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바꾸는사람들

칼럼 검색
칼럼 모아보기
ERICK squareal Research & Innovation Center of Korea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20) – “1980년대의 학교교육”

#1550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2026.07.01

1980년대는 전두환 신군부가 7·30교육개혁과 국민윤리 교육을 통해 학교를 통제하려 했으나 오히려 8학군 형성 등 의도치 않은 결과와 군사문화적 규율에 대한 저항을 낳으며 교육민주화운동의 토대가 된 시기입니다.           

 

 

서울의 봄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의 사망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거대한 변화의 계기가 찾아왔다. 시해 사건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에 오른 최규하 국무총리는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개헌을 약속하며 ‘위기관리’ 역할을 자임했으나 유신헌법을 폐지하고 대통령직선제를 실현하지는 못한 채로 1980년을 맞이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종식으로 새로운 민주적 정치체제가 성립할 가능성이 열렸지만, 또 다른 군부 쿠데타와 권위주의적 독재체제의 성립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1980년 초에 전자는 ‘서울의 봄’이라는 말로 회자되는 거대한 민주화의 물결이 되어 나타났다. 교육 영역에서도 유신 체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미 79년 12월 4일에 서울대학교는 기존의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회를 부활시키기 위한 학칙 개정 의지를 표명했고,1 문교부도 12월 12일에 초중고교 교과서에서 유신체제 관련 내용을 제외하여 가르칠 것을 일선 교사들에게 지시했다.2 최규하 정권의 내각에서 문교부장관이 된 이화여대 총장 출신 김옥길은 중고교생의 교복과 교모, 머리모양 등을 학교장 재량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하겠다는 등 교육행정의 ‘자율화’를 표방했다.3 이런 ‘갑작스런’ 방침에 놀란 한 사립여고 교장은 ‘교복을 자율화하라고 했으면 지침을 주셔야지 그냥 지시만 하면 어떡하느냐’고 장관에게 항의하기도 했다.4 그만큼 유신시대의 학교는 중앙집권적, 권위주의적 풍토에 길들여져 있었다.

 

최규하 정권의 우유부단함을 보여주듯이, 1980년 2월 15일 국무회의에서는, 학도호국단은 존속하되 간부 선임을 임명제에서 선거제로 바꾸고 군대식 편성을 학과 또는 학년 단위로 편성하며 사단장, 연대장 등의 호칭을 총학생장, 학생장 등으로 개칭한다고 하는 어중간한 절충적 「학도호국단설치령개정령」을 의결했다.5 그러나 그 정도의 개편으로 교육계의 민주화의 열망을 채울 수는 없었다. 서울대는 학도호국단 관련 조항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학칙을 개정하기로 독자적으로 결정했고 이런 폐지 방향에 전국 9대 국립대학도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6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전두환 등이 이끄는 신군부세력이 은밀히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했다. 계엄령 상황 속에서 시민들은 어둠 속에서 전개되던 이런 권력구도의 변화를 거의 알 수 없었다. 신군부세력은 1980년 5월 17일에는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통해 국회를 무력화하고, 정치인들을 체포, 연금하는 한편, 전국의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면서 정치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로서 짧은 ‘서울의 봄’은 끝나는 듯 했지만, 그에 대한 끈질긴 저항이 광주에서의 ‘5·18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결국 무참한 피의 학살로 종결되었다.

 

1980년 5월 31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정점으로 하여 입법·사법·행정의 삼권을 사실상 장악하는 초헌법적 통치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가 결성되었다. 국보위 설치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하루 전인 5월 16일에 처음 제의가 됐고, 5월 21일에는 설치 요강이 마련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집요한 압력에 굴복해 국보위 설치를 재가했다. 국보위 의장은 형식상으로는 최규하 대통령이었지만 핵심은 상임위원회에 있었고 그것을 전두환이 맡았다. 국보위는 상임위 산하에 13개 분과위원회를 두어 행정부의 각 부처들을 장악하고 통제했는데, 전두환이 9월 1일 11대 대통령에 취임한 뒤 10월 27일에 해산되었고, 그 뒤로 ‘국가보위입법회의’가 발족하여 1981년 3월에 제5공화국이 출범할 때까지 존속했다.

 

국보위의 가장 주된 역할은 새롭게 등장한 신군부세력의 정권 인수를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그 작업들이란 ‘권력형 부정축재자’ 재산 몰수 및 고위공무원 숙정, ‘사회악 일소특별조처’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5만 7천5백61명에 달하는 민주인사 검거, 3만 8천2백59명에 달하는 이른바 ‘삼청교육대’ 조치, 그리고 언론통폐합 등이었는데,7 그것들 중에는 교육에 관련된 것들로 대학 ‘졸업정원제’와 ‘본고사 폐지’ 및 ‘고교내신제’, 과외 전면 금지와 교육방송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는 ‘7·30교육개혁’ 조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7·30교육개혁

 

전두환의 국보위는 산하에 1980년 6월 5일, 문교공보분과위원회를 두어 문교 및 언론에 관련된 조치들을 강구하게 했다. 문교공보분과위원회는 오자복(吳滋福) 육군소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실무자 1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중 문교 관련 위원은 5명 정도였다.8 이 위원회에 내려진 전두환의 특명 중 하나가 ‘과열 과외 등 비뚤어진 교육풍토 쇄신’이었다.9 ‘과열 과외’ 문제는 “1980년 당시 과외를 받던 학생은 150만 명으로 초·중·고 학생 총수인 980만 명의 15.3%”에 달하여 “국민학생의 12%, 중학생의 15%, 고등학생의 41%가 과외공부로 시달렸고, 학부모의 과외비가 연간 3300억 원으로 추산”10될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문제 하나만 잘 해결해도 새 체제의 통치능력은 충분히 인정받게 될 것이라는 자평의 소리까지 개혁 주도세력 내부에서” 나올 정도로 과외 문제는 신군부 세력에 의해 중시되었다.11 이 문공분과위에 의해 7월 30일에 발표된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해소방안’이 후일 ‘7·30교육개혁’ 조치로 일컬어지게 되는 매우 급진적인 개혁 조치였다.

 

‘재학생의 학원 수강 및 과외 금지’를 전면에 내세운 ‘7·30교육개혁’ 조치는 크게 다음과 같은 개혁 조치들을 담고 있었다.

 

1) 1981학년도부터 대학 입학 본고사를 폐지하고 출신 고등학교의 내신성적과 예비고사 성적만으로 대학 입학자를 선발한다.
2) 고등학교 이하 각급학교의 현행 교과목 수를 줄이고 또 그 수준도 낮추는 방향으로 교육과정을 조정한다.
3) 대학 졸업정원제를 실시하여 신입생은 정원보다 일정수를 더 입학시키되 졸업은 인가 정원수로 시킨다.
4) 대학의 강의를 하루 종일 개설하여 대학의 시설과 인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전일제 수업을 시행한다.
5) 대학 진학의 문호를 넓히기 위해 대학 입학 인원을 연차적으로 대폭 확대하며 81년에는 최고 10만 5천 명까지 증원할 것을 검토한다.
6) 현행 ‘TV가정고교방송’의 운영을 개선하여 방영 시간과 대상 과목을 늘리는 한편 81년부터는 교육 전용 방송을 실시한다.
7) 방송통신대학을 확충하고 교육대학의 이수 연한을 연장한다.12

 

이 개혁 방안들은 모두 새롭게 전두환의 국보위에 의해 구상된 것들은 아니었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박정희 정권 말기 혹은 최규하 과도정권 하에서 교육계나 혹은 정치계에서 제안된 것들이기도 했다. 예컨대 1977년 7월 23일, 문교부는 ‘재수생 문제 해결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해 대학 정원을 81년까지 매년 12.5%씩, 그리고 전문학교―79년부터 전문대학으로 개칭―는 매년 18%씩 늘린다는 방침을 발표했다.13 고등교육기관 입학 정원의 대폭 확대는 1978학년도 대학 입학 정원 조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미 1977학년도에 대학학생정원령 시행 이후 사상 최대 규모인 5,195명을 증원한 바 있던 문교부는 1978학년도에는 전년도의 2배에 가까운 10,660명을 증원하였다.14 또 대학 신설이나 승격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종전의 입장을 바꾸어 1979년에 3개 대학이 신설되고, 4개 대학의 분교가 설치되고, 6개 초급대학과 1개 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되었다.15 한편, 재수생 종합대책에는 포함되어 있었으나 여건 조성의 미비로 시행이 미뤄지던 졸업정원제 또한 1980년 3월 초에 ‘정부시책평가교수단’에 의해 다시금 제안되는가 하면,16 5월 초에는 당시의 공화당 총재 김종필에 의해 과열 과외 해소 방안의 하나로 ‘대학 정원을 시설만 갖추면 거의 무제한으로 늘려 문호를 넓히는 문제’와 ‘대학 졸업정원제의 실시 여부’가 검토되고 있다는 입장이 피력되기도 했다.17

 

그러나 전두환의 국보위 이전까지 누구도 ‘재학생 과외와 학원 수강의 전면 금지’라는 파천황(破天荒)적인 조치에 돌입한 적은 없었다. 이 파격적 조치는 ‘과열 과외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을 받아 긍정적인 반응’18을 당장에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일선학교 현장에서도 일단은 ‘정상화’라 평가할 만한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언론은 연이어 보도했다. 『동아일보』의 1980년 9월자 기사는 그 한 예다.

 

‘7·30교육정상화방안’이 발표된 이후 그동안 국어 영어 수학 등 ‘대학입시 위주’의 고교 교육은 ‘인간 위주’의 전인교육으로 탈바꿈, 학교의 수업 분위기가 정상화되는 방향으로 크게 좋아졌다. 또 과외 철폐로 인해 입시학원가에는 재학생들의 발길이 뚝 끊긴 반면 도서관은 몰려든 학생들로 연일 초만원을 이뤄 새로운 면학 풍속도를 나타내고 있다. 과외됫바라지에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 심신까지 시달렸던 학부모들은 과외 노이로제에서 해방됐고 학생들은 과외 대신 도서관 출입과 TV 학습을 통해 실력 향상에 열중하고 있다. 이와 함께 대학 본고사 폐지 대신 출신 고교 내신성적 반영률이 높아지면서 최근 농촌 학생들의 도시집중이 둔화된 반면 오히려 도시 학생의 농촌 역류 경향이 두드러지는 등 과외 폐지 이후 색다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19

 

그런데 이상과 같은 ‘정상화’ 효과만이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엄격하게 단속하겠다는 방침에도 불구하고 과외가 근절되지는 못했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불법 과외로 적발되어 징계된 사례가 ‘과외교습자 형사입건 263명, 과외교습 학부모 면직 149명, 과외 학생 정학 643명, 과외 관계 세무조사 407명’20이라고 보도되기도 했지만, 8년 동안 이루어진 불법 과외가 이 정도에 그쳤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상상할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동원한 과외들까지 등장했다. 1985년 기사에 따르면,

 

과외교사가 직접 나서는 대신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된 비디오 과외가 있는가 하면 고속도로를 서행하면서 승용차 속에서 과외를 하는 이른바 드라이브 과외도 등장하고 있다는 지적들이다. 또 인적이 드문 해변가나 심산의 콘도·별장이나 외딴 암자에 숨어서 도둑질하듯 하는 부유층 자녀의 비밀과외도 성행하고 있다. 대학가에서 ‘몰래바이트’라 불리는 대학생의 입주 형식 과외, 여대생이나 전직 여교사의 파출부 위장 과외, 속칭 올빼미 과외라 일컬어지는 심야 비밀 방문 지도, 독서실 이용 학생의 자습 또는 생활지도를 빙자한 변태 과외 등 법망을 피하는 수법도 가지가지다. ··· 과외 단속의 강도가 높아지자 비밀 과외는 ‘위험수당’까지 신설돼 과외비의 고액화를 유발했다.21

 

스파이 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하는 이상과 같은 불법 과외들이 등장한 근본적인 이유는, 대학입시 자체가 과외금지 조치 이후에도 여전히 제로섬게임 식의 선발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제로섬게임인 한 선호하는 대학의 제한된 입학 기회를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규호 장과은 취임 초에, 우리나라 교육이 정상화되려면 “첫째는 학부모들의 자녀교육관이 달라져야 되겠고, 둘째는 중고등학교 교사들에게 인간교육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과 교사로서의 긍지가 철저히 다시 한번 가다듬어져야 하겠으며, 셋째는 이번 조치가 계기가 되어서 우리나라 대학교육이 정말 혁명적으로 달라져야 되겠다”22고 국민들에게 개혁에의 동참을 요구했지만, 과외에의 의존 현상은 부모들의 자녀교육관이나 교사들의 책임감과 긍지에 달린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7·30교육개혁 조치 이후, 과외가 불법화되면서 ‘과열 과외’가 현격히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80년대는 또 한 쪽에서 ‘8학군’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던 시대이기도 하다.

 

지금은 사라진 이름이지만 ‘8학군’이라는 말은 고교평준화 체제 하에서 고등학교 배정을 위한 단위로 ‘학군’ 설정에 관한 조례가 1980년 2월 19일 개정되면서 등장한 것이다. 학군 배정 방식이 종래의 출신 중학교 중심에서 거주지 중심으로 바뀌면서, 서울이 총 11개 학군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중 강남구와 서초구 지역이 8학군으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1976년에 강북에서 이전한 경기고, 1978년에 이전한 휘문고, 1980년에 이전한 서울고 등 평준화 정책 이전의 전통적인 입시 명문고들이 모여 있었고 거기에 경기여고, 숙명여고, 정신여고 등이 추가되었다. 이들 고교의 강남 지역으로의 이전은 ‘교육적’ 관점이 아닌 도심지 인구 분산을 명분으로 한 ‘강남구 개발’의 수단이었고 그 결과 1980년대 ‘8학군’이라는 이른바 ‘교육특구’가 탄생한 것이다.23

 

왜 ‘교육특구’로 불리게 된 것일까. 예전부터 매년 대학 입학 시즌이 되면 주요 신문과 방송은 어느 고등학교 출신 학생이 서울대학교 등 이른바 명문대학 입학에서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는지를 보도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1980년대가 되면 고교가 위치하는 지역, 특히 서울의 경우 학군까지 아울러 보도하는 관행이 정착한다. 예컨대 1989년 『조선일보』의 다음 기사를 보자.

 

학부모들이 8학군을 찾는 이유는 물론 서울대 등 명문대 합격자를 많이 내는 고교들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이곳 고교들이 지난 74년 고교평준화 이후 안정된 생활수준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입시교육에 박차를 가해 ‘신흥 명문고’로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여기에 강북지역의 옛 명문고교들이 하나둘씩 강남으로 자리를 옮긴 것도 같은 현상을 부채질했다. 7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한 학교는 경기 서울 휘문 배재 중동 동북 한영 배명 경기여고 숙명여고 정신여고 등 모두 11개교에 달한다. 금년 대학입시에서도 서울 다른 지역의 고등학교들은 서울대에 평균 10명선의 합격자를 냈는데 반해 강남의 몇몇 학교들은 30〜50명의 합격자를 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24

 

제도적으로 학군제는 고교 배정 방식을 거주지 중심으로 하면서 사실상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학생에게만 그 지역 고교로의 입학 기회를 배타적으로 허용하는, 따라서 타지역 출신 학생의 입학을 차단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바로 이 때문에 8학군 출현 이후, 마치 1968년 중학무시험제 실시 이전에 서울의 덕수국민학교 등으로 다른 지역으로부터 엄청난 ‘위장전학’ 현상이 빈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강남지역으로의 이른바 ‘위장전입’ 사건들이 빈발해 사회문제화되기도 했다. 8학군 고교의 이른바 명문대 입학성적이 과연 8학군 고교가 다른 학군 고교보다 잘 가르친 탓인지는 엄밀히 따져봐야 할 문제였지만,25 일반 학부모들에게는 어쨌건 8학군 출신이 매년 명문 대학에 많이 들어간다는 결과가 중요했다.

 

80년대 내내 8학군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거듭되다 결국 1996년에는 ‘공동학군’이 부활하고, 2010년에는 기존의 학교군에 ‘단일학교군’ ‘통합학교군’ 등이 추가로 설치되어 학생들의 학교 선택권이 확대되는 한편, 외국어고, 과학고 등의 특수목적고등학교가 등장하며 8학군에의 집착은 점차 약화되었다. 대신에 1990년대 말부터 대치동 등에 등장한 거대 학원가가 다시금 교육 불평등과 관련된 사회문제로 부각된다.26

 

 

졸업정원제

 

한편, 7·30교육개혁 조치에 담긴 정책들 중 가장 많은 논란을 유발하고 또 가장 빈번한 정책 동요를 보였던 것은 ‘졸업정원제’ 정책이었다. 졸업정원제는 1981년도 대학 신입생부터 각 4년제 대학 졸업정원의 30%―전문대학의 경우는 15%―를 가산한 수를 입학시킨 후 초과로 모집된 인원을 졸업 이전에 중도 강제 탈락시키는 내용의 정책이었다.

 

이 정책이 1981년도부터 실시되면서 갑자기 대학 입학 정원이 4년제 대학의 경우 30% 늘어나게 되었고, 게다가 대입 본고사가 폐지되자 대입 수험생을 둔 학부형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것은 1973년의 ‘고교평준화’ 정책 발표, 1968년의 ‘중학무시험제’ 발표 시기 때의 여론의 반응과 매우 유사했다. 그것이 바로 포퓰리즘 정책이 노리는 바이기도 했다.

 

한국 고등교육에서 최초로 시도된 이 정책이 야기한 결과 중 하나는 이른바 대학생 대상 사교육이었다. 1981년 3월에 한 일간신문은 일부 입시학원들이 “올 신입생부터 졸업정원제가 적용돼 성적이 나쁘면 중도탈락하는 점을 노려 대학별로 1학년 과정 종합판 및 단과반을 설치”27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후 졸업정원제 시행 과정에서 다양한 혼란과 동요가 발생하면서 대학생 대상 ‘과외 학원’는 더 이상 사회문제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가장 즉각적이고도 심각한 문제는 초과로 모집한 인원을 중도에 퇴출시키는데 따른 부담이었다. 우리 사회의 대학처럼 ‘입학하기는 어렵고 졸업하기는 쉬운’ 관행이 해방 이후 40여 년간 변함없이 지속되던 역사를 일거에 바꾸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미군정청 학무국의 고등교육국장으로 일했던 전 노스다코타주립대학 총장 프랭크 에버설(Frank L. Eversull)은 서울대학교 상황을 목도한 후 다음과 같이 한국 고등교육의 특질을 풍자하듯 지적한 바 있다.

 

(서울대학교에―인용자주) 입학한 2천 명의 학생들은 보통 사 년이 지나면 졸업할텐데 한국에는 낙제라는 것이 없다. ··· 한국의 대학에서 누군가 낙제를 한다면 그는 그것을 개인의 수치, 가족의 수치, 나라의 수치로 간주해 아마도 자살할 것이다. 내 상상력이 태평양 건너 3천 마일 떨어진 미국의 오지로 미치게 되면서 절로 중얼거리게 된다. ‘그런 일이 이곳 미국에서 벌어진다면 장의사들은 엄청나게 돈을 벌겠지’ 라고.28

 

‘낙제’를 자살을 감행할 정도의 ‘수치’로 여긴다는 것은 에버설이 ‘내 생애에서 그렇게 교육에 강한 관심을 갖고 지독하게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고 경탄할 만큼 한국인의 교육열이 높다는 것의 한 표현이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동아시아 고등교육의 특질에서 비롯된 결과이기도 했다.

 

아마노 이쿠오(天野郁夫)에 따르면,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나 독일의 아비투어, 영국의 A레벨 테스트와 같은 시험은 대학 입학 과정에서 선발 기능을 담당하기는 해도 기본적으로는 중등교육 수료 시험에 해당된다. 고등교육을 받을 만한 기본적 능력이 중등학교에서 길러졌다는 것을 그런 시험을 통해 확인받은 사람들이 대체로 대학 입학 자격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일찍부터 학력 취득이 사회적 상승 이동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제도화된 ‘학력주의’의 나라, 일본에서는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중등학교 졸업자 수는 곧바로 대학의 수용능력을 상회하게 되었다. 여기서 학력 시험은 ··· 중등학교 졸업자들 중에서 입학자를 골라내는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게 된 것이다.”29 게다가 대학 서열로 흔히 불리는 고등교육의 계층적 구조 때문에 수험 경쟁은 더욱 격렬해진다.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유럽 각국보다는 일본 쪽과 매우 유사한 ‘학력주의’의 나라다. 중등학교 졸업자가 대학의 수용능력을 크게 상회하는 상황,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대학입시는 그것이 예비고사와 본고사의 두 단계로 치러지건 아니면 예비고사만으로 치러지건 상관없이 졸업자들 다수 중에서 일부만을 골라내 승자로 만들고 나머지는 패자로 만드는 제로섬 선발일 수밖에 없다. 그 치열한 선발 과정을 가까스로 통과하여 대학에 입학한 이들에게 성적을 구실로 한 낙제나 제적은 그때까지 그 학생 그리고 그 혹은 그녀의 가족들이 쏟아부은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무로 되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에버설이 말한 것처럼 ‘자살’에까지 이르지는 않아도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것은 분명하니 그에 대한 저항도 필사적인 강도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이나 한국의 대학에서 낙제가 흔치 않은 이유는 대학교수의 온정주의에 있다기보다는 고등교육 선발 구조의 ‘동아시아적 특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각 대학이 졸업정원제 실시 과정에서 겪는 탈락자 선별의 어려움을 표하자, 정작 문교부는 학년별 탈락 비율에 대해 오락가락한다거나, 장관 자신이 정책 발표 1년반 남짓한 1981년 12월에 “탈락 방법은 자율로 구체적인 운영 방식은 대학의 자율에 맡기겠으며 학교에 따라서는 4학년까지 한 명도 탈락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30고 말하는 등 믿기 어려운 입장을 보였다. 애초에 국민의 지지 확보를 기대했을 신군부세력 중심의 여당 민주정의당도 또한 대학생 학부형들의 격렬한 반감과 저항에 부딪혀 당황하면서, “30% 탈락의 졸업정원제와는 관계없이 예컨대 80점 이상 등 일정 점수를 얻은 학생은 졸업시키도록 하는 방안을 곧 문교부 당국에 건의할 예정”31이라고 밝히는 등 동요를 보였다.

 

대학이 탈락 예상 학생을 정원이 모자라는 학과로 전과시킨다거나 하는 편법을 취하는가 하면, 탈락 위기에 내몰린 학생들이 휴학 또는 군입대를 하는 등의 방법을 취해 강제 탈락 조치를 무력화시키기도 했고, 여론에서도 지속적으로 이 정책을 비판하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자 결국 문교부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11개 수정 사항을 시달하고, 1984년에는 초과 입학 기준의 결정 자체를 대학 자율에 일임하는 등 양보를 거듭하다 1988년에 완전히 폐지하고 입학정원제로 환원조치했다.32 졸업정원제 정책은 실패한 실험이 되었다.

 

이 정책의 결정자들이 한 번도 자인한 적은 없지만, 졸업정원제 시행에는 “대학생들에게 재학 중 강제 탈락의 족쇄를 채우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학생운동을 약화시키려 했던 의도도 함께 작용한 것”33으로 의심하는 견해도 존재하며, 특히 그 제도 하에서 대학을 다닌 학생들 중 그렇게 의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34 심지어 “학우 간의 과도한 경쟁으로 역효과와 부작용을 낳았고, 이로 인해 대학의 소요가 더욱 가열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중도 수료 예상자들이 자포자기 상태에서 대학 소요에 참여하는가 하면, 중도 수료의 중압을 느낀 많은 학생들이 이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소요를 일으키기도 하였다”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였다.35 저항을 약화시키려던 정책이 오히려 더 큰 저항을 부르는 역설이 1980년대 대학가에서 현실화된 것이다.

 

 

고등교육의 팽창과 ‘백만 학도’의 시대

 

7·30교육개혁 조치가 낳은 가장 뚜렷하고도 중대한 결과는 대학생의 증대였다. 1980년대는 고등교육 팽창의 시대였다. 고등교육은 80년대에 7·30교육개혁 조치를 계기로 하여 대중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평가된다.36 그런데 고등교육 팽창이 1980년대에 새롭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1970년대 말부터 이미 대학교육 정원 증대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요구가 강했고 그에 부응하여 경제기획원과 문교부가 협의해 4년제 대학과 전문대학의 전체 정원을 49,450명이나 증원했다.37 7·30교육개혁 조치는 고등교육 팽창에 박차를 가한 셈이다.

 

팽창의 규모를 학생 수로 보면, 1978년에는 397,039명이던 대학생이 79년에는 480,277명으로 그리고 졸업정원제가 시작된 1981년에는 577,455명으로 늘어났다. 1983년에 최초로 우리나라의 대학생이 1,003,124명에 달했고 1990년에는 1,379,951명이 되었다.38 한편 일반고교생의 대학 진학 희망률도 졸업정원제 시행 시작년도인 1981년에 82.4%에 달하게 된다. 요컨대 졸업정원제로 인해 “그동안 억제되었던 잠재적 고등교육 수요가 흡수되어 해소되기보다는 더욱 극심하게 분출됨으로써 고등교육 팽창의 속도가 더욱 가속화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 것”39이다.

 

이러한 단기간의 급격한 고등교육 팽창은 즉각, 대졸자 취업난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졸업정원제 실시 이후 입학한 대학생들이 졸업을 앞둔 시기인 1984년에는 졸업생이 전년도에 비해 38%나 급증했지만, 대졸자들을 수용하는 취직처가 한 해 동안에 그만큼 늘어날 리가 없었다. 1984년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전국 764개 업체를 대상으로 조사한 대졸 사원 채용 규모는 기술직이 작년보다 2.5% 늘어난 반면, 사무직은 5.7%가 떨어져 전체적으로 3%쯤 줄어들었다. ··· 취업난의 심각함을 느낀 졸업생들은 자신의 전공이나 적성 또는 직종 등을 살필 겨를도 없이 ‘모집현장’이면 어디나 달려들어 종래 대졸자들의 외면을 받아온 중소기업체나 외판 직종에도 대졸구직자들”40로 넘쳐나는 취직난 현상이 필연적으로 노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연쇄적으로 취업 시장으로 나가는 고등학교 졸업자의 취업 상황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에 중등 실업교육의 쇠퇴는 막기 어려운 흐름이 되었다.

 

한편, 고등교육이 팽창한 1980년대에 대학생은 대거 ‘사회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형성되었다. “1980년대 후반 학생운동권은 ‘백만 학도’라는 언사를 자주 썼다. 거기에는 학생 인구가 만만치 않은 규모이며, 따라서 학생이 움직이면 세상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41 ‘백만 학도’라 자칭하는 대학생들이 1980년대에 전개한 학생운동의 비약적인 고조에는 물론 여러가지 원인이 작용했지만, 고등교육의 양적 팽창이 빠뜨릴 수 없는 ‘필요조건’으로 작용했다. 그 점은 1960년 4월혁명 당시 대학생들이 보였던 행태 및 그들 존재의 객관적 규모와 흥미롭게 대비되는 것이기도 하다.

 

 

국민윤리와 국민정신교육

 

물론, 반헌법적인 쿠데타 및 광주 시민들에 대한 학살 끝에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체제가 이런 학생들의 움직임에 대해 수수방관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에 국가권력이 교육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적 교화를 시도했는지를 검토해 보자.

 

최규하 과도 정권 하에서 교육의 ‘자율화’를 내세웠던 김옥길 문교부장관은 5·17 쿠데타 이후 전두환에 의해 경질되었고 5월 22일, 새롭게 장관에 오른 이규호는 본디 독일에서 유학한 철학자였다. 그는 문교부장관 취임 일성으로 “자율화는 교육이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른 분야와 별개로 존재할 때 가능한 것이며, 작금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으므로 민주화를 겨냥해서 교육시책을 펴려는 것”이라고 천명했다.42 그가 ‘자율화’ 대신에 애써 궁리한 끝에 선택한 모토인 ‘민주화’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곧 드러났다. 김옥길 전 장관의 교복자율화 조치를 되돌려 ‘특이한 교복 금지, 교모 착용, 두발 규제’ 등을 지시했던 이규호는 1980년 6월 28일의 전국학생처·과장회의에서 ‘학원질서 저해자를 학칙에 따라 즉각 처리하고, 교수·학생의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며, 지도교수 책임하에 대학신문을 편집·발간하라’는 등의 지시를 내렸다.43

 

이러한 부정적 조치에 그치지 않고 이규호는 “어떤 종류의 정치체제도 그 정치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을 국민들 사이에 확산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오래 존속할 수 없다”44는 논리로 ‘국민윤리’ 교육의 강화 작업에 착수한다. 학교만 아니라 공무원채용 시험에서 국민윤리를 필수과목으로 채택하고, 각 기업체 및 정부 산하기관 직원 채용시험 시 국민윤리를 중요시하라고 지시했다. 이규호가 민주화 이전 시대에 약 3년 6개월이라는 긴 기간 동안 장관직을 누린 최장수 장관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교육을 통한 체제 유지라는 적극적 사업을 주도한 업적도 작용했을 것이다.

 

1980년대는 ‘국민윤리’의 시대이기도 했다. 여기서 ‘국민윤리’라는 교과 혹은 학문분과의 역사를 간단히 되짚어보자. ‘국민윤리’라는 개념 자체는 1963년 제2차 교육과정 개정 시 고등학교 교육과정 중 사회과의 한 영역으로 국민윤리가 포함되면서 교과 명칭으로 최초 등장했지만 그것의 내용적 정체성도 불확실했고, 국민윤리학이라는 학문도 1960년대에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1973〜4년에 제3차 교육과정 개정을 통해 고등학교의 국민윤리가 독립된 교과로 분리된다. 이후 중학교의 ‘도덕’ 및 고등학교의 ‘국민윤리’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로 저작 발간되었으나 중학교의 도덕과 고등학교의 국민윤리 교과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 양성제도는 독립적이지 않았다. 이 두 교과 교육은 대학의 철학과, 교육학과, 심리학과, 종교학과 출신 교사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한편, 대학 교육에서도 국민윤리 교과가 등장한다. 국민교육헌장의 발포 이후 1969년부터 대학교수들로 구성된 ‘대학교육연구위원회’(서울대의 박종홍, 김태길, 류달영 교수 주도)에서 국민윤리를 대학의 교양필수과목으로 추가할 것을 정부에 건의했고 정부가 이를 수용하여 1970년 2학기부터 국민윤리를 대학의 교양필수과목으로 실시하도록 지시했다. 다만 당초에는 교재의 개발과 사용이 대학 재량에 위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재의 명칭도 다양했고, 국민윤리학의 정체성은 여전히 확립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응책으로 1980년 이후 대학에 국민윤리교육과가 개설되기 시작한다. 1980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 국민윤리교육과가 최초로 개설된 것을 계기로 이듬해인 1981년에 8개 국립대학교와 10개 사립대학교에 국민윤리교육과 혹은 국민윤리학과가 개설되었다. 1981년 2월 28일의 대통령령을 근거로 개설된 국민윤리교육과의 설립 취지는 중학교의 도덕 및 고등학교의 국민윤리 교과 교육을 담당할 전담교사 양성이었다.

 

그러나 1987년 이후의 정치민주화는 중등 및 대학교육에서의 국민윤리 교육의 실제에 큰 변화를 야기한다. 1989년부터는 종래 대학의 교양필수과목이었던 국민윤리 과목 운영이 대학 자율에 맡겨진다. 한편 고등학교에서도 1997년에 국민윤리 교과가 선택과목이 되었다. 7차 교육과정 개정에서는 교과 명칭이 ‘윤리’에서 ‘도덕’으로 변경되는 한편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바뀌었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는 국민공통기본교과인 ‘도덕’으로,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에서는 일반선택과목인 ‘시민윤리’와 심화선택과목인 ‘윤리와 사상’, ‘전통윤리’로 개편되었다.

 

‘국민윤리’를 내용적 핵심으로 하는 이러한 1980년대의 이데올로기적 교육정책은 기본적으로 1970년대의 ‘국민교육헌장체제’의 연장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전두환 정권은 「국민교육헌장」의 깃발 아래 머물며 그것을 반복하기보다는 다른 깃발을 내거는 것을 선호했다. ‘국민정신교육’이 그것이다. 이규호는 ‘국민정신교육’은 “우리의 인간교육의 핵심이고 만약 인간교육이라는 것이 교육에 가장 중요한 과제라면 우리 교육의 핵심”이라고 못박았다. 따라서 “우리가 아동들의 마음 속에 애국심을 그들의 인격의 핵심 속에 깊이 깊이 심어주기 위해서는 ··· 학교에서의 모든 교육 활동이 국민정신교육의 촛점에 맞추어져야만 한다”45고 명언했지만, 그것을 「국민교육헌장」에 기대어 정당화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규호 자신이 1968년에 「국민교육헌장」 초안 작성에 깊이 관여한 학계의 인물들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46

 

1980년대에 「국민교육헌장」은 형식적으로 유지되기는 했지만, “각급 학교의 헌장낭독 강제가 사라지고 1989년부터는 국민학교 교과서 표지 뒷면의 헌장 게재도 없어졌다.”47 한편 연례행사로 대통령 또는 국무총리가 참석하던 국민교육헌장선포기념식도 1988년 이후에는 크게 축소되었다.48 결국, 「국민교육헌장」은 1995년이 되어 사실상 폐지의 운명을 맞게 된다.

 

 

군사문화와 학교규율

 

그렇다면 1980년대의 초중등학교의 규율은 어떠했을까. 그것들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여유는 없고, 여기서는 학교 규율에 깊이 새겨져 있는 ‘군사문화’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로 하자. 80년대는 전두환 등 ‘신군부’가 지배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 26일 이후 찾아온 ‘서울의 봄’ 속에서 각 대학은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학생회를 부활시키려는 자율적 움직임을 보였고, 대학생들도 교련 반대 등 군사훈련 폐지를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런 변화의 시도는 5·17 쿠데타로 인해 좌절되고, 이후 전두환 정권에 의한 군부 독재가 시작된다. 그 정권의 교육정책을 관장한 이규호는 1980년 10월 말, 학생회를 부정하고 학도호국단 중심으로 학생조직을 정비할 것이라는 계획을 국가보위입법회의 문공위에 제출했다.49

 

초·중등학교의 규율에는 곳곳에 군사문화의 색채가 짙게 배어 있었다.

 

학교에서는 지금도 애국조회 시간에는 충성이라는 구호를 붙이며 거수경례를 하고, 행진곡에 맞추어 교실에 들어간다. 더구나 교련시간이나 체육시간에는 조금만 잘못하면 군대식 기합을 받고 욕설을 당하는 것이 우리의 교육 현실이다. ‘학교의 병영화’의 문제는 심각하다. 바로 ‘하면 된다’는 군국주의적 발상에 의해 우리의 어린 학생들은 맹목적인 인간형으로 자라난다. 이것이 확대되어 이 사회에 군사문화가 팽배해지는 요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군사문화를 추방하는 일은 학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50

 

군대식 규율을 유지한 채로 ‘충성’의 거수경례로 시작해 행진곡에 발맞춘 행진으로 끝나는 ‘애국조회’로 대표되는 ‘학교의 병영화’는 저 「말죽거리잔혹사」(2004년 유하 감독)라는 영화에 묘사된 유신 말기의 고교 규율에서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군사문화는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교의 규율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었다. 총검술과 같은 교련 훈련을 받지는 않았어도 여학생들 역시 전체주의적, 군사주의적인 규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다음 인용은 1989년 한 여고의 체육수업 모습이다.

 

수업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릴 즈음 4개 반 모두가 가로줄과 세로줄이 일사불란한 형태로 대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윽고 각 선생님들이 학생들이 서 있는 대형에서 3m쯤 앞 가운데 지점에 섰을 때 반장 학생의 군대식 보고와 인원점검이 시작된다. 반장이 마디가 분명한 어조로 ‘차렷!’과 ‘열중쉬엇’을 두어번 반복하자 점과 점이 연결된 근사한 직사각형 4개가 거짓말처럼 부동의 자세로 운동장에 박힌다. 선생님 쪽으로 돌아선 반장이 인원보고를 시작한다. ‘총원 58명, 사고 2명, 현재원 56명, 사고내용 주번 둘.’ 영락없는 여군 훈련소의 교육 모습이다. ··· 4열 종대로 바꾸어 하나 둘 구령을 외치며 운동장을 뛰는 것에서부터 반드시 단체로 열을 지어 이동하는 것까지 군대에서의 행동규칙과 흡사하다.51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차렷’과 ‘열중쉬엇’을 비롯한 구령, 그에 맞추어 이루어지는 ‘제식훈련’은 물론 기원을 추적해 보면 ‘군대’에서 ‘학교’로 들어온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것을 ‘학교’에서 배웠고 체육시간이나 운동장에서의 애국조회, 운동회 등을 통해 반복적으로 훈련받았다. 군인을 방불케 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운동장에 대열을 지어 부동자세로 도열해 있는 학생들의 모습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1980년대에 새롭게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 십여 년 전에도, 사십여 년 전에도, 아니 육십여 년 전에도 학교에서 유사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80년대에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중고등학생들이 입는 ‘교복’이 유신 시대나 그 이전 시대에 비해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교복의 ‘자율화’ 방침을 천명했던 ‘서울의 봄’ 당시의 문교부장관 김옥길의 개혁 방침이 이규호에 의해 철회된 후, 1983년부터 그는 갑자기 교복을 전면 폐지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 이유로 그는 교복 결정을 둘러싼 학교와 업체 간의 부정한 거래를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것 말고도 다음과 같은 근거도 제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교복 때문에 아동복들의 제조가 발달하지 못해서 수출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 아이들의 의복과 어른들의 의복은 많이 만들어져 수출이 되는데 청소년들의 옷은 만들지 않기 때문에 국제시장에서 수요가 있어도 팔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경제정책에 따라 교육정책을 결정한 것은 아니고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지만 정책결정의 메커니즘이 복잡한 현대 국가에서는 그런 작용도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52

 

위에서 든 요인은 교복 폐지 정책의 배경에 의류업계의 ‘로비’가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일으키지만, 어떤 요인이 더 지배적이었는지는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것 말고도 마치 7·30교육개혁 조치에서의 ‘과외 전면 금지’와 같은 포퓰리즘적 조치로서의 성격은 없었는지 의심해 볼 만하다. 왜냐하면 교복 폐지 과정은 문교부의 주도로 이루어지기보다는 당시의 여당 민정당의 요구에 의해 촉발되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85년 10월 16일에 정부와 민정당은 공동으로 교복 ‘자율화’ 방침을 발표했다. 자율화 방침의 주된 이유는 교복이 폐지되는 경우 ‘빈부격차로 인한 위화감 조성’ ‘사치경쟁’ ‘학생에 대한 교외생활지도의 어려움’ ‘청소년범죄에 휩쓸릴 위험성’ 등의 문제가 있다고 교사와 학부모들이 문제 제기를 했다는 데 있었다.53 여하튼 이렇게 해서 한국의 현대교육사에서 사라졌던 ‘교복’은 1986년에 ‘학교장 재량’에 맡기는 식의 ‘교복 자율화’가 표방되면서 다시 부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교복을 부활시킨 주된 동인이 정치권력의 위로부터의 강제라기보다는 학부모 그리고 교사 등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대한 정치적 반응에 있었다는 점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교사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전체주의적, 군사주의적 훈련은 학생들 사이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우리 학교의 학생문화에 오랜 기간 동안 관행으로 정착해 왔던 것은 상급생의 하급생에 대한 위계관계에 의거한 구타 문화였다.

 

중고등학교에서 교내 폭력이 공공연하게 용인되던 때가 있었다. 상하급생 간의 기강을 바로잡고 규율을 세운다는 구실 아래 하급생을 구타하던 것이 상급생의 당연한 권리처럼 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 더욱 분개했던 것은 학생이 까무러치도록 얻어맞았는데도 학교에서는 그것을 당연한 일상사처럼 넘기고 말았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 하에서 군국주의적 교육을 받았던 교사들은 이러한 폭력을 기강을 잡기 위한 ‘필요악’으로 알고 있었고 무심한 부모는 제 자식이 얻어맞았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가고 만 것이다.54

 

교사가 일종의 ‘필요악’이라 여겨 묵인하는 상황에서 재생산되는 상급생의 하급생에 대한 지배와 폭력의 문화를 위 기사의 저자는 ‘오장(伍長)문화’라 명명했다. 즉 군대 ‘분대장’의 문화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 기원을 일제 식민지기의 군국주의적 교육 경험에서 찾고 있다. 이 통찰은 기본적으로 옳다. 이러한 상급생-하급생의 권력 관계는 전두환 시대나 박정희 시대에 새롭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기원을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단은 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동일한 것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역사적 기원은 근대 일본교육에 있었다.

 

“4학년의 세력은 실로 위대했다. 제왕처럼 느껴졌다. 참으로 무서웠다. … 상급생의 명령은 왕의 명령처럼 느껴졌다”거나 “신입생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상급생의 권위다. 기숙사에 들어가면 상급생이 이른바 ‘헌법 발포’라는 행사를 연다. 하나, 4학년은 하느님이다. 건드릴 수 없다. 하나, 3학년은 간부다”55 같은 일본의 심상사범학교 생활에 대한 회고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상급생-하급생 간의 위계 문화가 군사주의적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초대 문상(文相) 모리 아리노리(森有礼)가 근대 일본의 사범학교를 황민교육을 축으로 하여 재편하면서 군대로부터 도입하여 사범학교에 정착시킨 ‘병식체조(兵式體操)’―오늘날 이야기되는 ‘제식훈련’이다― 및 군대식 규율에 기초한 기숙사 생활규범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일본 사범학교의 군사주의적 규율이 식민지기 조선의 사범학교 및 기타 학교에도 흘러들어와 정착했고, 그것이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아 1980년대 후반까지 계속된 것이다.

 

왜 이러한 일본 근대교육에서 역사적으로 비롯된 군사주의적, 전체주의적 규율이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동요 없이 유지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한국현대교육사의 앞 부분에서 또 ‘국민교육헌장체제’를 다룰 때 검토한 바 있어 여기서는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 다만, 한국의 학교교육을 둘러싸고 있는, 또 그것을 직접적으로 집요하게 통제하는 권위주의적, 전체주의적 정치체제라는 요인과 「국민교육헌장」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교육의 필요성이라는 요인에 더하여, 학교 단위, 학급 단위에서 전개되는 교사와 학생 간의 일상적 상호작용이 근본적으로 성찰되지 않는 한 ‘과거는 오래 지속된다’고 하는 점만을 다시 강조하는데 그치겠다.

 

그런데 1960년 4월에서와 같이, 학생이라는 존재는 가르치는 자, 지배하는 자의 의도대로 언제나 조형되는 피조물이 아니다. 1980년대는 이러한 권위주의적, 전체주의적 정치체제에 대한 저항이 끈질기게 또 거대하게 고조되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 저항의 주된 주역은 ‘백만 학도’를 자칭하던 대학생들이었고, 그들이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라는 묘판으로부터 1980년대 후반 교육현장에서의 ‘교육민주화운동’이라는 줄기가 성장했고 그것이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출범이라는 거대한 열매를 맺게 된다. 다음으로는 이 주체적인 저항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1980년대의 교육과 사회를 다시금 재조명해 보기로 하자.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 필자의 저작권 보호를 위해, 기존의 PDF 파일을 제공하던 서비스를 중단합니다. 대신 아래의 ‘인쇄(Print)하기’ 클릭한 후, ‘Ctrl + P’를 누르시면 칼럼 내용을 인쇄할 수 있습니다.

🖨️ 인쇄(Print)하기

각주

  1. 「서울大 學事調整委 첫모임 學生會 부활등 논의」 『東亞日報』 1979.12.6.(7).
  2. 「初中高校 교과서 維新내용 빼기로」 『京鄕新聞』 1979.12.12.(1).
  3. 「文敎部추진 中高교복 校帽 자유화」 『京鄕新聞』 1979.12.21.(7).
  4. 김병옥 (2006), 「교육부 40년 출입 老기자의 대한민국 교육부장관 48인論」, 『신동아』, 6월, 246쪽.
  5. 「政府 設置令개정 學徒護國團간부 選擧制로」 『東亞日報』 1980.2.16.(1).
  6. 「學園自律化 추진 國大學生處長결의」 『每日經濟新聞』 1980.4.8.(7).
  7. 「5공 산파역 아직도 여ㆍ야 포진」 『한겨레신문』 1995.12.15.(23).
  8. 5명의 구성을 보면 정태수鄭泰秀(문교차관, 당시 대학교육국장), 김상준金相駿(당시 현역 대령), 이중환李重換(당시 현역 군인), 안병규安秉珪(국회의원, 민정民正), 김행자金行子(당시 이대교수) 등이었다(「新엘리트論 (65) 制度改革의 견인차 <3>」 『京鄕新聞』 1983.4.25.(3)).
  9. 「남산의 부장들 (138) 國保委참여 거부자에 ‘報復의 칼’」 『東亞日報』 1993.5.2.(10).
  10. 文敎40年史編纂委員會 (1988), 『文敎40年史』, 文敎部, 488쪽.
  11. 「新엘리트論 (65) 制度改革의 견인차 <3>」 『京鄕新聞』 1983.4.25.(3).
  12. 金鍾喆 (1989), 『韓國敎育政策硏究』, 敎育科學社, 198-199쪽.
  13. 「정부, 再修生종합대책 확정 大學졸업定員制로 지향」 『京鄕新聞』 1977.7.23.(1).
  14. 오제연 (2019), 「1970년대 후반 대학정원 정책의 전환과 고등교육 대중화」, 『역사비평』, 128, 역사비평사, 160쪽.
  15. 오제연 (2019), 「1970년대 후반 대학정원 정책의 전환과 고등교육 대중화」, 『역사비평』, 128, 역사비평사, 162쪽.
  16. 「評價敎授團건의 敎育政治中立 보장을」 『東亞日報』 1980.3.7.(1).
  17. 「累積된 病弊 한꺼번에 폭발. 民主化의 陣痛일뿐」 『京鄕新聞』 1980.5.2.(2).
  18. 「‘課外멍에’ 벗고 한숨 돌렸으면」 『東亞日報』 1980.7·30.(7).
  19. 「勉學새바람 ‘全人敎育’」 『東亞日報』 1980.9.8.(6).
  20. 강준만 (2009), 『입시전쟁잔혹사』, 인물과사상사, 154쪽.
  21. 「이래도 되는가 (下) 빗나간 敎育熱」 『京鄕新聞』 1985.3.25.(3).
  22. 李奎浩, 尹亮重 (1980), 「新東亞인터뷰 文敎部長官 李奎浩씨」, 『新東亞』, 9월, 117쪽.
  23. 오제연 (2015), 「1976년 경기고등학교 이전과 강남 ‘8학군’의 탄생」, 『역사비평』, 113, 역사비평사, 214쪽.
  24. 「高校입학 새문제 제기···‘8學群파문’」 『朝鮮日報』 1989.2.14.(5).
  25. 한국교육개발원 연구팀이 1989년도 서울시내 일반계고교 졸업생 중 86년도 고입연합고사성적 180점 이상 우수학생 667명을 표본으로 삼아 실시한 ‘학군별 대학진학상황’ 조사에 따르면 8학군 소속 표본학급 236명 중 서울대 진학자는 12명으로 5.1%에 불과하여 5학군(서대문·마포구), 4학군(용산구), 1학군(성북ㆍ도봉구)에 이어 4위에 머물렀다는 것이다(「8學群 名門大 진학률 4位」 『京鄕新聞』 1989.5.11.(14)). 이는 8학군의 교육력을 의심케 하는 객관적 근거로 읽을 수 있다.
  26. 오제연 (2015), 「1976년 경기고등학교 이전과 강남 ‘8학군’의 탄생」, 『역사비평』, 113, 역사비평사, 224-226쪽.
  27. 「卒業定員制 파고든 재빠른 商魂 ‘대학생課外學院’ 등장」 『朝鮮日報』 1981.3.12.(7).
  28. Eversull, Frank L. (1948), “Korea-Russia and the United States in the Orient-Positive Foreign Policy to Curb Russian Expansion Necessary”, Vital Speeches of the Day, 14(9), Feb. 15, p.276.
  29. 天野郁夫 (1996), 『日本の敎育システム―構造と變動』,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p.92.
  30. 「졸업定員制 脫落방법 大學에 맡겨」 『東亞日報』 1981.12.7.(1).
  31. 「大卒定員制 완화 추진」 『朝鮮日報』 1981.12.13.(1).
  32. 金鍾喆 (1989), 『韓國敎育政策硏究』, 敎育科學社, 200-201쪽.
  33. 오제연 (2019), 「1970년대 후반 대학정원 정책의 전환과 고등교육 대중화」, 『역사비평』, 128, 역사비평사, 167쪽.
  34. 남신동, 류방란 (2017), 「대학졸업정원제도(1981〜1987)의 구상과 폐지에 대한 구술사 연구」, 『교육사학연구』, 27(2), 53쪽.
  35. 文敎40年史編纂委員會 (1988), 『文敎40年史』, 文敎部, 494쪽.
  36. 오제연 (2019), 「1970년대 후반 대학정원 정책의 전환과 고등교육 대중화」, 『역사비평』, 128, 역사비평사, 146쪽.
  37. 강내희 (2013), 「변혁운동의 거점에서 신자유주의 지배공간으로―1980년대 이후 한국의 대학」, 『역사비평』, 104, 66-67쪽.
  38. 『문교통계연보』 각년판에 의거함.
  39. 남신동, 류방란 (2017), 「대학졸업정원제도(1981〜1987)의 구상과 폐지에 대한 구술사 연구」, 『교육사학연구』, 27(2), 62쪽.
  40. 「쏟아지는 學士 일터가 없다」 『朝鮮日報』 1985.2.28.(11).
  41. 강내희 (2013), 「변혁운동의 거점에서 신자유주의 지배공간으로―1980년대 이후 한국의 대학」, 『역사비평』, 104, 68쪽.
  42. 「文敎정책 ‘自律’·‘他律’ 절충한 ‘民主化’로」 『朝鮮日報』 1980.6.1.(7).
  43. 한필재 (1990), 「80년대 문교부장관의 면모와 그 정책」, 『중등우리교육』, 4월, 74-75쪽.
  44. 한필재 (1990), 「80년대 문교부장관의 면모와 그 정책」, 『중등우리교육』, 4월, 76쪽.
  45. 李奎浩 「國民精神敎育과 人間敎育」, 『文敎行政』, 10월, 49-50쪽.
  46. 「敎育憲章 草案 발표」 『京鄕新聞』 1968.7.26.(1).
  47. 「국민교육헌장 존폐논란 재연 정치의미 부담 폐지방침 ‘흔들’」 『한겨레신문』 1994.6.21.(16).
  48. 신주백 (2005), 「국민교육헌장의 역사 1968-1994」,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5,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323쪽.
  49. 「文敎部 護國團 중심으로 학생組織 활성화」 『京鄕新聞』 1980.10.31.(1).
  50. 이윤찬, 「습관화된 군대식 경례·기합 맹목적 인간형 길러낼 수도」 『한겨레신문』 1988.9.15.(6).
  51. 「빗나간 학교체육 1-일사불란 운동장 수업」 『한겨레신문』 1989.3.31.(5).
  52. 李奎浩 (1993), 「중고생 교복 자율화 실시―일제시대의 교복은 벗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월간조선(편), 『한국현대사 119대사건―체험기와 특종사진』, 조선일보사, 286쪽.
  53. 「社說 교복자율화의 修正」 『東亞日報』 1985.10.17.(2).
  54. 「李光勳칼럼 ‘伍長文化’의 슬픈 遺産들」 『京鄕新聞』 1986.4.4.(3).
  55. 広島県師範学校 (1935), 『六十年回顧錄』, 広島県師範学校, p.243-244. 오성철 (2018),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 서해문집, 152쪽에서 재인용.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식민교육사 및 교육역사사회학, 동아시아근대교육의 비교사회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교육과학사, 2000),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서해문집, 2018), 역서로는 야나기 하루오의 『학급의 역사학』(교육을바꾸는책, 2026), 가리야 다케히코의 『대중교육사회의 형성』(학지사, 2023), 고마고메 다케시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공역, 역사비평사, 2008) 등이 있다.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이전글 ‘교권보호국’ 논쟁을 환영하는 이유 다음글 이찬승의 학습과학 특강(36) – “기억을 만드는 방법: 뇌의 신경생물학”
칼럼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