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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18) – “학력 엘리트의 등장”

#1532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2026.06.02
우리 한국 사회의 엘리트 집단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고, 그 과정에서 학교교육은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엘리트 집단이 지닌 역사 사회적 특질은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사회 안에서 위신과 권력, 우월한 기능을 갖고, 일정한 영역과 수준에서 의사결정 행동을 통하여 사회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기능 집단”1으로서의 엘리트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귀속주의적인 신분제적 사회질서가 무너진 후 등장한 근대 사회에서는 능력에 기반하여 사회적 역할과 지위가 배분되며 엘리트는 학교교육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형성된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능력을 개발할 기회를 부여하고 또 능력의 보유 정도를 기준으로 엘리트를 선발하는 기능은 근대 사회에서 학교교육이 담당하는 사회적 기능이다.

 

그렇지만 엘리트가 학교교육과 관련을 맺는 방식은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해방 이후 산업화, 도시화와 같은 구조적 변동이 학교교육의 급격한 팽창과 동시에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학교교육이 계층 생산 혹은 형성 기능을 담당했음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리고 그 계층 생산의 결과로 우리 사회에서도 엘리트 집단이 만들어졌다. 여기서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 집단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고, 그 과정에서 학교교육은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엘리트 집단이 지닌 역사 사회적 특질은 무엇인지를 밝힐 것이다.

 

 

엘리트와 학교

 

2006년에 언론사 중앙일보의 탐사기획 부문 취재팀이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 출현한 ‘파워엘리트’ 집단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대한민국 파워엘리트』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적이 있다. 그들이 분석 대상으로 삼은 엘리트 집단은 국내 최대의 인물 데이터베이스인 중앙일보 조인스 인물정보에 수록된 인사 27만 명 중에서 추출한 31,800명이었다. 그들은 정치인, 관료, 법조인, 군인, 언론인, 기업인, 금융인, 교육인, 의료인, 문화예술인, 종교인, 연구학술인 등 사회의 각 분야에 걸쳐 과거에 활동했거나 2006년 현재에도 활동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2

 

이 31,800명의 한국 엘리트들의 형성 과정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그들의 출신 학교다. 대학을 보면, 서울대 학부 출신은 10,528명으로 32.7%, 고려대 출신은 2,874명(8.9%), 연세대 출신은 2,562명(7.9%) 등이어서 이들 3개 대학 출신이 전체 엘리트의 절반(49.5%) 정도를 차지했다.3 2006년도 국내의 고등교육기관이 모두 412교였으니 학교 수로는 1%도 되지 않는 극소수의 학교가 전체 엘리트의 절반 가까이를 배출하는 독과점 상황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대학 만큼은 아니지만, 엘리트를 배출한 교육기관으로 또 주목되는 것이 고등학교다. 이 조사에 따르면 경기고, 서울고, 경북고, 경복교, 부산고, 경남고, 전주고, 광주제일고, 대전고, 광주고 등 10개 고교가 엘리트를 가장 많이 배출했다. 1950년 이전에 출생한 엘리트 전체의 35.3%가 이들 10개 고교 출신이었고, 1950년대에 출생한 엘리트 중에서는 37.78%가 이들 고교 출신이었다. 고교와 대학에서 엘리트 배출에 발군의 성적을 보인 학교는 경기고교와 서울대였다. 이 두 학교의 학력을 함께 취득한 자를 가리키는 ‘KS마크’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4

 

그런데 소수 ‘명문고교’의 독과점 상태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60년대에 출생한 엘리트 중 9.68%만이 이상의 고교 출신이었고, 1970년대에 출생한 엘리트 중에서 10개 고교 출신자는 5.84%에 불과했다.5 이러한 뚜렷한 변화가 1970년대에 시행된 고교평준화 정책의 영향임은 새삼 재언할 필요가 없다. 세대별로 엘리트를 많이 배출한 탑 10개 고교의 구성을 보면, 1950년대 이전 출생 엘리트의 경우는 경기, 서울, 경북, 경복, 부산, 경남, 전주, 광주제일, 대전, 광주 등의 고교였고, 1950년대 출생 엘리트의 경우는 구성에 약간 변화가 있어 경기, 경북, 서울, 경복, 광주제일, 부산, 경남, 경동, 대전, 용산 등의 고교였다. 그런데 1960년대 출생 엘리트의 경우는 전주, 마산, 대전, 경기, 우신, 진주, 순천, 휘문, 서울, 경북 등의 학교 순서로 엘리트를 배출했고 1970년대 출생 엘리트에 있어서는 순천, 대원외국어, 휘문, 학성, 서울, 상문, 단국대사대부속, 진주, 달성, 경기 등의 학교로 그 순서를 보였다.6 달리 말해 고교 단위에서 엘리트 배출의 경로가 다양하게 분화되고 심지어 특정 학교의 우위 체계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사실들을 바탕으로 위 보고서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 한국에서 소수 엘리트의 요직 독점 현상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로 확인되었고, 몇몇 명문교 출신들이 엘리트 집단 내부에 대거 포진하고 있는 것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그 정도가 급격히 완화되고 있고, 어느 한 세대가 학연과 지연을 모두 독점하지는 못했으며, 여성 엘리트의 약진이 대단히 바람직한 양상으로 이루어져왔고,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엘리트 내부의 혈연 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미미한 수준임이 밝혀졌고, 하나의 지배 집단이 오랜 세월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이질적인 지배 집단으로의 교체가 일어나고 있는 것도 관찰되었다.7

 

3만 명이 넘는 방대한 수의 표집을 대상으로 한 점, 그리고 출신 학교와 같은 측정오차가 비교적 작은 자료에 대한 분석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해방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의 엘리트 구성 변화와 관련된 이상의 결론을 반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확인된 점 중 하나는 해방 이후 우리 사회가 단순한 고졸, 대졸이라는 학력이 아니라 어느 대학, 어느 고교를 나왔는가 라는 ‘학교력(學校歷)’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 엘리트로 편입하는데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학력과 엘리트 지위 간의 관련을 확인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어느 직업집단 혹은 계층 출신이고, 학교에서 어떤 문화를 경험하고 공유했으며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집단인지를 보다 깊이 파고들어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또 한국 현대 엘리트 집단의 출현 과정과 그 내면에 접근해 갈 때 유력한 참조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서구 그리고 일본의 엘리트 형성 과정이다.

 

먼저 근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엘리트가 출현하는 과정에서 교육이 어떤 방식으로 관여하는지를 해방 전과 해방 후로 나누어 스케치해 보자.

 

 

식민지기의 엘리트

 

조선 시대의 엘리트 선발 장치로 작동한 가장 중요한 제도는 역시 과거제다. 소과와 대과를 급제하여 관리로 등용된 자를 조선 사회의 엘리트라 한다면, 과거제 응시 자격의 개방성 및 과거 시험이라는 능력에 따른 선발에 주목하여 과거제에서 근대성을 발견하려는 시도도 가능할 것이다.8 다만 과거제의 지속이 학교제도의 진화와 병행하여 이루어지지는 못한 점, 또 학교의 학력이 엘리트의 조건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조선 사회는 근대 이후의 사회와 크게 달랐다. 오늘날과 같은 엘리트의 형성과 선발 장치의 역사는 실제로 근대 이후에 본격화되었다.

 

시험과 학력과 결합하여 엘리트 선발의 장치가 되기 시작한 곳은 과거제를 실시했던 중국이나 조선이 아니라 유럽, 그것도 18세기의 프로이센이었다. 절대주의적 군주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국왕이 봉건귀족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통한 관료 임용이 필요했던 것이다.

 

(프로이센에서) 시험을 통한 관료 임용은 18세기에 들어서서 먼저 사법관료에서부터 시작되었고 1748년에는 그것이 행정관료를 포함한 관료 전체로 미치게 된다. ··· 프로이센과 중국의 결정적 차이는 ··· 과거제가 학교교육과 사실상 결합되지 않았던 데 비해 프로이센의 시험제도가 대학 교육을 전제로 하여 성립했다는 점이다.9

 

프로이센의 관료 임용을 위한 경쟁시험이 근대 일본에 수입되어 후에 언급할 ‘고문(高文)’과 같은 제도로 진화했는데, 그것이 식민지기에 조선인이 경험한 근대 엘리트의 선발 장치였다. 식민지기 학력과 엘리트의 연결고리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일본문관고등시험, 즉 ‘고문(高文)’이었다. ‘고문’ 이전에 이미 1887년에 「문관시험시보급견습규칙(文官試驗試補及見習規則)」(칙령제37호)이 공포되어 시험을 통한 관료 선발이 제도화되었다. 주임관(奏任官)은 고등시험을 통과한 자 또는 제국대학의 법과대학, 문과대학 졸업생으로, 판임관(判任官)은 보통시험을 통과한 자 또는 관공립중학교 졸업생으로 임용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10 이렇게 학력과 직업 선발을 연결시키는 시험제도가 다듬어져 ‘고문’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고문’은 1918년 제정된 「고등시험령」(칙령제7호, 1918.1.17.)에 따라 1923년부터 시행된 시험인데 문관고등시험,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 판사·검사 등용 시험 등 세 종류의 시험을 고등시험(행정과, 사법과, 외교과)으로 통합한 것이다. 이 시험 응시는 학교 학력과 결합되어 있었다. 제국대학 법과 졸업자, 구제고등학교, 대학예과 또는 동등 인정학교 졸업자는 이 시험 응시 이전에 통과해야 하는 예비시험을 면제받았다.11 1923년부터 1943년까지 이 시험에 합격한 조선인은 모두 364명이었는데 그들 중 1/3 가량은 출신학교가 경성제대 82명, 도쿄제대 25명, 교토제대 27명으로 식민지기 최고 학력의 소유자였다.12

 

그들 중 한 사람이었던 경성제대 출신 이항녕(李恒寧)의 자전적 소설의 한 대목에 따르면, 고문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과거’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인제 좋은 학교에 들어갔으니 다른 생각은 말고, 덮어놓고 고등문관시험(고등문관시험은 지금의 고등고시이다)을 준비하라고 권했다. 아버지는 지금의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옛날의 과거에 급제하는 것과 같으니까 이것보다 더 큰 명예가 없다고 하였다.13

 

또 고문 예비시험을 면제받는 특권이 보장된 제국대학 학생의 경우, 그에 상응하는 엘리트적 자의식을 지니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이항녕은 경성제대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그래서 우리가 대학 예과 댕길 때는, 일종의 특권계급으로서 학생 노릇을 했단 말이야. 특권계급이거든. 보통 가정에서는 대학 댕길 수 없다. 또 보통 머리 가지고는 될 수도 없었다. 수재들이다. 그래 수재들로 취급해 줬단 말이야. 수재들로.14

 

심지어 식민지기에는 제국대학으로 이어지는 전단계의 중요한 경로였던 중학교의 학생조차도 미래의 엘리트 계층으로 대우받았다. 리영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의 갑종 5년제 중학생이 아마도 조선 전체에서 많아야 3만 명이 안 됐을 테니까, 지금 우리나라 4년제 대학교 학생이 백수십만이나 되는 것에 비교하면 굉장한 엘리트였어요. 그래서 중학생들이 웬만한 일탈 행동을 하거나 심한 장난을 해도 일본 경찰조차 ‘각세이상다까라’라고, 우리말의 ‘님’에 해당하는 존칭 ‘상’을 부르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15

 

‘각세이상다까라’라는 일본어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학생님이니까’라는 뜻이다. 그들은 조선인일지라도 제국대학을 거쳐 고문을 통과하면 군수 이상의 고급 관료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꿀 수 있는 존재였다.

 

다만, 식민지기 조선인의 학력을 발판으로 한 엘리트 진입 과정은 매우 제한적이고 폐쇄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엘리트로 진입하기 위한 고등교육 및 엘리트적인 중등교육 교육 기회 자체가 식민지 치하에서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우민화 정책에 바탕을 둔 교육 기회의 민족적 차별·제한 정책 탓이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학력을 매개로 하여 진입할 수 있는 엘리트적 지위의 기회 자체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1933년의 조선인 고등교육기관 졸업자의 진로를 보면, 경성제대를 졸업한 조선인 45명 중 관공서에 관리로 취업한 사람은 53.3%, 회사 상점 등에 취업한 사람은 13.3%였고 관립전문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105명 중 69.5%가 관공서 관리로, 14.3%가 회사 상점 등에 취업했다. 퍼센트 상으로 보면 졸업자들이 상당한 비중으로 관리나 근대적 부문에 취업한 듯 보이지만, 그 수가 경성제대와 관립전문학교를 모두 합하더라도 한 해에 200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뿐만 아니라 같은 전문학교라도 사립전문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남자 225명 중 관공서 관리는 20.0%, 회사 상점 등에는 27.6%가 취업한 반면 36.4%는 취업하지 못하였다.16

 

식민지기에 관공서 관리나 근대적인 부문으로 취업할 수 있었던 조선인들은 말하자면 학력엘리트의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이들 식민지 지배 상황 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극소수의 조선인들을 근대적인 취업 기회와 연결시키는 파이프라인은 너무 가늘고 제한적이었다. 학력에 바탕을 둔 엘리트가 사회적인 범주로 출현하기 위한 구조적 조건은 아직 충족되지 못했다. 식민지배 상황 하에서의 관료로서의 고용기회는 면서기와 같은 말단 관직을 제외하면 조선인에게 돌아가지 못했고, 동시에 산업화는 극도로 제한되어 고용기회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학력에 바탕을 둔 엘리트라는 사회적 집단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중등 및 고등교육 기회의 개방과 일정한 팽창, 그리고 그 학력 소지자가 이동할 수 있는 근대적인 엘리트적 고용기회의 존재 및 그것의 기반이 되는 산업화가 필요했다. 그런 구조적 조건은 식민지 치하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의 엘리트

 

식민지기에 제대 출신으로 고문에 합격해 군수 등이 된 극소수의 조선인들 사례를 통해 매우 제한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던 학력의 지위 획득 효과에 대한 기대는 해방 이후 갑자기 폭발적으로 고조되었다. 앞서 미군정 하의 교육 상황을 서술할 때 언급했던 것처럼, 본국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빈 자리들 중에서도 비교적 높은 지위의 자리들을 우선적으로 메운 것은 학력 소지자들이었다. 학력이 엘리트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인식되어, 오늘날 ‘교육열’로 회자되는 현상이 범계층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학력 취득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이른바 입시경쟁 및 교육 팽창의 실태는 앞서 살펴본 바 있어 여기서 다시 반복하지는 않는다. 다만 여기서는 ‘엘리트’의 출현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주목할 만한 몇 가지 현상들에 집중한다.

 

먼저, 학교를 거친 엘리트의 면모가 식민지기와는 자못 달라진 점이다. 1964년에 어느 일간 신문에는 입시 자체에 전전긍긍하는 수험생의 출현을 개탄하며 해방 이전의 ‘무용담’과 비교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다.

 

“해방 전 대학 진학자는 ··· 경제적으로 아무런 근심이 없었고 또 학문할 열의로 대학엘 갔어요. ···” 서민층의 자제까지 진학할 민주주의 세상은 아니었으나 오늘날과 같이 서울의 몇 대학으로 모여드는 획일성은 없었다고. 자기 재능과 가정 형편에 따라 현해탄을 건너는가 하면 전문학교에 주저앉기도 하고. “요즘 수험생들은 불쌍해요. 입시 자체에 모든 걸 걸고··· ‘스케일’이 작은 인간이 되어가고 있어요. 무용담이 나올 틈바구니가 없어요.”17

 

‘학문할 열의’로 현해탄을 건너는 ‘경제적으로 아무런 근심이 없었’던 일제 시대의 대학 진학자들 중 상당수는 ‘주의자’, ‘지사’가 되어 다시 현해탄을 건너오기도 했다. 그런데 해방 이후에 대학 진학자는 ‘스케일이 작은’ 수험생이 되어버렸다는 개탄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수험 경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스케일’의 크기가 아니라 그들이 매우 많아졌다는 사실 쪽이다. 이는 대학을 거쳐 엘리트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범계층적으로 확산되어가는 현상의 다른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는 이른바 ‘형설지공’ 이야기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이란 중국 진(晉)나라에서 반딧불이의 빛으로 책을 읽었다는 차윤(車胤)과 눈에 반사된 달빛으로 책을 읽었다는 손강(孫康)의 일화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로,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입신출세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1960년대가 되면 매년 1, 2월에 중등학교 및 대학의 입시 결과가 발표되는 시기에 맞추어 이른바 경기중, 서울대와 같은 명문학교 ‘수석합격자’들의 합격기가 ‘형설지공’이라는 미담으로 포장되어 대부분의 일간 신문을 장식하게 된다.

 

흔히 접할 수 있는 ‘합격기’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1963년에 고아 출신으로 경기중학교에 입학한 이경호 군의 이야기는 “소년의 꿈은 꼭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불우한 천재를 도와야 합니다” 라는 호소로 끝을 맺고 있었다.18 합격기에는 합격한 본인의 노력과 비결에 대한 소개만이 아니라 그들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는 부모의 헌신이 함께 소개되기도 했다. 같은 해 1월에 아들을 서울사대 졸업시키고 딸을 경기여고 졸업시킨 어느 청소부 이야기가 신문에 다음과 같이 실리기도 했다.

 

서울 성동경찰서 청소부 박을경(63) 할아버지는 홀아비로 14년을 동서에 근무하면서 아들 점수(25)군을 서울사대까지 졸업시키고 이제 경기여고를 졸업한 딸 정순(19)양의 대학진학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 “엄마 잃은 어린 것을 내가 아빠되고 엄마가 되어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읍니다. 새벽 4시면 일어나 밥을 짓고 딸이 먹을 미음을 끓여야 했죠.” 그는 말을 이어 “국민학교 다니던 아들놈이 아버지의 노고를 눈치챘는지 새벽이면 몰래 일어납니다. 저는 호통을 쳤죠. 밥 지을 시간에 공부하라고 타일렀읍니다”라고 말했다.19

 

그렇다면 대학교의 수석 합격기는 어떤 스토리를 담고 있었을까. 중등학교에서의 수험 경쟁이 최고조에 달하던 1976년에 서울대 인문사회계열에 수석 합격한 경북고 졸업생 한위수 군의 합격기에는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교과서 중심으로 예습 복습을 열심히 했던 게 주효’했다는 상투구에 그치지 않고, ‘겨울방학부터 3학년 초인 4월까지 영어 수학을, 5〜6월 두달 간은 과학과 독어, 여름방학 때(7〜8월)는 국어를, 사회과목은 9〜10월 일정을 짜 과목별 집중 공부를 해 1개 과목 교과서를 3〜4번 정독’했다고 하는 과목별 학습시간 배분 방식, 그리고 ‘강박관념을 없애기 위해 일요일이면 틈틈이 영화관람도 했고 음악을 듣기도 해 기분전환’에 힘썼다는 생활관리 방법까지 담겨 있었다.20 대학입시에 실패한 경험을 극복하고 1976년 다시 고려대 법대에 수석합격한 황정규 군의 합격기는 학원 대입종합반에서의 학업 방식에 대한 소개와 함께 “재수생의 어려움이란 재수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수석 합격의 영광을 차지한 지금 지난 1년간의 괴로움은 나에게 ‘하면 된다’는 각오를 새로이 해주었고 이 각오로 고시 합격이란 또 하나의 장벽을 향해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21 수험 경쟁에서의 이러한 성공담은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효과적인지와는 별개로 다른 수험생들에게 성공을 위한 구체적이며 실현 가능한 구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합격기는 매년 주기적으로 일간지에 게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학』, 『학원』과 같은 청소년 대상 월간지에도 입시철이 되면 반드시 실렸다. 나아가 합격기는 예컨대 구맹회(편) (1989), 『아,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 고득점 합격생 수험생활 체험기』(열음사)와 같은 단행본으로도 정리되어 널리 유포되었다. 심지어 학업을 뒷바라지하며 자제를 명문대에 합격시킨 어머니의 수기까지 발간될 정도였다. 예컨대 黃乙淵 (1977), 『슬픔이여 그렇게 가렴』(汎曙出版社)이 그 예다.

 

명문 중등학교, 명문 대학교 입학시험에서의 성공담을 내용으로 하는 합격기의 최종적인 도달점은 현대판 ‘고문’ 즉 고시 합격기다. “극도의 생활난에서 쌀이 떨어지고 겨울에 땔 것이 없어 온 가족이 비관이 잠겨 있을 때도 ··· 부인의 격려를 받아가며 「육법전서」나 「행정법규」의 책을 버리지는 않았”던 전용성 씨의 1956년 사법, 행정 고등고시 합격 미담22에서부터, 앞서 언급한 대학 수석 합격기와 앞의 서울대 수석 합격기와 마찬가지로 합격에 필요한 유용한 학습 정보, 시험에 대비하는 요령, 시간관리법과 생활 및 건강관리법 등을 담고 있는 고시 합격기는 『고시계』, 『고시연구』 등 고시 준비를 위한 수험 잡지에 매 호마다 반드시 게재되었다. 그들의 고시 합격기 역시 고시연구사편집부(편) (1994), 『다시 태어난다해도 이 길을―사법시험고등고시 합격수기선』, 考試硏究社.; 考試界編輯部(편) (1996), 『정의의 월계관을 향하여』, 언약.; 고시계편집국(편) (2002), 『수석합격! 나도 할 수 있다』, 考試界社. 등과 같은 단행본으로 정리되어 유포되었다.

 

고교나 대학과 같은 학교 입학시험이건 고등고시이건 그에 성공한 자들이 발표한 합격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합격기에서는 ‘가문의 전통’이라거나 유복한 출신 계층에 대한 고백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명문학교에 입학하거나 난관의 고시에 합격하는데 있어 특별히 유리한 계층이 따로 존재한다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누구라도 놀거나 잠잘 시간을 아끼고―‘사당오락(四當五落)’ 고통을 견디며 노력하면―‘각고면려(刻苦勉勵)’― 이룰 수 있는 꿈이라는 것이었다. 모든 합격기는 ‘노력주의’라는 원리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 꿈을 갖거나 실현하는데 어려움은 있을지언정 장벽은 없다는 것이 일종의 복음처럼 합격기를 통해 유포되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떠했을까. 모두에서 언급한 중앙일보 조사팀의 파워엘리트 조사연구는 현대 한국 엘리트의 출신 학교와 출신 지역 등을 밝히기는 했지만, 정작 학력 또는 학교력의 취득 과정 자체를 규명하지는 않았다. 쉽게 말해 서울대 학부 출신이 어느 영역의 엘리트에서 얼마만큼의 비중을 점하고 있는가는 밝혔지만 서울대 학생의 출신 고교 확인을 넘어서서 어떤 계층이나 집단 출신의 자제가 서울대에 들어갔는가를 규명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부터 이 점을 보다 깊이 파고들어가 보자.

 

엘리트의 출신 고교, 서울대 입학생을 배출하는 고교가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해진다는 것은 엘리트 배출 경로의 분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서울대 입학생 배출 고교가 다양해진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교육평등이 실현된 증거라고 단언하기는 이르다. 10개교가 독과점했던 서울대 입학 기회를 100개교가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그 100개 고교에서 배출된 서울대 입학생이 어떤 사회경제적 배경 출신인가를 따져 묻기 전까지는 평등을 말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로 여기서는 서울대 신입생 부모의 학력과 부모의 직종에 따른 교육선발지수를 확인해 본다. 교육선발지수란 전체 집단 내에서 어떤 하위집단이 점하는 비중만큼 그 하위집단이 그에 상응하는 특정 교육의 기회를 누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만약 전체 취업인구 집단 중에서 관리·전문직 집단이 5%(B)를 점하고 있는데, 대학 진학자 전체 중에서 관리·전문직 집단의 자제가 10%(A)를 점한다고 한다면 그 집단의 고등교육선발지수(A/B×100)는 200이 된다. 이 방식을 활용해 서울대학교 1975년에서 2002년에 이르기까지 신입생의 부모 학력별 선발지수를 계산하여 제시한 것이 <표 1>이다.

 

<표 1> 서울대 신입생의 부모 학력별 선발지수: 1975·1979·2002

구분 서울대 신입생(A) 경제활동인구 전체(B) 선발지수(C)
연도 중학졸업

이하기타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전문

중퇴이상

중학졸업

이하기타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전문

중퇴이상

중학졸업

이하기타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전문

중퇴이상

1975 25.0 32.7 42.2 64.9 24.3 10.9 38.6 134.9 388.8
1979 33.5 24.8 41.6 59.2 29.5 11.3 56.7 83.9 367.6
2002 5.2 23.1 71.7 11.7 44.5 43.7 44.4 51.8 164.0

주1) 선발지수는 다음과 같이 계산하였다. C=A/B×100, F=D/E×100

주2) 부모의 학력 집단별 교육선발지수 계산에서 무응답자는 제외하였다.

자료) 1975년: 李創基 (1978), 「1975學年度 서울大學校 新入生의 身上特性」, 『學生硏究』, 15(1), 서울大學校學生指導硏究所, 1-20쪽./ 1979년: 洪大植 (1979), 「1979學年度 서울大學校 新入生의 特性」, 『學生硏究』, 16(1), 서울大學校學生指導硏究所, 1-60쪽./ 2002년: 서울대학교대학생활문화원 (2002), 『2002학년도 서울대학교 신입생 특성조사 보고서』, 서울대학교 대학생활문화원.

 

이에 따르면 전체 경제활동인구 중에서 중학 졸업 이하의 학력을 가진 이는 1975년의 경우 64.9%였으나 그해 서울대 신입생 중 부모의 학력이 중학 졸업 이하인 경우는 25.0%에 불과하여 선발지수는 38.6이었다. 그런데 같은 해 대학 및 전문대학 중퇴 이상의 학력을 가진 이는 전체적으로 10.9%였으나 서울대 신입생 중 부모의 학력이 그런 경우는 42.2%여서 선발지수는 388.8로 나타났다. 양자 간의 차이는 무려 9배 가량으로 컸다. 이런 경향은 고교평준화 정책이 실시된 이후인 1979년의 경우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아 그해 두 학력 집단의 선발지수는 각기 56.7과 367.6으로 나타났다. 다만, 이는 평준화 정책으로 인해 부모의 학력이 높지 않은 계층의 서울대 진학률이 약간 늘어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경향은 2002년에는 더욱 뚜렷하여 부모의 학력이 대학 및 전문대학 중퇴 이상인 집단의 선발지수는 164.0으로 현격히 줄어들었다.

 

그런데 1975년과 2002년이라는 두 시점의 간격이 27년으로 거의 한 세대에 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대학 취학자가 급격하게 늘어난 점을 고려한다면, 이상과 같은 고등교육 학력 집단의 선발지수의 하락은 서울대 입학 기회가 계층적으로 보다 평등해졌다는 증거라고 받아들이는데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다. 부모의 대학 학력이 자녀의 서울대 입학에 미치는 영향력은 시간이 지나며 축소된 것이 사실이지만, 또 다른 계층 변인의 작용 또한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1970년에서 2000년에 이르기까지 서울대학교 신입생의 부모 직종별 선발지수를 계산하여 제시한 것이 <표 2>다.

 

<표 2> 서울대 신입생의 직종별 취업자 집단 선발지수: 1970〜2000

구분 서울대 신입생(A) 40세이상 경제활동인구 전체(B) 직종별 선발지수(C)
연도 농림어업 생

산

직

판매서비스직 사무기술직 관리전문직 농림어업 생

산

직

판매서비스직 사무기술직 관리전문직 농림어업 생

산

직

판매서비스직 사무기술직 관리전문직
1970 16.2 4.0 32.8 12.1 34.9 56.0 15.3 19.2 4.5 5.0 28.9 26.3 171.4 269.5 691.4
1975 12.3 5.5 34.2 22.3 25.7 57.6 14.9 19.9 4.0 3.6 21.4 37.2 171.3 564.6 712.7
1980 15.4 4.8 22.6 18.6 38.6 49.5 18.0 22.5 5.0 5.0 31.0 26.6 100.4 375.4 771.9
1985 16.1 6.9 29.1 17.6 30.3 39.3 20.9 27.6 5.6 6.7 40.9 33.2 105.7 313.0 451.8
1989 12.2 9.0 26.7 17.1 34.9 33.4 25.6 28.1 5.9 7.2 36.6 35.4 95.2 292.2 485.3
1996 5.2 8.6 15.2 19.1 51.9 20.7 38.2 23.6 9.7 7.8 25.3 22.5 64.4 197.5 662.2
2000 3.7 9.8 16.5 17.7 52.2 17.9 36.0 26.9 11.1 8.1 20.7 27.2 61.5 160.1 645.0

주1) 선발지수는 다음과 같이 계산하였다. C=A/B×100. 선발지수에서 분자는 서울대학교 신입생의 부모 직업 조사 자료에서 무응답, 무직, 기타 직종 불명인 경우를 제외하고 각 직종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재계산하였다. 경제활동인구 중 취업자의 직종 분류와 서울대 신입생 조사의 부모 직종 분류가 일치하지 않아, 후자를 전자에 가깝게 재분류하여 A를 계산하였다. 예컨대 서울대 조사에서의 군경, 교육문화관련직, 언론인, 종교인, 공무원 등은 관리전문직으로 분류하였다.

출처: 서울대 신입생 자료: 李創基 (1978), 「1975學年度 서울大學校 新入生의 身上特性」, 『學生硏究』, 15(1), 서울大學校學生指導硏究所, 1-20쪽; 李創基, 李慶奭 (1982), 「서울大學校 1981學年度 新入生과 過年度 新入生과의 特性比較」, 『學生硏究』, 18(1), 38-47쪽.; 차재호, 권영목 (1986), 「지난 5년간의 서울대학교 신입생 특성의 변화―1982학년도부터 1986학년도까지」, 『學生硏究』, 21(1), 서울大學校學生生活硏究所, 3-15쪽.; 이창기 (1989), 「지난 8년간의 서울대학교 신입생의 특성 변화―1982학년도부터 1989학년도까지」, 『學生硏究』, 24(1), 93-106쪽.; 이창기, 박민규 (1995), 「1995학년도 신입생의 특성 보고」, 『學生硏究』, 30(1), 서울大學校學生生活硏究所, 81-90쪽.; 서울대학교대학생활문화원 (2002), 『2002학년도 서울대학교 신입생 특성조사 보고서』, 서울대학교 대학생활문화원. 경제활동인구 자료: 『한국통계연감』 매년도.

 

경제활동인구 중에서 취업자를 직종별로 농림어업, 생산직, 판매서비스직, 사무기술직, 관리전문직 등 5개 범주로 구분하여 각 직종 집단이 경제활동인구 중 40세 이상 취업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분모로, 그리고 서울대 신입생이 보고한 부모의 직종에 따른 구성비를 분자로 하여 선발지수를 계산한 것이다. 이 수치로부터는 몇 가지 뚜렷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관리·전문직 집단의 서울대 입학 선발지수는 농림어업이나 생산직 등 이른바 육체노동직 집단의 그것보다 현격히 높다. 1970년에 전자는 691.4로 농림어업의 28.9에 비해 24배, 생산직의 26.3에 비해 26배 높았다. 이 격차는 1980년까지 갈수록 커진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차이가 줄어들어 1985년 관리전문직의 선발지수는 451.8로 농림어업의 40.9에 비해 11배, 생산직의 33.2에 비해 13.6배가 된다. 이런 변화는 1989년에도 마찬가지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1980년대의 강력한 과외금지조치로 인해 가정의 사회경제적 배경 요인이 학력(學力)에 미치는 영향력이 일시 줄어든 탓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1996년에는 관리전문직의 선발지수는 662.2로 농림어업의 25.3에 비해 26배로, 생산직의 27.2에 비해 29.4배로 다시 높아진다. 선발지수의 수치 상으로 보면 1980년대 이전 상황으로 퇴행하는 이런 경향은 2000년에도 유사하게 확인된다.

 

둘째, 사회계층적으로 중산층으로 여겨지는 판매서비스직과 사무기술직의 서울대 입학에서의 선발지수를 보면, 1970년에 판매서비스직은 171.4, 사무기술직은 269.5로서 서울대 입학에서 관리전문직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육체노동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무기술직의 선발지수는 그 5년 후인 1975년에는 564.6으로까지 급상승하여 관리전문직 수준에 육박하지만, 판매서비스직은 상대적으로 답보 상태에 머문다. 그러나 1980년 이후 판매서비스직은 100 전후로 떨어지고 1990년대 중반 이후는 60대로 하락하여 서울대 입학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불리한 직종 집단으로 변모한다. 한편 사무기술직은 1980년대 내내 300대 정도의 비교적 높은 수준을 보이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는 역시 큰 폭으로 하락하여 2000년에는 160 정도로 떨어진다.

 

요약하여 말하자면, 부모의 직종을 근거로 한 직업집단이라는 사회경제적 배경 요인은 서울대 입학에서 지속적으로 매우 큰 영향력을 미쳐 왔다. 서울대 입학이라는 교육 기회의 배분이 평등하게 이루어졌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앙일보 조사그룹의 파워엘리트 조사연구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사회에서 학연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엘리트 배출 교육기관이 분화하는 ‘긍정적’ 변화가 강조되었지만, 정작 서울대라고 하는 엘리트 배출의 으뜸가는 교육기관에의 접근에 있어 사회경제적 배경 요인은 ‘계층 간의 불평등’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쳐왔다. 신문 잡지 방송 등에서 거듭하여 보도된 ‘형설지공’의 스토리를 담은 합격기가 만들어내는 사회 이미지와는 다른 불평등한 메커니즘이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서의 엘리트 형성 과정에서 작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는 짧은 기간 동안의 서울대 신입생만을 대상으로 하여 짧게 소묘하듯 살펴본 데 그쳤지만, 이에 대해서는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 보다 치밀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유념해야 할 것은 이상의 두 <표>를 통해 드러난 바,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 요인이 자녀의 명문 대학 입학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리얼리티는 일반 대중이 쉽사리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조사 자료에 기반한 사회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발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녀의 서울대 입학도 ‘하면 된다’고 믿어 꿈을 갖고 자녀의 학업을 지원하고 사교육비 지출을 주저하지 않지만, 모든 수험생에게 응시를 제도적으로 개방하는 입시제도 하에서 ‘사실상’ 동등한 학력 경쟁의 기회가 부여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사회적인 쟁점으로 부각되기도 어려운 것이다. 심지어 1969년의 대입 예비고사제도 이후 국가가 대학입시제도를 직접 관리하고 있고, 또 중학무시험제, 고교평준화 정책, 과외금지 정책 등을 통해 능력주의적인 경쟁의 기회를 개방하고 확산하는 듯한 정책적 제스처를 지속적으로 취하는 상황 하에서, 서울대 입시 선발 결과에서의 계층 간 격차 문제는 더욱 쟁점으로 부상하기 어려워진다. 달리 말해 국가가 관리하는 선발시스템이 빚어내는 공정성의 이미지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교육 기회의 계층 불평등’을 은폐하는 효과를 빚어낸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제한된 특정 시기에 입학한 서울대학교 신입생이라는 극히 한정된 집단만을 대상으로 한 매우 단편적인 자료에 의거하여 제기하는 이러한 의심을 일종의 가설로 설정하여 앞으로 보다 엄밀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또 좀더 엘리트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가 현대 한국의 엘리트들의 문화와 정신세계 그리고 그것과 계층구조 간의 관계가 지닌 특질에 접근해 가보자. 이 작업을 위해서는 현대 한국의 엘리트를 ‘비교’의 맥락에 위치시켜 상대화하여 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 여기서 주목한 것은 서구와 일본의 근대 엘리트 및 그들과 교육의 관계가 지닌 특질에 대한 선행연구다.

 

 

서구와 일본의 엘리트

 

근대 사회에서 엘리트가 고등교육기관, 특히 이른바 명문으로 여겨지는 소수의 고등교육기관을 통해 배출되는 경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심지어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이다. 한국의 이른바 SKY대학의 대응물을 각 사회에서 찾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다. 대표적인 것으로 영국의 이른바 옥스브리지로 불리는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 프랑스의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 ENS), 국립행정학원(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 ENA), 파리정치학원(Institut d’études politiques de Paris/Sciences Po), 고등상업학교(École des hautes études commerciale), 에콜폴리테크닉(École polytechnique) 등 이른바 그랑제콜(Grades écoles), 미국의 이른바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대학들(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컬럼비아, 코넬, 다트머스 등), 일본의 도쿄대학, 교토대학, 도호쿠대학 등 왕년의 제국대학들, 사회주의권의 모스크바대학,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김일성대학 등이 그것이다. 이들 대학 출신이 ‘독점’은 아니더라도 각 사회의 엘리트 지위를 상대적으로 선점하는 경향을 공통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에 졸업자들을 주로 입학시키는 엘리트 중등교육기관들이 존재하는 것도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현상들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영국의 사립기숙학교 ‘이튼(Eton)’, ‘럭비(Rugby)’, ‘해로우(Harrow)’와 같은 통칭 ‘퍼블릭스쿨(public school)’들, 프랑스의 리세(lycée)―리세는 1802년 「공교육일반법」에 의해 탄생한 중등교육기관이다. 애초에는 엘리트 중등교육기관이었고 콜레주 등과 경합했으나 교육개혁을 통해 개방적인 공립 후기 중등교육기관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리세 간에도 학교차가 존재한다. 바칼로레아는 이 리세의 졸업 인정 시험이자 대학 입학 자격시험이다. 오늘날과는 달리 19세기 후반 바칼로레아 합격자가 17세 인구에서 점하는 비율은 1%도 되지 않았으므로 여기서 애초의 리세는 엘리트 중등교육기관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리세는 프랑스혁명 이후 엘리트 양성의 ‘묘판’으로 간주되었다.23 ―, 그중에서도 그랑제콜 준비급(Classe préparatoire aux grandes écoles, 흔히 ‘프레파’라 약칭된다)을 병설한 파리의 ‘앙리4세 리세(lycée Henri IV)’, ‘루이르그랑 리세(lycée Louis le Grand)’ 등이 전통적인 리세들이다. 일본에서도 1945년 이전이라면 제국대학과 구제고등학교, 45년 이후라면 도쿄대학, 교토대학 등의 엘리트 대학과 나다(灘), 가이세이(開成)와 같은 사립 중고일관교로 불리는 엘리트 고교 등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엘리트 형성 원리의 전환을 의미하는 엘리트 중등학교의 성격에서 서구와 동아시아 간에는 구조적이라 할 만한 차이가 존재한다. 먼저 서구 사회를 보면,

 

전근대의 엘리트는 신분제에 기반한 귀족이었다. 이에 반해 근대에는 특정한 교육 자격(=엘리트 중등학교→대학)이 엘리트로의 등용문이 되었는데, 이는 신분제 원리에서 능력주의 원리로의 엘리트 편성 원리의 전환으로 포착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엘리트로의 길을 밟을 수 있는 자는 ‘교양 있는 계층’이거나 ‘교양과 재산이 있는 계층’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 엘리트 중등학교는 특히 방대한 하층 민중을 거의 완전하게 차단했다. 이런 의미에서 엘리트 중등학교의 창출은 교육을 매개로 하여 근대의 사회적 성층 구조의 유지·재생산에 봉사하는 것이었다.24

 

예컨대 영국에서의 대표적인 엘리트 중등학교는 1382년에 설립된 윈체스터칼리지(Winchester College) 이래 왕족, 귀족 등에 의한 기부금으로 설립된 사립기숙학교, 흔히 퍼블릭스쿨로 통칭되는데, 그들은 공립학교와 병립하면서 영국식의 복선형 학제를 구성하는 한 축이 되었고 지금도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퍼블릭스쿨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유수한 칼리지에 졸업생을 입학시키는 영국 엘리트의 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20세기 초 옥스브리지 학생의 거의 70%가 퍼블릭스쿨 출신자였다는 기록이 있다.25 그렇다면 민중 대상의 공립학교 교육과정과 차별화되는 퍼블릭스쿨과 옥스브리지의 교육과정에 관통하는, 동시에 영국의 엘리트 계층의 ‘교양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라틴어·그리스어로 이루어진 고전어였다.

 

그런데 왜 라틴어·그리스어였을까. 특히 라틴어는 로마제국의 몰락 이후 이미 일상어로서는 죽어버린 언어였음에도. 그런데 이를 이해하려면 중세 유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세 유럽에서 공용어는 라틴어였으므로 지식인에게 그것은 필수학문이었다. 르네상스 또한 라틴어·그리스어 등 고전어에 기반한 인문주의가 주된 내용이었고, 중세의 대학 교육은 그 두 언어 없이는 불가능했다.

 

19세기 럭비스쿨(Rugby School, 1567년 설립)의 전설적 교장(재임기간 1828~1842) 토마스 아놀드(Thomas Arnold)는 퍼블릭스쿨을 근대의 엘리트 중등교육기관으로 개혁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개혁을 주도한 인물로서 퍼블릭스쿨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엘리트 형성에서 라틴어·그리스어 등 고전어가 지닌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하여 이후 퍼블릭스쿨 교육과정의 특질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했다.

 

그리스어, 라틴어를 학교에서 축출하면 지금 세대의 사람들의 시점을 현재 및 가까운 선배들로 제한해 버림으로써 우리는 수백년에 걸친 인류의 경험을 상실하고 인류가 마치 15세기에 처음 출현한 것과 같은 상태에 빠지게 된다. ··· 그리스·로마의 정신은 우리 자신을 쌓아 올리는 정신의 기본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완성의 정화에까지 도달한 우리 인류의 정신이기도 하다. ··· 도덕적·정치적인 견해―이런 사항이 오로지 인간의 인격을 결정한다―의 점에서는 우리와 그리스·로마인은 완전히 동일하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투키디데스, 키케로, 타키투스를 고대의 작가로 부르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우리나라의 친구이자 동시대인이다.26

 

실제로 토마스 아놀드 교장 시대인 1834년 럭비스쿨의 필수과목 총 수업 시간 수 중에서 60%가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배당되었고, 역사와 성서 수업까지도 이들 고전어로 쓰인 교재를 사용했으므로 이것까지 포함하면 80%가 고전어 학습에 할당되었다.27

 

비단 영국만이 아니다. 유럽 대륙의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엘리트 중등교육의 내용적 핵심은 라틴어·그리스어 등 고전어였다. 근대 이후 독일에서 ‘교양시민층 재생산의 장’으로 간주된 엘리트 중등교육기관인 김나지움(Gymnasium)은 19세기 말 이래의 다른 비엘리트적 중등교육기관인 실과김나지움(Realgymnasium)이나 고등실과학교(Oberrealschule)와는 달리 고전어를 커리큘럼의 핵심으로 하였고, 그런 이유에서 김나지움 졸업생만이 대학의 세 기본학부 즉 신학·법학·의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 교양시민층 즉 엘리트가 될 수 있었다. 이는 고전어 습득 유무에 따라 자격사회에서의 서열이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28 현대로 들어와 보면,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그랑제콜 입학시험에서 필기시험의 하나로 ‘고전어와 고전교양시험’이 치러지는데 2021년의 경우 ‘라틴어 또는 고대그리스어 텍스트 번역과 해석’(6시간 필기시험), 라틴어 번역(4시간 필기시험), 그리스어 번역(4시간 필기시험), ‘라틴어 또는 그리스어 텍스트의 번역과 해석’(구술고사 준비 1시간30분, 구술 30분 시험) 등이 실시되었다.29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서구를 학습하며 근대교육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서구 엘리트 중등교육의 내용적 핵심이었던 라틴어·그리스어 등 고전어는 어떻게 되었을까. 메이지 정부의 교육 관계자들은 유럽의 근대교육 제도를 학습하고 취사선택하여 도입하는 과정에서 서양의 ‘근대’ 학문을 중심으로 삼고자 했다. 그들은 서구의 고전어 중심 교육과정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시아에서 유럽의 고전어·고전학에 상당하는 ‘한학(漢學)’의 위상을 유지하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중등교육의 교육과정은 완전히 서양 근대의 학문을 기초로 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리스·라틴의 고전학은 필요 없고, 한학도 또한 그것을 대신하는 위치를 부여받을 정도의 것이 아니다. 한학은 ‘한문’으로서 국어 교과의 일부로 왜소화되었고 그 대신에 영어가 가장 중요한 교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 ‘교양’의 문제는 인간 형성의 이념과 결합되어 있다. 그 인간 형성에 대한 배려 자체가 일본의 중등학교에는 결여되어 있었다.30

 

이는 근대 일본의 엘리트는 고전어로 대표되는 ‘교양’의 결여를 태생적 조건으로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는 서구의 엘리트 학교와 일본의 그것이 커리큘럼 등 문화적 내용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달랐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케우치 요는 이 차이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규정한다.

 

서구에서는 엘리트 중등학교와 고등교육기관은 전통적인 귀족 문화의 전파와 재생산 장치(→젠틀맨)였다. 신흥계급은 이러한 학교를 통해 전통문화를 모방하고 동화했다. 그런데 일본의 근대학교는 전통적 지배계급의 문화와 단절된 서구문화(→하이칼라, 인텔리)의 전파 장치로 출발했다. 그런 만큼 일본의 학교는 전통적 지배계급의 문화적 재생산 장치는 아니었다. 바꿔 말하면 서구의 엘리트 중등학교와 고등교육기관은 ‘상류계급’ 문화의 장이었던 데 비하여 일본의 그것은 ‘외래’ 문화의 장이었다. ··· 학교가 ‘외래’ 문화라는 것은 학교문화가 계급 문화로부터 독립되어 있다는 뜻이다. 엘리트 학교는 어떤 계급 집단과도 독립되어 누구에게나 동경의 대상(문화)이 된다. 바꿔 말하면 엘리트 학교의 문화가 모든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등거리에 있는, 계급 개방적인 것이 되기 쉽다는 뜻이다.31

 

일본에서도 엘리트 고등교육기관과 엘리트 중등교육기관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일본의 엘리트 고교도 엘리트 대학에 학생들을 입학시키는 주요 경로가 된다는 점에서 영국의 퍼블릭스쿨이나 프랑스의 명문 리세와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다케우치 요는 그 엘리트 학교의 교육내용이 ‘상류계급’의 문화인가 어떤 계급, 계층에게도 낯선 ‘외래’ 문화인가에 따라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고 본다. ‘모든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등거리에 있는, 계급 개방적인 것’으로서의 ‘외래’ 문화가 일본의 엘리트 학교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 ‘외래’ 문화를 성공적으로 수용한 증거를 시험을 통해 입증하여 명문 학교의 학력을 취득한 이가 엘리트로 충원된다는 것이다.

 

그런 학력 취득의 관문으로 작용하는 시험의 성격도 서구와 일본이 크게 다르다. 영국의 A레벨 시험이나 독일의 아비투어(Abitur), 프랑스의 바칼로레아(Baccalauréat) 등은 ‘일본의 입시 문제에 비하면 가정의 문화자본과 훨씬 강하게 관련되는 시험이다’.32 또 서구에서는 명문 대학으로의 선발 장치로서 에세이 형식의 필답 고사만이 아니라 구술 고사와 면접 등의 장치도 큰 비중을 점하며 활용되는데 이 과정에서도 가정의 문화자본이 관여한다.

 

예컨대 다케우치 요가 제시하는 다음의 흥미로운 사례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1972년 영국 육군사관의 선발에 공립학교 출신의 노동계급 후보자와 퍼블릭스쿨 출신 후보자가 함께 응시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면접 시험에서 두 사람은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달랐다. 노동계급 학생이 실패한 이유는 ‘그는 위엄이 없다. 부하들에게 명령을 제대로 내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퍼블릭스쿨 출신 후보자에 대해서는 실패했어도 침착하게 대처한 점이 높이 평가되어 ‘그는 매우 침착한 것으로 보였다.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라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면접시험을 통해 객관적 시험의 결과가 할인되거나 거꾸로 할증이 붙거나 하는 것이다. 계급문화가 능력으로 변환되고 평가되어 버린다.”33 이런 일은 일본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분석에 따르면, 서구와는 달리 일본의 엘리트는 독특한 특질을 지닌 존재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를 ‘학력 엘리트’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좀 더 따져보자.

 

 

일본과 한국의 ‘학력’ 엘리트

 

‘학력 엘리트’란 일본의 사회학자들이 서구와의 비교 위에서 일본 엘리트 및 그들을 낳는 제도와 문화, 장치의 특질을 집약하여 보여주는 개념으로 창안한 것이다. 아소 마코토(麻生誠)에 따르면 “학력 엘리트란, 학력 획득 경쟁을 둘러싸고는 ‘경쟁 이동’(contest mobility)을 경험하고, 졸업 후의 지위 획득 과정에서는 ‘비호 이동’(sponcered mobility)을 경험”34하는 존재로 정의된다. 여기서의 ‘경쟁 이동’, ‘비호 이동’은 미국의 사회학자 랄프 터너의 사회이동 개념35에서 비롯된 것인데, 쉽게 말하자면 학력을 취득하는 과정에서는 사회 구성원들 간에 개방적인 경쟁이 전개되지만, 일단 학력이 취득된 후에는 그 학력 및 그에 기반한 학연이 ‘제2의 신분’처럼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여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유지시키는 그런 사회에서의 엘리트를 ‘학력 엘리트’로 개념화한 것이다.

 

아소 마코토 이후 ‘학력 엘리트’ 개념은 여러 사회학자들에 의해 일본 사회와 교육의 특질을 포착하는 핵심 개념으로 활용되었다. 가리야 다케히코에 따르면, 학력 엘리트는 ‘특정한 사회계층 문화와의 근친성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대중교육이 실현하는 업적주의를 통해 선발되는’ 엘리트로서, 그들에게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보증해 준 것은 학교에서의 성공이었다. 그들이 다녔던 학교에서의 경험을 통해 특정한 ‘학교문화’는 공유하고 있을지라도 ‘특정한 계층문화의 공유를 통해 맺어진 지배적 집단’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그들과 대중 간의 문화적 차이는 별로 없다.36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탄생한 엘리트들을 대중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하나의 사회계층으로는 보지 않는다. 교육을 기축으로 새롭게 탄생한 계층 질서는 그 상위에 자리하는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통합된 집단으로 구획하지 못한다. 계층 문화를 용해시켜 문화적으로 사회의 대중화를 추진함으로써 학력사회는 문화적 선량(選良)이라고는 할 수 없는 엘리트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37 그 결과 “‘읽는 거라곤 스포츠 신문, 말하는 거라곤 영화, 하는 거라곤 마작’과 같은 생활이 이상하지 않게 통용”되며 ‘와리캉割勘, 대리출석, 컨닝은 학생의 관례다’라는 말이 버젓이 회자되는 대학문화38와 대중문화 간의 거리는 단지 한 걸음 뿐이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의 엘리트는 어떠한가. 앞서 언급한 2006년 한국의 엘리트 31,800명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그들 중 769명을 무작위로 뽑아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벤허」 14%로 1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1%, 「닥터 지바고」 9%, 「사운드 오브 뮤직」 3% 등으로 나타났고, 국내 영화로도 「태극기 휘날리며」와 「웰컴 투 동막골」이 공동 2%로 나타났다.39 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는 「삼국지」 7%, 「성경」 6%였고, 「대망」, 「죄와 벌」, 「토지」, 「칼의 노래」 등이 각 2%로 동률이었다.40 단편적인 조사이기는 하나 이상에서 언급된 리스트만 보면 엘리트가 향유하는 문화와 대중문화는 다르다고 하기 어렵다. 양자는 놀라울 정도로 연속적이다.

 

한국의 엘리트는 대학 입학 이전에 일반 대중과는 다른 교양을 익힐 틈이 없었고 그것은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고교생에게 ‘바이블’은 “‘셰익스피어’의 문장이나 무명시인의 시이든, 교과서에서 나온 영어 문제거나 일본 참고서에서 복사된 수학 문제이든 일류 대학의 출제”41 문항이었을 뿐이며 세칭 일류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4년 동안 교양서적으로 15권 정도를 읽은 사람은 15%에 불과하다는 결과가 나올 정도였다.42

 

1971년 가수 서유석은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Blowing in the Wind」의 가사를 바꿔 「파란 많은 세상」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학교 앞에 책방은 하나요 대폿집은 열이요 이것이 우리 대학가래요/ 학교 앞에 책방은 하나요 양장점은 열이요 이것 정말 되겠습니까/ 가르치는 교수님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요/ 내 친구야 묻들 말어라 너도 몰라 나도 몰라요.43

 

대학생들은 청바지를 입고 기타를 튕기며 ‘노래하고 술마시며’ 자신들의 청춘을 향유했지만, 그들의 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에 간격은 없었다. 이러한 대중문화와의 연속성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한국 학교교육의 내용은 어느 계층의 문화로부터도 중립적이며, 전근대의 지배계층의 교양의 핵심을 이루던,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당시(唐詩),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사군자(四君子)’로 대표되는 ‘유교적 교양’은 학교의 커리큘럼에 화석과 같은 흔적만 남겼을 뿐 그 중추에서 밀려난 지 오래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 들어선 근대교육의 학제는 놀라울 정도로 개방적이었고, 산업화 시기 이후에는 학교와 고용 부문 사이에 견고한 파이프가 부설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의 중학무시험제, 고교평준화 정책으로 그나마 이전까지 존속해 온 엘리트적 중등교육기관은 존재 기반을 상실했다. 다만 서열화된 대학 구조 하에서 엘리트를 배출하는 이른바 명문 대학은 여전히 존속하며 엘리트 배출의 산실로 기능했지만, 그곳으로의 접근 기회는 적어도 대중의 눈에는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장 중요한 선발 장치인 대학 입학시험은 국가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됨으로써 선발의 공정성이 담보되었고 그것이 선발 결과의 수용도를 높였다. 이 글에서 밝힌 것처럼 실제로 서울대와 같은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에의 접근 가능성은 부모의 학력이나 직업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지만 그것은 좀처럼 가시적이지 않았으며 따라서 사회적인 쟁점으로 부각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한국의 엘리트에게서는 1차 세계대전 시에 ‘진격 나팔과 함께 사병의 선두에 서서 참호를 뛰어나가고, 또 포연이 가득해 적군과 아군 중간의 무인지경에 사상병이 쓰러지면 아군 진지에서 혼자 뛰어나가 어깨에 부축하고 돌아온’44 영국 퍼블릭스쿨 출신의 사관들이 보여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한국의 남자 학력 엘리트들 이력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온갖 형태의 병역기피는 이미 대중들에게 익숙한 것들이다. 그 반면에 대중들 사이에 누구라도 개방적으로 실시되는 입학시험을 통과하면 ‘엘리트’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꿈을 갖게 함으로써 교육열을 범계층적으로 고양시키고 교육을 팽창시키는 효과가 발휘되기도 하는 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엘리트는 기본적으로 학력 엘리트였다는 점에서 그 문화와 속성, 양성과 충원의 메커니즘이 일본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다. 이는 ‘동아시아의 학력 엘리트’라는 범주도 성립시킬 수 있는 근거라고 여겨지는데, 이에 대해서는 ‘동아시아의 근대교육 형성의 특질’을 다룰 때 따로 논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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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麻生誠 (1991), 『日本の學歷エリ-ト』, 東京: 玉川大學出版部, p.10.
  2. 이규연 외 (2006), 『대한민국 파워엘리트』, 황금나침반, 48-51쪽.
  3. 이규연 외 (2006), 『대한민국 파워엘리트』, 황금나침반, 131쪽.
  4. 본디 KS란 1961년에 제정된 「공업표준화법」에 따라 1962년부터 제정된 ‘한국공업규격(Korean Industrial Standards)’의 약자였다.
  5. 이규연 외 (2006), 『대한민국 파워엘리트』, 황금나침반, 66-70쪽.
  6. 이규연 외 (2006), 『대한민국 파워엘리트』, 황금나침반, 66-70쪽.
  7. 이규연 외 (2006), 『대한민국 파워엘리트』, 황금나침반, 38쪽.
  8. 예컨대 그런 입론의 대표적인 예로 김경용 (2003), 『科擧制度와 韓國 近代敎育의 再認識』, 교육과학사. 참조.
  9. 天野郁夫 (1983), 『試驗の社會史―近代日本の試驗·敎育·社會』,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p.14.
  10. 竹內洋 (1991), 『立志․苦學․出世―受驗生の社會史-』, 東京: 講談社, pp.1-2.
  11. 정태헌 (2013), 「일제하 조선인 ‘高文’ 합격자들의 학교ㆍ관료생활과 시대인식」, 『史叢』, 79(2),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13-257쪽. 참조.
  12. 정태헌 (2017), 「‘高文’ 출신들의 해방 후 시대인식과 진로」, 『韓國史學報』, 66, 고려사학회, 230쪽.
  13. 李恒寧 「소설 靑山曲 (12)」 『京鄕新聞』 1960.11.17.석간.(4).
  14. 이항녕 (2001), 「제3부 이항녕」, 한국정신문화연구원(편), 『내가 겪은 민주와 독재』, 선인, 226-227쪽.
  15. 리영희, 임헌영 (2005),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한길사, 49쪽.
  16. 朝鮮總督府 (1934), 「官公私立學校卒業者狀況」, 『調査月報』, 11月, pp.22-80.
  17. 「入學競爭 그 안팎 (2) 受驗生氣質」 『東亞日報』 1964.2.15.(5).
  18. 「孤兒의 벅찬 榮光」 『京鄕新聞』 1963.2.12.(7).
  19. 「父情14年」 『京鄕新聞』 1963.1.28.(7).
  20. 「나는 이렇게 공부했다 ③ – 大學首席 합격자들의 성공 手記」 『京鄕新聞』 1976.1.28.(4).
  21. 「나는 이렇게 공부했다 ⑤ – 大學首席 합격자들의 성공 手記」 『京鄕新聞』 1976.1.30.(4).
  22. 「登龍門넘버원 (1) 七回高等考試의 境遇」 『京鄕新聞』 1956.2.22.(3).
  23. 渡邊和行 (2001), 「近代フランス中等教育におけるエリートの養成」, 橋本伸也(編), 『エリート教育-近代ヨーロッパの探究 4』, 京都: ミネルヴァ書房, p.90.
  24. 望田幸男 (1998), 『ドイツㆍエリート養成の社会史―ギムナジウムとアビトゥーアの世界』, 京都: ミネルヴァ書房, p.7.
  25. 藤井泰 (2001), 「近代イギリスのエリート教育システム」, 橋本伸也(編), 『エリート教育-近代ヨーロッパの探究 4』, 京都: ミネルヴァ書房, p.52.
  26. Arnold, T. (1834), “Rugby School”, Quarterly Journal of Education, 7(16). 藤井泰 (2001), 「近代イギリスのエリート教育システム」, 橋本伸也(編), 『エリート教育-近代ヨーロッパの探究 4』, 京都: ミネルヴァ書房, pp.30-31.에서 재인용.
  27. 藤井泰 (2001), 「近代イギリスのエリート教育システム」, 橋本伸也(編), 『エリート教育-近代ヨーロッパの探究 4』, 京都: ミネルヴァ書房, p.30.
  28. 望田幸男 (1990), 「ギムナジウムの社会的機能と敎養市民層への道」, 望田幸男(編), 『國際比較ㆍ近代中等敎育の構造と機能』, 名古屋: 名古屋大學出版會, p.55.
  29. 山崎晶子 (2022), 『現代フランスのエリート形成―言語資本と階層移動』, 東京: 靑弓社, p.54.
  30. 天野郁夫 (2005), 『學歷の社會史—敎育と日本の近代』, 東京: 平凡社, p.134.
  31. 竹內洋 (1993), 『パブリック・スクール―英國式受驗とエリート』, 東京: 講談社, p.171.
  32. 竹內洋 (1993), 『パブリック・スクール―英國式受驗とエリート』, 東京: 講談社, p.177.
  33. 竹內洋 (1993), 『パブリック・スクール―英國式受驗とエリート』, 東京: 講談社, pp.154-155.
  34. 麻生誠 (1991), 『日本の學歷エリ-ト』, 東京: 玉川大學出版部, p.14.
  35. Turner, R. (1960), “Sponsored and contest mobility in the school system”,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25(6), Dec., pp.855-867.
  36. 가리야 다케히코 (2023), 오성철(역), 『대중교육사회의 형성』, 학지사[苅谷剛彦 (1995), 『大衆敎育社會のゆくえ―學歷主義と平等神話の戰後史』, 中公新書, 東京: 中央公論新社], 32-33쪽.
  37. 가리야 다케히코 (2023), 오성철(역), 『대중교육사회의 형성』, 학지사[苅谷剛彦 (1995), 『大衆敎育社會のゆくえ―學歷主義と平等神話の戰後史』, 中公新書, 東京: 中央公論新社], 142쪽.
  38. 臼井吉見, 河盛好藏(編) (1973), 『大學生―こう考える葦(第二集)』, 東京: 潮文社, p.31. 오성철 (2018),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 서해문집, 310-311쪽. 재인용.
  39. 이규연 외 (2006), 『대한민국 파워엘리트』, 황금나침반, 226쪽.
  40. 이규연 외 (2006), 『대한민국 파워엘리트』, 황금나침반, 264쪽.
  41. 「入學競爭 그 안팎 (4) 出題傾向」 『東亞日報』 1964.2.19.(5).
  42. 「‘배고픈’ 讀書群」 『京鄕新聞』 1965.1.27.(3).
  43. 이영미 (2002),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황금가지, 157쪽.
  44. 池田潔 (1949), 『自由と規律―イギリスの学校生活』, 東京: 岩波書店, pp.139-140.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식민교육사 및 교육역사사회학, 동아시아근대교육의 비교사회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교육과학사, 2000),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서해문집, 2018), 역서로는 야나기 하루오의 『학급의 역사학』(교육을바꾸는책, 2026), 가리야 다케히코의 『대중교육사회의 형성』(학지사, 2023), 고마고메 다케시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공역, 역사비평사,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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