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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12) – “5·16 군사정변과 교육”

#1467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2026.03.04
군부 세력이 통치하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재생산되고 산업화와 경제성장, 근대화라는 구조적 변화가 전개되는 시기를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의 세 시기로 나누어 각 시기별로 교육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검토합니다.

 

 

1960년 4월혁명 이후 범사회적으로 고조되었던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민주화와 변화의 시도는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가 이끄는 쿠데타 세력의 내란으로 인해 일거에 장벽에 부딪혔다.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1980년대 후반까지 오랜 기간 동안 군부 세력이 통치하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재생산되면서 또 한편에서는 산업화와 경제성장, 근대화라는 구조적 변화가 전개된다. 이를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의 세 시기로 나누어 각 시기별로 교육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검토해 본다.

 

 

5·16 군사정변과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

 

5·16 군사정변이 교육계에 미친 영향은 가장 먼저 교원노조에 대한 가공할 탄압으로 나타났다. 5월 18일부터 교원노조 지도교원들에 대한 전국적인 검거가 시작되어 천오백여 명이 구속되었고 결과적으로 주요 간부 6명이 최고 무기징역을 포함한 5년에서 10년까지의 장기 징역에 처해졌다.1 군사정변을 일으킨 세력은 4·19정신의 계승을 표방했지만 그 4월혁명의 중요한 성과였던 교원노조가 일차적으로 궤멸 대상이 된 것이다.

 

정변을 일으킨 군부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입법·사법·행정 3권을 장악하고, 국회와 지방의회를 해산했으며 이 위원회는 5월 18일 장면 총리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아 5월 19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이하 ‘최고회의’로 약칭)로 개칭되었고 20일에 내각 구성을 발표하여 군사정부를 수립했다. 이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여러 개혁 조치들이 취해졌는데 그 안에는 물론 교육 관련 정책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5월 26일에 최고회의는 문교 관련으로 다음 조치들을 발표했다.

 

1. 학원의 명랑화를 기해야 되겠으며 정치적 활동과 노동조합은 있어서는 안되겠다. 2. 각종학교의 신설은 일체 중지한다. 3. 혁명과업 완수에 적극 노력한다. 4. 잡부금을 받는 실태를 철저히 조사한다. 5. 학원부패를 일소한다(문교부에서는 부정입학의 책임을 묻고 경기중고교장 조병욱 서울중고교장 서원출 경기여중고교장 조기흥 용산중학교장 민승복 이상 네 명을 의원면직시켰다). 6. 명년도 대학중고교 입시요강을 오는 7월 15일까지 발표한다. 7. 교육공무원으로서 병역을 미필한 자는 단시일 내에 정리한다. 8. 교직자 중 병역기피자는 자진 물러나기 바란다 9. 민원함을 설치하여 민원을 살핀다. 10. 중고교 학생의 좋은 교풍을 창조한다. 11. 국가재건을 위해 국민의 각별한 협력을 요망한다. 12. 국민의 단결을 촉진하는 시책을 강구한다.2

 

정변의 정당성을 호소하기 위하여 이른바 ‘깡패’들을 정리했듯이, 교육계에서도 잡부금을 부당징수하거나 부정입학에 관여한 부패한 교원들, 병역을 기피한 교원들, 무엇보다도 교원노조 활동을 한 이들을 추방하는 것으로 문정을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임시적인 조치에 그치지 않고 최고회의는 보다 적극적인 교육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그 주요 내용을 국가재건최고회의공보부가 최고회의 1주년을 맞아 작성한 ‘업적보고’에 의거해 살펴보자.

 

(가) 교육기관의 정상화

 

1. 학원내의 교직원간, 교원과 학생간 또는 교직원과 이사진간의 불화, 교원노조문제로 인한 분규 및 이사진의 모리행위 등을 조사하여 학교폐쇄, 재단이사승인취소 등 단호한 조치로 이를 종식시켰다. 그 내용을 살펴볼 것 같으면 중고등 및 대학관계 분쟁법인수가 총 40개처였는데 5.16 이후 32개처를 해결했다.

 

2. 대학의 정비강화 ① 종래의 대학은 양적으로만 팽창(8·15당시 학생수 7,819명, 인구대비 0.005%, 현재 142,576명 인구대비 0.57%)하였을 뿐 질적으로는 매우 저조하였을 뿐 아니라 무계획한 대학의 난립은 고등유민의 대량배출(졸업자의 약 60%)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사회악이 조성되었으며 농촌경제는 더욱 마비되었다. 이에 혁명정부는 단호히 대학정비에 착수하여 61년 8월 12일 각의의 결정을 비롯한 수차에 걸친 단계적 조치로 지난 11월에 그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4년제대학 정비상황은 정비전의 전국각대학생수가 주야간, 국공사립을 합하여 총 91,920명이었는데 5·16이후 25,510명(28%)을 감하여 66,410명이 되었다. ② 교육대학의 설립 국민학교 교원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2년제 교육대학 10개교가 창설되었다. 이는 기존사범학교의 폐지, 부속 또는 병설의 조치로서 설립된 것이다.

 

3. 실무초급대학의 강화 경제개발오개년계획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한 인적 요소로서의 기술인 및 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실무교육의 강화방침에 따라 실무초급대학을 대폭 확충하였다. 그 내용은 5·16 이전에 실업계 초급대학총수가 12개교(학생수 3,208명)였는데 5.16 이후에 27개교(학생수 10,590명)로 확충되었다.

 

(나) 교육행정의 쇄신

 

1. 학원의 정화책으로서 잡부금의 징수를 금지하여 학원의 부패를 막았으며, 과외수업을 금지하는 한편 부정입학을 단속하였다. 그리고 학원부패의 온상이었던 사친회(후원회)를 폐지하였다.

 

2. 청신하고 소박한 기풍을 진작하기 위하여 중고등학생의 두발, 남녀대학생의 복장 등 그 규준을 설정하여 시달 실시하였고 도의확립을 촉구하였다.

 

3. 교육공무원의 인사교류를 꾀하기 위하여 교육공무원인사교류요강을 제정하고 종래 정실에 얽히고 침체되었던 인사교류의 공평을 기하였다.

 

4. 교육공무원법에 엄연히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정권에서 지급치 않았던 교원법정수당지급의 제규정을 제정 실시하였다. 이는 법제정 공포이래 8년간의 숙제를 일거에 해결한 것이다.

 

5. 학기제의 변경(종래의 학기초 4월1일을 3월1일로)을 단행하여 우리나라 실정에 가장 적합하게 하였다.

 

6. 의무교육을 강화하여 의무교육시설기준법을 제정하고 학구제를 철저하게 실시하였으며 의무교육경비를 확보하는 등 국민학교피해(사라호) 교실복구를 위하여 총소요자금 5억8백85만환 중 국고에서 부담키로 된 1억7천2백만환을 각 해당학교에 지난 10월 1일자로 배치하였다.

 

7. 종래의 각자만의 장학제도를 지양하고 실질적인 학비보조로서 학업후 상환을 전제로 하는 ‘대여장학금제도’를 창설 실시하였다.

 

8. 입시제도를 개혁하여 지역사회의 발전과 향토교육의 건전한 육성을 목표로 하는 입학고사제도를 제정하였다.

 

9. 교과서 편수업무로서 반공교육 지도서를 편찬하고 도서지구 및 벽지학교에 대하여 도서를 무상급여하였으며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한국어를 신설하고 각 학교에 체육시간을 증가했으며 입학전형에 체능실기고사를 실시하였다.

 

10. 교원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실업계강습 527명 기타 각종강습 7,225명 계 8,552명의 재교육을 실시하였다.

 

11. 교육계의 부패를 단시일 내에 일소하고 국민교육의 정상적 질서를 회복하고 이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국·공·사립을 막론하고 적용되는 「교육에 관한 특례법」을 공포하였다.3

 

이상의 다양한 개혁 조치들 중에는 (나)의 3. ‘교원 인사교류’나 4. ‘교원법정수당지급’, 7. ‘대여장학금제도’와 같은 반드시 필요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나)의 1. ‘잡부금징수금지 및 사친회 폐지’나 6. ‘의무교육강화’ 등 학부모들로부터 환영받을 만한 조치들도 있었다. 그러나 (가)의 1. ‘학교폐쇄와 재단인가 취소’나 2. ‘대학정원감축’ 등의 조치는 과격한 내용을 담고 있었던 만큼 교육계에 파란을 일으켜 그 시행에 난관이 발생하거나 결국 철회되기도 했다.

 

(나)의 2. ‘중고등학생의 두발’ 규준 설정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정변 초기의 문교차관이었던 서명원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의 학생 두발 정책은 정권마다 다소 달랐다. 제2공화국 때는 ‘짧게’였다. 죄수들처럼 보이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혁명정부는 단정을 강조하며 일제시대 때처럼 ‘빡빡’ 깎도록 정책을 바꾸려 했다. 나는 반대였다. 외국인에 대한 이미지도 중요하다며 약간 앞머리를 기르게 하도록 해달라고 장학관실의 군인들을 설득했다.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정책을 ‘짧게’로 되돌려 놓았다. ··· 문제는 받아들이는 측의 예단이었다. ‘짧게 깎으라’는 공문을 일선으로 내려 보냈더니 일선 학교에서는 “빡빡”으로 해석해 버렸다. ··· 다시 거리에는 ‘죄수’들이 등장했다. 나의 노력은 헛되었다.4

 

이후 1980년대의 두발 및 복장 자율화 조치 도입 이전까지 오랜 기간 지속된 중고등학교 학생의 두발 및 복장 규제는 군사정변을 계기로 새롭게 시작된 것은 아니며 1950년대에도 관행처럼 지속되어 왔는데 5·16은 그에 이렇다 할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고 오히려 그것을 재생산했다.

 

한편, (나)의 5. 학기제 변화와 관련해서도 4월이 3월로 바뀐 연유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증언이 있다. 역시 서명원의 증언이다. 그는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였다가 4월혁명 이후 장면 정권에 이화여대 대학원장이었던 오천석이 문교부장관으로 부임하면서 함께 ‘사무차관’(60.8.30-61.7.9)이 되었고 5·16 군사정변 이후에도 한동안 문교차관의 지위에서 당시의 문정을 경험했다.

 

당시 우리나라에 와있었던 조지 피바디 팀이 한국의 고등교육을 보고 비난하였습니다. ··· 동숭동 같은 경우에는 ‘대학의 대학’이라는 체면상 ‘개학했다고 개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4월 20일 경에 개강이 되었습니다. ··· 4월 20일부터 조금 하다가 5월 지나고 6월 하순이 되면 더워서 못한다고 하여 휴강하고, 또 명교수일수록 휴강을 해야만 권위가 선다고 해서 일찍 끝나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내정간섭은 아니지만 이것은 안되겠다고 하여 그러느니 개학일자를 3월로 당기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3월 20일 경에 강의가 시작될 수 있지 않겠는가(웃음) 하는 농담이 나온데서부터 이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5

 

식민지기 이래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4월 학기제를 3월 학기제로 바꾸기 위해 제도적 검토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주로 대학에서 만성적으로 유지되던 ‘휴강’ 관행에 대한 조지 피바디 미국교육사절단의 지적이 계기가 되어 수업 정상화를 위한 임기응변적 조치로 3월 개강이 제안되었던 것이 군사정권에 의해 전격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정변 이후의 교육 관련 가장 중요한 개혁 조치는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으로 법제화되었다.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법률제708호)이 1961년 9월 1일 제정되었다. 이는 전문 22조와 부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주요 내용은 1. ‘문교재건자문위원회’ 설치, 2. 대학의 학교, 학과의 폐합 및 환치 명령(정원 재조정 포함), 3. 교육대학설치, 4. 교육자치제 폐지(교육감을 내각 수반이 임면), 5. 내각 수반의 국·공립대학 교원 임명, 6. 대학 전임강사 이상의 임용 시 교수자격심사, 7. 교육공무원법에 준한 사립학교 교직원의 임명과 징계, 8. 교원의 노동운동 및 집단적 행위 금지, 9. 명예교수제 도입, 10. 교원 정년 단축(65세를 60세로 단축), 11. 교감제 정지, 12. 학사고시제 도입, 13. 사립학교 이사의 승인제 등이었다.

 

이들 내용을 담은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이하 ‘임시특례법’으로 약칭함)은 그것이 ‘임시특례’를 정한 법이었던 만큼, 그 내용 중 일부는 향후 「교육법」, 「교육공무원법」 등의 개정으로 이어지거나 아니면 「사립학교법」(1963.6.26. 법률제1362호) 제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임시특례법’은 1963년 12월 5일에 법률 제1466호로 폐지될 때까지 2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존속한데 그쳤는데, 그 과정에서 교수 임용 심사제 조정, 교감제의 환원, 학사 자격고시제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네 차례의 개정을 거치는 등 그 불완전성과 임기응변성을 노정했다. 교원 정년을 일거에 60세로 줄이는 등의 파격적인 조치도 1964년 1월에 종래의 65세로 환원되었고,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입학에 국가고사를 도입하는 조치도 1963년 4월 2일에 폐지되었던 것이다.

 

군부세력에 의한 교육개혁 조치 중에서 아마도 국민들이 반갑게 받아들였을 것들 중 하나가 ‘사친회’ 폐지였을 것이다. 일선 학교에서 학부모들이 ‘사친회비’의 형식으로 학교운영비 및 교원 인건비의 적지 않은 부분을 부담해 왔다는 점에서 ‘사친회’ 자체의 폐지는 환영받을 만했다.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사친회’를 대신하는 ‘기성회’라는 새로운 조직이 도입, 운영됨으로써 사실상 이 조치는 무화되어 버렸다. ‘최고회의’ 2주년의 문정 보고에서 당시의 문교부장관 이종우는 다음과 같은 논리로 ‘기성회’ 도입을 정당화했다.

 

과거에 있어서는 국가 또는 지방단체의 예산부족과 설립재단의 재원부족으로 인하여 그 시설비를 보호자의 부담에 의지하게 되어 국민의 교육비 부담이 과중하였으므로 혁명정부는 학교 제잡부금 징수를 철폐시킴에 이르렀으나, 학교시설을 확보할 대책으로서 수익자 부담의 원칙하에 회원인 보호자로부터 회비를 징수하여, 설립자의 재력이 미치지 못하는 국·공·사립의 시설을 보충하여 중·고교 및 대학(교)교육의 시설을 개선하였다.6

 

그는 ‘사친회’를 대신하는 ‘기성회’의 도입을 오히려 ‘성과’로 제시했다. ‘수익자부담의 원칙’이라는 미명 하에 교육 팽창의 비용을 학부모에게 전가하는 교육재정구조에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군사정권이 시행한 조치들 중에서 가장 큰 물의를 빚은 것은 대학 정원의 급격한 감축 조치였다. 박정희가 임명한 군사정권 하의 초대 문교부장관은 해병대 대령이었던 문희석(문교부장관 재임기간 1961.5.20.〜1962.1.8.)이었다. 그는 1961년 9월 중순의 국립대학총학장회의에서의 훈시를 통해 대학생 정원을 10만여 명에서 5만 명으로 절반을 감축하겠다고 선언했다.

 

문장관은 이 계획의 구체적인 것으로서 ‘대학생정원에 있어 국공립대학생수를 약 2만 명으로 하고 사립대학은 약 3만 명으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 특히 문장관은 이들 대학생을 양성하는데 인문계를 30%, 실업계를 70%로 구분할 방침임을 또한 밝혔다. 그러나 국공립대학에 있어서는 인문계를 17%, 실업계를 83%로 하여 실업교육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말했다.7

 

당시의 한국 실정으로 볼 때 너무 많은 대학생을 절반 가량으로 줄이는 한편, 경제성장을 위한 인력 양성기관으로 고등교육기관을 재편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당시 최고회의의 대학 정비 사업의 배경에는 대학교육을 사회적 낭비로 보는 교육관이 작용하고 있었다. 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회 자문위원의 대학 정비 사업 회고에 따르면 1961년 당시의 대학생 수는 문교부 통계로 13만 6천 명인데 이는 인구대비 0.53%로 ‘세계 제4위’에 해당하는 높은 수치라는 것이었다.8

 

최고회의의 대학 정원 축소 작업은 매우 난폭한 논리 하에서 진행되었다. “예컨대 이화여대의 경우, 군정은 이 대학이 ‘유한마담을 만들어내는 대학’이라는 이유로 죽지 않을 만큼 학생 수를 줄여 명맥만 남겨놓았다고 한다. 또 연세대는 설립자가 미국인이니 ‘미국 대학’이라고 학생 정원을 마구 줄여놓고 고려대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민족의 대학’이라고 마구 늘려주는 식이었다.”9 이로 인한 대학 정원의 파격적 감축은 문희석 이후 군정의 두 번째 문교부장관이 된 고대 교수 출신의 김상협(재임기간 1962.1.9.〜1962.10.14.) 장관의 재량에 의해 어느 정도 원상복구되기는 했으나 대학 정원 감축 입장 자체는 군정 내내 기본적으로 유지되었다. 군정의 마지막 문교부장관이었던 이종우(재임기간 1963.3.16.〜1963.12.16.)는 대학 정비를 표방한 정원 감축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즉 “국립대학 29,440명을 17,340명으로, 공립대학 5,240명을 2,740명으로, 사립대학 54,320명을 40,250명으로, 야간대학 2,920명을 6,080명으로 정비하고 71개 대학수를 48개 대학으로 정비하였다”10는 것이다.

 

이러한 대학교육 불필요론의 배경에는 군부세력의 최고 권력자 박정희의 독특한 대학관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63년에 집필한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저작 안에서 자신의 고등교육관을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소를 팔아도 대학을 다녀야 한다는 학구열의 탈선을 삼가는 일이다. “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노래로 듣고 ··· 이등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우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고운 손으로는 살 수 없다. 고운 손아. 너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만큼 못살게 되었고 빼앗기고 살아왔다. 소녀의 손이 고운 것은 미울 리 없겠지만 전체 국민의 1% 내외의 저 특권지배층의 손을 보았는가.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우리의 마음을 할퀴고 살을 앗아간 것인가. 우리는 이제 그러한 정객에 대하여 증오의 탄환을 발사하여 주자. 영원히 그들이 우리를 부리는 기회를 다시는 주지 말자. 이러한 자각, 이러한 결의, 이러한 실천이 있는 곳에 비로소 경제도 재건되고, 정치도 정화되고, 문화도 발전되고, 사회도 건전하고 종교도 승화되는 것이다. 이것 없이, 우리에게는 기적도 발전도 바랄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11

 

‘불란서 시집’을 읽는 특권층에 대한 ‘증오의 탄환’이 곧 대학 정원 감축과 조정으로 정책화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2년 남짓한 군정을 끝낸 이후에도 이 방침을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유리한 선택지라고는 할 수 없었다. 군정의 종료 이후 민정으로의 이양 과정에서 선거를 통해 정권을 계속 장악할 필요가 있었던 박정희 군부세력은 결국 대학 정원 감축이라는 애초의 입장을 번복하고 타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대부분의 대학은 정비 이전의 학과를 복구하게 되었으며, 더구나 사범학교가 2년제 교육대학으로 개편되고, 또 고등학교와 전문학교를 결합한 ‘실업고등전문학교’ 제도가 1963년부터 신설되는 한편, 초급대학의 증설에 적극적이었던 결과로 대학생 수는 사실상 그다지 줄지는 않았던 것이다.12

 

한편, 군사정권은 경제성장을 위한 인력 양성의 차원에서 대학교육만이 아니라 중등교육 수준에서의 실업교육 진흥을 구상했다. 1962년 10월 시점에서 정부는 인문계 고등학교의 60% 내지 70%를 종합고등학교로 개편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실업계학교의 정비개편원칙으로서 문교부는 1. 시설이 불비하고 발전의 가망이 없는 학교를 정비하고 2. 분포소재의 부적합한 인문 실업고등학교를 정비개편하며 3. 인문고교의 60 퍼센트 내지 70 퍼센트를 종합고교로 개편할 것을 계획하고 있다.13

 

그러나 이 정책 또한 순조롭게 실현되지 못했다. 이승만 집권기인 1950년대 이래 국민들의 교육적 지향은 대학으로 이어지는 인문계 고교로 주로 향하고 있었고, 교육열의 그런 지향이 정변 이후에 바뀔 만한 요인은 여전히 만들어지지 못했다.

 

 

민정으로의 전환과 정치적 갈등

 

최고회의는 1962년 5월 27일, 군사정변 이후 유지해 온 비상계엄을 경비계엄으로 바꾸었고, 다시 12월 5일에 경비계엄을 해제했다. 아울러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를 통해 개헌을 확정했다. 부통령제 폐지와 4년제 대통령의 1차 중임 가능, 단원제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개헌이었다.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선거에서 신설 공화당의 후보 박정희와 야당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가 대결해, 박 후보가 470만 여표, 윤 후보가 454만 여표를 득표해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박정희는 이후 1967년의 제6대, 1971년의 제7대 대통령으로 연이어 3선에 성공했고, 이후 10월유신을 통해 장기집권의 기반을 마련하여 간선제의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972년 제8대, 1978년에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 간에 걸친 박정희의 집권 기간은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박정희 집권 동안 계엄은 3번 선포되어 합계 31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같은 기간 중에 위수령이 3번에 합계 5개월 동안 발동됐고, 각종 비상조치가 9건 69개월 동안 지속됐다. 이들 비정상적인 기간을 합치면 1백5개월로 박정희의 집권 기간인 2백20개월의 약 절반에 해당된다.14

 

이처럼 박정희는 집권 기간 내내 정치적 갈등과 저항에 직면했다. 1960년대에 그가 직면했던 가장 거대한 정치적 저항은 한일회담반대투쟁, 이른바 ‘6·3항쟁’이었다.

 

[그림 1] 한일회담 반대 경기고교생 시위
(1964.3.26. 『경향신문』)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군부세력의 집권을 추인한 미국은 동아시아에서의 반공체제 강화를 위해 한·일국교정상화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은 1964년이 되어 한일회담의 추진으로 본격화되었다. 이에 대해 지식인과 사회단체 및 학생집단은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을 전개하며 반대했다. 그러한 반대운동은 1964년 3월 24일부터 본격화되어, 그로부터 6월 3일의 계엄령 발포에 이르기까지 73일간 전국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투쟁에는 4월혁명 당시와 마찬가지로 고교생들도 참여하는 양상을 보였다. 3월 27일에는 전국, 13개 도시에서 30여 개 학교가 시위에 참여했으며, 주요 고등학교의 학생들도 대대적으로 참여했다. 지속적으로 이어진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1964년 6월 3일, 오후 9시 40분, 대통령포고11호로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각급 학교가 무기휴교령에 들어가면서 일단락되었다. 이 날이 6월 3일이었다는 것을 연유로 이후 이들 항쟁은 ‘6·3항쟁’으로 불리게 된다.

 

6·3항쟁으로 드러난 학계와 교육계의 저항에 우유부단하게 대응한다고 여긴 당시의 문교부장관 윤천주(1964.5.11.〜1965.8.26.)를 경질하고 동시에 당시의 법무부차관 권오병(權五炳 1965.8.27.∼1966.9.25.)을 16대 문교부장관으로 전격 임명했다. “한일협정비준반대 등으로 건전한 학풍이 무너진 대학에 새로운 학풍을 불어넣고, 학원을 바탕으로 책임 없는 말을 하여 학생들을 그릇 인도하는 교수들에게 책임을 지어 교권을 확립하고 학원과 사회를 명백히 구분하겠다”15고 선언한 권오병은 한일회담 반대 등 반정부적 성향을 보인 교수들의 제거와 학생운동 탄압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교육계만이 아니라 정계에도 여러 분란을 일으킨다. 이른바 “‘데모장관’으로 발탁되어 학원폐쇄와 교수 및 학생의 추방으로 전대미문의 성가를 높인”16 권오병 장관은 부단히 문제를 일으키는 트러블메이커였다. ‘불도저장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을 오히려 즐겼다고 하는 그의 재임기간 1년 동안의 행적은 언론에 의해 다음과 같은 야유와 비난을 담아 정리되었다.

 

(1966년 8월) 27일로 권오병 문교부장관이 취임한지 만 1년이 된다. 정부수립 후 16번 갈린 문교부장관 중 1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킨 이는 권장관이 8번째. ··· 그러나 권문교의 1년은 그의 불도저적인 저돌행정 탓으로 말썽이 그치지 않았던 가장 시끄러운 1년이었다. 취임 80일만에 국회에 상정되었던 해임안을 비롯, 해임안폐기 두차례, 불신임안상정보류 네차례. 이밖에 사립대학인 숙대에 관여, 직접 간접으로 관련된 행정소송이 8건. 민사소송이 8건. 형사고발이 1건. 청원이 4건이나 되며, 문교행정과 관련, 고소·고발·소원을 당한 것이 1백7건이나 된다. ··· 개인적으로 한일회담을 반대한 교수 20명을 정치교수란 이름을 붙여 학원에서 몰아냈으며 학생 117명도 함께 징계했다. ··· 권문교의 문교행정은 문자 그대로 좌충우돌 그것이었다. 대학가의 데모 바람이 한물 가라앉자 그는 또 국공립대학불하·ROTC의 전면실시·대학정원령(안)을 내놓았다. 이는 데모가 일어나는 주요 원인이 대학생이 많기 때문이며 이를 위해서는 대학을 국립으로 육성할 필요가 없으며 군사훈련으로 데모할 여유를 주지 않겠다는 권문교의 소신을 드러낸 것이었다.17

 

그야말로 교육계를 대상으로 ‘칼춤’을 추는 망나니 역을 자임했다고 해도 좋을 행보였던 셈인데, 이는 박정희의 절대적인 신임 하에서 이루어진 ‘호가호위(狐假虎威)’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권오병의 그와 같은 저돌적 행보는 1966년 9월에 국회에서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과 관련된 항의로 김두한 의원이 저지른 이른바 ‘국회오물사건’의 여파로 잠시 멈추게 된다.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당시의 총리 정일권 내각이 총사퇴 의사를 표명했고 그에 대해 박정희는 법무, 재무장관을 경질하는 동시에, 비어있는 법무부장관의 자리로 권오병을 이동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는 권오병의 퇴출과 실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법무부장관으로 잠시 자리를 옮겼던 권오병은 다시 박정희의 신임과 암묵적인 지시를 받으며 일년 반 후인 1968년 5월에 다시 새로운 과업을 지고 18대 문교부장관으로 복귀하게 된다. 그가 박정희의 재신임 속에서 전개한 정책들 중에는 「국민교육헌장」 발포, ‘중학무시험제’ 도입, ‘대학입학예비고사제’ 도입 등 1970년대의 교육을 지배하게 되는 주요 정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보다 상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베이비붐세대와 초등 의무교육제

 

1960년대 박정희 체제의 문정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정책이라면 그것은 초등 의무교육제의 확충이었다. 1950년대 말까지 국민학교 취학률 90%대의 달성이라는 목표가 가시적으로 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의무교육제도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1960년대에 들어선 이후에도 여전히 미완의 과제였다. 오히려 1950년대보다 더 심각한 새로운 사태가 닥쳐오고 있었다. 그것은 베이비붐 세대라는 거대한 파도의 도래였다.

 

베이비붐 세대란 일반적으로는 “출생아수와 출산율이 급격히 증가한 특정 시기에 태어난 이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출산율이 3.0 이상인 연령대가 일정 기간 연속적으로 유지된 거대인구 코호트”18로 정의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한국전쟁이 종료되고 출산붐이 시작된 1955년부터 산아제한 정책 도입 이전 시기인 1963년까지 9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로 규정”19된다.

 

1950년대 후반의 의무교육 6개년 계획의 시행은 내부적인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취학 적령 아동 자체의 단기간 절대적 증대라는 수요의 폭증 문제에 직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55년에 태어난 세대가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1961년에 이르러서는 이전보다도 더 심각한 학교 부족, 교실 부족, 교원 부족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고 따라서 추가적이고 더 강력한 의무교육정책이 요구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베이비붐 세대의 도래에 대응하여 다시금 의무교육제정책을 수립, 시행하게 된다. 이승만 정부 시대인 1958년 12월에 제정 공포된 바 있는 「의무교육재정교부금법」은 그 재원이 특정세인 소득세와 입장세에만 의존하고 있어 필요한 교부금액을 실질적으로 확보할 수 없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는 1962년 4월 24일에 동법을 개정하여 내국세 총액의 11.55%를 의무교육을 위해 교부하도록 하는 등 의무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20 이 법을 기반으로 하여 1960년대에 베이비붐 세대의 취학에 대응하는 의무교육 확충 계획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결합되어 있었다. 즉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병행하는 제1차 의무교육 시설 확충 5개년 계획(1962〜1966) 및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병행하여 제2차 의무교육 시설 확충 5개년 계획(1967〜1971)이 추진되었다. 의무교육제의 명실상부한 실현을 위한 정부의 인식과 대응은 이승만 정부의 그것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문교부의 자체 평가에 따르면 이 두 계획의 시행 결과로 “··· 그렇게도 심각했던 교실난은 점차 해소되어 갔다. 그래서 시설 확충 5개년 계획의 완성연도인 1971년에는 부족 교실을 거의 해소할 수 있었고, 대도시 지역의 저학년 2부제 수업을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2부제 수업이 일소되었다. ··· 한편, 이러한 시설 확충을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늘어나는 학생 수 때문에 생겨난 부족 교원의 확보 노력도 함께 병행되었다. ··· 교과서 무상 지급 대상자를 점차 늘려 완성연도인 1971년에는 462만 명의 아동들에게 무상 지급하였다. 그리고 도서·벽지의 아동과 극빈 아동들에게 우선적으로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21는 것이었다.

 

[그림 2] 1968년 서울 전농국민학교 조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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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학 상황을 보자. 먼저 전국 상황을 보면 1948년에 2백4십여 만 명이던 국민학생 수는 12년 후인 1960년에는 3백60여 만 명으로 1.5배 늘어났다. 1960년대에 베이비붐 세대의 도래로 취학자가 급증하면서 1980년에 5백6십5만 여 명으로 최고에 달했으나 그 후 점차 감소했다. 한 학교당 학생 수는 1967년에 993.4명으로 최고에 달했으나 역시 이후 조금씩 점감했다. 학급당 학생 수는 법정 최고 기준인 60명 미만에 달한 최초의 시기가 1972년이다.22

 

의무교육제 실현과 관련하여 민중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박정희 정부가 1961년 5월 이후에 내세운 이른바 ‘혁명공약’의 일부로 1950년대 사친회와 잡부금의 폐지 등이 있었고 이것이 전면적으로 실현되는 듯 보였으나, 그로부터 2년 후인 1963년에 ‘기성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학부모의 교육비 부담 형식이 부활하는 등 사태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대’의 악몽이었던 사친회비는 1962년에 ‘혁명’을 표방하는 신정부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1년도 지나지 않아 1963년에 다시 ‘기성회비’라는 이름으로 부활되었다. 이에 대해 언론은 “그 이유가 어떠하든, 이런 조치는 분명히 문교정책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며 혁명 전의 부조리한 사태로 되돌아간 것밖에 더 될 것이 없음을 우리는 못내 유감으로 생각한다. … ‘의무교육의 무상’은 문명국가의 초보적 상식에 속하는 일인데 과감하게 개혁했다가 다시 어물어물 구태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이라며 혹독한 비판을 가할 정도였다.23

 

기성회비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자 정부는 기성회비 폐지 계획 발표와 부활의 용인을 반복하다 1970년에는 다시 한번 그 명칭을 ‘육성회비’로 바꾸었다. 1970년 2월에 「초·중·고 학교육성회준칙·관리지침」을 발표하여 학부모들이 부담하는 비용을 ‘육성회’가 관리하며 그것의 지출 용처를 교직원 연구비 보조 등으로 지정하고, 그것의 지급한도액을 교육감이 책정하도록 하는 공적 관여를 시작했다. 이는 기성회비의 납부 성적에 따라 교사 처우가 달라지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학교별 격차를 발생시키는 폐단에 대한 대응 조치였다. 그러나 의무교육의 ‘유상제’ 원리에는 변함이 없었다.24

 

“최근 당국이 조사한 우리나라 총 교육비(67년도)는 916억 원으로서 이 중 정부 부담이 3분의 1 가량이고 나머지 3분의 2는 모두 학부모들이 내는 사교육비로 나타났다”25는 보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1960년대 말까지 의무교육비의 2/3 가량을 민이 부담하는 재정 구조는 지속되었다. 이 기사에서는 1976년이 되어서나 국민학교의 완전무상교육이 실현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국민학교 육성회가 폐지되는 것은 1980년에 이르러서였다.26 1948년에 초등 무상 의무교육제가 법적으로 제도화된 지 38년이 지나서야 초등교육이 ‘무상’ 의무교육으로 실현되는 제도가 완성된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1960, 70년대의 경제성장이 낳은 결과인 동시에, 중학교로의 의무교육제 연장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1960년대 중등 및 고등교육 팽창은 어떠했을까. 박정희 정권은 1961년의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직후, 중등 및 고등교육의 팽창에 대해 애초에는 부정적,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1961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제정한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 및 1963년의 「사립학교법」 등은 중등 이상 교육 팽창의 억제와 사학에 대한 규제를 기본적 성격으로 하고 있었다. 중학 무시험제 발표 4년 전인 1964년 7월에 윤천주 문교부장관 하에서 발표된 「중·고등학교확충10개년계획」 안에도 “국민소득, 국가재정형편, 인적소요량 등을 고려하여 고등학교와 국·공립학교의 확충은 억제하고 사립학교 확충에 중점을 둔다. 도시집중을 피하고 지방분산원칙을 실현한다. 고등학교에 있어서 인문계보다 실업계를 육성, 확충토록 한다”27는 방침이 천명되고 있었을 정도다.

 

1965년 2월에 국무회의에 제출된 윤천주 문교부장관 명의의 「중등교육10개년계획」에 따르면, 이상의 중등교육 억제 방침을 견지하면서, 계획 완성연도인 1974년의 중등학교 졸업자의 상급학교 진학률 목표를 중학교의 경우 1964년의 49.9%에서 1974년에는 47.2%로, 고등학교의 경우는 75.0%에서 55.4%로 오히려 낮추는 계획이 발표되었을 정도다.28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것이 제시되었다.

 

남북통일과업의 전망이 서지 않는 현실에 비추어 국방비의 절감을 기대할 수 없으며, 국방비의 절감 없이는 교육비의 대폭적인 증액이 곤란할 것이며 외원의 전망, 경제개발을 위한 투자 등을 고려할 때 의무교육 재정수요조차 충용하기 어려운 국가재정 형편으로 보아 중등교육을 위한 정부투자 증액을 크게 기대할 수 없다.29

 

요컨대 1960년대에 박정희 정권은 중등교육 이상의 적극적인 교육 기회 확충과 팽창을 전개하지도 계획하지도 않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베이비붐세대라는 새롭고 거대한 압력이 낳은 초등 의무교육제의 조속한 실현 압박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고, 또 박정희 등 군부세력의 반지성주의적 실용교육관도 작동했을 것이다.

 

1960년대 중등 및 고등교육 팽창의 규모를 정리해 보면, 1961년 중학생은 620,026명, 고등학생은 287,557명, 대학생은 142,576명이었으나 1969년이 되면 중학생은 1,147,408명으로, 고등학생은 530,101명으로, 대학생은 177,161명으로 늘어나 각기 185.1%, 184.3%, 124.3%의 증가율을 보였다.30 1960년대에 고등교육의 팽창이 현저히 억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어느 정도 팽창했지만, 여전히 1969년도 시점에서도 국민학교 졸업자 799,969명 중 509,352명이 중학교로 진학하여 진학률이 66.1%였고, 중학교 졸업자 312,814명 중 219,142명이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진학률이 70.1%였다. 한편, 당시 명칭으로 인문계 고교 졸업자 82,208명 중 33,040명이 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으로 진학하여 진학률은 40.2%, 실업계고교 졸업자 62,854명 중 6,033명이 상급학교로 진학하여 진학률은 9.6%였다.31

 

경제성장을 위해 인문계 고교보다는 실업계 고교 쪽의 팽창을 선호하고 적극 추진하려 했던 박정희 정권 통치 하의 1960년대에 인문계 고교와 실업계 고교의 비중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1961년 당시 고등학생 278,557명 중 인문계 고교생은 177,603명, 실업계 고교생은 100,954명이어서 양자의 비율은 63.8% : 36.2%였다. 인문계를 실업계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의 결과로 1969년에는 고교생 530,101명 중 인문계 고교생은 294,292명, 실업계고교생은 235,809명으로 양자의 비율은 55.5% : 44.5%로 변화했다.32 그러나 여전히 고교생의 절반 이상은 인문계 고교생이어서, 정부의 실업교육 중시 정책이 순조롭게 실현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민중들의 교육열이 정부가 의도하는 방향과 내용으로 순조롭게 작동하지는 않았다. 또 권력집단 역시 자신들의 정치적 지지의 확보와 정당성 강화를 위해 민중들의 교육 요구를 통제, 조작하거나 억누를 수도 없었다. 오히려 권력 유지의 안정적 기반을 확보한다는 맥락에서 작동하는 포퓰리즘적 정책 방향 쪽이 교육에 대한 경제적 필요라는 맥락에서의 정책 방향보다 우선하는 경향조차 나타났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다음에 살펴보게 될 1969년의 ‘중학 무시험제’, 1974년의 ‘고교평준화’라는, 취학 구조 자체를 뒤바꿀 만한 영향을 발휘하게 될 일련의 정책들이었다.

 

 

권위주의 체제 하의 교육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세력에게 민주화라는 과제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마찬가지였고, 하물며 그들에게 교육과 관련된 정책을 합리적이고 중장기적인 전망에 입각하여 구상하고 집행하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그것은 그들이 짧은 기간 동안 교육개혁을 위한 방안이라며 입법화환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 안에 담긴 개혁안들 중 상당수가 몇년도 지나지 않아 폐기되거나 타협적으로 조정된 것에서도 드러난다. 물론 그중에는 중등학교였던 사범학교를 2년제 고등교육기관인 교육대학으로 발전적으로 개편하는 등 이후의 교육 발전에 지속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개혁안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에 급속하게 성장한 특수집단으로서의 한국 군부가 지닌 오만한 자의식은 한국 교육의 발전과 민주화에 오히려 부정적인 해악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다.

 

5·16 직후에도 문교부 사무차관으로서 군부세력의 행태를 목격할 수 있었던 서명원의 증언에 주목해 보자. 그는 문교부장관 대신으로 참여한 내각 회의의 한 장면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날의 핵심 안건은 국방부에서 상정하였다. 군인들을 학교의 교원 또는 사무직원으로 임명하자는 기상천외의 제안이었다. 나는 ‘사무직원이면 몰라도 어떻게 자격증이 있어야만 하는 교원 자리를 아무나 임명할 수 있느냐’며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국방부 실무자는 ‘학교 영어 선생들은 회화를 제대로 못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 군인들 중에는 영어 회화를 잘하는 사람이 많아요’라고 자랑했다. ··· 하마터면 군인들이 교단을 점령할 뻔한 사건이었다.33

 

‘영어 회화를 잘하는’ 군인이 학교 교사를 대치할 수 있다는 이런 황당하고도 오만한 발상의 이면에는 한국 군부의 독특한 자의식이 작용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 장교 집단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높은 집단 중 하나였다. ··· 한국군 장교는 1950년대에만 무려 9천여 명이 미국의 각종 군사학교에 파견되어 교육받고 돌아왔”34다는 사실이 그들이 일으킨 군사정변 및 이후 그들에 의해 전개된 권위주의적인 교육정책의 바탕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한국 교육을 구조적, 제도적으로 개혁해 나갈 전망과 계획은 아직 없었다. 최고회의 수반으로서 국정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는 장인 1962년의 시정연설에서 박정희가 교육과 관련하여 내세운 개혁안은 다음과 같이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것들이었다.

 

건설기에 적합하도록 교육제도를 쇄신하고 문교정책을 조절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할 것이며 생산기술 교육을 강화할 것입니다. 의무교육에 있어서는 적령아의 완전취학을 기할 것이며, 중·고·대학생의 정원을 가급적 국가 수요계획에 따라 책정할 것입니다. 혁명과업 수행대열에 민족의 총력량을 집중시키기 위해 국민조직과 국민훈련을 강화하여 승공민주이념을 확립할 것이고,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앙양하여 국민정신을 진작하기 위한 범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입니다. 국민의 지식수준의 향상과 민주사상의 고취를 위해 전국적인 문맹해소와 계몽운동을 촉진할 것이고, 이에 따라 근로정신을 위시한 도의진작에 치중할 것입니다.35

 

이 시정연설에 담긴 교육정책 내용들 중에는 혁명적이라 할 만한 내용은 별로 없었다. 박정희라는 이름을 지우고 그 내용만으로 보면,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서 혹은 장면 총리에 의해서 제시되었다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만큼 군사정변 이후 한동안 박정희가 이끄는 군부세력은 교육개혁과 관련한 임팩트를 지닌 정책 비전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앞서 본대로 그들이 저돌적으로 내세운 대학 정비 구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그뿐 아니라 ‘임시특례법’에 담긴 여러 조치나 개혁안들이 무산되거나 유야무야되었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민정으로의 복귀를 계기로 한 대통령선거에서의 득표를 위한 포퓰리즘적인 타협적 태세 전환의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교원노조를 파괴하고 교육자치제를 폐지했지만, 1960년대에는 아직 학교교육에 군사훈련을 도입하거나 학도호국단을 부활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1967년에 재선에 성공한 이후, 정권 유지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박정희는 이전까지와는 달리 본격적으로 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에 나서기 시작한다. 각종 대통령 연설에서 교육문제를 언급하는 빈도가 늘어나고 ‘국민들을 가르치려는 자세’가 점차 전면에 등장한다. 그것은 1968년 연두기자회견에서 꺼낸 ‘제2경제’라는 말에서 시작해 그해 말에 「국민교육헌장」을 ‘대통령 박정희’의 이름으로 발포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후 1970년대의 교육사는 이전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며 숨가쁘게 전개된다. 정권이 학교교육을 국가주의적, 군국주의적으로 재편 통제하는 경향에서도 그러했다. 또한 1960년대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뚜렷한 관련을 갖기 어려웠던 교육정책이 70년대에는 공업고등학교의 정책적 육성에서 드러나듯이 경제개발 계획과 유기적 관련을 맺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였다. 또 한편으로 민중들의 교육열도 1970년대에는 ‘중학 무시험제’, ‘고교평준화 정책’ 등의 급진적 정책과 연동하여 변화하기 시작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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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김문심 무기징역, 강기철 징역15년, 신동영 징역10년, 이목 징역10년, 이종석 징역7년, 신우영 징역5년, 여학룡 징역3년 5년간 집행유예 등 교조간부 6명이 수인이 되었다(이목 (1989), 『한국교원노동조합운동사―4.19혁명기를 중심으로』, 푸른나무, 366쪽).
  2. 「人間改組等 四個政策發表」 『京鄕新聞』 1961.5.26.석간.(3).
  3. 公報部 (1962), 「革命政府의 一年間業績槪要」, 『最高會議報』, 8호, 125-126쪽.
  4. 徐明源 (2005), 『徐明源回顧錄―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네!』, 정민사, 363-364쪽.
  5. 韓國敎育史庫(편) (1999),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50년 구술사 자료집(1)』,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41-42쪽.
  6. 李鍾雨 (1963), 「革命二年間의 業績槪要 文敎部」, 『最高會議報』, 20호, 50쪽.
  7. 「大學生 10萬4千名서 五萬名으로 減縮」 『京鄕新聞』 1961.9.14.석간.(1).
  8. 金昞熙 (1963), 「大學整備에 對한 回顧」, 『最高會議報』, 16호, 128쪽.
  9. 남재김상협선생전기편찬위원회(편) (2004), 『남재 김상협―그 생애 학문 사상』, 한울, 380쪽.
  10. 李鍾雨 (1963), 「革命二年間의 業績槪要 文敎部」, 『最高會議報』, 20호, 50쪽.
  11. 朴正熙 (1963), 『國家와 革命과 나』, 항문사, 270-271쪽.
  12. 박호근 (2005), 「5ㆍ16 군사정부의 교육정책과 결정유형」, 『교육정치학연구』, 12(2), 19-20쪽.
  13. 「全國人文系高校60%〜70% 綜合高校로 改編추진」, 『京鄕新聞』, 1962.10.18.(7).
  14. 정상호 (1998), 「박정희신드롬의 정치적 기원과 그 실상」, 한국정치연구회(편), 『박정희를 넘어서』, 푸른숲, 90쪽.
  15. 「軍人亂入事件은 學園이 自招한 일」, 『東亞日報』, 1965.8.28.(1).
  16. 「野, 權文敎 自退要求」, 『東亞日報』, 1966.2.21.(1).
  17. 「猪突文敎1年」, 『東亞日報』, 1966.8.27.(3).
  18. 김용하, 임성은 (2011), 「베이비붐 세대의 규모, 노동시장 충격, 세대간 이전에 대한 고찰」, 『보건사회연구』, 31(2), 한국보건사회연구원, 37쪽.
  19. 김용하, 임성은 (2011), 「베이비붐 세대의 규모, 노동시장 충격, 세대간 이전에 대한 고찰」, 『보건사회연구』, 31(2), 한국보건사회연구원, 40쪽.
  20. 敎育改革審議會 (1987), 『中學校 義務敎育 擴大實施 方案』, 政策硏究Ⅱ-5, 敎育改革審議會, 64쪽.
  21. 文敎40年史編纂委員會 (1988), 『文敎40年史』, 文敎部, 321-322쪽.
  22. 이들 수치는 각년도 『문교통계연보』에 의함.
  23. 「社說 國民學校의 期成會 組織方針은 彌縫策에 不過하다」, 『朝鮮日報』, 1963.4.21.(3).
  24. 「初·中·高 學校育成會準則·管理指針」, 『東亞日報』, 1970.2.10.(3).
  25. 「절름발이 義務敎育의 義足 雜賦金20年」, 『東亞日報』, 1970.2.10.(3).
  26. 「國校育成會 폐지 내년부터」, 『每日經濟新聞』, 1979.6.14.(7).
  27. 『京鄕新聞』, 1964.7.28.(3), 「私立校확충 重點 中高校擴充10個年계획을 추진」.
  28. 문교부 (1965), 「중등교육10개년계획」, BA0084427, 문교부, 5쪽.
  29. 문교부 (1965), 「중등교육10개년계획」, BA0084427, 문교부, 11쪽.
  30. 1961년의 수치는 『한국통계연감』, 1969년의 수치는 『문교통계연감』에 의한다.
  31. 이들 각각의 진학자 수치는 1968년도 졸업자의 1년 후 진학상황을 조사한 것이다. 1969년도 『문교통계요람』에 의한다.
  32. 1961년의 수치는 『한국통계연감』, 1969년의 수치는 『문교통계연감』에 의한다.
  33. 徐明源 (2005), 『徐明源回顧錄―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네!』, 정민사, 364-365쪽.
  34. 한홍구 (2003), 『대한민국사 1』, 한겨레신문사, 274쪽.
  35. 박정희 (1962), 「1962년도 시정방침 연설(1962.1.5.)」 대통령비서실(편), (1973), 『박정희대통령 연설문집 1―최고회의편』, 대한공론사, 165쪽.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식민교육사 및 교육역사사회학, 동아시아근대교육의 비교사회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교육과학사, 2000),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서해문집, 2018), 역서로는 야나기 하루오의 『학급의 역사학』(교육을바꾸는책, 2026), 가리야 다케히코의 『대중교육사회의 형성』(학지사, 2023), 고마고메 다케시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공역, 역사비평사,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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