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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21) – “교사운동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1606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2026.09.30
과거 교사가 선거에 동원되고 대한교련이 정권에 순응하던 구조를 짚으며,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함께 성장한 교사운동이 1989년 전교조 창립과 합법화로 이어져 교육의 정치적 종속 구조에 균열을 냈다고 평가합니다.              

 

 

교사와 정치권력

 

1958년 5월 대전의 한 국민학교 교사와 동사무소 서기 간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국민학교 선생- “자네는 이번에 몇표 배당이 왔나?”
동회 서기- “왜 학교에서도 자유당표를 배당주던가?”
선생- “그럼. 나는 30표책임일세.”
서기- “뭐? 30표? 그까짓것은 누워서 팟떡먹길세. 나는 자네의 열곱쟁이인 300표라네. 역시 선생들은 대접을 하여주느먼.”1

 

이승만 체제 하에서 선거가 있을 때마다 학교 교사들이 불법적인 선거운동에 노골적으로 동원되곤 하던 관행을 꼬집는 신문기사의 한 대목이다. 1959년에 내무부장관으로 취임한 최인규는 취임사에서 “공무원의 대통령 선거운동은 집무 시간 외에 하는 경우 선거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펴며 노골적으로 교사들에게 선거운동을 강요했다.2 60년 3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교사들에게 “삼삼오오 가정방문을 해서라도 두 R씨―대통령 후보 이승만과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가리킨다. 인용자주― 이름 밑에다가 기표하도록 설득하라”3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 필연적 결과는 1960년 4.19 ‘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였다.

 

그러나 1년 남짓한 제2공화국 하에서 주춤했던 학교교육에 대한 정치적 지배는 61년 군사정변 이후 다시 재개되었다. 몇 장면을 들어보자. 1967년 국회의원 선거 시에 전라북도 고창군 교육장 겸 선거관리위원장은 일선 국민학교를 순회하며 “상부의 지시와 지령 때문에 부탁하니 전 직원은 수업에 지장이 없는 한 가정방문을 실시, 공화당 후보 당선을 위해 유권자를 포섭해달라”는 지시를 내렸다.4 관행처럼 굳어진 박정희 체제 시기 선거개입의 숱한 사례들 중 하나다.

 

1972년 이른바 「유신헌법」 발포 이후 종신집권체제를 구축한 박정희는 민주화운동과 유신 체제 반대투쟁이 격화되자, 1975년 1월 22일에 특별담화를 발표하며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는 기만적인 ‘국민투표’(2월 12일 실시)를 실시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때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교사들이 전면적으로 동원되었다. 1975년 2월 3일에 보도된 다음의 신문기사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서울시내 국민학교와 공립중학교 교사들이 1일부터 학생 가정방문을 통한 국민투표 참가권유에 나섰다. ··· 어떤 학교에서는 정부에 비판적인 가정을 중점적으로 찾아가 설득하라고 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학교에서는 학급지도를 하면서 학부모와의 화제를 국민투표로 유도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교사는 국민투표를 권유하다 말썽이 날 경우 학교의 지시가 아니라 자의로 한 것처럼 하라는 학교 측의 지시도 함께 받았다고 말했다. 한 국민학교 교장은 “지금까지 제한됐던 교사들의 가정방문이 갑자기 해제됐다”면서 교육구청으로부터 회의석 상이나 공문서로 지시받은 것은 아니며 어떻게 시달됐는지 밝히기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교사들은 가정방문 후 보고서를 써내도록 지시받았으며 가정방문에 필요한 교통비의 지급도 약속받은 것으로 알려졌다.5

 

촌지 수수의 우려가 있다며 엄격히 금지되었던 가정방문이 갑자기 권장된다거나, 방학 때에 갑작스럽게 어머니교실이 개강되고 육성회이사회가 개최되고 졸업식 일자가 국민투표일 이전으로 앞당겨지기도 했다.6 결국 국민투표 결과는 투표율 79.9%, 그리고 유효투표의 73.1%의 찬성률을 보여7 박정희의 재신임이 확정되었다.

 

 

대한교련의 어용성

 

학교교육과 교사에 대한 정치적 통제와 지배의 역사는 오랫동안 권위주의적 정치체제하에서 일종의 ‘구조적 특질’로 지속되어 왔고 이상에서 예시한 몇몇 장면들은 그 특질의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교육의 정치적 종속에 대해 교원단체는 어떤 대응을 보였을까. 한국현대교육사에서 반드시 따져 물어야 할 주제의 하나다. 그리고 이때의 주된 대상은 대한교육연합회다. 1945년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이후, 일제 잔재 청산과 교육개혁을 위해 결성된 진보적 교사단체인 조선교육협의회가 미군정에 의해 불법단체로 규정되어 해산되고, 그에 대항하는 보수적인 교육관료 중심 단체로 등장한 것이 1947년에 결성된 조선교육연합회다. 그것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대한교육연합회로 개칭되어 유일한 거대 교원단체가 되었다.

 

한편 이승만 정권의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은 취임 직후 가장 먼저 교육계에서의 교원 숙청 작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게다가 정부수립 2년 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교육계에서 진보적인 교사 자원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승만 체제 하에서 대한교련은 학교교육에 대한 이승만과 자유당의 정치적 지배에 단 한 차례도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한 모순이 1960년 학생혁명 이후 ‘교원노동조합’의 자발적 결성 움직임을 낳았다. 혁명 이후 교육민주화를 위한 교사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지만 이듬해 1961년 5월 군사정변의 발발로 그 시도는 좌절되었다. 대한교련의 독점적 교원단체로서의 지위는 유지되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교련은 이전과 동일한 생존전략을 고수했다.

 

그 단적인 증거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앞다투어 ‘지지성명’을 발표하던 각종 어용단체들의 발 빠른 충성경쟁 행보에 대한교련도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1972년의 이른바 ‘10월유신’ 체제가 등장하자마자 교련은 곧바로 지지성명서를 발표했었다. 다음은 그 일부다.

 

국제정세의 거센 도전을 이겨내고 남북대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할 중대한 시점에 서서 이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갈 수 있고 우리 실정에 가장 알맞는 체제 구축을 단행하기 위해 선언된 10월 17일 박대통령각하의 특별선언은 5천만 민족의 영광스러운 평화적 통일과 중흥을 이룩하려는 실로 우리 민족의 운명과 직결되는 조치로 확신하고 전국 20만 교육자를 대표하여 ··· 우리의 결의와 신념을 천명하는 바이다.8

 

이는 이승만 체제 하에서 대한교련이 보였던 곡학아세와 전혀 다름없는 행보였다. 그 흔들림 없는 ‘일관성’은 1980년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1979년 12.12 군사쿠데타와 80년 5.18 비상계엄 전국 확대, 그리고 같은 해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여 국가기구를 장악한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간선제로 8월 27일에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간선제 대통령선거 직전인 8월 20일, 대한교련은 다음과 같은 전두환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지금 우리의 당면 과제인 민주정치의 토착화, 민주 복지국가의 건설, 정의사회의 구현을 추구하기 위하여서는 강력한 실천력과 영도력을 국민적 단합을 도모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가 요구되고 있다. 이와같은 시대적 요청과 국민적 여망에 따라 우리 25만 교육자는 새역사의 사명을 훌륭히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전두환 장군을 우리의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할 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교육자적 사명감으로 새시대 새역사 창조에 앞장설 것을 성명하는 바이다. 1980년 8월 20일. 대한교육연합회 회장 정범석.9

 

이러한 대한교련의 ‘어용성’에는 역사적 기원이 있다. 교련은 해방 직후인 1947년에 ‘조선교육연합회’로 출범할 때 식민지기의 반관반민적인 어용적 교육단체 ‘조선교육회’의 사업을 대부분 이어받았다. 그로 인해 식민지 교육 경험의 특성, 즉 식민성, 관료성, 근대성을 내재한 준국가기구적 성격이 온존되었다.10 그러나 그뿐 아니라 해방 이후에 대한교련이 국가권력기구, 더욱 구체적으로는 문교부와 맺고 있었던 특이한 유착 관계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 주된 내용은 대한교련 운영경비의 주된 재원인 이른바 ‘방학책’의 독점 발매에 대한 문교부의 승인 및 문교부의 국고보조금 지원에서 비롯된 국가권력 의존성이다.

 

국민학교 학생들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자학자습하는 데 활용케 한다는 의미로 속칭 ‘방학책’으로 불렸던 부교재를 대한교련이 독점적으로 제작하여 사실상 모든 학생들에게 강매하던 관행은 해방 이후 오랜 기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해방 이후 새롭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기에 조선교육회―1925년에 설립된 관제 단체로 회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맡았으며, 식민교육의 정책을 뒷받침한 교육계의 대표적인 어용단체였다―가 보통학교 학생들에게 ‘하계학습장’, ‘동계학습장’이라는 이름으로 부교재를 강매하여 재정에 충당하던 관행을 해방 후 대한교련은 답습했다. 방학책은 내용의 부실함만이 아니라 재정적 부담의 강요로 인해 학교 현장에서 물의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대한교련 출범 이후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모든 국민학생 그리고 70년대 후반에는 중학생에게 일 년에 두 부씩 판매함으로써 얻는 수익은 한때 대한교련 전체 재정의 85%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11 그 부작용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교부는 방학책의 독점 판매를 지속적으로 승인해 주었을 뿐 아니라 국고보조금까지 지원함으로써 대한교련의 복종과 충성을 담보받을 수 있었다. 1971년에 이미 대한교련의 정치적 종속성은 다음과 같이 언론에 의해 지적되고 있었다.

 

사회집단 중 가장 대표적인 압력단체인 대한교련이 초기 활동을 제외하고는 관권의 비호 아래 어용적 성장을 계속, 압력단체 본래 사명인 자주성을 상실하고 정치에의 압력 행사가 아닌 정치로부터 압력을 받는 후진국압력단체의 전형적인 취약성을 노출해 왔다. 15만 교직자를 등에 업고도 교련의 약체가 지적된 것은 정치문화의 비합리적 요소 외에 조직의 모순 등 수술할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최근 교련 회장 자리는 교권투쟁의 대상인 학원기업가들이 눈독을 들이는 자리로 전락했으며 시군교육회장 등 중요한 자리는 대부분 교육장 장학사 관립대학 총장이 맡는 활동의 제약성을 스스로 안고 있다. 교육전문지 ‘교육평론’ 취재부장 김병옥 씨는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떤 목적을 위해 ‘문교부가 교련에 압력을 넣을 필요도 없다’고 교련의 모순을 지적한다. 이러한 현상은 교련의 재정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 자발적 집단인 교련은 회원들이 30원씩 회비를 내고 있지만 주요 재원은 문교부가 특전을 준 1년 이익금 1억에 육박하는 방학책 사업과 교육기재창 사업에서 염출, 교련 운영비에 충당되고 있다.12

 

문교부는 대한교련의 재정적 종속성을 활용해 1976년에는 사단법인인 교련을 「공익법인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의 적용 대상인 공익법인으로 지정하여, 사업예산 및 임원 임면에 대해 문교부의 지도감독을 받도록 했다.13 이로써 대한교련은 교육정책에 대한 교사의 여론과 권익을 대변하여 활동할 수 있는 교원단체로서의 제도적 요건조차 상실하게 된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 대한교련은 1981년에는 국회 문화공보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뇌물로 ‘돗자리’를 선물하여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14 대한교련과 정치권력이 유착하는 단적인 사례는 1985년, 전두환의 대구공고 동창생으로서 초등교사로 재직 중이던 백순달이 전두환에 의해 대한교련의 사무총장으로 임명된 사건일 것이다. 그와 함께 전두환은 대한교련에 10억 원을 하사했고 교련은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15 1988년 전두환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자 대한교련은 7백여만 원짜리 ‘병풍’을 제작해 선물함으로써 사은의 정을 표했다.16

 

대한교련은 국내 최대의 전문직 단체를 자임해 왔다. 1987년에 편찬된 『대한교련40년사』에 소개된 40년간의 대한교련의 업적은 ‘교육연구대회’ 개최, 『새교육』, 『새교실』, 『새한신문』 발간, ‘교원단일호봉제’ 추진, ‘교육자치제’ 개선, ‘대한교원공제회’ 창설, ‘사도헌장’ 및 ‘사도강령’ 제정 등을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17 교사들의 복지와 전문성 향상에 일정한 기여를 한 사실은 인정된다. 그러나 교직 전문성의 핵심 원리인 자율성이 정치권력의 지배 하에서 심각하게 제약되어 왔고 그에 대해 교련은 철저히 무력했고 심지어 동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고질적으로 재생산되어 온 학교교육의 정치적 종속 구조에도 마침내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1980년대 후반의 정치민주화운동, 그리고 그와 연동하여 전개되는 교사운동이 그 균열을 만들어낸 힘이었다.

 

 

민주화운동과 교사운동

 

1980년대도 박정희 유신 체제와 마찬가지로 권위주의적 군부독재 체제가 지속되었지만 그 체제의 재생산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1980년의 ‘서울의 봄’은 이후 민주화를 지향하는 시민운동과 학생운동에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제공했다. 80년대의 이른바 ‘졸업정원제’ 정책으로 인해 100만 명 가까운 규모로 성장한 대학생들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판금서적이었던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18나 한길사의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을 접하며 현실 비판의 의식을 벼려 나갔다. 특히 80년대 중반 이후 거의 모든 대학에서 공공연하게 상영된 광주항쟁의 숨겨진 진실을 다룬 비디오19들을 보며 자란 학생들의 사회의식은 그들의 끈질긴 학생운동의 기반이 되었을 뿐 아니라, 결국 1987년 6월항쟁으로 대표되는 시민들의 민주화운동의 자양분이 되었고 그 묘판으로부터 80년대 중반 이후의 교사운동이 자라나게 된다.

 

1980년대 교사운동은 1981년 8월 초, 전국 31명의 교사들이 모여 ‘학교교육의 반성과 새로운 교육자상의 정립을 기본과제로 설정하고 중등교육자들의 동지적 공동체 운동을 준비할 것’을 선언하며 YMCA중등교육자연구협의회를 결성하는 것20으로 처음에는 소박하게 시작하였다. 이는 이듬해 초에 ‘한국YMCA중등교육자협의회’(회장 오장은)로 발전한다. 그 밖에도 YMCA초등교육자협의회, 흥사단교육문화연구회 등 교사단체가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한다.

 

교사들의 자발적인 연구와 토론 모임의 성격이 짙었던 이들 교사단체의 활동은 1980년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정치적인 투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 계기는 1985년 7월에 일어난 이른바 『민중교육』 사건이다. 같은 해 5월에 학교교육에 대한 비판과 진보적 교육이론 소개를 내용으로 하는 교육무크지 『민중교육』(실천문학사)이 출판되었는데 그에 기고하거나 출판에 관계된 교사들이 당국으로부터 대대적인 탄압(파면 10명, 강제사직 7명, 감봉 2명, 경고 1명)을 당하게 된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관제언론을 총동원하여 『민중교육』지에 대한 좌경용공몰이 조작을 전개하였으며, 이에 저항하는 교사들에 대한 연행과 파면 등의 중징계, 그리고 글을 기고한 김진경, 윤재철 두 교사와 실천문학사 주간 송기원 씨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했다.21

 

이듬해인 1986년 5월 10일에는 서울, 부산, 광주, 춘천의 교사들이 Y중등교협 주최로 ‘제1회 교사의 날’ 집회를 갖고 「교육민주화선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전국 단위로 교사들이 참여하여 서울 450명 참가(367명 서명), 광주 250명 참가(87명 서명), 춘천 30명 참가(23명 서명), 부산 80명 참가가 이뤄졌다. 이는 곧바로 강릉지역 교육민주화선언(5월 29일), 충청지역 교육민주화선언(6월 14일), 전북지역 교육민주화선언(7월 12일) 등으로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교육민주화실천결의대회’(서울 5월 31일, 호남 6월 21일, 해남 6월 28일, 강원 7월 12일, 영남 9월 6일, 전주 9월 13일) 등 교사 대중집회가 잇달아 개최되었다.22 「교육민주화선언」에서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요원의 불길로 타오르는 민주화의 열기는 역사의 필연이며 각 부문의 민주화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교사들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야 할 교육부문의 민주화는 사회 전체의 민주화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교육의 민주화는 사회의 민주화의 토대이며 완성이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하며 교육의 민주화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아래와 같이 요구했다.

 

1.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실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교육은 정치에 엄정한 중립을 지켜 파당적 이해에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1. 교사의 교육권과 제반 시민적 권리는 침해되어서는 안 되며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권도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1. 교육행정의 비민주성, 관료성이 배제되고 교육의 자율성이 확립되기 위해 교육자치제는 조속히 실현되어야 한다. 1. 자주적인 교원단체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는 전면 보장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당국의 부당한 간섭과 탄압은 배제되어야 한다. 1. 정상적 교육 활동을 저해하는 온갖 비교육적 잡무는 제거되어야 하며, 교육의 파행성을 심화시키는 강요된 보충 수업과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심야학습은 즉각 철폐되어야 한다.23

 

이 「교육민주화선언」은 80년대 교사운동이 교사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운동의 범위를 넘어서서, 교육의 정치적 중립, 교육행정의 민주화와 교육자치제의 실현,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권 보장을 지향하는 교육운동을 지향하고 있음을 선언한 것인 동시에 자주적인 교원단체의 결성이라는 구체적인 과제까지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이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교육민주화선언」 이후 교사들의 대중집회 참가와 조직 결성이 비약적으로 활성화된다. 그것은 같은 시기에 민중교육 관련 해직교사들과 현장교사들의 뒷받침으로 결성된 ‘민주교육실현협의회’(약칭 민교협. 1986년 5월 15일) 결성과 그에 의한 『교육과 실천』 및 『민족과 교육』 발간, 일련의 교사 대중집회(‘민주교육탄압저지대회’(86년 7월 17일 명동성당 사도회관, 400명 교사 참여), ‘민중교육지 사건 1주년에 즈음한 민주교육 실천대회’(86년 8월 29일, 350명 교사 참여). ‘창립1주년기념집회’(87년 5월 10일)) 등으로 나타난다.

 

1987년 1월 14일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전두환 정권에 의한 ‘호헌’ 선언이 부른 범국민적인 저항이 1987년의 6월항쟁으로 발전하여 결국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29 민주화선언이 이루어지는 등 정치민주화가 급속도로 전개되는 과정과 병행하여, 동시에 그 결과로 교사운동도 한 단계 발전했다. 1987년 7월 14일에 ‘교사대토론회’가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고 많은 대중교사들의 참여가 확산된 것을 계기로 하여 같은 해 9월 27일에 ‘민주교육추진전국교사협의회’(약칭 전교협)가 결성된 것이다. 전교협은 한 단계 비약한 교사운동의 발전을 약속했다. 전교협은 결성 직후 전국적인 시도·교협 조직을 정비하였으며 초기의 3,000여 회원이 88년 상반기에는 8,000여 명으로, 88년 하반기에는 15,000명으로 확산되었고, 88년 11월 20일 여의도집회 후에 급속히 늘어 89년 상반기에는 3만 명에 이르는24 대중조직으로 발전하였다.

 

교사운동이 전교협으로 대표되는 전국적인 대중조직을 중심으로 급격히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이른바 ‘교원정보부’ 사건이 발생해 교육계에 충격을 주었다. 1988년 10월 초 국회 문교공보위원회의 국정감사 과정에서 문교부 안에 속칭 ‘교원정보부’라는 사찰기구가 설치되어 학생운동과 교사운동 등에 대한 정보 수집과 감시, 사찰과 통제를 지속해 왔다는 것이 드러나 주요 일간지를 통해 보도된 것이다.25 아울러 비단 중앙기구인 문교부만이 아니라 각 시도교육위원회도 같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26 심지어 문교부는 고등학교 교사들을 ‘교육연구사’를 직책으로 특임하여 전국의 11개 국립대학에 모두 67명이나 배치해 학생들의 동태 파악 등 사찰 업무를 해온 사실도 드러났다.27 교사 신분이었던 이들은 ‘첩자’ 역할의 대가로 ‘교감자격증’이라는 특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28 대한교련은 이런 사태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그럴수록 교사운동의 열기는 더욱 가열되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출현

 

전교협은 1989년에 접어들며 교원노조의 결성이라는 방향으로 운동 방향을 굳혔고 그것은 같은 해 5월 말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로 약칭) 결성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그림 1] 전교조 창립 (1989.5.28.)

1989년 5월 28일 결성과 동시에 발표한 「창립선언문」은 전교조라는 교원노조 조직 태동의 배경, 그리고 전교조의 향후 운동 방향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일급의 사료인만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립선언문」의 모두에서 전교조는 노동조합 결성이 학생, 학부모와 함께 하는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즉 ‘참교육’ 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위한 교육민주화운동의 일환임을 먼저 밝힌다. 그리고 전교조 창립의 역사적 전사로 1960년 4.19 이후의 교원노조, 1986년 5.10 「교육민주화선언」, 사학민주화투쟁 그리고 1988년의 ‘전교협’ 결성을 자리매김함으로써 한국 교육의 민주화가 정치민주화 나아가 민족의 통일과 분리될 수 없는 과제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단결을 호소하는 것으로 매듭짓고 있다.29

 

전교조는 창립 직후 전국적인 지부, 지회, 분회를 조직하여 6월 12일 현재 “전국적으로 11개 지부, 42개 지회, 111개 분회에 교수 4백여 명을 포함, 1만 7천6백39명의 조합원이 가입을 마쳤”다고 보고했다.30 그러나 문교부는 강경한 탄압으로 일관하여 7월 3일, “전교조가입교원(교사·교수 등)에 대한 처벌 기준을 대폭 강화, 단순 가담 교원도 교원노조에서 탈퇴하지 않을 경우 파면 또는 해임토록 시·도교위에 지시했다.”31 문교부의 집계에 따르면 결성 이후 네 달이 지나지 않은 “21일 현재, 1만 1천77명이 전교조를 탈퇴했고 1천4백63명이 파면·해임·직권면직되어 교단을 떠남으로써 현직교사 가입자는 49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 그러나 전교조는 노조 가입 현직 교사가 49명이라는 문교부 집계에 대해 7월 말부터 20일까지 공개적인 탈퇴 무효 선언 5백54명, 신규 가입 1백34명 등 6백88명이라고 반박하고 해직교사 및 탈퇴서를 쓰고도 조합비(월 1만 원)를 내는 등 정상적인 조합 활동을 하는 교사들까지 포함하면 8천여 명이나 된다고 주장”32했다.

 

전교조의 창립과 함께 이를 지지하는 학생운동이 고교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되었고,33 한편으로 전교조의 운동 취지에 공감하며 탄압에 반대하는 학부모운동이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이하 참교육학부모회로 약칭)라는 기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89년 9월 22일에 참교육학부모회는 “교육 모순을 바로잡고자 떨쳐 일어난 선생님들과 함께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위한 참교육 운동에 적극 매진한다”는 내용의 「창립선언문」을 발표했다. 전교조 중심의 교사운동과 학부모운동의 이와 같은 연대는, 지향하는 교육이념이 동질적인 집단들 간의 연대만으로 보기보다는 교육의 정치적 종속과 같은 요인에 더하여 한국 교육현장에서 만성적인 고질적 문제로 유지되어 온 ‘촌지’와 같은 병폐를 척결하겠다는 전교조의 의지가 일반 학부모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참교육학부모회는 결성 후 반년도 지나지 않은 1990년 3월 초에 전국 1,900명의 학부모를 대상으로 ‘돈봉투에 관한 학부모의 의식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에 따르면, “교사에게 ‘촌지’를 준 경험이 있는 학부모는 1천1백65명으로 전체의 77.4%에 이르렀으며, ‘빈손으로 갈 수 없어 학교를 찾아가지 못한다’는 학부모도 44%나 돼 교육현장에 만연한 ‘검은 돈’의 심각성을 확인시켜 주었다.”34

 

전교조의 창립이 교육계에 가져온 파장 중에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오랜 기간 그 어용성을 비판받아 온 유일한 최대 교원단체 ‘대한교육연합회’가 전교조의 출현을 계기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로 이름을 바꾸고 획기적인 내부 개혁을 단행하는 등 변신을 꾀했다는 사실이다. 종래 교수, 교장, 교감 등이 독점해 온 지도부와 시·도 조직에 평교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또 문교부로부터의 재정지원 단절 등 독립성을 강화하는 등의 조직개혁 내용을 포함하는 변신이었다. 이 변화를 주도한 89년 11월 당시의 교련 회장 윤형섭은 “교련이 어용단체라는 질책을 받고 있지만 사실 어용을 한 것이 아니라 어용을 당했다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그러나 교련은 앞으로 ‘정치적 독립’을 이룬다는 목표로 부당한 외부 압력은 단호히 거부할 생각입니다”35라며 변화의 계기와 성격을 밝히기도 했다. 한국교총은 교원노조가 아닌 전문직 단체로서의 성격을 이후에도 견지해 나갔지만, 여하튼 종래의 ‘어용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전교조의 창립으로 인해 제공된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학교교육에서의 자유를 둘러싸고 국가권력이 교사에 대해 일방적으로 휘둘렀던 지배와 통제의 권력구도는 1989년 이후 더 이상 순조롭게 견지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전교조의 출범은 교원단체사만이 아니라 한국현대교육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전교조는 1990년 5월 말, 창립 1주년을 맞이하며 1천5백여 조합원 교사들의 일터와 맞바꾸어 이루어진 영향력으로, “학교 내에서는 물론 사회 여타 부문의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전혀 새로운 양상을 창출하거나 적어도 그러한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는 것, 그리고 구체적으로 “문교부가 내놓고 있는 갖가지 교육정책―교장임기제나 교육환경개선특별회계 신설, 교원지위향상을 위한 특별법 마련 등―이나 고교 학생회의 직선제 바람, 대한교련(교총의 전신)의 변신 몸부림 등이 전교조운동의 가시적 효과라면 각 학교 교무실의 분위기 변화, 학생·학부모들의 의식 고양 등은 손에 잡히지 않는 성과”라고 자평했다.36

 

창립 2주년이 되는 1991년에는 “단위학교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교조 조합원 및 후원회원) 교사가 대략 5만여 명으로 집계”되었다고 밝히고 “해마다 5천여 명씩 교단으로 진출하고 있는 신임교사들이 대부분 전교조를 지지·후원하고 있어 합법화가 안된다고 해도 4〜5년 안에 10만여 명의 조합원과 후원교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밝히기도 하는 등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37 그리고 1993년 10월에는 김영삼 ‘문민’정부 하에서 해직교사들의 복직이 본격화되었고 마침내 평화적 정권교체로 평가받는 김대중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1999년 7월 1일부터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이 발효되면서 전교조는 공식적으로 합법화되었다. 아울러 민노총 산하의 전교조와 병행하여 한국노총 산하의 교원노조로 ‘한국교원노동조합’도 동시에 출범하게 되었다.38

 

 

새로운 교육사의 시대로

 

20세기 말인 1999년에 전교조가 비로소 합법화되어 교원노조 활동의 합법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김대중 정권의 등장이라는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내용으로 하는 한국 정치 민주화의 결실로 평가할 수 있지만, 동시에 전교조를 중심으로 한 교사운동이 그러한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이는 20세기의 한국 사회가 산업화 이후 이루어낸 민주화라는 성과의 교육부문에서의 기여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이후 전개되는 또 다른 거대한 사회 변화가 새로운 교육사의 단계를 열어가게 된다.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적 이념 하에서 전개되는 세계화, 정보화 속에서의 교육 변화라는 다이나믹이다. 한국 교육의 제도와 정책, 그리고 교육 세계 안에서의 국가와 교사, 학부모, 학생 간의 역학 관계에도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과 국면이 전개되어 간다. 해방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노태우 정권 하에서 한국현대교육은 국가권력 대 교사·학부모·학생이라는 비교적 단순한 이항대립적 모순 구도가 오랜 기간 재생산되어 왔으며, 그에 대한 후자 쪽의 저항 과정에서 교사와 학부모·학생 간의 공감에 기초한 연대가 창출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이념이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영향력을 급격히 증대시키면서 교육 세계에서도 국가권력 대 교사·학부모·학생이라는 대립구도와는 성격을 크게 달리 하는 대립구도가 생겨나게 된다. 예컨대 ‘교원평가’라고 하는 90년대 후반에 등장한 교육정책은 종전과는 다른 교육주체들 간의 대립구도, 즉 ‘국가·학부모 대 교사’라는 구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거기서는 초기 전교조가 확보할 수 있었던 교사와 학부모 간의 연대는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아울러 교육자치제의 실현과 함께 국가권력 안에서도 중앙과 지방 간에 대립구도가 새롭게 형성되기도 하고, 교사집단 내에서도 정책 지향을 달리 하는 다양한 집단들 간의 분화와 대립이 생겨나기도 한다. 학부모 집단의 경우에도 물론 마찬가지다.

 

이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그러한 다원적 변화를 만들어낸 결정적인 계기는 1995년 문민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이른바 ‘5.31 교육개혁’이다. 해방 이후 20세기 말까지 한국교육계에서 여러 차례 ‘교육개혁’을 내건 개혁 시도가 간헐적으로 전개되어 왔지만, 그것들 중에서도 1995년의 그것은 한국현대교육사에 새로운 ‘구조적 변화’를 야기했다는 점에서 교육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난을 설정하여, 종래의 개혁 시도들로 어떤 것들이 있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1995년 문민정부 하에서 전개된 ‘5.31 교육개혁’의 특질과 그것이 이후 한국교육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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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敎師에 配當된 自由黨票」 『東亞日報』 1958.5.11.(5).
  2. 김진송 (2006), 『장미와 씨날코―1959년 이기붕家의 선물 꾸러미』, 푸른역사, 253쪽.
  3. 金種 「敎壇日記 <56> 賣國奴 시대 (2)」 『東亞日報』 1980.5.26.(4).
  4. 「郡敎育長이 與支援 강요」 『東亞日報』 1967.5.27.(7).
  5. 「一部市·郡職員을 國民投票 계몽원에」 『東亞日報』 1975.2.3.(7).
  6. 「敎師는 선거때 외롭고 괴롭다」 『東亞日報』 1975.2.7.(4).
  7. 「國民投票案 가결」 『京鄕新聞』 1975.2.13.(1).
  8. 大韓敎育聯合會 「大統領의 特別宣言에 따른 우리의 覺悟」 『朝鮮日報』 1972.10.19.(1).
  9. 「聲明書」 『東亞日報』 1980.8.20.(1).
  10. 김성학 (2004), 「해방직후 교원단체의 등장과정과 활동을 통해 본 식민지 교육경험의 지속과 변동」, 『교육사회학연구』, 14(2), 48쪽.
  11. 「文敎部 방학책 없어진다 79學年부터」 『東亞日報』 1977.8.24.(7).
  12. 「敎權확립운동 속의대책회의 안팎 陣痛겪는 ‘敎聯’」 『京鄕新聞』 1971.8.30.(5).
  13. 「敎聯, 文敎部監督下에」 『東亞日報』 1976.9.29.(7).
  14. 「돗자리 醜聞」 『京鄕新聞』 1981.9.5.(2).
  15. 김병옥 (2006),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부장관 48인論」, 『新東亞』, 6월, 241쪽.
  16. 「747萬원 짜리 병풍 全前대통령에 선물」 『東亞日報』 1988.10.7.(15).
  17. 대한교련40년사편집위원회 (1987), 『大韓敎聯40年史』, 대한교육연합회.
  18. 「책이야기 전환시대의 논리」 『한겨레신문』 1990.6.7.(7).
  19. “85년 고려대 석탑 축제 때 <오, 광주>와 광주항쟁 직후 일본교회협의회서 만든 일본어판이 상영됐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기점으로 광주에 관한 영상기록물들이 각 대학의 집회와 축제에서 상영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다큐멘타리들은 미국, 일본, 서독, 영국 등 외국에서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뉴스의 화면을 녹화하여 편집한 것들이다. ··· 85년 5월부로 서울, 부산, 광주, 수원, 인천 등 전국 곳곳의 성당에서 개최된 ‘광주사태비디오·사진전’에서는 이같은 기존 자료 외에 천주교 광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제작한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이 소개됐다. 상영시간 70분, 독일국영 제3방송, 일본 NHK, 미국 CNN, 영국 ITN 등에서 방영된 필름들과 기존 자료들을 재편집하고 한국어 해설을 새로 넣어 만들었다.” 「‘광주항쟁’ 바로 알고 싶다」 『한겨레신문』 1988.12.10.(7).
  20. 전국교직원노동조합(편) (1990), 『한국교육운동백서 1978-1990』, 풀빛, 21쪽.
  21. 전국교직원노동조합(편) (1990), 『한국교육운동백서 1978-1990』, 풀빛, 37-38쪽.
  22. 전국교직원노동조합(편) (1990), 『한국교육운동백서 1978-1990』, 풀빛, 49쪽.
  23. 전국교직원노동조합(편) (1990), 『한국교육운동백서 1978-1990』, 풀빛, 51-52쪽.
  24. 전국교직원노동조합(편) (1990), 『한국교육운동백서 1978-1990』, 풀빛, 96-97쪽.
  25. 「여기가 바로 ‘敎員情報部’」 『東亞日報』 1988.10.6.(3).
  26. 「柳根一칼럼 ‘大兄은 보고 있었다’」 『朝鮮日報』 1988.10.16.(5).
  27. 「고교교사 국립대학에 ‘교육연구사’로 67명 배치 운동권 동태 보고 등 학원사찰」 『한겨레신문』 1988.10.22.(11).
  28. 「사설 ‘선생님’을 첩자로 만든 교육계」 『한겨레신문』 1988.10.27.(6).
  29. 전국교직원노동조합(편) (1990), 『한국교육운동백서 1978-1990』, 풀빛, 348쪽.
  30. 「전교조 임시집행부 구성」 『한겨레신문』 1989.6.13.(10).
  31. 「단순가입 교사도 파면·해임」 『경향신문』 1989.7.3.(15).
  32. 「全敎組현황 ‘49명 잔류’」 『京鄕新聞』 1989.9.21.(3).
  33. 「고교생 2천여명 농성」 『한겨레신문』 1989.8.29.(9).
  34. 「학부모77% ‘교사에 돈봉투 줬다’」 『한겨레신문』 1990.3.3.(10).
  35. 「어용탈피 체질개선 안간힘」 『東亞日報』 1989.11.22.(17).
  36. 「전교조 1년 <2> 교육계·사회에 남긴 변화 물결 교무회의 공개토론 일상화」 『한겨레신문』 1990.5.27.(5).
  37. 「현직교사 활동공간 마련 성공 전교조결성 2주년」 『한겨레신문』 1991.5.23.(7).
  38. 「내일 2개 교원노조 정식출범 전체교원 20%線 가입」 『朝鮮日報』 1996.6.30.(29).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식민교육사 및 교육역사사회학, 동아시아근대교육의 비교사회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교육과학사, 2000),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서해문집, 2018), 역서로는 야나기 하루오의 『학급의 역사학』(교육을바꾸는책, 2026), 가리야 다케히코의 『대중교육사회의 형성』(학지사, 2023), 고마고메 다케시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공역, 역사비평사,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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