬반 표시를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 능력 밖의 일이다. 만에 하나 그런 궁리 과정을 거칠 수 있었더라면, 그 결과를 간결하게 ‘찬성’ 또는 ‘반대’로 요약하는 게 무리란 점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국교위 조사가 불합리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서·논술형 도입의 찬반을 표시한 응답자들은 궁극적으로 어떤 교육의 양상을 지지했는지 자신도 알 길 없는 의견을 낸 꼴이다. 겉으로 보면 단순히 도입에 찬성 또는 반대했을 뿐이지만, 그 논리적 이면에서는, 찬성이나 반대에 함축된 모든 교육적 여파를 지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여파를 포괄한 교육의 ‘큰 그림’은 모른 채였고, 조사를 시행한 국교위도 그걸 그려낼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미시적인 조사에 의지하는 국교위의 국민 의견 수렴이나 합의 도모로는 결국 백년대계라면 담아야 할 교육적 지향(구심)을 모으는 게 불가능하다. 국교위 계획은 지엽적이며 파편적인 ‘대책’들을 나열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게 된다.

 

 

백년대계를 위한 합의를 추구하자

 

교육 백년대계를 위해 사회적 합의를 모색한다면, 국교위는 스스로 고안한 대안들에 대해 과반의 찬성을 획득하는 데 몰두해선 안 된다. 교육의 근원적인 사안에 대하여 집합적인 안목을 세련시키고 벌어진 이견을 최대한 좁히려는 노력을 우선 기울여야 한다. 이를테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키워야 하는가, 교육은 개인과 사회에 어떤 과업인가와 같은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이들에 대해 사회 구성원이 나름의 생각들을 나누고 성찰하며 공분모를 확보해 가는 과정이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렇게 사회적 합의를 도모하는 일은 교육에 대한 우리 상식의 새 판을 짜는 과업이라 할 수 있다. 교육에 관련된 우리의 말과 생각 그리고 선택(행동)이 사회관계에서 소통될 수 있도록 공통의 문법을 구축해야 하며, 그것을 통한 대화와 포용으로 교육의 큰 그림을 함께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런 필요는 교육을 논란하는 오늘의 사태를 되돌아보면 절감하게 된다.

 

교육을 이야기하며 흔히 우리는 미래와 성공을 들먹이고 공정을 들먹인다. 그러나 미래, 성공, 공정에 담는 각자의 뜻은 사뭇 다르다. AI와 경쟁하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고 노동에서 해방된 인문 문화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수능 만점의 성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고 실존적인 몰입의 성공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채점의 공정을 외치는 사람이 있고 배분의 공정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이와 같은 간극들을 고착시켜서는 우리 사회 안에서 교육을 이야기할 수 없고, 교육 발전 계획은 더욱 엄두마저 낼 수 없다. 미래 교육을 위해 사회적 합의를 추구한다면, 교육을 이야기하는 언어의 소통 가능성을 높이고 논의의 장을 더욱 개방적이며 관용적일 수 있게 펼쳐야 한다.

 

국교위는 정치적 타협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합의만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해(利害) 절충으로 얻는 합의는 그 절차나 과정 자체가 교육을 부패시키며, 결국 우리 삶을 피폐하게 이끌 것이다. 흔한 말을 빌리면, 그런 합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삶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으로 타락시킨다. 삶은 스스로 꾸준히 가치를 다듬으며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 과정을 이해타산이란 역학으로 오염시키면 삶에서 의미 자체가 증발해 버린다.

 

공부를 즐기고 기꺼이 남을 돕는 어린이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거듭하면, 공부의 즐거움이나 돕는 보람은 가물어 없어진다. 물욕이 이유이자 동기가 되는 것이다. 정치나 다수결 바탕의 합의는 바로 그런 사태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자신의 이익을 키우기 위한 언쟁이나 타협에는 당연히 수지 타산이 깔려 있다.

 

교육정책의 이런 대안 저런 대안을 둔 싸움은 교육적 이상을 위한 논의가 아니라 대안에 깔린 이익만 노리는 투쟁이 된다. 대안이 어떤 교육을 낳을지 안중에 있을 리 없다. 결국 교육이 우리 아이를 어떤 사람으로 키울지 마저 안중에 두지 않는 형국에 이른다. 국교위는 이런 싸움을 붙이고 있지는 않은지 조심스레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교육에선 그런 싸움이 지속되면서 생겨난 징후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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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제4의 길> 편집진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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