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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교육의 문제를 푸는 책들(2) – “대중교육이라는 신화를 벗기다” (Revised)

#1471 이찬승, 교육을바꾸는사람들 대표 2026.03.17

Gordon Tait 외, 『Making Sense of Mass Educ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제4판) 비평

                                                                                                                                 

 

학교는 공정한 곳인가. 노력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는 곳인가. 교육은 불평등을 줄이는가, 아니면 재생산하는가. 이 질문들은 새롭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해 이미 답을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그 답의 상당 부분이 신화(myth)에 가깝다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여기서 신화란 거짓말이 아니라, 사회가 검증 없이 공유하는 집단적 전제를 뜻한다.

 

퀸즐랜드 공과대학(QUT)의 고든 테이트(Gordon Tait)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이 쓴 『Making Sense of Mass Education』은 대중교육(mass education)에 관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믿음들을 하나씩 문제 삼고 그 근거를 따져보는 책이다. 사회계층, 젠더, 인종, 기술, 미디어, 철학, 법과 윤리까지. 다루는 범위가 넓지만 방만하지 않다. 각 장마다 하나의 신화를 먼저 제시하고, 그것이 왜 신화인지를 사회학·철학·문화연구·법학의 시각을 교차시키며 해부한다. 이 책이 호주의 교원양성 과정에서 오랫동안 필독서로 자리 잡아온 이유가 여기 있다.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다루는 신화는 ‘능력주의(meritocracy)’다. 학교는 출발점의 차이를 능력과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믿음. 교사들도, 학부모들도, 학생들도 이것을 믿는다. 아니,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데이터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연구들에 따르면, 학업 성취도와 사회경제적 배경 사이의 상관관계는 수십 년이 지나도 완고하게 유지된다. 부유한 가정의 자녀가 좋은 성적을 받는 비율은 저소득층 자녀보다 현저히 높고, 이 격차는 단순히 학습량이나 성실성의 차이로 설명되지 않는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문화자본(cultural capital)’ 개념이 여기서 힘을 발휘한다. 학교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언어 습관, 독서 태도, 지적 호기심, 시험에 임하는 방식— 이 모든 것들이 이미 특정 계층의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된다. 교사가 학생에게 “질문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할 때, 어떤 학생에게 그것은 당연한 태도이고, 다른 학생에게는 낯선 문화적 요구다.

 

한국의 교실을 떠올려보면 이것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강남과 지방 소도시의 학업 격차, 사교육 접근성의 차이, 부모의 학력과 자녀의 대학 진학률 사이의 관계. 이것들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하면 된다”는 언어로 학생들을 독려한다. 저자들은 이 언어가 때로 불평등 구조를 개인의 책임으로 치환하는 기능을 한다고 지적한다.

 

능력주의를 버리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신화적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을 때—실제 구조적 불평등을 은폐하면서도 공정한 시스템의 외양을 유지할 때— 교육은 해방의 도구가 아니라 현상 유지의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는 지식만 가르친다”는 신화

 

학교가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라는 생각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는 생각은 신화다. 다소 낯설지만 읽다 보면 점점 설득력을 갖는 개념이 있는데, 바로 ‘거버넌스(governance)’와 ‘주체성(subjectivity)’이다. 거버넌스는 단순한 통치나 관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메커니즘을 가리킨다. 주체성은 그 결과로 형성되는 인간의 자아상, 즉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는 내면의 감각이다. 쉽게 말하면, 학교는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유형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두 개념을 이론적으로 가장 날카롭게 정식화한 사람이 바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다.

 

미셸 푸코의 통치성(governmentality) 개념을 교육에 적용하면 이런 질문이 나온다. 학교는 어떤 유형의 학생을 ‘정상’으로, 어떤 학생을 ‘문제’로 규정하는가. 집중력이 낮은 아이는 ADHD로 진단받고, 규칙에 저항하는 아이는 행동 장애로 분류된다. 이 진단들이 아이를 돕기 위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행동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허용 가능한 것’인지를 규정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저자들은 이것이 음모론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학교는 의도적으로 아이들을 억압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근대적 대중교육 시스템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특정한 규범과 기대를 내면화한 인간 유형을 생산하는 기능이 구조 속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실하고, 시간을 잘 지키고, 권위에 순응하며, 정해진 평가 방식에 적응하는 인간. 이것이 나쁜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이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아이들이 어떻게 규정되고 다루어지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교실에서 흔히 들리는 말들이 있다. “왜 이렇게 산만하니”, “왜 시키는 대로 안 하니”, “저 아이는 문제가 있어.” 이 진단이 아이의 개인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학교라는 특정한 규범 공간에 맞지 않는다는 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경쟁이 교육을 개선한다”는 신화

 

이 책의 4판에서 특히 강화된 논의가 있다. 경쟁을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신화, 즉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와 ‘교육의 시장화(marketisation)’다.

 

학교 선택제, 교장 공모제, 학교 성과 평가, 순위 공개. 이러한 정책들은 경쟁을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논리 위에 서 있다. 시장 원리가 교육에 적용되면 비효율이 줄고,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권이 확대된다는 주장이다.

 

저자들은 이 논리를 단순히 반박하는 대신,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추적한다. 학교 순위가 공개되면 학교들은 평가 지표에 유리한 학생을 선발하려 하고, 불리한 학생은 점점 주변으로 밀려난다. 경쟁이 심화될수록 취약계층 학생이 많은 학교는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해지지만, 시장 논리는 그 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성과가 높은 학교에 더 많은 선택과 자원이 몰리고, 격차는 오히려 확대된다.

 

이 과정에서 평가 체계는 경쟁을 촉진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호주의 NAPLAN(전국 표준화 학업성취도 평가)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시험은 교사들의 수업 방향을 시험 대비 중심으로 재편시켰고, 지역과 계층 간 격차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그 격차를 줄이는 데에는 제한적인 역할만을 했다. 측정은 강화되었지만, 개선은 따라오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한국은 학교 순위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지만, 몇 년마다 공개되는 서울대 신입생 통계는 사실상 유사한 역할을 한다. 서울대 신입생 중 강남 3구와 자사고·특목고 출신 학생의 비중이 높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수치들은 경쟁 체제가 약속했던 것—노력하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다는 믿음—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경쟁은 기회를 고르게 분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유리한 위치에 있던 학교와 학생에게 더 많은 자원과 선택이 집중되었다.

 

NAPLAN이 호주에서 보여준 것은 시험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평가가 경쟁을 만들고, 경쟁이 서열을 만들며, 서열이 다시 격차를 확대하는 구조다. 한국은 그 구조를 이미 익숙한 방식으로 반복하고 있다. 시험 대신 입시 실적이, 점수 대신 대학 이름이 그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기술이 교육을 구한다”는 신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교육계에는 기대가 넘친다. 텔레비전이 나왔을 때 “교실의 벽이 무너진다”고 했고, 인터넷이 퍼졌을 때 “모든 아이에게 평등한 지식이 열린다”고 했으며, 스마트폰이 등장했을 때 “언제 어디서나 학습이 가능해진다”고 했다. 지금은 AI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AI가 개인 맞춤형 학습을 실현하고,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며, 교사의 한계를 넘어설 것이라는 기대다.

 

저자들은 이 기대가 근거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반복되는 이 패턴—가능성을 과장하고, 기술 자체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맥락과 조건에 대한 논의를 생략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자고 요청한다.

 

디지털 기술이 교육 격차를 확대하는지 줄이는지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여기에 누가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달려 있다. 같은 AI 도구를 쓰더라도 결과는 다르다. 질문을 정교하게 구성할 줄 아는 아이는 AI를 사고의 도구로 활용하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는 답을 복사하는 데 그친다. 질문의 질은 언어 능력과 배경지식에서 나오고, 그것은 다시 가정환경과 교육 경험에서 온다. 기기가 같고, 앱도 같고, 심지어 AI도 같다. 그러나 그것을 다루는 능력은 같지 않다.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는 기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 기기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조건의 문제다.

 

 

“교사의 판단은 중립적이다”라는 신화

 

교사가 수업에서 마주치는 판단들—이것을 가르쳐도 되는가, 이 학생에게 이렇게 해도 옳은가, 이 규칙은 정당한가—은 결국 윤리적 질문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런데 교원양성 과정에서 이 부분은 대체로 가장 소홀히 다루어진다.

 

저자들은 두 가지 대표적인 윤리 관점을 소개한다. 하나는 의무론적 윤리(deontological ethics)로, 어떤 행동이 규칙이나 권리를 침해하는지를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결과주의 윤리(consequentialism)로, 그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예컨대 수업 시간에 계속 떠드는 학생을 교실 밖으로 내보내는 일은 다수의 학습권을 위해 한 학생을 배제하는 결정이다. 결과주의적으로 보면 이 조치는 다수 학생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학생의 권리와 존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다른 판단이 가능하다.

 

이 책의 목적은 어느 쪽이 정답이라고 선언하는 데 있지 않다. 대신 교사가 이런 판단을 무심코가 아니라 이유와 원칙을 가지고 숙고하도록 돕는 데 있다. 교실의 윤리적 결정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중요한 것은 어떤 판단을 하느냐보다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한국 교육에 적용하면

 

이 책은 호주의 맥락에서 쓰였다. 원주민(Indigenous Australians) 교육, NAPLAN, 호주의 교원 전문성 기준(APSTs) 같은 구체적인 사례들이 등장한다. 한국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던지는 핵심 질문들—교육은 불평등을 재생산하는가, 학교는 어떤 유형의 인간을 만드는가, 능력주의는 공정한가, 기술은 격차를 줄이는가 등—의 문제의식은 한국 교육에도 정확히 유효하다. 오히려 극단적인 입시 경쟁 구조, 사교육 의존도, 전국 단위 시험의 지배력을 생각하면, 이 질문들이 더욱 첨예하게 와닿는 맥락이 한국일 수도 있다.

 

이 책은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정책을 도입하라거나, 어떤 교수법을 사용하라거나. 대신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이끈다. 신화를 벗기고 나면 더 정직한 질문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더 정직한 질문에서 더 나은 교육이 시작될 수 있다.

 

 

맺으며: 교사들에게

 

이 책이 해부한 신화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학교는 지식만 가르치는 곳이라는 생각, 경쟁이 교육을 개선한다는 논리, 새로운 기술이 교육을 구한다는 믿음, 교사의 판단은 중립적이라는 전제. 이것들은 모두 거짓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로서 작동한다. 완전히 틀린 믿음은 쉽게 의심받지만, 절반쯤 맞는 믿음은 검증 없이 유통된다. 그리고 이 신화들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매일 아침 교사가 들어서는 교실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예컨대 이런 장면이다. 교실에서 유독 눈에 띄는 아이들이 있다. 자꾸 돌아다니는 아이, 말을 듣지 않는 아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 한국의 교사들은 이런 아이들을 어떻게 볼까. 이 아이들이 가진 어떤 결함의 문제로 볼까, 아니면 교실이라는 공간이 이 아이들에게 맞지 않을 가능성도 함께 보는가. 아이를 결함으로만 본다면, 학교가 특정한 인간형을 정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학교는 지식만 가르친다”는 신화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교실이 맞지 않을 가능성을 외면한다면, 그 판단이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도 외면하는 것이다. 이는 “교사의 판단은 중립적이다”라는 신화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책은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사회학과 철학의 개념들이 촘촘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그 개념들은 추상적인 이론에 머물지 않는다. 결국 교사가 교실에서 마주하는 구체적인 상황들—학생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규칙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무엇을 공정하다고 볼 것인가—과 연결된다. 교육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질문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교사들에게 요청하는 전부다. 교실에서 “왜?”를 묻는 아이를 귀하게 여기는 교사가 결국 자신의 교실에 대해서도 “왜?”를 묻게 된다.

 

 

※ 이 시리즈는 AI 도구를 활용해 원서의 핵심 내용을 추출하고, 필자가 내용을 검토·수정하여 한국 교육 현실에 맞게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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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바꾸는사람들 대표 이찬승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짧은 직장 생활을 경험한 후 지금의 능률교육(NE능률)을 창립하여 30년을 경영하면서 영어교과서와 참고서 등 다양한 저술활동을 했다. 2009년 회사를 매각하고,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이란 비영리 공익단체를 설립하여, 현재 이 단체 대표직을 맡고 있다. 국가 교육시스템 재 디자인과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동, 청소년들도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개혁에 특히 관심이 많다. 수업혁신과 교육격차 완화를 위해 학습과학의 연구와 전파, 그리고 교원 연수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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