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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22) – “1995년의 교육개혁”

#1619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2026.10.14
문민정부의 5·31교육개혁을 국가교육체제를 민주화·분권화한 개혁이자, 학교선택권과 경쟁 원리로 평준화 체제를 흔든 신자유주의적 개혁으로 평가합니다.                                                                                             

 

 

‘수시모집과 정시모집’, ‘논술시험’, ‘종합생활기록부’, ‘특수목적고’와 ‘자립형 사립고’, ‘수준별 교육과정’, ‘학교장 초빙제’와 ‘학교운영위원회’, ‘학교평가’와 ‘교원평가’, ‘법학대학원’ 등 2026년 현재의 우리 교육에 정착해 있는 일련의 제도들은 1995년 이전까지 이른바 평준화 체제가 빚어낸 중등학교의 균질화·획일화와 국민교육헌장 체제가 빚어낸 중앙집권적인 교육행정하에서는 매우 낯설고 심지어 급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것들이었다. 이런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교육개혁안으로 제시되고 여론의 수렴을 거쳐 제도화되고 법제화된 시기가 김영삼이 이끌던 이른바 문민정부하에서 교육개혁이 추진된 1995년을 전후한 시기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교육개혁은 한국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이야기될 정도로 폭넓은 범위에 걸쳐 구조적인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이 개혁들은 대통령 직속 자문 기구로 만들어진 ‘교육개혁위원회’에 의해 구상되고 주도되었는데, 그와 함께 「국민교육헌장」의 사실상 폐지 등 주목할 만한 개혁 작업들이 동시에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리고 당시에 전개된 교육개혁의 주된 특질은 무엇인지를 검토해 보자.

 

 

국민교육헌장체제의 종식

 

김영삼 정부는 1995년 해방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일제의 식민 잔재 청산을 상징하는 조치로, 구 조선총독부 즉 중앙청 건물을 철거하겠다는 파격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그대로 실행되었고, 이후 경복궁과 광화문은 예전 모습을 되찾게 된다. 그런데 이와 함께 전개된 또 하나의 중요한 시도가 있었다. 그것은 해방 이후에도 50년간 유지되어 온 초등교육기관의 명칭 ‘국민학교’를 개명하는 작업이었다. ‘국민학교’ 명칭 폐기의 필요성은 교육사회학자 이규환에 의해 당시 다음과 같은 논리로 역설되었다.

 

일반적으로 국가주의 지향적 정권은 초등학교의 이름으로 ‘국민학교’를 선호한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 나치 정권과 일본 군국주의 정권 아래의 ‘국민학교’이다. 당시 독일에서 ‘국민’이란 피와 말, 국방과 투쟁, 정신과 운명, 노동과 문화의 공동체였다. 따라서 국민학교는 이러한 국민을 연마·육성하는 도장이었던 것이다. 1941년에 일본 정부가 공포한 「국민학교령」의 목적은 황국의 도에 따라 초등보통교육을 실시하여 국민의 기초적 연성을 이루는 데 있었다. 이것은 충군애국의 도를 연마하여 대동아공영권 실현을 목표로 한 전쟁 수행을 위하여 헌신하는 국민적 성격의 연성을 뜻하였다. ··· 국민학교의 이름을 바꾸자는 근본 이유는 그것이 우리 민족을 침략한 일제에 의해서 법령으로 확정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 이제 문민정부는 일제 식민통치 제1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없애려는 웅대한 사업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국민학교’의 이름을 바꾸어 민족의 주체화와 사회의 민주화를 지향한 기초교육을 실천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1

 

이에 호응하여 교육계에서 ‘국민학교’ 명칭을 바꾸기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다만, 개명 작업이 이때 처음으로 시도된 것은 아니다. 예컨대 4·19 학생혁명 이후에도 개명 작업이 시도된 바 있다. 1961년 5월 3일에 오천석의 뒤를 이어 문교부장관으로 취임했던 윤택중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국민학교란 명칭은 일제 말기인 지난 41년 2월 25일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내린 “황국(皇國)의 도(道)에 따라 초등보통교육을 실시한다”라는 칙령 제148호 「국민학교령」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 내가 문교부장관직에 있을 때 몇몇 뜻있는 분들이 국민학교의 개칭을 제기하여 몇차례 의견을 나누었었다. 그러나 5·16이 나는 바람에 결실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2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독재체제하에서 위축되었던 개명 작업은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재개되었다. 그런데 87년의 ‘교육개혁심의회’는 “바꿀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적절한 대안이 없다”라는 이유로 보류했는가 하면, 90년의 ‘교육정책자문회의’와 ‘중앙교육심의회’ 등에서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었다. 1993년부터 ‘국민학교이름고치는모임’, ‘극일운동시민연합’ 등 민간단체들이 다시 명칭 변경 운동을 벌였고 당시 오병문 교육부장관도 청와대에 명칭 개정 건의를 했으나 “적절한 대안도 없는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라는 청와대 측의 부정적 반응에 재차 무산되었다. 그러나 해방 50주년을 맞이하는 1995년에 개명 운동이 다시 일어나 4월 1일 대한YMCA연합회, 흥사단,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 등 민간단체들이 ‘국민학교 명칭개정 전국협의회’를 발족하고 공청회를 연이어 열었다.3

 

이런 여론에 힘입어 문민정부의 교육부장관 박영식은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키로 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4 이는 단순한 학교 명칭의 변경에 그치지 않고 이후, “일선 교육현장에 알게 모르게 배어있는 일제의 잔재와 관행을 씻어내는 계기”5로 작용하게 된다.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종식과 정치 민주화가 교육계에 부여한 또 한 가지 과제는 「국민교육헌장」의 폐지 문제였다. 87년 정치민주화 직후에 이미 국회에서 국민교육헌장의 폐지 요구가 제기된 바 있었다. “국민교육헌장의 내용에는 국가주의 우선, 기능주의 강조 등 현시점에서 볼 때 부정적인 측면이 많고 정부의 대북정책 등과도 모순되는 표현이 있다”라는 평민당 소속 박석무 의원의 문제 제기에 답하며 당시의 문교부장관 김영식은 1988년 10월 말 국회 문공위에서 “68년에 제정된 국민교육헌장의 폐지 또는 개정 여부를 중앙교육심의회에서 검토하겠다”라고 밝혔다.6 그러나 곧바로 폐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1989년 노태우 정권하의 ‘중앙교육심의회’는 “제정 당시 국민적 합의에 의해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이 그동안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는 데 의견을 함께하고 재검토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려7 「국민교육헌장」의 수명은 좀 더 연장되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 폐지 요구가 재개되었다. 5년 전에 국회에서 그 문제를 제기했던 박석무 의원은 1993년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다시 폐지를 요구했다. “국민교육헌장이 제정된 이후의 유신체제 교육은 민족중흥이라는 당초의 목적보다는 그 미명 아래 정권 유지를 위한 부도덕한 세뇌와 감시 그리고 탄압의 정략적 교육, 체제 순응적 교육이 진행됐다”며 “그 문맥상 국가주의 또는 전체주의를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으며 순응적이고 기능적인 인간상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8

 

결국 문민정부의 교육부는 “헌장이 만들어질 당시 국회의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선포한 것이어서 교육부가 임의로 존폐를 결정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어 곧 구성될 교육개혁위원회가 폐지를 심의한 뒤 대통령에게 건의하는 형식을 취하게 될 것”이라는 종전과는 다른 전진적 입장을 천명했다.9 동시에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에 헌장의 개폐와 관련된 연구를 의뢰했다.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이돈희 교수 등으로 구성된 연구팀은 1년 후 발표된 연구보고서에서 헌장의 즉각 폐지, 개정, 존치 등 다양한 입장이 사회적으로 존재한다고 지적한 후, 다음과 같은 연구팀의 입장을 밝혔다.

 

1. 한국 교육의 이념적 지표를 밝히는 「국민교육헌장」 혹은 이에 상응하는 공식적인 장전을 제정해 두는 것은 필요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2. 현행의 「국민교육헌장」은 그 기능을 중지시키고 『교육헌장』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장전을 제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새로운 헌장의 제정은 우리의 교육을 전면적으로 반성하고 이념적 방향을 정착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10

 

그런데 이후 교육부는 “국민교육헌장 폐지 여부를 검토한 결과 각종 간행물 게재와 기념식 등에서의 낭독이 중단되는 등 이 헌장의 공식적 기능이 이미 중지됐으므로 별도로 폐지를 공식화하지는 않을 방침”이라고 한 걸음 후퇴하는 듯한 입장을 취했다.11 결국 공식적으로 「국민교육헌장」이 폐기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 이래 이어져 온 ‘국민교육헌장 체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것만큼은 최소한 분명했다. 한국의 학교교육을 고도로 국가주의적이고 중앙집권적으로 통제하는 체제의 이념적 근간을 이루었던 「국민교육헌장」은 이렇게 해서 여하튼 교육사의 무대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대치하는 새로운 교육체제와 제도는 어떤 것이 되어야 했을까. 그것을 구상하고 현실화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교육개혁위원회’였다.

 

 

교육개혁위원회

 

현대교육사를 돌이켜보면, 고교평준화나 교육헌장 제정 등 개별적인 정책과 관련하여 국가가 조직·운영한 위원회들은 1980년 이전에도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국정의 최고의사결정권자인 대통령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한 포괄적인 교육개혁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12 구체적으로는 ‘교육개혁위원회’ 이전에도 제5공화국의 ‘교육개혁심의회’(1985〜1987) 그리고 노태우 정부의 ‘교육정책자문회의’(1989〜1993) 등이 있었다. 또 문민정부 이후에도 국민의정부의 ‘새교육공동체위원회’(1998〜2000)와 ‘교육인적자원정책위원회’(2000〜2002), 참여정부의 ‘교육혁신위원회’(2003〜2007) 등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 현대교육사에서 명멸하였던 숱한 교육개혁 기구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펼친 것은 김영삼 정부에서 조직된 ‘교육개혁위원회’(1994〜1998)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이십여 년의 한국 교육은 1995년 5·31교육개혁에 주석을 붙인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교육개혁위원회에서 발표한 교육개혁안의 파괴력은 상당하였다.”13

 

1992년 중순에 「교육개혁위원회규정」(대통령령 제13,955호, 1992.8.10)이 제정되고 1년 반 후인 1994년 2월 5일에 대통령자문기구로 출범한 ‘교육개혁위원회’는 1994년 9월 5일 교육개혁위원회의 제1차 대통령 보고자료―이는 대통령에게 제출된 보고서로는 제1차에 해당하지만, 1995년에 발표된 제2차 보고서가 실질적으로 ‘제1차’ 교육개혁 방안으로 간주된다―에서 교육개혁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11가지로 정리하여 제시했다. 1. 교육 재정의 확충, 2. 대학 교육의 국제 경쟁력 강화, 3. 사학의 자율과 책임의 제고, 4. 대학 입학 제도 개선, 5. 학제의 다원화 및 탄력성 제고, 6.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개편 및 운영의 내실화, 7. 교원의 전문성 신장 및 사기 앙양, 8. ‘학교공동체’ 중심 교육 운영, 9. 직업기술 교육의 혁신, 10. 교육법 및 교육 관계 법령 정비, 11. 사회교육 및 사회의 교육적 기능 강화였다.14 ‘교육 수요자 중심의 교육’, ‘교육의 다원성’, ‘교육 운영의 자율성과 책무성’ 등이 개혁의 원리로 표방되기는 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개혁방안은 제시되지 않았고, ‘신자유주의적’ 개혁 이념도 전면에 부상하지 않은 단계였다.

 

교육개혁위원회의 본격적인 개혁 방안은 1995년 5월 31일의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으로 발표되었다. 이후에도 교육개혁위원회는 1996년 2월에 ‘평생직업교육체제’, ‘교과목 선택에 의한 학생중심 교육과정 운영’, ‘전문대학원제도 도입 및 관계법령 정비’를 내용으로 하는 대통령 보고서,15 1996년 8월에는 ‘지방교육 자치제도의 개선’, ‘교원정책 전환’, ‘사학의 자율과 책임의 제고’, ‘교육정보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대통령 보고서,16 1997년 6월에는 ‘민주시민교육을 위한 개혁’, ‘과외대책을 통한 사교육비 경감 방안’, ‘유아교육 공교육체제 확립’ 등을 내용으로 하는 대통령 보고서17를 발표했다. 그런데 세 차례에 걸친 이 후속 방안들은 기본적으로 ‘5·31교육개혁 방안’을 보완하거나 구체화하는 것이어서, 문민정부 시대에 이루어진 일련의 교육개혁들을 흔히 ‘5·31교육개혁’으로 통칭한다.

 

[그림 1] 5·31교육개혁 관련 신문보도
(『한겨레신문』 1995.6.1.)

「新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1995.5.31.)이라는 제목을 단 보고서는 교육개혁을 통해 만들고자 하는 ‘신교육체제’의 기본 특징으로 다음 여섯 가지를 제시한다.

 

○ 학습자 중심 교육: 교육 공급자인 학교 및 교원과 교육행정기관의 편의 중심 교육으로부터 학습자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한다. 교육 공급자 간에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의 경쟁을 통해 교육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 선택권을 확대한다.
○ 교육의 다양화: 종래의 획일적이고 서열화된 교육에서 벗어나 다양한 교육프로그램과 특성화된 학교를 설치·운영함으로써 학생의 잠재능력, 창의력 및 인성이 함양되도록 한다.
○ 자율과 책무성에 바탕을 둔 학교 운영: 규제와 통제 중심 교육 운영에서 벗어나 개별 학교의 자율과 책무성 중심의 교육 운영으로 전환하고, 학부모 및 학교 관련 인사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학교가 효율적으로 운영된다.
○ 자유와 평등이 조화된 교육: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계발할 수 있는 자유의 영역이 보장됨과 동시에, 교육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불리한 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형평의 장치가 마련되어 교육의 수월성이 확보된다.
○ 교육의 정보화: 첨단 멀티미디어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여 누구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21세기형 열린교육이 실시된다.
○ 질 높은 교육: 학교와 교원, 그리고 학생에 대한 객관적이고 엄정한 평가체제와 견실한 재정지원, 서비스 위주의 교육행정 등의 종합적인 지원체제를 통하여 교육의 질을 제고한다.(밑줄 강조는 원문. 이하 동일)18

 

‘학습자 중심’,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 선택권’, ‘다양한 프로그램과 특성화된 학교’, ‘학부모와 학교 관련 인사의 자발적 참여’, ‘교육의 수월성’, ‘평가’, ‘서비스 위주’ 등 보고서가 강조한 일련의 개혁 원리는 교육 공급자가 아닌 교육 수요자로서의 학생, 학부모의 선택에 부응하도록 학교교육에 ‘서비스 경쟁’이라는 원리를 도입하겠다는 정책의지를 숨김없이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1994년 보고와는 달리 1995년의 5·31교육개혁 보고서에 이상과 같이 ‘신자유주의적 정책 패키지’가 대거 포함된 데에는 1차와 2차 사이에 OECD에 파견되어 있던 교육부 관료가 OECD 내부의 논의를 국내 정책 주체들에게 전달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김용, 박대권의 연구에 따르면 “1995년 교육개혁은 국제기구인 OECD가 한국의 교육정책에 최초로 포괄적인 영향을 끼친 사례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후 한국 교육은 국제기구가 주도하는 글로벌 교육정책 장에 편입되어 광범위한 영향을 받”19게 되었다는 것이다.

 

5·31교육개혁은 여론의 대체적인 호응과 지지 속에서 또 정부의 강력한 추진 의지하에서 비교적 순조롭게 전개되었다고 평가되는데, 거기에는 개혁사업 진행 과정이 지닌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신자유주의의 흐름이라는 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는 비교육계 인사들이 주도하고, 이러한 방향에 터한 구체적인 개혁안의 수립에는 합리성과 전문성을 지닌 전문위원 등 교육계 인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비공식적 참여자로서 매스컴, 이익집단, 연구소와 학자집단이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어지는 교육정책 결정 과정에서는 5·31교육개혁안을 입법화할 책임을 지고 있는 교육부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교육부장관과 장관을 보필하는 행정고시 출신 고급 관료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개혁안과 관련된 법률의 수준에 따라 국무회의와 국회가 협조적으로 참여하였다.20

 

김재웅은 교육계와 비교육계, 학계와 관료계,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협력과 역할 분담이 비교적 순조롭게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개혁 과정이었다고 평가하면서도 교사 집단의 참여가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5·31교육개혁은 단지 문민정부가 전개한 단발적이고 한시적인 개혁에 그치지 않고 이후 한국 교육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런 지속성을 낳은 요인 중 하나는 인적 요인이다. 5·31교육개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인물 가운데 10명이 이후 교육부의 수장에 올랐다. 1기 교육개혁위원회 때 상임위원을 맡았던 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는 37대 교육부장관(1997〜1998년)에 올랐고, 2기 교육개혁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김덕중 당시 아주대 총장은 39대 장관(1999〜2000년)을 지냈다. 40대 문용린(2000년), 41대 송자(2000년), 42대 이돈희(2000〜2001년) 장관 역시 문민정부 교육개혁위원회 위원 출신이었다. 1기 교육개혁위원회 위원이었던 이기준 전 서울대 총장은 5대 교육부총리(2005년)에, 5·31개혁 방안 수립 당시 장관이었던 안병영 연세대 명예교수는 참여정부에서 교육부총리에 임명됐다. 마지막 교육부총리였던 김신일 부총리(2006〜2008년)는 1〜2기 교육개혁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교육개혁위원회 전문위원이었던 이주호 KDI 교수는 이명박 정부에서 교육과학기술부장관에 올랐고, 5·31교육개혁 방안 수립 당시 교육부 교육정책총괄과장을 맡았고 교육개혁위원회 2기 위원장이었던 문용린 장관을 보좌했던 서남수는 박근혜 정부하에서 장관에 올랐다.21 이는 5·31교육개혁의 지속적인 영향력 발휘의 기반이 되었다.

 

그렇다면 5·31교육개혁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여기서는 그것을 종전의 ‘국민교육헌장 체제’가 지닌 국가주의적, 중앙집권적인 국가교육체제를 민주화·분권화시켰다고 하는 한 측면, 또 그와 동시에 한국 교육체제를 ‘신자유주의적’ 이념에 따라 재편했다고 하는 또 다른 한 측면으로 크게 나누어 평가하게 될 것이다.

 

 

국가교육체제의 민주화·분권화

 

1995년 이전까지 ‘국민교육헌장 체제’하에서 중앙정부는 국정교과서 제도로 대표되는 교육과정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통해 학교교육을 정치적인 교화의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1973년부터 3년 동안 전개된 제3차 교육과정 개정 및 1976년부터 본격화된 교과서 국정화를 통한 유신체제의 교육적 정당화 시도가 그 대표적인 예다. 5·31교육개혁은 이러한 학교 교육과정의 틀에 근본적인 메스를 가했다.

 

국정교과서의 수는 최소화하고 검인정 교과서를 적용할 교과목과 교과목별 검인정 교과서의 수를 대폭 확대한다. 초등학교 교과서도 점진적으로 검인정 교과서로 전환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초·중등학교 모든 교과서에 대해 자유발행제를 지향하도록 한다. 교과서 채택은 단위학교의 학교운영위원회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함으로써 자유 경쟁을 통한 교과서의 질 제고가 이루어지도록 한다.22

 

위의 개혁안에 제시된 자유발행제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교과서에 대한 종래의 국가주의적 통제를 더 이상 유지하지 않겠다는 자세만큼은 확고해졌고 이후 교육과정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와 간섭은 크게 약화되었다.

 

아울러 학교교육에 대한 국가주의적 통제의 또 다른 축인 교사의 교육 활동에 대한 통제의 틀도 개혁 대상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개혁의 쟁점이 된 것은 1949년 제정된 이래 1995년까지 지속되어 온 「교육법」 제75조의 한 항목, 즉 “교사는 교장의 명을 받아 학생을 교육한다”는 조항의 개정 문제였다. 이 조항은 학교장이 교사의 교육행위를 관료적으로 통제하는 데 활용되는 악법이라며 교사들로부터 종종 지탄받아왔던 것이었다. 예컨대 이 조항에 기대어 학교 현장에서 “대부분의 학교 관리자들은 아직도 형식적인 학습지도안의 기재 내용을 매월 검열하는가 하면 한술 더 떠서 매주 그 내용을 결재하는 경우”도 있었고, “자율장학이라는 미명 아래 창문을 통해서 수업내용을 감시하는” 관행이 오랜 기간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었다.23

 

그런데 이 「교육법」 제75조에는 역사적 기원이 있었다. 그 조항은 1941년에 일본제국이 「소학교령」을 개정한 「국민학교령」(1941.3.1. 칙령 제148호) 제17조에 “훈도는 학교장의 명을 받아 아동의 교육을 담당한다”라는, 이전의 일본 교육법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규정을 삽입한 데서 기원했다.24 그 이전 일본의 「소학교령 시행규칙」 제134조에는 “정교원은 아동의 교육을 담임하고 이에 속한 사무를 맡는다”고만 되어 있었다. 그렇게 “교장의 명령권이 애매했는데, 학교 전체의 유기적 활동을 필요로 하는 국민학교에서는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 조항이 개정된 것이다.25 여기서 말하는 ‘학교 전체의 유기적 활동’이란 바꿔 말하면 천황제 국가권력의 도구로 학교교육을 활용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적 의도의 다른 표현에 불과했다. 물론 이 규정은 식민지 조선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에서는 1947년에 제정된 「학교교육법」의 제28조에 “교유(敎諭)는 아동의 교육을 담당한다”로 규정하여 제국 시대의 국민학교령 조항을 폐지했다. 그런데 해방 이후 1949년에 이승만 정권하에서 제정된 「교육법」은 놀랍게도 일제시대의 「국민학교령」 제17조를 다시 복제·부활시켜 제75조에 “교사는 교장의 명을 받아 학생을 교육한다”라는 조항을 못박아 넣었던 것이다. 그것이 1995년까지 반세기 가까이 개정되지 않고 유지되어 왔다. 따라서 이 조항의 개정은 교사의 교권 보호와 국가교육체제의 민주화를 위해 필수적인 과제였다.

 

1996년 2월 9일 발표된 2차 교육개혁 방안에서는 이와 관련된 개혁 구상이 다음과 같이 천명되었다.

 

교육법 제75조 교직원의 임무에서 교사는 교장의 명을 받아 가르치도록 되어 있으나, 교사가 적법한 상관의 명에 따르는 것은 국가공무원법에 의하여 당연한 것이므로 “교장의 명에 따라” 라는 것을 외국의 입법례에 따라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학생을 교육하도록 개정하여 법치주의를 실현한다.26

 

그런데 이 방안에 따라 교육법률이 개정되기까지 한 차례 더 우여곡절이 있었다. 교육개혁위원회의 제안을 받아 새로운 법안을 마련할 책임을 부여받은 교육부는 법 시안을 작성한 후 1996년 7월 19일에 ‘교육법 개편 방안 공청회’를 열어 여론을 수렴했는데, 이때 교육개혁위원회의 개혁 방안과는 달리 「초·중등교육법」(시안) 제24조의 내용을 “교사는 교장의 지도를 받아 학생을 교육한다”는 것으로 바꿔 공청회에 올린 것이다.27 이는 당연히 격심한 반발을 불렀고 그에 대해 교육부는 “교직사회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다. 교장단의 반응은 어떻겠는가. 교육부로서는 현실적인 고려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대응할 뿐이었다.

 

이런 어설픈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최종적으로 1997년 12월 13일 제정된 「초·중등교육법」(법률 제5438호)은 교육개혁위원회의 개혁 방안을 그대로 수용하여 제20조(교직원의 임무) 제3항에 “교사는 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학생 또는 원아를 교육한다”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무려 「교육법」 제정으로부터 48년, 「국민학교령」 제정으로부터는 56년이 걸린 셈이다. 교육개혁위원회의 이상과 같은 ‘민주적’ 개혁 방안은 직접적으로는 1987년의 시민 항쟁, 그리고 1989년의 전교조 출범으로 대표되는 교사운동의 성과다.

 

아울러 5·31교육개혁안에는 ‘국민교육헌장 체제’하에서는 교육과 관련된 권리의 주체로 여겨지지 않았던 학생과 학부모의 권리를 보장하고 신장하기 위한 개혁 방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개혁 원리가 천명되었다.

 

교육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 및 교원의 권리를 구체적으로 보장하고, 자유민주주의 교육체제를 지향하는 헌법정신을 충분히 구현할 수 있도록 교육법 체제를 개편한다. 교육의 관계 당사자인 학생, 학부모, 교사, 학교 설립자, 국가 등의 교육권의 개념을 타당하게 정립하고, 교육을 통한 개인의 이익과 국가 사회 전체 이익의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교육에 대한 규제를 최소화하고, 학생 및 학부모의 교육기본권을 보장하고, 교원의 교육의 권리를 보장하며, 학생자치활동과 학부모의 학교교육 참여제도를 법제화한다.28

 

한국 현대교육사 최초로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 학교설립자, 국가 등과 함께 ‘교육권’의 담지자로 법제화된 것이다. 그것은 학생자치활동의 보장을 위한 ‘학생회’ 결성, 그리고 학부모의 학교교육 참여제도로서의 ‘학교운영위원회’ 조직 등 학교교육체제를 민주화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되었다.

 

요컨대 교사, 학생, 학부모의 권리를 법적으로 확인하고 제도적으로 실현하는 방향의 개혁안이 제안되고 법제화되었다는 점에서 교육개혁위원회의 개혁은 국가교육체제의 민주화·분권화라는 뚜렷이 진보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권 실현이라는 개혁 목표가 그들의 학교선택권 보장, 그리고 그와 한 쌍을 이룬 교육 공급자에 대한 평가체제라는 또 다른 차원의 제도들로 구체화되면서 5·31교육개혁은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라는 또 다른 측면을 아울러 지니게 된다.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과 평준화 체제의 균열

 

5·31교육개혁에서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권 실현은 학생회나 학교운영위원회와 같은 기구의 법적 제도화로도 구체화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선택권’ 부여를 중심으로 구체화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개혁 방안으로 제안되었다.

 

○ 중학교 선택권 부여: 학생에게 학교선택권을 부여하기 위하여 1996학년도부터 중학교의 학군 내 희망교를 복수 신청받아 추첨·배정한다. 필요할 경우 시·도교육감이 학군을 조정할 수 있다.

 

○ 일반계 고등학교 선택권 부여: 학생에게 학교선택권을 부여하기 위하여 평준화 지역의 일반계 고등학교는 1996학년도부터 학군 내 선복수지원, 후추첨 방식에 따라 학생을 선발한다. 시·도교육감은 학생의 학교선택권을 넓히는 방향으로 학군을 광역화한다. 1998년 이후 대학교육의 다양화·특성화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 대학 입학 전형제도가 다양화되었다고 시·도교육감이 판단하면 건학이념이 분명하고 정부의 재정지원 없이 재단전입금 및 학생납입금 등으로 운영·유지할 수 있는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에 등록금 자율책정권을 부여한다. 그리고 학생에게는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에 대한 학교선택권을 부여한다.29

 

학교선택권의 부여가 종래와는 달리 학생 선발을 둘러싼 ‘경쟁’을 새롭게 부추길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 대해서 교육부는 아래와 같이 답변했다.

 

그동안 학교와 교원은 양질의 교육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경쟁을 하지 않은 반면, 학생과 학부모만 경쟁하는 교육체제에서 학습 과부담 고통과 사교육비 과부담 고통을 강요해 왔다. 이번 교육개혁은 학생과 학부모가 소모적인 경쟁을 하는 교육을 학교와 교원이 생산적인 경쟁을 하는 교육으로 교육의 근본 틀을 바꾸는데 중핵이 있다.30

 

더 나아가, 5·31교육개혁이 학교교육에 ‘시장 메커니즘’을 도입하려는 것임을 숨기지 않고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다.

 

이번 교육개혁은 교육의 목표와 바람직한 교육체제를 구현하는 방법으로서 교육 소비자에게는 선택권의 확대가, 교육 공급자에게는 경쟁의 활성화가 각각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전체적으로 교육 효과의 극대화, 다시 말해 개인의 삶의 질 향상과 국부의 증진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본질을 바탕으로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시장 메커니즘을 도입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31

 

중등학교 단계에서 학생과 학부모의 학교선택권 부여, 그리고 교육 공급자의 경쟁 활성화는 요컨대 1968년에 출범한 ‘국민교육헌장 체제’와 함께 오랜 기간 기본적 골격을 유지해 온 평준화 체제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다른 개혁 방안들과는 달리 전면적으로 법제화되거나 실현되기는 어려웠다. 중학교 선택권이나 일반계 고등학교 선택권을 학생과 학부모에게 부여하는 방안은 결국 순조롭게 실현되지 못했으며, ‘자립형 사립학교’ 또한 문민정부 당시에는 실시가 보류되었다가 국민의정부가 들어선 이후에야 가까스로 실현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5·31교육개혁에서 표방된 ‘학교선택권’이라는 개혁 원리는 사실상 ‘고교다양화’를 지향하는 일련의 정책들을 정당화하고 추동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평준화 체제에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특수목적고교가 1995년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1983년부터 과학고등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했고, 1984년부터는 외국어학교가 등장하여 특목고의 선행 형태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5·31교육개혁으로 인해 이들 학교의 존립에 적극적인 정당성이 부여되어 이후 급속한 성장과 확대를 이루게 되었다. 결국 5·31교육개혁은 고교다양화라는 이름하에서 실질적으로 ‘고교의 수평적 계층화’를 야기하여 평준화 체제를 동요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김용은 고교다양화 정책을 중심으로 5·31교육개혁이 지닌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측면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고교다양화 정책은 고등학교라는 상품을 늘리는 의미가 있고, 대학설립준칙주의를 시행하여 상품 확대를 대학으로까지 연장했다. ··· 이와 함께 모든 학교의 교육정보를 공개하도록 하는 정보공개 정책을 통해서 구매자의 합리적 선택을 도왔다. 또 교원평가와 교원성과급 제도를 도입하여 공급자 내부가 수요자의 요구에 신속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했다. 이렇게 보면, 고교다양화 정책은 교육시장을 만들고 작동하도록 하는 신자유주의 교육개혁 패키지의 핵심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32

 

여기서 고교다양화 정책이 교원평가 및 교원성과급 제도, 그리고 학교의 정보공개 정책과 결합되어 있다는 지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교조를 중심으로 한 교육운동을 다룰 때 언급했던 것처럼 5·31교육개혁 이전에는 학교교육의 세계에서 국가권력 대 교사·학부모·학생이라는 대립구도가 지배적이었지만, 이후에는 교원평가나 교원성과급 제도를 둘러싸고 기존의 대립구도와는 다른, 보다 복잡한 대립구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5·31교육개혁은 국가교육체제의 민주화·분권화라는 측면에서만 일방적·긍정적으로 상찬되기는 어려운 성격의 것이었다. 5·31교육개혁이 추동하는 고교다양화 정책이 “학생들이 다양하고 자유로운 교육 경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출신 계급에 따라 비교적 뚜렷하게 구별된 교육 경험과 제한된 교육 기회만을 제공함으로써 수평적인 계층화와 분화를 통하여 불평등을 유지”33하는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보다 근본적으로 5·31교육개혁의 ‘신자유주의적’ 측면을 ‘공교육 시장화(marketizing)와 학교 민영화(privatization)’를 목적으로 한 ‘시장주의에 의거한 교육의 사사화(私事化) 전략’34으로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입장도 이후에 상당한 규모로 확산된다. 이런 비판들이 얼마나 타당성을 갖는 것인지는 5·31교육개혁 이후 한국의 교육과 사회 세계에서 전개된 리얼리티에 근거하여 다시금 평가되어야 한다. 단일한 이념이나 원리만으로 설명되거나 평가되기 어려운 복합적 면모와 성격을 5·31교육개혁은 지니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여하튼 1995년 5·31교육개혁을 분기점으로 하여 한국의 학교교육이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된 것은 분명하다. 권위주의 정치체제하에서 형성된 ‘국민교육헌장 체제’가 종식되고 동시에 ‘평준화 체제’도 심각한 동요의 국면을 맞이하면서 한국 현대교육사의 한 단계가 바야흐로 막을 내린 것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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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이규환 「언제까지 ‘국민학교’인가」 『한겨레신문』 1995.1.26.(5).
  2. 尹宅重 「日잔재 ‘국민학교’명칭 바꾸자」 『東亞日報』 1995.2.27.(23).
  3. 「시민-교육계 10년노력 결실」 『朝鮮日報』 1995.8.12.(29).
  4. 「國校명칭 ‘초등학교’로 교육부 발표」 『東亞日報』 1995.8.12.(3).
  5. 「社說 初等학교, 간판만 바꾸지 말고」 『京鄕新聞』 1995.8.13.(3).
  6. 「국민敎育헌장 改廢검토」 『東亞日報』 1988.10.25.(15).
  7. 「교육헌장 존속시키기로」 『東亞日報』 1989.3.24.(15).
  8. 『제162회 국회 교육위원회회의록』 제1호 1993년 7월 7일, 대한민국국회사무처, 64쪽.
  9. 「국민교육헌장 없어진다」 『한겨레신문』 1993.12.5.(14).
  10. 李敦熙 외 (1994), 『國民敎育憲章에 관한 綜合硏究』, 서울大學校師範大學附設敎育硏究所, 73-74쪽.
  11. 「국민교육헌장 폐지유보」 『한겨레신문』 1995.12.2.(18).
  12. 김용, 박대권 (2018), 「문민정부 교육개혁에서의 OECD의 영향―국제기구의 영향과 글로벌 교육정책 장으로의 편입」, 『교육정치학연구』, 25(2), 84쪽.
  13. 김용, 박대권 (2018), 「문민정부 교육개혁에서의 OECD의 영향―국제기구의 영향과 글로벌 교육정책 장으로의 편입」, 『교육정치학연구』, 25(2), 84쪽.
  14. 교육개혁위원회 (1994), 『제1차 대통령보고자료 신한국 창조를 위한 교육개혁의 방향과 과제』, 교육개혁위원회.
  15. 교육개혁위원회 (1996), 『제3차 대통령보고서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新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Ⅱ)』, 교육개혁위원회.
  16. 교육개혁위원회 (1996), 『제4차 대통령보고서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新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Ⅲ)』, 교육개혁위원회.
  17. 교육개혁위원회 (1997), 『제5차 대통령보고서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新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Ⅳ)』, 교육개혁위원회.
  18. 교육개혁위원회 (1995), 『제2차 대통령보고서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新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 교육개혁위원회, 21-22쪽.
  19. 김용, 박대권 (2018), 「문민정부 교육개혁에서의 OECD의 영향―국제기구의 영향과 글로벌 교육정책 장으로의 편입」, 『교육정치학연구』, 25(2), 105쪽.
  20. 김재웅 (2015), 「김영삼 정부의 교육정책 결정 구조와 과정―5·31 교육개혁안을 중심으로」, 『교육정치학연구』, 22(2), 75쪽.
  21. 「문민정부 ‘5·31교육개혁안’ 만든 10명 교육부 수장에 올라」 『머니투데이』 2015.11.23.(https://www.mt.co.kr/policy/2015/11/23/2015112309478242278)
  22. 교육개혁위원회 (1996), 『제3차 대통령보고서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新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Ⅱ)』, 교육개혁위원회, 49쪽.
  23. 이현규 「교육풍토 개선위해 교장선출제 실시를」 『한겨레신문』 1989.4.5.(4).
  24. 「국민학교령」 제정 이전까지 관련 조항은 「소학교령시행규칙」(1900.8.21. 문부성령 제14호)의 제135조 “정교원은 아동의 교육을 담임하고 이에 속하는 사무를 담당한다”는 것이었다.
  25. 大山惠佐, 本間俊一 (1941), 『國民學校令釋義』, 東京: 富山房, p.40.
  26. 교육개혁위원회 (1996), 『제3차 대통령보고서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新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Ⅱ)』, 교육개혁위원회, 66-67쪽.
  27. 박수성 (1996), 「‘자치’ 억누르는 ‘통제’의 고삐―교육법 개정을 둘러싼 논란」, 『중등우리교육』, 80, 67-68쪽.
  28. 교육개혁위원회 (1996), 『제3차 대통령보고서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新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Ⅱ)』, 교육개혁위원회, 60-61쪽.
  29. 교육개혁위원회 (1995), 『제2차 대통령보고서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新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 교육개혁위원회, 21-22쪽.
  30. 교육부 (1995), 『교육개혁 문답으로 알아본다』, 교육부, 3쪽.
  31. 교육부 (1995), 『교육개혁 문답으로 알아본다』, 교육부, 4쪽.
  32. 김용 (2026), 「5·31 교육개혁과 고교 다양화 정책의 평가」, 『교육연구논총』, 47(2), 20쪽.
  33. 손준종 (2010), 「한국 고등학교의 수평적 계층화에 관한 이해와 비판」, 『교육사회학연구』, 20(4), 한국교육사회학회, 159쪽.
  34. 김용일 (2006), 「5·31 교육개혁의 현황과 전망」, 『敎育問題硏究』, 24, 고려대학교교육문제연구소, 130쪽.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식민교육사 및 교육역사사회학, 동아시아근대교육의 비교사회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교육과학사, 2000),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서해문집, 2018), 역서로는 야나기 하루오의 『학급의 역사학』(교육을바꾸는책, 2026), 가리야 다케히코의 『대중교육사회의 형성』(학지사, 2023), 고마고메 다케시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공역, 역사비평사,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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