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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천자문] 새삼 교권의 뜻을 묻는다

#1607 편집실, <교육 제4의 길> 편집진 2026.09.30
‘교권’이 때에 따라 여러 뜻으로 정책 과정에 스미는 점에 주목하며, 최근 ‘미래 교육’ 대안 논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교권을 보호하거나 확보한다는 표면의 이야기들이 사실은 교권 확립의 길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을지 모른다고 경계한다.

 

 

교권이 무너진 지는 오래다. ‘교권 확립’이 국정 구호였던 적도 있다. 1982년 일이다. “교직풍토 개선 운동”을 펴겠다며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교권 확립의 해’를 선포했다. “교사는 인격과 학문 양면에서 존경받아야 하며, 사회는 교사를 존경할 줄 아는 상황이 도래해야만 비로소 교권은 확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국정을 이야기하며 교권을 거론한 데에는 교육 외적인 계산이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문제 지적이 터무니없지는 않았다. ‘교권 추락’은 당시 꽤 심각한 ‘교육 문제’였다.

 

1982년 12월 26일 한 신문의 사설은 “‘교권 확립의 해’에 본 교직자의 지위”를 다뤘다. 아래와 같은 대목이 들어있다.

 

대한교련(大韓敎聯)의 조사에 의하면 32개 직종 가운데 교사의 사회적 지위는 21~25위였으며, 경제적 순위는 24~27위였다고 한다. 겨우 하상급(下上級)에 속하는 직업관이다. ··· 교직이 직업으로서의 매력을 잃은 지가 오래됐고, 사회적인 지위나 인기도가 낮아졌으며 교육자들의 긍지마저 퇴색해진 것이 오늘의 교육계 실상이다.

 

사설 맺음은 이렇게 되어 있다. “제자 앞에 체통을 차릴 수 있는 수입과 보람이 제공돼야 한다. ··· 얕보는 직업관이 씻겨야만 교권과 사도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44년 전 ‘교권’은 ‘체통’의 문제였다.

 

이제 교직은 ‘사회 경제적으로’ 얕보이지는 않는다. 적어도 미래 세대의 직업관에선 그렇다. 청소년의 ‘희망 직업’ 조사에서 교사는 늘 ‘최상급’이다. 그러나 교사 체통이 말이 아니긴 예전과 다름없다. 쪼들리는 가계 때문이 아니다. 아예 ‘선생’으로 대우하질 않는 ‘교권 침해’ 사태가 잦다. ‘힘 있는’ 학부모들은 교사를 ‘교복(敎僕)’으로 취급한다. 자녀가 학교에서 어떻게 굴든 잘 받아주고, 시험 점수와 학교생활 기록은 탈 없게 하길 기대한다. 어긋나면 송사도 불사한다. 적지 않은 학생이 선생님께 대드는 게 무슨 대수냐는 듯 군다고도 듣는다.

 

1999년 5월 25일 한 신문의 사회면에는 교사가 학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대통령 앞으로 “교권이 실추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호소하는 유서를 남겼다고 보도했다. “언론과 교육 당국이 교사를 비리의 온상으로 내몰고 있고, ··· 학생들이 교사를 고발하고 심지어는 구타까지 일삼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다”고 개탄하면서였다고 한다. 교권은 꾸준히 ‘문제’였지만, 문제가 되는 이유는 때 따라 달랐다.

 

1999년엔 교원단체가 정부와 대차게 맞섰다. 교육부 장관 퇴진 운동까지 벌였다. 그렇게까지 이른 데는 ‘개혁’이 한몫했다. 역사상 가장 획기적이었다는 ‘5.31 교육개혁’은 1994년부터 4년간 이어졌다. 그 여진으로 술렁이던 가운데, 1999년 학교는 ‘새 학교 문화 창조’의 기치를 내건 또 다른 개혁으로 더더욱 흔들렸다. 개혁은 늘 ‘대상’을 손가락질하며 시작된다. 짧게 잡아도 5년 이상 교사는 ‘개혁 대상’이란 주홍 글씨를 달고 살았던 셈이다. 잘 알려져 있듯, 5.31 개혁은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의 전환”을 외쳤었다. ‘공급자’인 교사의 권리는 회수해 마땅하다고 공언했었다.

 

2000년 전후의 개혁은 학교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흔히 일컫는다. 아닌 게 아니라, 개혁 탓만은 아니었겠지만, 그 시기를 거치며 교육을 보는 우리 상식은 뚜렷이 바뀌었다. 교육을 ‘인적자원 개발’과 다름없게 보고, 학교와 교사의 제구실은 ‘소비자’의 선택을 좇아 ‘서비스’하는 데 있다 여기게 되었다. 이런 통념은 요즘 ‘AI 교육’이나 ‘고교학점제’ 같은 문제를 이야기하는 데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바뀐 상식에는 교권의 자리가 있을지조차 의구하게 된다.

 

교육 당국은 한창 ‘미래 교육’을 구상하고 있다. 특히, 학교가 ‘인간 고유의 역량’이나 ‘창의적 사고력’을 키우게 할 방도를 궁리하고 있다. 이 맥락에서도 교권은 암암리에 정의되고 있다. 이를테면 ‘미래 대입 제도’에 대해서는 ‘절대평가’와 ‘서·논술형 도입’을 ‘숙의’하고 있다. 교원단체들은 대체로 “취지에는 동의하나···” 하며 유보적인 의견을 냈다. ‘미래 역량’ 계발을 위해 평가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도입 가능한 현실’을 먼저 갖추라고 주문했다. 도입된다면 학생 평가는 교사의 ‘주관적인’ 준거와 판단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따라올 게 번연한 ‘교권 침해’를 막을 대책이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원단체들이 말하는 선결 요건은 바로 ‘교권 보호’이다. 평가권은 교권에 속하고, 절대평가든 서·논술형 출제든 교사 재량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이의가 없다. 다만, 그러한 교권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 문제가 해소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현행 대입제도 아래에서도 교권 침해는 막대한데, 교사 재량이 더 넓혀진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 후탈의 여지를 미리 없애야 대입 개편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에는 수업이나 평가에 대해 정부가 획일로 구속하더라도 교권은 지켜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있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렵겠지만, 교원단체들이 요구하는 교권 보호 대책을 정부가 마련한다고 상정해 보자. 교원에게 만족스러울 ‘면책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러면 교권은 확립되는가? 학교생활 기록이나 평가에 대한 지침은 대입 개편에 맞춰 개정될 것이다. 그 지침은 어쩌면 교사들의 직무를 더욱 촘촘히 구속할 것이다. 대입에 직결될 테기 때문이다. 그런 지침 아래에서도, 악성 민원이나 송사 등에 희생될 걱정이 사라진다면, 교권은 더 존중되는 것인가?

 

교권 확립을 국가의 획일 규제에 맞닥뜨려 추구해야 한다는 교원도 적지 않을 테다. 지금 얘기하는 선결 조건이 갖추어지더라도, 교사로서 ‘지침대로 하는 평가’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나설 교사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전문성과 윤리의식(사명감)을 구속됨 없이 관철할 수 없다면 교권은 존중되는 게 아니라고 여기는 이들이다. 평가를 포함하여, 가르치는 일 총체에 대해 교사의 자율이 용인되어야 비로소 교권은 바로 선다고 본다. 이런 교사는 ‘교권’을 걸어 교권 너머의 권리를 탐하고 있는가?

 

‘미래 교육’의 구상 아래에서 교사의 재량권은 지금보다 넓어질지 모른다. 이 점에 반색하며 획일적인 ‘지침 기반’의 정책에 타협하려는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해야 교권 확립으로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른다.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교권을 추구한다 해도, 현실적인 타협을 거쳐 점진적으로 다가가는 길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 믿음(전략)은 실질적인가? 그럴지 모른다. 설사 그렇더라도, 타협하려는 생각에 잠입해 있는 반(反) 교권의 불씨는 의식 위에 올려두어야 할 것이다.

 

교권은 궁극적으로 교사에 대한 사회적(문화적) 신임으로 지지되어야 한다. 교사의 전문성과 사명감(윤리)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학교 교육에서의 수업이나 평가 그리고 다른 활동과 일상에 대하여, 교사가 견지하는 기준과 선택 그리고 행동이 오롯이 존중되는 모습으로 교권은 드러나야 할 것이다. 교육과정이나 평가의 양식 등을 결정해 내려주도록 정부에 미뤄놓고, 내려오는 지시 아래에서 허용되는 자율만으로 교권이 대체될 수는 없다.

 

타협을 통해 우선 소극적인 자율이나마 얻게 되면,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교권을 얻어낼 길은 더 열리게 될까? 모른다. 옹색하나마 새롭게 확보한 자율에 안주하는 가운데, 전문성이나 사명감은 적어도 집합(collective) 수준에서 퇴화하지 않으리라고 보장되는가? 더욱이, 정부 지시를 따라서만 기능하는 ‘교직 작동’에 거듭 익숙해질 ‘사회’가 문득 교사의 자율권을 떠올리고 챙겨주게 될까? 사회적 신임을 얻을 길은 계속 멀어지지 않을까?

 

특히, ‘교권 보호’의 타협안은 철저히 법제에 의존하도록 논의된다. ‘법대로’의 관성은 계속 강고해져 왔다. 그러나 교권은 본질상 ‘법 없이 살아가는’ 양식으로 소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교권 확립에는 성문율이 아니라 불문율이 마땅하지 않은가? 법으로 보호되는 ‘교권’은 진정 교권일 수 있는가? 타협하더라도, 교권을 다루는 대안은 늘 이와 같은 질문으로 톺아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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