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3일을 아세요
| 일부 청소년들의 혐오와 조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단순한 금지나 훈계 대신 성찰적 질문과 공론장 경험을 통해 청소년 스스로 시민성과 애도의 언어를 기를 수 있도록 어른과 교육이 그 토양을 마련해야 합니다. |
“5월 23일을 아세요?”
좌중에 있던 누군가가 이렇게 질문했다. 순간 시끌벅적했던 자리에 정적이 흘렀다. 내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였다. ‘무슨 날일까. 광주민주화운동은 5월 18일이고, 5월엔 기념일도 많은데… 초파일인가… 그때쯤인 것 같은데 생뚱맞게 초파일을 왜 묻는 걸까.’ 질문한 사람은 좌중을 두루 살피며 대답을 기다렸다. 선뜻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0대 아이들은 이날을 대대적으로 기념한다고 해요. 온라인으로 폭넓게 전파되고 있다네요.”
비로소 기억났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일이다. 어떤 이에게는 오래 남은 상처의 기억이고, 어떤 이에게는 민주주의와 시민의 품격을 떠올리게 하는 날이다. 이 질문을 한 이는 일부 온라인 공간에서 이 날짜를 가벼운 농담의 코드로 소비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이 맥락을 잃은 채 웃음의 소재가 되는 장면 앞에서, 우리는 그들을 나무라거나 세태를 한탄하는 데 그칠 수는 없다고 했다. 달리 보면 10대들 사이에 특정한 날과 특정한 이의 죽음을 조롱거리로 삼게 된 데에는 어른들의 책임도 크다고 했다. 유독 이날의 죽음을 희화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인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10대들은 왜 이런 행동을 거리낌 없이 되풀이하고 있을까. 어른들은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가.
노무현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한 사람의 죽음을 희화화해서는 안 된다는 기준만큼은 정치적 입장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죽음 앞에서조차 조롱이 먼저 작동한다면, 그 사회는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감각부터 무너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는 공감력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공동체가 죽음을 어떻게 기억하고, 말하는가는 결국 그 공동체의 시민성을 보여 주는 척도다.
최근 일부 청소년들 사이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의 언어와 감수성을 비판 없이 답습하는 현상이 심상치 않다. 이른바 ‘일베 문화’는 사건의 맥락과 사실관계를 지워 버린 채 혐오와 조롱을 놀이의 형식으로 유통시킨다. 특정 날짜를 은어처럼 호명하고, 고인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합성해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리고 비하어를 댓글과 일상 대화 속에 아무렇지 않게 끼워 넣는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자극적인 표현이 마치 대담함이나 재치인 것처럼 포장된다. 타인의 비극은 소비 가능한 밈으로 전락한다. 그 결과 정당한 비판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인간적 경계를 그어야 하는지보다 얼마나 큰 반응을 끌어내느냐가 더 중요해지는 왜곡된 감각이 자리 잡는다. 이 모든 것이 조회 수와 수익으로 치환되면서 죄책감은 점점 무뎌진다.
익명 게시판에서 만들어진 표현은 짧은 영상 플랫폼, 게임 대화방, 오픈 채팅, 댓글창, 이미지 캡처를 거쳐 순식간에 번져 나간다. 출처도, 정치적 함의도, 역사적 상처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자극적인 말투만 떼어 와 따라 쓰는 청소년들이 적지 않다. 친구가 올린 짤을 공유하고, 유행하는 댓글을 복사해 쓰고, 더 독한 표현에 더 큰 반응이 붙는 경험을 반복하는 사이에 조롱은 하나의 놀이 규칙처럼 학습된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보일지라도, 이러한 반복은 혐오와 역사 왜곡, 죽음의 희화화를 일상 언어로 굳혀 놓는다. 맹목성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엇이, 왜 잘못되었는지 숙고하기보다 또래 사이에서 통하고 주목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시민적 판단과 공감의 근육을 서서히 마비시킨다.
청소년은 이미 수많은 뉴스와 댓글, 영상과 밈 속에서 세상을 읽고 있다. 무엇이 자극적이고, 무엇이 반응을 얻는지 누구보다 빨리 느낀다. 문제는 감각의 속도에 비해 성찰의 시간이 너무 적다는 데 있다. 우리는 청소년에게 조심하라고 말하지만, 왜 어떤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지, 왜 타인의 상처를 웃음거리로 삼아서는 안 되는지 차분히 이야기할 기회는 충분히 주지 않았다.
훈계보다 질문이 먼저다
일부 청소년들의 철부지 행동이라고만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없다. 그들의 행동이 주도적인 여론이 되고, 사회적 상상력의 주류가 된다면 그 공동체는 지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메시지도 모순적이다. 우리는 청소년에게 주도적으로 살라고 말하면서도, 사회와 역사에 대한 판단은 아직 이르다며 입을 막아 버린다. 스스로 생각하라고 권하면서도 정작 생각의 재료와 토론의 장은 충분히 내어주지 않는다. 그 사이 청소년들에게는 냉소가 바이러스처럼 퍼져 간다.
이제는 청소년들이 주체로 설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성찰적인 질문으로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 ‘그건 나쁜 짓이니 하지 마라’는 훈계만으로는 달라지지 않는다. 왜 죽음을 조롱해서는 안 되는가. 온라인에서 던진 짧은 문장이 왜 누군가에게 깊은 상처가 되는가. 기억과 애도는 왜 공동체를 지탱하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말해 볼 기회를 가질 때 청소년의 판단 능력이 커져 간다. 시민성은 정답 암기가 아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신의 언어를 돌아보는 연습을 통해 형성된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버틸 수 없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 사이에도 넘지 말아야 할 인간적 경계가 있다. 인권감수성, 성인지 능력 등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능력, 비판과 모욕을 구별하는 분별력, 약자의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는 태도가 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이룬다. 오늘 누군가의 죽음을 가볍게 소비하는 문화는 내일 다른 이의 상처 앞에서도 같은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어른들의 역할은 정답을 대신 말해 주는 데 있지 않다. 판을 열어 주고, 함께 자료를 읽고, 충분히 질문하고, 성급한 결론을 늦추는 데 있다. 교사는 더 많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깊이 듣는 사람이어야 한다. 부모 역시 ‘그런 건 몰라도 된다’고 선을 긋기보다, 왜 어떤 죽음이 사회에 오래 남는지 차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은 생각보다 훨씬 섬세하다. 필요한 것은 그 섬세함이 자랄 토양이다.
아이들은 이미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은 어디에 힘을 써야 할까. 단지 ‘댓글을 예쁘게 달자’는 수준의 예절 교육으로는 부족하다. 역사적 맥락을 읽는 힘, 디지털 공간의 말이 현실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 이해하는 힘, 개인의 표현이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따져 보는 힘이 필요하다. 교실에서 서로 다른 기사와 기록을 함께 읽고, 같은 사건을 둘러싼 감정과 해석이 왜 갈리는지 토론해 볼 수 있다. 청소년이 자료를 찾고 비교하며 자기 언어로 정리할 때 판단은 훨씬 깊어진다.
청소년에게 더 많은 공론장이 필요하다. 학생회든 학급 토론이든 청소년 언론이든 좋다. 중요한 것은 말하고, 듣고, 수정할 수 있는 자리를 실제로 경험하는 일이다. 부적절한 농담이 나왔을 때도 벌만 주고 끝낼 것이 아니라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다른 태도는 무엇일지를 함께 따져 보아야 한다. 판단의 기회를 가질 때 청소년은 자기 말의 무게를 배운다.
즉, 주도성(Agency)을 길러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주도성은 자기관리 능력과 다르다. 계획표를 잘 짜고, 성과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능력만으로는 주도성이 길러지지 않는다. 진짜 주도성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를 넘어 ‘내 말이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함께 고민하는 데서 시작된다. 조회 수와 즉각적인 웃음보다 타인의 상처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 그것이 민주시민의 주도성이다.
이미 여러 자리에서 청소년들은 건강한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중 하나가 2018년 한국교육개발원(KEDI)이 주관한 ‘학생들이 제안하고 만들어가는 교육정책’ 학생포럼이었다. 경기도의 일반고 7개교와 특성화고 2개교에서 학교별로 5명씩 선발된 약 40명의 학생들은 대학입시, 진로교육, 수업 및 평가, 교육과정, 생활지도 및 자치활동, 학교시설 등 여섯 가지 주제 가운데 하나를 맡아 토론했다. 학생들은 학교 현장에서 몸으로 겪은 문제를 자기 언어로 풀어내고, 고교 교육이 어디에서 막히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해석과 제안의 문장으로 연결해 냈다. 당시에도 많은 어른들은 “입시체제 아래에서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이 포럼은 그 걱정을 불식시켰다. 청소년은 이미 교육의 객체가 아니라 학교와 교육정책을 읽고 말하며 제안할 수 있는 주체라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
최근 윤석열 탄핵 과정을 지나며 우리가 확인한 것도 같은 가능성이었다. 이른바 ‘빛의 혁명’이라 불린 광장에는 청소년들도 분명한 시민으로 서 있었다. 누가 시켜서 나온 것이 아니라 왜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는지, 왜 헌정 질서를 지켜야 하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며 거리로 나왔다. 응원봉과 손팻말, 자유발언과 노래, 온라인 카드뉴스와 또래 간 대화를 통해 청소년들은 자신의 언어로 시대를 해석하고 광장의 의미를 확장해 갔다. 그 과정은 단순한 참여를 넘어 공적 언어를 배우고 민주주의의 감각을 몸으로 익히는 시민적 훈련이었다.
집회 현장 안팎에서 청소년들은 또래의 언어로 상황을 기록하고 발화했다. 탄핵의 쟁점을 정리한 게시물을 만들고, 계엄과 민주주의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나누고, 학교와 지역에서 작은 토론과 연대를 조직했다. 어떤 청소년은 광장에서 자유발언으로 자신의 불안과 분노, 그리고 바라는 사회의 모습을 또렷하게 말했다. 또 어떤 청소년은 온라인에서 왜 지금 침묵해서는 안 되는지를 설명하며 참여의 문을 넓혔다. 기성 언론이나 정당 정치가 다 담아내지 못한 감각과 언어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청소년은 이미 현실을 해석하고 공론장에 개입하는 시민이다.
이 사례들이 보여 주듯, 청소년은 기회를 얻을 때 생각보다 훨씬 깊고 책임 있게 판단한다. 학교의 불합리한 규칙을 바꾸기 위해 의견을 모으고, 지역 문제를 조사해 공론장에 올리고, 자신이 겪은 차별을 언어로 정리해 침묵을 흔드는 청소년들이 있다. 생각할 기회를 얻을 때 청소년은 가벼운 소비자가 아니라 문제를 자기 삶과 연결해 받아들이는 시민으로 성장한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바로 그 가능성이다.
시민은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5월 23일을 기억하느냐는 질문은 단순한 추모의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어떤 언어를 용인할 것인지, 어떤 감수성을 다음 세대에 건넬 것인지를 묻는 일이다.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장난 하지 마라’는 금지보다 왜 그런 장난이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교육이다. 애도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약해지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시민으로 자라는 일이다.
학교는 시험 문제만 푸는 곳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문장을 배우는 곳이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용어 몇 개를 외운다고 익힐 수 없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싶은 순간 멈추어 서는 힘, 다수의 웃음 속에서도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역사적 비극을 남의 일로 밀어내지 않는 감수성 속에서 자란다. 청소년은 바로 그 훈련의 중심에 서야 한다.
5월 23일을 아세요? 이 질문은 단순한 상식 퀴즈가 아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사회가 무엇인지, 기억과 애도를 어떻게 다음 세대와 나눌 것인지 묻는 질문이다. 그 책임은 청소년에게도 열려 있어야 한다. 청소년이 자기 언어로 역사와 공동체를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다음 세대를 시민으로 대하게 된다.
교실과 가정, 마을에서 이 질문이 더 자주, 더 진지하게 오가기를 바란다. 우리는 왜 기억해야 하는가. 왜 타인의 고통을 웃음으로 바꾸어서는 안 되는가. 어떤 공동체를 다음 세대에 남기고 싶은가. 청소년은 이 질문 앞에서 충분히 사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다. 청소년을 배제한 채 시민성을 말하겠다는 선언은 끝내 공허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 건네야 할 것은 조롱의 기술이 아니라 애도의 언어이며, 반응의 속도가 아니라 공적 판단의 힘이다. 5월 23일을 기억하자는 말은 결국 한 사람의 죽음을 넘어, 죽음 앞에서조차 인간의 품위와 공동체의 경계를 잃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는 요청이어야 한다.
|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 필자의 저작권 보호를 위해, 기존의 PDF 파일을 제공하던 서비스를 중단합니다. 대신 아래의 ‘인쇄(Print)하기’ 클릭한 후, ‘Ctrl + P’를 누르시면 칼럼 내용을 인쇄할 수 있습니다. |
구리 인창고 교장을 마치고, 현재 경기도지속가능발전협의회(G-SDGs) 교육위원장, 온배움터(구 녹색대) 생태교육연구소 소장, ‘김덕년의 행복한 학교이야기’ DJ 등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꿈꾸고 싶은 교육낭만주의자로, 교육문제를 아이들의 시각으로 접근하려고 합니다. 연세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에서 국어를 공부하고, 온배움터(옛 녹색대) 생태교육과에서 생명이 중심이 되는 교육생태계를 고민했습니다. 저서로는, <주도성과 진로교육>(교육과실천, 2025)[신간], <주도성>(교육과실천, 2023), <아름다운 숲을 닮은 배움공동체>(케렌시아, 2022), <교사교육과정>(교육과실천, 2022), <포노사피엔스를 위한 진로교육>(교육과실천, 2021), <과정중심평가>(교육과실천, 2018), <교육과정-수업-평가-기록 일체화>(에듀니티, 2017) 등이 있습니다. 연구로는, <고교 교육 환경 변화 전망과 과제:학생들의 시선으로>(한국교육개발원, 2018), <학생부종합전형의 내실화와 교육과정-수업-평가-기록 일체화 연계방안>(한국외대,2018), <학교생활기록부 기반 면접 및 구술고사 연구>(서울대, 2017) 등을 진행했습니다.

정치적 논란을 떠나서, 아이들 사이에 대상불문하고 약한것, 본인과 다른 것, 이질적인 문화 등 조롱과 혐오가 마치 놀이나 장난 위트 있는 조크로 고착화되는 문화가 걱정스럽습니다. 배려와 이해 그리고 양보하다 내 것만 놓치고 내 순서를 놓친다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런 가치가 존중받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에게는 방송,유튜브 등 미디어 영향이 크다고 보는데 그런 코드를 재미인냥 반복적으로 심어 놓는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면, 반대로 미디어가 이런 극단의 코드를 순화시켜야 된다고 봅니다.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