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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편집실 논설] 대입제도 개편은 제대로 준비 안 된 채 시작됐다

#1581 편집실, <교육 제4의 길> 편집진 2026.08.20
정부가 대입제도 개편에 돌입했지만, 관변의 최근 발언이나 발표에서 그 지향 자체의 중대한 결함을 보게 된다고 지적한다. 대입제도의 고부담 속성을 ‘혁신’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발상은 반(反)교육적이라 비판한다. 이대로 가면 이번 개편은 성공이 곧 실패인 역설을 낳으리라 경고한다.

 

 

정부가 대입제도를 바꾸는 데 달려든 모양이다. 교육부와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가 지난 8월 5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그 뜻을 밝혔고, 대통령도 인공지능 시대에 ‘5지 선다형 시험’이 적절하지 않다는 취지로 수긍했다고 한다. 국교위에서는 내년 3월까지 ‘개편안’을 확정하겠다고 일정도 못 박았다. 제도에 얽힌 변수가 매우 복잡하고 관련된 기초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임을 감안하면 무리한 계획이다. 어디에 믿는 구석이 있는지 모르지만, 국교위 위원장은 우려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확고하게 자신감을 내비친다고 한다.

 

 

정부가 대입제도를 개편하려는 이유

 

국교위는 대입제도를 바꾸는 첫 절차로 ‘대국민 숙의·공론화’를 시작했다. 개편에 대하여 어느 정도 복안이 섰다는 뜻이겠다. 지난 11일 인천에서 ‘현장 토론회’를 열었는데, ‘인사 말씀’에서 위원장은 대입제도 개편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개편안은 어떤 지향에서 구상할지 밝혔다. ‘보도 참고 자료’에 따르면, 그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학생들이 미래 사회에 필요한 핵심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서는 교육과정, 교수·학습 방법 등 교육 전반의 혁신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혁신은 대입제도와 연계되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인사치레로 듣고 흘려도 그만인 말일 수 있다.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나 시중에서나 흔히 떠도는 언사이다. 그렇지만 이젠 그런 말이 정책과 제도로 번안되고 우리 교육을 오랫동안 구속할 참이다. 적어도 교육을 걱정한다면, 위원장의 발언이 무엇을 뜻하는지, 과연 대입제도가 그런 뜻대로 개편되어도 괜찮을지 엄밀히 검토하고 견제해야 할 것이다.

 

논리를 따라 해체해 보면, 국교위 위원장의 위 발언은 세 개의 생각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이 이면(裏面)의 생각이 합당하지 못하다면, 대입제도 개편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이는 꼴이다. 각각을 검토하기 쉽게 명제로 잘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① 교육은 “미래 사회에 필요한 핵심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② 우리 교육은 그런 지원 역할을 충실히 해내지 못하고 있으므로 “교육과정, 교수·학습 방법 등 교육 전반의 혁신이 필요”하다.
③ 교육 “혁신은 대입제도와 연계되어야” 한다.

 

암묵적이지만 위와 같은 생각은 국교위 위원장만 갖고 있는 건 아닌 듯하다. 비슷한 발언은 대통령 업무보고나 국회 교육위원회의 질의 같은 자리에서도 있었다는데, 그 함의(含意)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더 깊이 따져 묻는 사람은 없었던 듯하다. 위원장의 언사에 대해 언론이나 교육계에서도 특별히 토를 달고 있지 않다. 정부에서 대입제도 개편의 신호가 나온 뒤 시중의 이야기들은 개편안의 구체적인 향방, 즉, 대입 사정(査定)이 무엇을 근거로 어떤 방법과 절차를 따라 이루어지게 될지에 쏠려 있다. 국교위 위원장도 인사말을 쓰면서 암암리에 자신이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지 의식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우리 사회의 상식을 인사에 담는다고 여겼을 듯하다.

 

국교위 위원장의 발언은 대중의 묵인을 얻고 있는 시쳇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대입제도 개편에 들어서며 첫 토론회를 여는 발언이었다. 설사 말하는 사람은 의미를 크게 두지 않고 무심히 뱉었던 인사말이었더라도, 세심히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그러려니 듣고 흘려버려선 안 될 모난 ‘상식’을 담고 있다. 신뢰할 만한 교육 연구와 논의 결과에 비추어 보면, 위원장의(정부의 것이라 해석해도 될) 상식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런 상식의 바탕에서 대입제도가 개편된다면 학교 교육에는 큰 불행일 수 있다.

 

 

교육은 미래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보험인가?

 

OECD와 같은 국제기구들이 내놓는 문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교육을 ‘미래 핵심역량’을 키우는 일로 여기는 정책 행태는 ‘지구적으로’ 유행이다. 그러나 광범한 유행성이 ‘역량 중심 교육’의 일리를 뒷받침해 주지는 못한다. 그런 유행 풍조에서는 교육 이야기는 종종 미래 사회가 ‘불확실하다’며 시작한다. 그런데, 불확실성을 강조해 놓고는 바로, 앞뒤 안 맞게, 미래에 대비할 핵심역량이 어떤 것들인지 적시하는 데는 거침이 없다. 그 역량들을 키우기 위해 교육을 이렇게 저렇게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서도 확신에 차 있다. 어디서 오는 논리이고 신념인지 알 길 없지만, 그야말로 자가당착의 행태이다. 비유컨대, 목적지를 모르더라도 그곳을 향하여 걸어갈 수는 있다는 식이다.

 

모순적인데도, 지구적인 유행이어선지, 우리도 따라서 법석대고 있다. 미래 사회를 헤아리기 어렵다면서도(특히,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달로 미래가 더욱 불확실하다면서도), 알 수 없기에 더욱 다급히 대응해야 한다고들 힘준다. 특히 정부 주변에서 소란스럽다. ‘불확실한 미래 사회에 대한 대비’라는 어구는 이제 관변 자리에서마다 들먹여야 할 관용어이다. 그러나 이 말은 뜯어볼수록 논리가 희한하다.

 

미래 사회는 ‘불확실성’에 갇혀 있어서 미리 그려볼 수 없단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미래는 ‘결정된’ 상태에 있다. ‘결정되어 있다’ 대놓고 언명하진 않지만, 미래 사태에 적응하기 위한 역량을 도출할 수 있다니 결정되어 있다고 전제하는 셈이다. 그렇지 않다면 역량 도출이 불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면 우리는 거기에(적응을 시작하게 될 미래 사태에) 진입하게 되리라고 상정한다. 교육은 바로 그 결정된 미래에 적응하는 데 쓸모 있으리라는 핵심역량을 키우는 일이라는 게 미래 관련 언사들의 골자이다.

 

그러나 말 그대로 미래(未來)는 아직 오지 않은 때이다. 오지 않은 ‘현실’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상정은 가히 초월적이라 하겠다. 어떻게 성립되는 말인지 짐작할 길 없다. 실제를 운위하는 게 아니라 비유를 구사하고 있다고밖에 달리 이해할 길이 없어 보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미래는 생겨난다.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고 말해야 더 적절할지 모른다. 그 상태를 앞서 점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현재’ 우리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결정이 그 ‘생겨남’을 시나브로 구체화하고 있을 뿐이다.

 

흔히 듣게 되는 인공지능 이야기에 빗대 보자. 그것은 사람의 직업을 대부분 앗아갈 것이고 그런 실직 사태가 일어나기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들 난리다. ‘인간 고유의 역량’을 키워 몰려오는 AI에 대적해야 한다며 다급히 ‘혁신’을 외친다. 국교위 위원장의 발언도 그 통속이다. AI의 직업 침식이 심각하고 그런 ‘AI 대전환’에 대비할 시간이 진정 부족하다면,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 개발의 속도를 늦추고 ‘일의 미래’와 인류의 삶이 어떻게 될지부터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유예의 단안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고, 미래의 공포가 다가오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들 낙망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소동들이다. 정부는 인공지능 ‘스타트업’을 막대하게 지원하고, 전기와 물 부족을 걱정하면서도 이곳저곳에 ‘데이터센터’를 짓겠다고 허둥대고 있다. 일을 차분히 진척시키면 미래 불안도 누그러지고 미래로의 진전도 더 안전해질 수 있을 듯한데, 이렇게 자명해 보이는 대안이 정책의 맥락에서는 선택지로 거론되지도 않는다. 늦으면 처진다는 우려 때문일 수 있겠다 싶기는 하다. 이를테면 ‘인공지능 세계 3강’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조바심이 대입제도 개편까지 흔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한국이 세계를 주도할 수 있기 전까지는(그럴 때가 올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우리 교육은 계속 선두에 따라붙기 위한 ‘역량 중심’ 프로그램에 매달려야 한다는 뜻인가? 그러는 동안 우리 교육의 의미는 ‘세계 랭킹’에 부수되는 가치로밖에 달리 규정될 길이 없는가? 으레 하는 말처럼 교육이 사람됨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에게 ‘사람됨’을 정의할 자주의 여지도 없다는 뜻인가? 미래 사회와 교육을 엮어 내뱉는 상투어에는, 안타깝고 섬뜩한, 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교육관이 들어 있다. 대입제도 개편에도 그런 교육관이 잠입할 듯하다.

 

 

교육을 혁신할 이유는 교육 밖에서 찾아야 하는가?

 

교육과정이나 수업 그리고 평가 등이 ‘역량 함양’과 같은 외현적인 ‘목표’를 겨냥하여 조직 동원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국교위 위원장의 발언에 함축되어 있지만, 마냥 용인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아이디어는 1940년대 이후 부각하여 ‘목표’ 중심의 시각이라 정리되기도 하는데, 오늘날까지 줄곧 쟁론에 붙들려 있다. 이를테면 교육이 ‘인재 양성’이란 기치 아래 모인 정책들은 그런 시각이 변주해 낸 것으로, 지금 추세에선 비판의 여지를 벗어난 대세에 있다고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대중 인지와는 다르게, 적어도 학구적인 맥락에서는, ‘내용’을 핵심에 두는 대척 담론이 그런 ‘대세’에 팽팽하게 맞선다.

 

이 비판론에 따르면 교육은 인간다운 삶의 양식으로 들어가는 ‘성년식’이다. 교육은 교과에 내재한 안목 또는 지식의 형식을 학생에게 전수하는 것으로, 그 과업에 교과를 벗어나 달리 ‘목표’를 두어야 할 이유가 없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외견상 평가인 활동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달성도를 판정하려는 게 아니다. 가르침과 배움의 궁합과 그 도정(道程)의 위치를 살피는 성찰이다. 물론 제도상으로는 성취도를 매기는 총괄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용 본위의 입장에 선다면, 그런 평가에서도 결과를 토대로 목표 달성 여부를 운위할 이유가 없다. 교육은 [시험으로 달성도를 가늠할 준거가 되는] 목표를 겨누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보면, 목표 설정에서 시작하여, 설정된 목표에 비추어 성패가 평가될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게 바로 교육이라고 여기는 목표 중심의 교육관은 내용을 중심에 두는 교육관을 전도(顚倒)한 것이다.

 

목표를 앞세우는 교육관에 따르면, 내건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평가’되면 교육은 어쨌든 성공이다. ‘점수’가 결론이다. 이를테면, 수능에서 만점을 얻었다면 그 만점자에게 공교육은 ‘완전한’ 성공이다. 과연 그런가? 따지고 들면 흔쾌히 ‘그렇다’ 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능 성적이 ‘교육’ 성취의 일부에 불과할 테기 때문이다. 인지적인 측면의 교과 학습에만 한정해 생각하더라도 수능이란 평가가 ‘부분’에 그치지만, 덕성이나 정서 그리고 체육 등의 측면까지 포괄해 고려한다면, 교육상 수능 점수의 의미는 더욱 왜소해진다.

 

요컨대, 교육목표나 그 달성도를 추정하려는 평가(시험)의 항목은 교육 내용이 생겨날 때 전제되었던 ‘교육 이상(理想)’이란 궁극의 전집(全集)에서 끌어내는 표집(標集)일 수밖에 없다. 그 표집에서 얻어낸 증거로 전집의 실재를 가늠하려는 시도는 그야말로 맹인모상(盲人摸象)의 우화 꼴이다. 교육을 목표 본위로 규정하려는 입장에서는 바로 이 곤란한 국면에서 교육 내용에 이미 실려 있는 내재가치를 방기해버린다. 내용은 오직 목표의 수단으로만 의미를 지니도록 뒤집은 것이다. 상품을 생산하는 공정과 마찬가지로, 교육은 목표를(산물을) 설정하는 데 따라 달라지게 되는 공학적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교과의 가치도 그런 프로그램의 부속으로써만 인정된다. 지금 정부는 바로 이런 생각으로 대입제도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입시의 구속력이 교육 혁신을 끌 동력일 수 있는가?

 

국교위 위원장은 끝으로 교육 혁신을 “대입제도에 연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학교 교육이 대입제도에 휘둘리는 현실을 보며 떠올린 생각인 듯하다. 대입이라는 강력한 제도의 고삐로 교육을 틀어쥔다면, 어떤 ‘혁신’ 목표이든 쉽게 관철할 수 있으리라 착상한 것이다. 일상에서 확인하듯, 대입에서 성공 지표(이를테면, 수능)는 교수 학습을 좌지우지한다. 그런 구속력을 지닌 장치에 ‘혁신’의 속내를 내장시킨다면 학교 현장은 쉬이 속내대로 돌아가리라 기대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고부담 평가’로 교육 현장을 장악하겠다는 ‘묘안’이다. 이것은 뒤집어 보면 결국 ‘입시 위주’ 교육을 조장하려는 음험한 발상이다. 입시 위주 교육은 대입제도가 ‘고부담’이 되면서 낳게 되는 ‘부작용’이라 문제 삼아야 마땅한데, 국교위 위원장은 그런 부작용을 혁신이 먹히는 징후라고 왜곡 해석할 참인 것이다.

 

198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신자유주의 풍조가 부상하고 교육의 ‘책무성’을 따지는 기류가 발달했다. 개인(학생, 교사 등)이나 교육 프로그램 또는 조직(학교, 교육구 등)을 평가하여 보상하거나 벌하기 위한 시험들이 널리 제도화되었다. 이때 동원된 시험의 수단은 당사자들에게 당연히 큰 부담이었다. ‘고부담 시험’은 예민한 정책 의제로 떠올랐다. 그런 시험(평가)이 과연 책무성이나 성취도를 높이는지, 제도화에 따른 부작용은 없는지 논란하게 된 것이다.

 

일단 도입된 제도들이 굳어져 오늘날까지도 힘을 발휘하고 있는 만큼, 지금도 그런 시험을 둔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그 결론 역시 단일하거나 일방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고부담 시험이 교육을 왜곡하고 타락시킨다는 사실에 이의는 거의 없다. 그런 지적은, 이를테면, ‘시험 본위 수업(teaching to the test, TTT)’이나 ‘캠벨의 법칙(Campbell’s Law)’과 같은 이름으로 일반화되고 있다. 그런 시험에 의지하는 결정들(입시 당락 사정, 보상금 차등 지급 등)에 대해서도, 또한, 다른 자료나 증거들로 보완되지 않는다면 부당해진다는 데도 큰 이견이 없다.

 

고부담 시험에 대한 경계(警戒)는 교육정책에서 반영해야 마땅한 조건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과 같은 데서는 학부모들까지도 그런 시험을 시행하는 제도에 조직적으로 저항한다. 고부담 시험으로 교육의 본연을 훼손하지 말라고 비판하며, 시험 날 자녀들 등교시키길 거부하기까지 한다. 이와 같은 경계나 저항의 움직임을 우리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우리가 일상으로 겪고 있듯이, 고부담 시험의 폐해는 다른 어느 나라에 못지않게 막대하다. 더욱이 대입제도는 가장 직접적으로 고부담 시험 이슈를 폭발시킨다. 그런데도, 앞에서 거듭 확인했듯이, 최근 정부의 제도 개편 움직임에는 고부담 평가의 폐해에 주의(注意)하는 기미가 전혀 없다.

 

이미 지적했듯이, 국교위 위원장은 오히려 고부담 시험을 적극 활용하겠다고 공언했다. 교육 혁신을 대입제도에 연계해야 마땅하다고 힘주어 주장했다. 입시의 고부담 속성을 이용하여 교수-학습과 같은 교육 실천의 양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바꾸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변화 촉발을 그는 혁신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다. 수능과 같은 고부담 시험의 위력은 워낙 강하다. 그런 시험이나 평가 도구로 고삐를 틀면 학교 교육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거듭 말하거니와, 그때 변화는 혁신이 아니다. ‘입시 위주 교육’이라는 부작용일 뿐이다.

 

 

서·논술형 시험을 개편의 중심에 둔다면 반(反)교육적이다

 

이런 지적에 대해 국교위는 서·논술형 시험의 경우를 들어 반박할 듯하다. 첫 토론회 자료를 보면, 그 자리에서 국교위 측은, 이번 대입제도 개편으로 근본적인 교육 혁신을 노리고 있다고 띄운 듯하다. 자료가 간략해서 발표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짐작건대 이를테면 “표준화•암기 중심 교육”에서 벗어나 “창의성•비판적사고•융합 역량”을 키우는 ‘패러다임 전환’ 수준의 혁신을 기대한다는 식이다. 이어서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에서 활동하는 한 인사의 발표에서는 ‘AI 기반 서·논술형 평가’의 가능성을 설파한 듯하다.

 

두 발표를 연결해 짐작해 보면, 요컨대 대입제도 안의 평가 양식을 바꾸어 교육 혁신을 이끌겠다는 의도를 밝혔고, 그런 ‘혁신’을 위한 평가 양식의 변화는 ‘AI 기반’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고 장담한 것으로 보인다. 토론회 전에 알려져 있었던 것처럼, 국교위는 서·논술형 시험을 대입제도에 끼워 넣을 요량을 지니고 있다. 이 생각대로 된다면, 이제까지 ‘선다형’ 문제가 이끌었던 ‘단순 지식’ 위주의 수업을 벗어나게 된다고 계산하는 것이다. 학교 수업이 서·논술형 시험 준비로 바뀌면서, ‘비판적 사고와 표현 역량’을 키울 ‘미래 지향의 패러다임’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물론 서·논술형 출제에는 채점 공정성 등의 난관이 있었는데, 이제 AI가 도와줄 터라 이 문제도 풀렸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토론회 시나리오는 국교위 위원장의 인사 말씀에 함축된 교육관과 대입제도(고부담 평가에 대한) 인식과 궤를 맞추고 있다. 요컨대, 국교위를 비롯한 정부는 대입제도에 담기는 수능이나 다른 평가 요소들의 양식을 바꾸어 한국 교육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루겠다고 꿈꾸고 있다. 국교위 위원장의 말과 발표 슬라이드를 다시 인용하면, ‘일방적 주입과 단편적 암기 위주’라고 거듭 비판 받아온 “교육과정, 교수·학습 방법 등 교육 전반”의 실상을 ‘고부담 평가’를 동원하여 혁파하게 되리라고 전망하는 것이다. 이런 부푼 구상은 안타깝게도 얼마 못 가 물거품이 될 것이다. 그것은 더 근본적으로 제기했어야 마땅한 질문을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짚어본 대로, 국교위는 대입제도가(특히, 고부담 시험이) 학교 교육을 뒤흔드는 힘에 매료되어 그 힘을 써먹을 궁리에 몰두했다. 표적을 바꾸어 공정(工程)을 틀어야 하는데, 수능과 같은 위력적인 시험이면 충분한 수단이 되리라 여겼을 테다. 수능은 학교 수업이란 공정에 대해 최우선의 표적이 될 뿐만 아니라, 그 고부담 속성이 지닌 인력으로는 공정의 흐름을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 설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목표-수단을 접합하는 공법의 아이디어에도 교육에 대한 모종의 상정이 스며있기 마련일 텐데, 국교위는 이에 대한 검토를 간과했다. 상정될 것이 달리 없고, 목표와 수단이 교육의 모든 것을 규정한다고 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교육은 내용 본위로 진화해 왔다. 교육이 어떤 모습을 취한다면 그것은 내용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육 밖에 ‘목표’를 세울 수 있고, 그것을 교체할 때마다 그에 맞춰 내용을 갈아 끼우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육’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은, 내용 본위로 생각할 때 교육 이야기가 아니다. 내용을 바탕에 두는 전통적 교육관에서 보면, 국교위의 발상에 담긴 ‘교육’은 교육에 대한 것이 되지 못한다. 물론, 모든 개혁 시도가 전통적 교육 의미를 반드시 존중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개혁의 이름으로 새로운(대안적인) ‘교육’을 내세우려면, 일차적으로 그 대안이 어떤 전거(典據)에 대해 성립하는지 검토해야 마땅하다. 새로운 시도가 전통의 교육관과 어떻게 갈등할지 살피며, 전통을 버리는 데 따라오는 ‘기회비용’이 얼마일지 따져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생략하면 그만큼 새로운 대안 선택은 부실한 결정이 된다. 지금 대입제도 개편 시도는 바로 이 점에서 치명적으로 부실하다.

 

결국 현재 추진하는 개편은 ‘성공이 곧 실패’인 역설을 낳을 위험이 있다. 대안의 가능성(개편으로 기대하는 ‘패러다임 전환’)에 취하여, 정책 결정자들은 그 대안이 반교육적일 수 있는 위험을 살피지 못했다. 만약 전통적인 교육관이 목표 중심의 대안적 교육관으로 대체되지 말았어야 한다고 결론짓게 된다면, 이번 개편이 어떤 효과를 내더라도 그것은 교육이 아닌 효과가 된다. 이 글 내내 시사해 왔듯이, 목표를 내세우거나 평가를 수단으로 삼는 교육 혁신 시도는 교육의 본연을 훼손하기 십상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교육부와 국교위를 비롯한 정책 주체들은, 대입제도의 힘에 열광하지 말고, 대입제도의 힘이 어떤 ‘교육’을 빚을지 우선 숙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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