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해 보는 학교 민주시민교육
| 지금이야말로 시민교육의 기초를 단단히 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학교 현장에서 여러 교과 교육에 파급효과가 크면서도 학생들이 스스로 시민성을 기를 수 있는,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교육 활동들을 소개합니다. |
해마다 이맘때면 중학교엔 3년을 함께 보낸 아이들이 졸업을 하고, 새내기들이 들어온다. 그 아이들은 신체적, 정서적 변화와 성장이 가장 왕성한, 이 싱그러운 시절에 한데 모여 무엇을 배우고 떠났을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2026학년도 학교에 새로운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중, ‘교육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어떤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에 가장 맞닿아 있는 것은 ‘2026 민주시민교육 추진 계획’1이다. 교육부가 지난 1월 발표한 이 계획에는 헌법 가치를 중심으로 시민 역량 함양, 현장 중심 민주시민교육 지원, 학교와 지역사회 참여 촉진, 학교 민주시민교육법 제정 등이 핵심으로 담겨 있다.
사실, 우리 교육이 민주시민교육이 아닌 적은 없었다. 교과서 맨 앞장마다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이 실려있던 시절에도 우린 ‘한국적 민주주의’ 나라였다. 또, 우리 교육의 핵심 가치와 방향을 설정한 교육기본법 제2조에 따르면, 교육은 모든 국민이 ‘민주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사회적으로는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 교사들이 노골적으로 이와 동떨어진 교육을 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민주시민교육을 해 온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왜 학교에서 민주시민교육을 잘 받았다는 말을 하는 이들은 이토록 드물까.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어느 정도 답은 나와 있다. 교사는 교과 교육에만 매달리고 학생은 성적 경쟁에 내몰리는 학교, 결과 중심의 왜곡된 능력주의와 승자 독식의 사회적 자원 배분이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교육계와 한국 사회가 가장 큰 범인이다. 우린 꾸준히 그들을 지목해 잘못을 파헤쳐 왔지만, 그동안 눈에 띄는 변화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이젠 당위와 선언을 넘어 실질적인 대안을 하나씩 찾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야 할 때이다. 우리가 제도적 기반이나 교육 철학이 부족하여 시민교육을 안 하거나 못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일정한 성과를 맛본 몇몇 시민교육 사례가 있다. 일단, 거기에서 다시 시작해 보자.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으라 했다. 12·3 내란을 시민의 힘으로 막아내고 각 분야에서 낡은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혁신(革新)’이 일어나고 있는 이 시점이야말로 시민교육 바탕을 단단히 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터. 학교 현장에서 여러 교과 교육에 파급효과가 크고, 학생 스스로 시민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교육 활동을 찾아보았다.
실천 사례 하나 : 학교 모의선거교육
학교에서 본격적인 모의선거교육이 이루어진 것은 지난 2018년 지방선거 때였다. 사단법인 징검다리교육공동체가 기획·지원한 모의선거 프로젝트에 전국 16개 중·고교가 자율적으로 참여하여, 각 학교 교육과정 안에서 교사와 학생들의 협업으로 수업과 운영이 이루어졌다.2 학생들이 스스로 선관위를 구성해 모의선거 과정을 관리·운영하면서 부정선거, 무효투표를 생생하게 배우고, 공약을 분석하며 자신이 지지할 가장 적합한 후보를 찾아냄으로써 지식과 기능, 가치·태도를 두루 갖춘 융합형 인재를 길러낼 수 있는 실천적 교육과정이다.
참여 학교에서는 당시 지방선거 실제 후보자 명부와 공약 등을 바탕으로 모의선거 과정에 참여하였다. 학생들은 먼저 후보자의 공약과 정책을 분석하는 학습을 진행하고, 그 이후 모의 투표에 참여하였다. 단순히 투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후보의 입장을 비교하고 자신의 판단으로 후보자를 선택하는 과정이 포함되었다.
선거 전에는 선거제도와 민주주의의 원리, 선거 과정 등에 대한 사전 교육이 진행되었고, 모의 투표 이후에는 결과 분석과 나눔을 통해 학생들 스스로 자신들의 실천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성찰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러한 교육 활동은 주로 사회 교과나 창의적 체험활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공약 분석, 정책 비교 토론, 투표 경험을 함으로써 유권자로서 갖춰야 할 태도나 역량을 기를 수 있었다. 모의선거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생 26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투표권이 생겼을 때 투표에 꼭 참여하겠다.’, ‘모의 투표지만 실제 선거처럼 진지하게 참여하였다.’, ‘모의선거 투표 전에 했던 수업이 선거제도를 이해하고 투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선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실제 선거에도 관심이 생겼다.’는 등 대부분의 항목에 80% 이상 긍정적인 답변을 한 바 있다.
모의선거교육은 단순한 선거 체험을 넘어, 청소년이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변곡점을 마련하였다. 학생들은 모의선거를 통해 한 표의 의미와 가치를 체감하였고, 정책 비교와 토론을 통해 비판적 사고와 의사결정 능력을 길렀으며,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후 이 교육의 확대, 심화가 기대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중앙선관위가 2020년 1월, 학교에서 실시되는 모의선거를 ‘공무원의 선거관여’나 ‘공무원의 선거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로 보고 금지3함으로써 모처럼 지펴 오른 민주시민교육의 불길에 찬물을 끼얹었다. 공무원의 선거운동을 금지하는 법 규정을 학교 선거교육의 금지로까지 확대 해석해 버린 탓이다. 최근 들어, 선관위가 다시 ‘공직선거법’ 제85조(공무원 등의 선거관여 등 금지) 제1항과 제86조(공무원 등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금지) 제1항 제3호 규정에 대하여 법 개정과 함께 전향적 해석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 6월 3일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중앙선관위의 발빠른 대응과 학교의 체계적 교육과정이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실천 사례 둘 : 학교 정당 만들기 프로젝트
모의선거보다는 긴 호흡으로 진행되는 시민교육 사례이다. 학교를 국가와 비슷한 완결된 공동체로 보고 이를 운영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의 소공동체(정당)를 구성하는 프로젝트이다. 2018년 서울 마곡중에서 민주시민교육의 차원에서 실시한 바 있다.
이 프로젝트는 정당이 단순한 선거 조직이 아니라 가치와 정책을 제시하는 공적 결사체임을 체득하고, 득표율에 따른 의석 배분을 통해 대표성과 비례성의 원리를 경험함으로써 한 표의 가치와 소수 의견의 존중을 학습할 수 있다. 또한, 인물이나 인기 중심이 아니라 정강·정책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정책 중심 정치 문화를 훈련할 수 있으며, 선거 이후 의회 토론과 합의 과정을 통해 숙의 민주주의 경험을 쌓아 다른 교육 활동이나 교과 수업에도 활용할 수 있다.
프로젝트는 대개 이런 흐름으로 전개된다. 1단계는 정당을 만드는 과정이다. 학급 단위로 정당 창당을 준비하며, 당명·로고·슬로건을 만든다(공존과 배려당, 소확행당, 자치책임진당, 잘놀열공당 등). 이어 정당이 추구하는 가치(정강)를 2~3개 설정하고 뒷받침하는 핵심 정책도 5~6개를 제안한다. 예를 들면 급식, 휴식 시간, 학생자치, 학교 환경, 디지털 기기 사용 문제 등이 될 수 있다.
2단계에서는 정책을 검증하고 공론화하는 단계이다. 교내 공개 정책 설명회를 열어 질의응답 및 상호토론을 하고, 각 당의 정책 비교표를 제작하여 교내 곳곳에 게시할 수도 있다. 정당 활동에 SNS 사용을 허용할 것인지는 일정한 고민이 필요한데, 이는 첫 학생의회의 토론 주제로 삼을 수도 있다.
3단계에서는 전교생(또는 해당 학년)을 유권자로 설정하여 각 정당에 대한 비밀 투표를 실시하고, 개표 및 정당별 득표율을 산출한 뒤, 득표율에 따라 미리 정해 놓은 의석을 배분한다.
4단계에서는 정당별 비례대표들이 모여 학생의회를 구성하고, 유권자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각 당의 대표 의원이 나와 쟁점 규정이나 문제에 대한 토론을 벌이는 활동으로 마무리를 할 수 있다.
마치고 나면, 전체적인 준비와 진행 과정을 되짚어 성찰하며, 해마다 진행할 것인지, 이듬해에는 무엇이 개선되어야 할 것인지 평가하는 시간을 갖는다. 정당을 만드는 일회성 프로젝트에 그치지 말고, 다양한 학교 행사, 활동에 정당의 이름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여 효능감과 지속성을 담보해 준다면 학생들의 자율과 책임 역량이 더욱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자리 잡으면 교과 수업과도 얼마든지 연계해 볼 수 있다. 사회 교과에서는 민주주의 제도의 이해와 운영 차원에서, 국어 교과에서는 정책토론과 논증 수업에서, 수학 교과에서는 득표율 계산 및 의석 배분 공식의 측면에서, 기술·가정에서는 학교 공간 재구성 정책 수립 측면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실천 사례 셋 : 모의재판을 활용한 프로젝트 수업
모의재판은 민주시민교육의 핵심 가치인 법치, 절차적 정의, 권리와 책임, 공적 토론 등을 체험적으로 익힐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프로젝트 수업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만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절차 또한 매우 중요하다. 모의재판을 교육 활동에 도입하면 학생들은 절차의 중요성을 몸으로 경험하게 된다. 또한 권리는 책임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개인의 권리와 공동체의 이해 사이의 긴장을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균형 잡힌 관점을 키울 수 있다. 서로 다른 주장과 근거를 비교·검토하고, 감정이나 인상이 아닌 증거와 논리로 판단하는 훈련을 할 수 있으며, 판사·검사·변호인·배심원 등 다양한 공적 역할을 맡아보며 민주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무를 이해할 수도 있다.
비교과 활동(자유학기, 창체, 자기개발시기 등)만이 아니라, 교과 수업에서도 진행할 수 있다. 다음은 국어 교과에서 과거의 삶을 다룬 문학 작품에 대한 감상을 바탕으로 오늘의 삶과 관련지어 모의재판을 만들어 발표하는 수업의 흐름4이다.
| 차례 | ‘배움과 나눔’ 과정 | 소설과 과거사 모의재판
발표 프로젝트의 단계 |
| 1~3차시 | <꺼삐딴 리> 줄거리 / 시대와 역사 배경지식 활성화
사회·문화적 배경 / 인물의 성격과 가치관 |
프로젝트 안내 및
문학작품 감상 1 |
| 4~6차시 | <순이 삼촌> 줄거리 / 시대와 역사 배경지식 활성화
사회·문화적 배경 / 인물의 성격과 가치관 |
문학작품 감상 2 |
| 7차시 | 다양한 과거사 탐색 / 문학 속의 과거사
내가 선택한 소설 재판 |
프로젝트 발표 준비 1 |
| 8차시 | 재판 모둠 정하기 / 사건 개요 및 재판 등장인물 정하기 / 증거 목록 정하기 | 프로젝트 발표 준비 2 |
| 9차시 | 공소장 작성 및(예시자료) 패들릿 올리기 | 프로젝트 발표 준비 3 |
| 10차시 | 모의재판 대본 작성 및 소설과 비교하며 검토 | 프로젝트 발표 준비 4 |
| 11차시 | 모의재판 대본 검토 및 다듬기 / 대본 읽기 | 프로젝트 발표 준비 5 |
| 12차시 | 모의재판 무대 준비 및 모의재판 연습 | 프로젝트 발표 연습 1 |
| 13차시 | 모의재판 공개 최종 연습 | 프로젝트 발표 연습 2 |
| 14차시 | 모의재판 공개 1 – 소설 ‘꺼삐딴 리’ 재판 | 프로젝트 실행 및 평가 1 |
| 15차시 | 모의재판 공개 2 – 소설 ‘순이 삼촌’ 재판 | 프로젝트 실행 및 평가 2 |
| 16차시 | 배움-나눔 과정 정리 및 소감 정리 글쓰기 | 프로젝트 과정 자기 평가, 완료 |
최종적으로 학습에 참여한 학생이 모두 모여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판결에 대한 평가에서 시작하여, 다른 판결 가능성이 있는지 점검해 보고, 절차적 공정의 측면에서 미흡한 면은 없었는지, 판결이 갖는 사회적 의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등을 나누는 성찰과 확장을 통해 숙의, 숙론의 훈련이 가능하다. 결국 모의재판 수업 프로젝트는 ‘학교를 작은 공론장으로 만드는 활동’이 된다.
모의재판과 관련 시나리오는 중학생용과 고등학생용으로 7개가 개발되어 공개되어 있다. 사법정책연구원 홈페이지5에서 무료로 PDF 파일 내려받기가 가능하다.
실천 사례 넷 :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 수업
학생들의 배움·성장에 도움이 되는 학습 방법 중, 첫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단연 토의·토론일 것이다.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부터 시작해서 격식이 느슨한 토론, 격식이 엄격한 토론, 비경쟁형 토론, 경쟁형 토론 등이 다양한 장면 및 활동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는 비경쟁형 토론 중 하나인 ‘역지사지(易地思之) 공존형 토론’(서울시교육청)6에 대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은 단순한 경쟁식 토론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 현안에 대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합의를 모색할 수 있는 시민적 역량을 기르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다. 토론 참여자는 서로 다른 견해를 이해하고 다름을 포용함으로써 공존적 태도와 민주적 합의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또, AI와 SNS가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디지털 환경에서 확증편향과 그로 인해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판단력과 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역지사지 공존형 토론의 핵심은 ‘입장 교환’과 ‘합의 도출’에 있으며, 모둠형 토론의 주요 절차는 다음과 같다.
▪ 1단계(토론 주제 파악하기) : 제시된 주제와 관련된 쟁점 자료를 읽은 후 내용을 파악하고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아직 찬반 입장은 정하지 않는다.
▪ 2단계(1차 자료 분석) : 무작위로 찬반을 나눈 뒤, 교사가 제시하는 쟁점 자료를 각각 받아 자기 팀의 주장과 근거, 상대 팀을 반박할 내용을 정리한다.
▪ 3단계(1차 토론) : 각 팀마다 주어진 시간 동안 입론-반론-최종발언 순으로 찬반 논쟁을 진행한다.
▪ 4단계(2차 자료 분석) : 1차 토론 때와 입장을 바꾸고 2차 토론을 위해 필요한 자료를 추가적으로 조사한다.
▪ 5단계(2차 토론) : 입장을 바꾸어 팀별로 논의를 마친 후, 1차 토론 때 찬성 팀은 반대 입장에서, 반대 팀은 찬성 입장에서 입론-반론-최종발언 순으로 토론한다. (가급적, 1차 토론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내용을 중심으로 토론한다.)
▪ 6단계(모둠별 합의안 만들기) : 각자 돌아가며 토론 주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발표한다. 모두가 최종 의견을 제시한 후, 모둠 내 의견 중 합의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분류하고, 만장일치를 할 수 있도록 의견을 조정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승패 가르기식 토론이 아니라, 서로의 입장에서 주장‧논거를 구성해 보는 경험을 통해 다양한 관점을 체득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교차조사토론(CEDA)과도 비슷하지만, 격식이 비교적 자유롭고 비경쟁적인 차이가 있다.
이 토론과 연계하여 다양한 교과 수업과 사회 참여 활동을 구상할 수도 있다. 시민으로서 학교나 다른 일상생활에서 상대를 존중하며 말하는 활동이나 글쓰기 수업과 연계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 인공지능과 윤리 문제, 반려동물과 동물실험, 청년 아르바이트와 최저임금, 역사의 라이벌인 묘청과 김부식, 정도전과 이방원, KBS ‘사이언스 워’에서 다룬 토마스 에디슨과 니콜라 테슬라, 루이 파스퇴르와 알베르트 코흐 등 교과 주제와 학습 형태를 긴밀하게 연결하면 흥미진진한 역지사지형 토론 수업 장면을 무궁무진하게 연출할 수 있다.
민주시민교육이 자리를 잡으려면
학생들의 시민성을 길러줄 수 있는 프로그램과 수업은 꽤나 다양하다. 이제 요체는 교사들이 실행할 수 있도록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우리 사회와 교육의 주류는 아직도 성적지상주의, 왜곡된 능력주의, 학벌사회이다. 교사들은 사물이나 현상, 학습 주제의 근본을 파고드는 수업을 시도하면 할수록 항의나 볼멘소리를 (아직은) 들어야 한다.
▪ 학생들: “그런 거 왜 해요? 대입에 도움이 되나요? 다른 반은 그거 안 하는데요.”
▪ 학부모들: “애들한테 왜 의식화 교육을 하죠? 교과서에 나와 있지 않은 것은 가르쳐 주지 마세요. 우리 학교(반) 애들만 불리해지는 거 아닌가요? 선생님이 아이들 인생 책임져 줄 거 아니잖아요.”
▪ 학교(장): “외부로부터 항의나 민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는 수업은 안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왜 사서 고생을 합니까? 그거 말고도 가르쳐야 할 게 산더미잖아요.”
새 정부의 교육부가 나섰다. 교육부는 앞의 ‘추진계획’에서 민주시민교육 콘텐츠를 개발·보급하고 EBS 채널을 활용하며, 헌법연구원 전문 강사 특강으로 헌법교육을 확대·강화하겠다고 한다. 거짓 정보와 확증편향에 대비해 가짜뉴스를 판별하는 디지털 미디어 문해교육도 확대할 방침이다. 또한, ‘학교 역사교육 활성화 방안’을 통해서는 역사 수업하는 교사를 보호하고, 역사 교실 수업 환경 조성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7 ‘학교 민원 대응체계’를 안착해 교육과정에 따라 정당하게 수업하는 교사가 민원에 노출되지 않게 보호한다는 계획이다.
다 좋다. 하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학교가, 교사들이 당당하게 움직일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가 시민교육을 준비할 때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많다. 현재, 가장 결정적인 걸림돌은 교사의 정치기본권 문제이다. 선거 날 투표하는 일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정치 문제에 관한 한 40만을 헤아리는 교원이 행위 무능력자인 상황에 놓여 있다. 정치인 후원, 정당 가입, 피선거권 행사와 같은 초보적 시민 권리마저도 모두 불법행위가 되고 마는 현실에서 교사의 수업 반경은 현격히 축소될 수밖에 없다. 본질적인 문제는 최대한 회피하고 지엽적인 것만 수박 겉핥기 하듯 다루는 수업이 진행된다. 무미건조한 수업에 아이들은 시큰둥하고 교사도 힘이 빠진다. 결국, 해를 거듭할수록 시민교육의 관점에서 집필되지 않은 교과서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교사가 전문가로 존중받으며 교육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시민으로서 당당히 설 수 있는 법적·제도적 울타리가 필수적이다. 교사의 전문성과 시민적 권리는 한 몸인 것이다.
교사의 시민적 권리 회복, 정치기본권을 요구하면 꼭 나오는 말이 있다. 교사들이 편향적인 내용을 주입하거나, 학교 현장이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혼란에 빠진다는. 그게 사실이라면 이미 학교 정치교육을 허용하고 있는 수많은 나라들은 이미 망했어야 할 것이며, 우리나라의 학생과 교사는 수준이 형편없어서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정말, 일부 불순한 정치인들이 우려하는 ‘과도한 정치화’가 문제일까? 묻고 싶다. 우린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학교에서 학생들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문제를 제대로 배워 행동할 수 있게 해 준 적이 있나? 내가 걸어온 38년 교육 여정에서는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철저한 정치적 무관심, 사회 현장과의 분리를 추구했을 뿐이다. 공론장에서 숙의와 숙론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사회를 음성적인 방식으로 접하고 소비하는 문화, 독버섯이 자라기 딱 좋은 환경이 형성된다. ‘서부지법 폭동’이라든지 소수자를 향한 온라인 혐오 문화는 그들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교육이 그들을 그쪽으로 빠져들도록 방치, 방관한 탓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하다. 알고리즘의 먹잇감이 되도록 부채질하고서 이제 와서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책임 있는 교육자의 자세일 수는 없다. 우리 교육은 ‘과도한 정치화’가 아니라, ‘과소한 정치화’를 먼저 걱정해야 한다.
산나 마린 핀란드 총리(前), 저신다 아든 뉴질랜드 총리(前), 에마뉴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現), 이들은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모두 30대에 그 나라의 행정부 수반이 된 이들이다. 그 나라의 젊은 층은 특별히 더 똑똑하고,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한 것인가? 정치인이 꼭 30대여야 할 이유도 없지만, 30대라고 안될 이유 또한 없다.
그런데, 우리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제22대 국회 구성을 보면, 여전히 5060세대가 중심이다. 2030세대 청년 국회의원이 겨우 5.7%에 그친 반면, 5060세대는 무려 81%였다.8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등 북유럽이 30% 안팎인 점을 생각하면 한국의 청년 세대는 눈에 띄게 적다. 왜 오늘날 청년 세대에 차별과 혐오가 기승을 부리는지 청년 세대의 정치적 좌절과 분노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청소년, 청년 세대를 교육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학교 생태계를 바꾸고, 학교가 민주주의 교육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 민주시민교육은 정답이 없는 교육이다. 학습자가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고, 논쟁적인 현장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곧 성취이고 정답이 되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주입이 될 수 없다. 학습자 스스로 찾아나가고 만드는 과정이기에 시간이 걸리며 진입 장벽이 높고, 품이 많이 든다. 하지만, 일단 들어서기만 하면, 전혀 새로운 길이 열린다. 마치, 양질 전화(轉化)의 법칙과도 같다.
‘실패하더라도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라는 사뮈엘 베케트의 경구를 떠올려 보자. 내일의 더 나은 출발선을 위한 오늘의 도전과 실패가 필요하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출연자들은 하나같이 그 분야에 엄청난 시간을 쏟은 분들이다. 마음과 생각은 출발점일 수는 있지만, 종착역까지 갈 수 있으려면 견디는 시간과 끊임없는 시도밖에 없다. 용광로에서 금속이 들끓다 제련되어 나오듯, 다양한 사회적 상황과 맥락이 충돌, 경쟁하면서 시작이 반이라는 마음으로, 민주시민교육 이어달리기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2026학년도, 첫날이다.
|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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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https://www.educh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74 (교육언론 ‘창’, 2026.01.31.)
https://www.educh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79 (교육언론 ‘창’, 2026.02.11.)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50765 (오마이뉴스, 2018.07.02.) 참고: http://21erick.org/column/535/ (서울 금호고의 20대 대선 모의투표교육)
-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75606 (프레시안, 2020.01.28.)
- 각 단계(차시)별로 학생들이 모둠 활동을 통해 모의재판을 준비해가는 과정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padlet.com/ggochimi/_2021-4fo30c5aq6iwnqfp 또, 수업 진행에 필요한 학습지(자료)는 여기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https://cafe.naver.com/f-e/cafes/11076080/menus/16
- https://jpri.scourt.go.kr
- https://blog.naver.com/seouledu2012/223475564844
- https://www.educh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8488 (교육언론 ‘창’, 2026.02.26.)
- https://data.ipu.org/parliament/KR/KR-LC01/data-on-youth/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35년 동안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선생님과 함께 가는 고전 소설 여행』(공저), 『선생님과 함께 가는 현대 소설 여행』(공저) 등의 책을 썼으며,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세계문학) 서평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양서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