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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10) – “1950년대의 학생문화”

#1448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2026.02.04
1950년대 국가는 학생들을 어떻게 훈육하려 했고, 또 그들은 학교 안팎에서 무엇을 경험하며 세계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어떤 주체로 성장했을까요? 여기서는 중등학생에 초점을 두고 1950년대의 ‘학생문화’를 확인합니다.

 

 

1950년대의 한국사회와 학생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60년 4월혁명에 이르기까지 1950년대는 어떤 시대였을까. 『동아일보』는 1955년 8월 15일, 해방 10주년을 맞이하여 ‘해방십년의 특산물’이라는 이름으로 1950년대를 표상하는 11개의 키워드를 선정하여 특집 연속기사로 다루었다. ‘자유선풍’, ‘사바사바’, ‘양공주(洋公主)’, ‘감투싸움’, ‘얌생이’, ‘브로-커’, ‘알바이트소년’, ‘가짜’, ‘땐쓰’, ‘사창(私娼)’, ‘사치’ 등이었다.1 오늘날에는 그 의미조차 알기 어려운 ‘사바사바’2나 ‘얌생이’3 같은 유행어를 포함해 이 말들은 전후의 폐허와 혼란을 상징했다. 재래의 가치와 규범이 전쟁으로 인해 총체적으로 무너진 이후의 1950년대 대한민국 사회는 손창섭(孫昌涉)의 「비오는 날」(1959)에서처럼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시공간으로 혹은 이범선(李範宣)의 「오발탄」(1959)에서처럼 방향을 잃고 헤메는 절망적인 인간 군상으로 문학적으로 형상화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 1950년대는 ‘보리고개’와 미국의 ‘원조물자’로 대표되는 궁핍의 시대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꿈꾸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 미래를 위한 꿈의 장이 바로 학교였다. 해방 이후 등장한 세대들은 우리말로 교육을 받았고 학교 안팎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세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1950년대는 급격히 팽창한 중등학교, 대학교를 무대로 ‘학생집단’이 사회적인 주체로 부상하던 시대였다. 규모만 보더라도 식민지 말기인 1943년에 전 조선을 통털어 109,345명에 불과했던 중등교육 학생 집단은 1959년에는 남한에서만 745,907명으로 약 7배 늘어났고, 고등교육 학생 집단은 같은 시기 5,504명에서 79,551명으로 약 14배 늘어났다.4

 

국가는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어떻게 훈육하려 했을까, 또 그들은 학교 안팎에서 무엇을 경험하며 학교를 포함한 세계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어떤 주체로 성장해갔을까. 여기서는 주로 중등학생에 초점을 맞추어 1950년대의 ‘학생문화’ 속으로 들어가 본다. 대학생이 이른바 ‘학력엘리트’로 부상하는 과정은 별도의 글을 통해 후에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학도호국단’과 ‘도의교육’

 

이승만 정권의 국민에 대한 이데올로기 교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의 맹서’(혹은 맹세)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한국전쟁 이전인 1949년에 최초로 문교부에 의해 제정된 세 버전의 맹서에서 출발했다. 즉 ‘우리의 맹서’로 “1. 충성은 조국에, 2. 사랑은 민족에, 3. 목숨은 통일에”, 그리고 ‘학생의 맹서’로 “1. 진리에 살자, 2. 자유롭게 배우자, 3. 공정히 행하자”, 그리고 ‘청년의 맹서’로 “1. 알고 행하자, 2. 의리에 살자, 3. 용감히 싸우자” 등이 제정되었다.5 그런데 다소 번잡하고 산만한 이 세 ‘맹서’들은 1952년 3.1절을 앞두고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다음과 같이 단일한 것으로 수정되었다.6

 

‘우리의 맹서’ 1.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 딸, 죽엄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를 처부시자. 3.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이후 이 ‘우리의 맹서’(혹은 ‘우리의 맹세’. 이하 ‘우리의 맹세’라 한다)는 모든 공식행사에서 제창되었을 뿐 아니라, 국정 및 검인정 교과서 심지어 보통 간행물에까지 수록되었다. 이를 수록하지 않으면 판매 취소, 입건 심지어 저자 및 출판사에 대한 수사까지 자행되었다고 한다.7 이 맹세는 결국 1960년 4월혁명 이후 폐지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우리의 맹세’를 학생들이 암기하고 복창하게 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전쟁 전에 조직한 ‘학도호국단’을 통해 학생들을 상시 감시하고 군사훈련을 통해 통제했고 수시로 그들을 관제 데모, 즉 휴전반대데모나 재일교포북송반대데모 등에 동원했다. 학도호국단의 반민주적 성격은 1953년 한국에 파견된 ‘유네스코운크라한국교육사절단’의 최종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되기도 했다.

 

··· 교련과 행진, 특히 가로 분열행진 및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하는 표어 절규는 개적(個的) 생각 및 적당한 단체의 진취의 기상을 죽이는 것이다. 생도들은 학교 외부에서부터 오는 맹목적이고 깊은 성실과 진지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 명령을 받고 집행토록 훈련을 받고 있다. 정부가 선전을 위하여 생도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개성의 존중을 방해하며 죽이는 것이다.8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학도호국단은 이승만 체제 말기까지 학생 통제와 동원 및 훈련 기구로 존속했다. 그렇다면 학도호국단을 통한 동원과 훈련은 순조롭게 소기의 목적을 거두었을까. 1950년대 학생들은 지배 권력의 의도대로 휘둘리고 조형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었다. ‘우리의 맹세’에서처럼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를 휘날리자는 ‘북진’ 통일의 이데올로기는 역설적이게도 학생들의 뇌리 속에 ‘통일’을 지상과제로 각인시켜 결과적으로 1960년 4월혁명 당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학생들의 통일운동을 낳는 한 요인이 되었다. 한편, ‘재일교포북송반대’ 데모를 통해 학생들의 뇌리 속에 각인된 ‘반일’ 의식은 1964〜5년의 거센 한일협정 반대 운동에 이념적 기반으로 작동하기도 했다.9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 이후 현저해진 학생들의 이른바 ‘풍기문란’ 현상과 사회적인 퇴폐 문제에 교육적으로 대응한다는 이유로 ‘도의교육’이라는 것을 1953년부터 주창하기 시작했다. 1953년 12월 도의교과 설정이 결정된 후, 1954년 4월 20일 「교육과정시간배당기준령」이 제정 공포되어 국민학교와 중학교의 사회생활과에 배당된 시간 중 연 35시간을 도의교육에 충당하기로 규정되었다. 1955년 10월 12일에 문교부는 ‘도의교육위원회’를 설치했고, 1956년에는 고등학교 도덕과정이 문교부 훈령으로 결정되었다. 1956년에는 「도의교육요항」이 발표되었고, 같은 해에 고등학교용 도덕교과서, 이듬해에 국민학교용 도의교과서와 중학교용 도의교과서가 국정으로 발행되었다.10

 

‘우리의 맹세’나 ‘도의교육’을 보며 사람들은 곧바로 일제시대의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나 ‘수신(修身)’ 교육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언론에서는 양자 간의 연관을 다음과 같이 직격하는 비판을 제기했다.

 

··· 출판물, 신문, 잡지에 게재되는 ‘우리들의 맹세’의 형식이나 일제시대의 ‘국민서사’의 형식이 무엇이 다른지 보라! 각 학교나 각 관공청의 일본기를 대신한 태극기의 액자나 일본천황의 사진을 대신한 리대통령의 사진의 액자들을 보라! 무슨 주간이라고 어린이의 가슴에 꼬리표를 붙이게 하는 것을 보라! 각 학교의 많은 표어를 보라! … 일제시대의 그 형식을 그대로 지키고 있지 않은가. … 오늘날의 교육계에서 도의교육을 들고 나선 것은 이런 것과 같이 일제시대의 수신이라는 도의과목이 그리워 그 우위성을 시인하고 고집하는 것이 아닌가.11

 

대한민국의 국민 만들기를 위해 식민지적 교육 형식을 복제하여 활용한다는 비판인 셈이다. 그 도의교육을 주창하는 교육관료들 중에는 바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을 거쳐 문교부차관의 지위에까지 오른 고광만으로 대표되듯, ‘일본의 침략을 시인하고 그것을 그대로 잘 지키라고 교육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12

 

그럼에도 이승만 정부는 이념적 공세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도의교육위원회’는 심지어 학생 대상의 도의교육 차원을 넘어서서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이른바 ‘국민윤리강령’이라는 것을 구상하여 1958년 11월 16일 제정하기로 결의했다. 일년 남짓한 준비 끝에 최현배(당시 연희대 교수), 김두헌(숙대 총장), 김기석(서울사대 교수), 서은숙(이대 교수), 심태진(문교부 장학관), 고광만(전 문교부 차관) 등이 마련한 초안이 1960년 2월 초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발표되었다.

 

한나라의 흥망성쇠는 그 국민의 도의심에 매어있음을 깊이 느끼고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아 민주주의 새 나라를 세우는 우리 국민은 다음의 윤리강령을 반드시 지키기로 결심한다. 1. 성실하고 정직하여 품위있는 사람이 된다. 2. 부지런하고 검박하여 내 힘으로 살아간다. 3. 사랑과 도리로 화목하고 건전한 가정을 이룬다. 4.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 화합하여 사리사욕을 버리고 공동의 이익을 존중한다. 5. 궁한 중에도 예의와 염치를 차리고 절개와 신의를 지킨다. 6.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지고 평등의 정신으로 인권을 존중한다. 7. 권리에 앞서 의무를 다하며 보수에 앞서 직분을 다한다. 8. 권리와 파당에 기울지 않고 사리에 맞도록 공정하게 모든 일을 처리한다. 9. 정의를 세우고 법을 지켜 사회의 질서를 이룩한다. 10. 겨레의 문화를 이어받아 끊임없는 창의로 더 나은 살림을 이루어 나간다. 11. 국제연합의 정신으로 자유를 사랑하는 벗나라 사람들과 우의를 두터이 한다. 12. 겨레의 높은 이상을 찾아 무궁한 발전을 기약한다.13

 

12개 강령을 관통하는 이념이 무엇인지조차 알기 어렵고 개인, 가족, 공동체, 국가, 민족, 세계 등 인간이 속한 거의 모든 집단을 망라하여 덕목을 일방적으로 나열하는 이 ‘국민윤리강령’ 또한 “이것은 일제 때의 소위 ‘황국신민서사’ 같은 감을 줄 뿐 아니라 ··· 실질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14는 비판을 야기했다. ‘국민윤리강령’ 자체가 학생과 국민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기 어려운 지배자의 위선적인 요구에 가까웠다.

 

 

1950년대의 교육실제

 

해방 이후 미군정기에 전개된 교육 운동 중에서 교육현장인 아래로부터 분출된 개혁 운동으로 ‘새교육운동’이 있었다. 국민 만들기를 위해 안호상 등에 의해 위로부터 주도된 극우적·국가주의적 교육개혁과는 달리 일정한 민주적 지향성을 지니고 아동 중심, 생활 중심을 표방하는 ‘새교육’은 초기에 적지 않은 현장 교육자들의 관심을 모았고 교육 운동으로까지 발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 교육의 실제는 새교육운동과는 전혀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1953년 2차 미국교육사절단 보고서에서는 한국의 교실 교육이 아동 중심이 아닌 교사 중심의 일방적인 암송과 주입 위주 교육으로 흐르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기계적 암송, 정해답 및 교사의 진술문의 축어적 합동 반복 암송과 추상적 토론이 한국에 있어서의 교실교육을 지배하고 있다. 아동들의 정서 성장 및 발전과 관련한 이해와 행동이 따른 반사(성)적 사고, 희망 및 창조 표현에 대한 것은 이 교실교육 속에는 극소하거나 전무하다.15

 

이와 동일한 지적은 1955년의 3차 미국교육사절단 보고서에서도 반복되었다.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은 시험에 통과한다는 목적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근래에 한국의 고등학교에서 절대방정식과 조건부등식을 배우는 학반을 관찰했다. 그 반원들은 무서워하는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근심과 공포로 긴장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역시 그들은 교사가 묵묵히 흑판 위에 자기 노-트의 것을 복사한 것을 자기들 노-트에 미칠듯이 복사하고 있었다. ··· 교사는 수학을 더 교수하려고 서둘렀다. 왜? 그럼으로써 그들이 수학을 더 배울 수 있었을가? 아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시험에 통과할 수 있었다.16

 

그렇다면 ‘새교육운동’에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던 초등교원들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그 세계에서도 ‘새교육’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한때의 유행에 불과했다. 새교육 유행의 일시성을 성내운은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나는 한국에 와 있는 새교육입니다. ··· 그런데 불가사의한 것이란 한국의 교육자이드먼요. 왜냐고요? 찾아가기만 해 보세요. 나를 환영안하는 곳이 있나, 특히 교육자치고 말입니다. 그런데 구경만 하고 사지는 않거든요. 웬 칭찬은 그리도 하든지 내가 소개되고 나면 박수 소리가 터지도록 요란스럽답니다. 그런데 막상 나를 사는 교육자란 없단 말씀입니다. 그러니 불가사의라고 안할 수 있겠어요?17

 

심지어 초등교육에서의 ‘새교육운동’ 실패는 1969년 중학무시험제 도입 이전까지 가장 치열한 선발 경쟁의 장으로 유지되었던 중학교 입시라는 제도적 조건 하에서 충분히 예견되는 사태였다.

 

한편으로는 정권에 의한 위로부터의 반공주의적, 국가주의적인 이념 공세와 통제, 또 한편으로는 상급학교 입학시험 통과라는 실제적 압력이 1950년대 학생들의 경험과 생활을 옥죄고 있었지만, 그들이 몸으로 직면했던 교육현장의 문제는 비단 그것들만이 아니었다.

 

 

1950년대 교육현장의 부조리

 

50년대를 상징하는 키워드 중 하나로 ‘사바사바’라는 유행어가 있었음은 모두에서 언급했다. ‘사바사바’라는 말의 어원은 불분명했으나 그것이 “한손에 ‘뇌물’(주로 보증수표)를 든 교활한 ‘간상배’가 음흉한 부정관리 귀에 입을 가까이대고 ‘××××―’ 간사한 눈웃음을 치며 숨죽인 말투로 무어라고 입을 놀리고 있을 때 그 소리”를 의음(擬音)한 말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18

 

이 ‘사바사바’ 관행으로부터 교육계도 자유롭지 않았다. 1952년 4월에 이미 일류 중학교에 편법으로 입학하기 위해 최하 1백만 원의 비용이 드는 ‘사바사바 행각을 해야 한다’는 기사가 일간지에 등장했고,19 심지어 졸업과 입학 시기가 교원들의 ‘추수기’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회자되기도 했다.20 공사립을 막론하고 일선 학교에서 교원들이 정식 급료 외에 얼마나 다양한 형태와 경로로 수입을 확보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행어였다. 그 다양한 수입원을 1954년의 한 언론은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시당국자가 11일 말하는 바에 의하면 작금 시내 일부 중고등학교에서는 시에서 인정한 외의 징수금으로서 (1) 5, 6학년 과외교수에 대한 사례금 (2) 저학년 담임교사에 대한 사례금 (3) 교사의 생일 결혼 장례 등에 대한 축, 조위금 (4) 교사 자녀의 생일 백일 결혼 등을 빙자한 징수금 (5) 명절 계절적인 축하금 (6) 담임교사의 기념품대 동학년학급비 등의 명목으로 다액의 잡부금을 학부형 내지 학생들로부터 징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21

 

일선 학교에서 가장 큰 규모로 심각하게 자행된 부조리는 이른바 ‘보결입학’이었다. 치열한 입학시험을 통과한 학생들로 채워지는 학교의 정원과는 별개로 자퇴를 하거나 퇴학당하는 학생으로 인해 생긴 결원을 보충하기 위한 학생 모집이 ‘보결’의 원래 의미였으나, 일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가 이를 부족한 학교 재정을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1950년대는 공공연한 관행이었다.

 

아마도 가장 악명 높은 보결입학은 이승만의 양자가 된 이기붕(李起鵬)의 아들 이강석(李康石)이 1957년 4월에 서울법대 1학년으로 편입학하여 법대생들의 동맹휴학을 유발한 사건일 것이다. 최고의 대학으로 자부하던 서울대에서조차 편법적인 보결입학이 자행될 정도였으니, 중등학교에서는 그 정도나 범위가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은 세칭 일류중학교로서 입학 경쟁이 극심했던 서울의 경기중, 서울중, 경복중 등에서 1950년대 내내 기부금 입학이라는 명목으로 문교부와 서울시교위의 묵인 하에 ‘보결입학’ 제도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1957년도의 아래 기사를 보자.

 

서울시내 경기·서울·경복 등 세칭 일류중학교에서는 최근 200만환·100만환·50만환씩 기부(?)할 것을 전제로 ‘보결생’을 모집하여 입학허용을 하고 있어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데 세칭 일류교의 이와 같은 ‘정가표’를 붙여 ‘학교간판’을 팔아먹는듯한 처사에 대하여 이를 감독할 ‘시교육위원회’에서는 도리어 이를 방조 내지는 묵인하면서 학교측을 두둔하는 해괴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경기를 비롯한 서울·경복 삼개중학교 책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지난 8월중순 경부터 3개학교 교장 및 사친회 관계자들은 김서울시교육감과 누차 협의를 하여 그 결과 제2학기 초인 10월 경에 학급정원에서 5% 이상 초과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보결생’을 뽑도록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22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공립중학교에서조차 이런 관행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고 사회적 물의를 빚으면서도 1960년까지 이는 매년 기부금을 인상하면서 계속되었다.23 다음 기사는 일류중학교만이 아니라 금액을 달리 하면서도 대부분의 공립중학교에서 기부금을 전제로 한 보결입학이 만연했음을 보여준다.

 

세칭 시내일류공립중학에 보결생으로 들어가는데 찬조금조로 최소30만환으로부터 최고300만환까지 내고 들어간 사실이 밝혀졌다. 문교부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지난 4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시내공립남녀중학 22개교 중 17개교(남 11, 여 6)에 1,2,3학년에 보결 및 전입된 학생수는 1,396명(남자 700, 여자 696)에 달하고 있는데 그 대부분은 1학년 보결생이며 이들로부터 찬조를 받은 금액은 3억6천8백93만여환에 달하고 있다. 특히 모중학에서는 한 사람의 보결생으로부터 최소 30만환으로부터 최고300만환이라는 막대한 찬조금을 받아들인 사실이 밝혀졌으며 동교에서는 전기기간중 전입 학생 49명, 찬조금은 총 4천5백35만환에 달하고 있다 한다.24

 

보결입학과 같은 부조리한 관행은 이른바 ‘브로커’들을 매개로 하여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브로커’ 또한 『동아일보』가 선정한 1950년대의 유행어 ‘특산물’의 하나였다. 1957년도에 월간지 『신태양』에 게재된 「교육질서 유린하는 특권계급」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따르면, 같은 해 고려대학교는 신입생의 10%를 무시험전형이라는 이름으로 ‘부정입학’시켰는가 하면, 경복중학교는 신입생의 1/3을 국민학교 내신서에 의거하여 무시험입학시켰다.25 이들 무시험입학자의 부모들이 막대한 돈을 기부금 명목으로 납부하며 편법으로 입학했고 그 과정에 ‘브로커’들이 개입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보결입학’으로 대표되는 입시에서의 부정 문제를 해결하거나 완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는 국가가 오늘날의 수능과 같이 입시 선발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었는데, 이 방법이 한국전쟁기에 선구적으로 시도된 바 있었다. 1951년 7월 31일 한국교육사상 초유의 국가고사가 중학 입시와 관련하여 실시되었다. 당시 서울을 위시한 미수복지구 14개 시·군을 제외하고 140개 시·군에서 91,684명의 수험생들이 자기 거주지 또는 피난지 근처에서 동일한 시험을 치러 중학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를 구상하고 집행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 심태진에 따르면,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고사 후의 채점과 성적증명서 발급사무 역시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각 중학교의 입학자 선발사무 역시 예정대로 끝마치게 되어, 해마다 물의를 일으키던 부정입학, 정실입학 운운은 자취를 감추었”다26고 한다. 그런데 이 제도는 얼마간 효과적으로 지속되다 1954년에 갑자기 이승만 대통령의 석연치 않은 지시로 폐지되고 각 학교의 자유선발로 되돌아갔다. 문교부는 다시금 1956년에 국가연합고사를 실시하여 상급학교 입학에 활용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이 또한 대통령의 지시로 폐지되었다. 부정입학이나 보결입학, 심지어 입학사정 시의 비용 징수 등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학생선발권을 학교가 독자적으로 장악해야 했고, 따라서 사학재단 및 일류학교의 교장, 심지어 보결입학의 특혜를 우선적으로 누리게 될 권력층이 이승만에게 로비를 한 결과였다.27 바꿔 말해, 국가권력이 일선학교의 부조리를 앞장서서 용인하는 형국이었다. 전후의 아노미적 혼란과 무질서 상황 속에서, 전 계층의 하향평준화가 낳은 사회이동 욕구의 폭발적 분출이 학교라는 통로로 집중되면서 빚어진 이러한 기형적 현상들은 1950년대 교육사의 부인할 수 없는 단면들이었다.

 

학교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은 한편으로는 절대적인 교육재정의 궁핍이 낳은 생활고 속에서 이러한 부조리에 부득이하게 가담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 또한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오천석은 1950년대 정치권력과 관련하여 교사들이 처해 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지적했다.

 

교사들은 어떤 특정 정당의 앞잡이가 되어 사표가 강요당한 채 선거운동에 선봉을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교단에서 어린이들에게 정의를 가르치던 교사들이 어느새 경찰의 주구로 타락하여 부정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육에 대한 정치적 간섭은 선거 때에만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 아니었다. 이것은 교과서에도 나타났고, 교실 안에서의 학습과정에도 침투되었으며, 기타 여러 모양의 학교행사에도 표현되었다. 특히 교직자의 임면과 승진 등, 인사행정에 있어 정치적 영향력이 컸다.28

 

실제로 선거가 있을 때마다 교사들은 부정적인 선거운동에 노골적으로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한 교사의 다음과 같은 우울한 회고를 보자.

 

선거[1960년 3.15 선거를 가리킨다―인용자주]를 앞두고 밤마다 직원실에는 파티가 벌어졌었다. 파티래야 그 뻑뻑한 막거리에 생두부나 돌같이 딱딱한 오징어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도 감지덕지 좋아라고 목구멍과 야합을 하며 모두들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 어느날 하루 나도 어쩔 수 없이 야간파티에 참석했었다. 모 기관에서 나온 금테두른 양반과 지방유지 그리고 학교장 등등 남선생 여선생 할 것 없이 이마를 맞대고 주기(酒氣)를 올렸다. 주기가 몇바퀴 돌자 상투적인 발병이 시작됐다. 삼삼오오 가정방문을 해서라도 두 R씨 이름 밑에다가 기표하도록 설득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부모를 자르듯이 마을과 마을을 잘라 여기는 누구누구 또 저기는 아무개 식으로 배당이 돌아갔다. 나에게도 예외 없이 몇몇 집이 떠맡겨졌다.29

 

교사들을 노골적으로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이상과 같은 작태들은 그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의 차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는 ‘민주주의’의 의미와 원리가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었다.

 

민주주의는, 사람에게는 나면서부터 하늘로부터 받아 가지고 온 몇 가지의 기본적인 자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 중의 하나가 언론의 자유다. 이 자유는 다른 사람이 빼앗을 수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줄 수도 없는 소중한 것이다. 자기가 정직하게 믿는 바를 아무런 꺼림도 없이 발표할 수 있는 자유―이것은 민주주의가 지키려는 가장 근본적인 사람의 권리의 하나며, 민주 사회를 다른 사회보다 뛰어나게 만드는 표적의 하나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사회는 벙어리의 사회요, 노예의 사회며, 죽음의 사회다. 사람을 이 세상에서 가장 값있는 존재로 믿고, 백성에게 주권이 있으며, 산 사회, 자라나는 사회를 이상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언론의 자유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30

 

이것은 식민지 치하의 교과서에서 학생들이 배울 수 없었던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헌법이 천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교과서를 가르치는 교사들은 교장·교감과 장학사들, 교육행정관료와 정치권력자의 지배 하에서 철저한 무기력을 드러낼 뿐이었다. 그렇다면 학교에 만연한 부조리와 정치적 억압에 학생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학생의 저항과 교양

 

1950년대의 고등학생과 중학생, 심지어 국민학생조차도 오늘날과는 의식과 행동이 크게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1950년대 말, 의무교육제가 일단 완료되던 1959년 시점에서 그 해에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졸업자의 40% 남짓한 정도에 불과했으니(오성철의 현대교육사(8) 「1950년대의 교육팽창」 참조), 중고등학생의 자의식은 이미 완전 취학이 실현된 오늘날의 중고생과 같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는 무엇보다도 동맹휴교로 대표되는 학생운동의 전개 양상과 빈도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 삼대 일간지의 1950년대 중등학생 맹휴 관련 기사를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인터넷 기사 검색을 통해 살펴보면, 1953년 1월부터 1959년 12월까지 7년 동안 전국의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사범학교 등에서 발생한 맹휴는 총 91건으로 매년 약 13건에 달했다. 그중 국민학교는 5건, 중학교는 11건, 중고교 합동은 17건, 고등학교는 52건 등이었고 사범학교는 3건, 그리고 특수학교가 2건이었다. 중등학교 학생의 저항에 대한 사료나 연구 자체가 빈약하여 그 전모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으나 신문에 기사로 보도된 것만 보아도 적지 않은 발생 빈도를 알 수 있다.

 

1950년대 중등학교 학생 저항의 대부분은 공금횡령이나 사친회비 인상에 반대하는 교장 및 교감을 배척하는 맹휴이거나 특정 교사의 경질을 요구하는 학내 문제와 관련된 맹휴들이었고,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요구를 담은 맹휴는 별로 없었다. 『조선일보』의 다음 기사는 1950년대 중등 학생운동의 성격을 잘 요약해 준다.

 

중고등학교의 맹휴가 경향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 원인들은 거개가 재단 대 교장과의 분규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일이다. ··· 더구나 학교운영의 재정적 원천이 재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부형들에게 있다는 사정이 이런 분규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유명무실한 재단에서는 학교운영을 위한 재정을 마련해주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학생들로부터 징수하는 돈을 학교운영에만 쓰지 않고 재단운영과 그 사사들의 생활비로 착복하는 주객전도의 사태도 벌어지고 있고 이런 경우 교장이나 학교측이 항의한다든지 뜻에 거슬릴 경우 이를 억압 또는 파면함으로써 분규가 터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반면 또 재단으로부터의 보조보다도 후원회비 기타의 학생들로부터의 징수금이 훨씬 거액이고 학교운영의 실질적 재정력이 되기 때문에 교장들이 이를 좌우할 수 있는 처지에 있음을 이용해서 부정사용하는 예가 허다하며 무력화한 재단을 무시해서 독단적인 처리를 함으로써 분규를 일으키는 예도 많은 것이다.31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1950년대의 학생 맹휴가 주로 학교 단위의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학생 통제와 감시 그리고 군사훈련과 같은 훈육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관제 조직인 학도호국단이 저항의 기제로 작동하는 역설이 드러난다. “학도호국단 주도의 학생분규가 일어날 때 전학생이 일률적으로 집단행동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 학도호국단을 통해 일상적으로 익혀진 집단성과 규율성이 학생분규과정에서도 자연스럽게 재현”32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학교교육의 교화와 통제를 통한 위로부터의 지배질서의 재생산 의도가 언제나 순조롭게 관철되지는 못한다는 사실, 동시에 학생들은 어떤 혹독한 억압적 조건 하에서도 나름의 시선으로 세계를 꿰뚫어 보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주체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1960년 4월혁명의 발발과 전개 과정에서 중등학생들이 학교 단위를 넘어서서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연대하여 이승만 체제를 무너뜨리는 정치적 시위를 전개한 역동이 이미 1950년대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1950년대 학생문화에서 주목해야 할 주제는 그들의 내면적인 정신세계다. 사회적 구성 면에서 보면 중학교, 고등학교 진학률에서 드러나듯이 중등학생들은 ‘엘리트’라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중’이라 할 수도 없었다. 그들 중 일부는 대학을 거쳐 미래에 지도적 위치에 오를 것이기에 ‘잠재적 엘리트군’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등학생 특히 이른바 일류학교 학생들 중에는 ‘미래의 엘리트’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트 의식이 생명력을 유지하려면 단지 난관으로서의 입학시험을 통과하여 특정한 학교의 성원이 되었다고 하는 일종의 ‘선민의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것은 자신들이 보통의 일반 대중과는 다른 세계관과 인생관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정신세계’를 공유하고 있고, 그러한 정신세계에 지속적으로 자양분을 제공하는 ‘지식’과 ‘예술’의 공급원이 존재해야만 재생산될 수 있고 또 대중들로부터도 ‘승인’을 얻어낼 수 있다. 그 정신세계를 명명하는 대표적인 개념이 바로 ‘교양(敎養)’이다.

 

동아시아에서 ‘교양’은 먼저 근대 일본에서 1920년대 이른바 ‘다이쇼기(大正期)에 탄생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그 주인공들은 제국대학의 예과적 성격을 지닌 엘리트 교육기관 즉 ‘구제고등학교(舊制高等學校)’ 학생들이었다. 그들에게 교양의 자양분을 지속적으로 제공한 것은 『카이조(改造)』, 『주오코론(中央公論)』 등과 같은 종합월간지, 그리고 이른바 ‘이와나미문고(岩波文庫)’로 대표되는, 동서양의 고전 번역본으로 이루어진 교양서적들이었다. 이 일본판 교양문화는 식민지기에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정점으로 하는 식민지 고등교육기관 나아가 고등보통학교 등의 중등학교에도 도입되었다.

 

식민지기에 유수한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다닌 리영희는 당시의 학생층의 사회문화적 지위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당시의 갑종 5년제 중학생이 아마도 조선 전체에서 많아야 3만 명이 안 됐을 테니까, 지금 우리나라 4년제 대학교 학생이 백수십만이나 되는 것에 비교하면 굉장한 엘리트였어요. 그래서 중학생들이 웬만한 일탈 행동을 하거나 심한 장난을 해도 일본 경찰조차 “각세이상다까라”(학생님이니까)라고, 우리말의 “님”에 해당하는 존칭 “상”을 부르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재미있지 않아요? 일제시대 갑종 중학생의 사회문화적 지위나 평가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겠지요.33

 

그들은 지식인 대상의 잡지를 읽고,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소설로 대표되는 일본근대문학만이 아니라 ‘이와나미문고’ 등을 통해 보급되는 서구 문학과 사상의 일본어 번역본을 읽으며 엘리트적 자의식의 내용으로 ‘교양’을 갖추어 갔다.

 

그런데 1945년 해방과 함께 이렇게 종합월간지, 일본문학·사상 및 일역 서구문학·사상 서적에 기초한 교양은 그 공급원이 끊기게 되었다. 그나마 식민지기에 일본어 문해능력을 가까스로 갖출 수 있었던 세대들은 해방 이후에 일본인들이 남기고 떠나 시장에 쏟아져 나온 일본 서적들을 소비할 수 있었으나, 해방과 동시에 일본어 학습기회가 사라진 순수한 한글세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언어는 익혔으되 그것을 가지고 소비할 만한 한글의 문화적 자원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럼에도 또 한편으로는 그들에게도 선발된 소수라고 하는 ‘선민의식’이 식민지기 이래 관성적인 관행처럼 유지되고 있었다. 예컨대 1950년대 경기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는 그 학교의 역사가 1900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학교사’가 단적으로 보여주듯, 해방 이전에 학력 엘리트의 산실이었던 경기고등보통학교와 관련된 집단적 기억이 유산처럼 계승되고 있었다.34 1950년대의 중등학생들은 그런 존재였다.

 

동아시아 세계에서 소수만이 입학할 수 있는 학교의 학력을 바탕으로 하여 엘리트로서의 자의식을 키우려 했던 학생들에게 필요한 교양의 배양기는 ‘종합잡지’와 ‘교양서적’이었다.35 그렇다면 1950년대 중등학생이 접근할 수 있는 잡지와 서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중등학생의 교양과 관련된 대표적 잡지로 『학원』이 있었다. 『학원』은 1952년 11월 피난지 대구에서 ‘대양출판사’ 사장 김익달에 의해 창간되어 1979년 9월까지 발간된 학생 종합지인데,36 주로 중고등학생이 기고한 글들을 문예란에 실어 전파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미국과 서유럽의 문학과 예술, 관련 인물들을 새로운 지식으로 소개하는데 독보적인 역할을 담당했다.37 한편, 대학생 이상의 고등교육 수혜자들을 위해서는 1953년에 『사상계』가 창간되어 지식인의 교양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림 1] 『학원』(1952.11.)과 『사상계』(1953.4.) 창간호


1959년에 『학원』에 실린 다음 글은 미래의 엘리트에게 ‘교양’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친 논리로 강변했다.

 

제 아무리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훌륭한 학교에 다닌다 하더라도 학생들이 몸가짐과 언동을 삼가하지 못하며 양서를 벗삼지 않고 저속한 양화나 야비한 소설을 읽으며 깡패적인 행위를 영웅인양 으시댄다면 어찌 교양있는 학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교양이란 몸에 지니는 것이기는 하나, 장식품은 아니다. 장식품과 같이 몸에 붙인 지식과 행동은 결코 교양이 아니다.38

 

저속한 영화나 소설이 아니라 ‘양서’를 읽어야 ‘교양 있는 학생’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무엇이 ‘양서’란 말일까. 그리고 그것은 어디서 어떻게 구해 읽을 수 있는 것일까.

 

전쟁의 폐허 속에서 미국의 원조에 기대어 학교 교과서를 겨우 인쇄해 보급하던 1950년대 상황 속에서 ‘양서’ 즉 ‘교양서적’은 출판과 공급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헌책방이나 도서관에 쌓여 있던 적지 않은 일본어 서적들은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새로운 독자들을 확보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1950년대 중등학생의 내면세계는 이른바 ‘교양의 부재’ 혹은 ‘교양의 결핍’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 새로운 전기가 찾아온 것이 1958년도였다. 그 해에 이른바 ‘문학전집’, ‘사상전집’, ‘백과사전’ 등이 여러 출판사에서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출판되기 시작했다. 이를 당시의 신문은 경이로움을 담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집대성이라고 이름붙은 간행물 부움’ ··· 이것이 1958년 후반기의 한국출판계를 대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 전국 팔백여 출판사(문교부 집계)에서 발간하는 사전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 창작집시집 기타와 다시 512종(공보실 집계)의 일간 통신 주간 월간 학보 등의 정기간행물은 숫자로만 상상하여도 부진하는 출판업계라고 자탄한 일년전이 면구스러울 지경이며 날마다 신문 잡지의 광고란 신간소개란은 거창한 사(사)전과 전집 등을 예고하고 있어 각 출판사들은 전례없는 사업의욕과 체면유지 등 착잡한 가운데 실수요자수를 도외하는 출혈도 막무간 장기계획을 세워 형용키 어려운 대결상을 보이고 있다. 그 하나의 좋은 예로 불모의 소지와도 같던 이 나라 후학들에게 세계문학의 정수와 집대성이라는 오단광고를 필두로 ‘정음사’(전60권) ‘을유문화사’(전60권) ‘동아출판사’(전50권) ‘창원사(創元社)’(전60권)의 4개사가 각기의 특색있는 제작방법을 과시하면서 『세계문학전집』의 발간을 고하였던 것으로 집대성의 ‘부움’은 시작되었다. ··· 한편 ‘민중서관(民衆書館)’에서는 『한국문학전집』을, ‘백수장(白水莊)’에서는 『한국단편소설집』을, ‘계몽사’에서는 『세계소년소녀문학전집』(전50권)을 마련하고 있는데 뭐니뭐니 하여도 1958년에서 지고로 특기할 일은 역시 『이조실록』 전48권의 완간이다. ··· 다음은 집대성 ‘부움’의 기중 화려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사전(辭典)(사전(事典))으로 『우리말큰사전』(전6권), 『국어새사전』, 『중사전』(을유문화사에서 발간 중) 『중사전』(국어국문학회) 『과학대사전』 『경제학사전』은 이미 기간되어 널리 알려진 바이고 올해 말미를 장식할 것으로 ‘학원사(學園社)’ 간 『대백과사전』(전6권) ‘동아출판사’ 간의 『새백과사전』(단권)이 있다.39

 

‘전집’의 연쇄적인 출판은 ‘출판혁명’ 혹은 ‘출판계의 르네쌍스’라고까지 상찬되었다.40 중고등학생은 『학원』을 구독하고 대학생은 『사상계』를 구독하며 엘리트로서의 자의식을 조금씩 키워나갔고 또 ‘문학전집’, ‘사상전집’의 소비자가 되어 교양을 가까스로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1954년 「교육법시행령」 공포 이후 대학에 ‘교양과정’이 신설되고 ‘교양국어’ 등이 과목으로 설치되는 한편으로, 대학입시에서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문학작품 등이 다루어지게 되자, 58년부터 출판된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은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추천하는 텍스트가 되었다.41

 

[그림 2] 세계문학전집 신문광고
상: 동아출판사 『세계문학전집』(전50권) – 『동아일보』 1958.6.28.
하: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전60권) – 『동아일보』 1959.8.27.석간.

그런데 이렇게 1950년대 말이 되어 몇 안 되는 종합월간지나 급조된 ‘전집’류에서 ‘교양’의 배양기를 찾을 수 있었던 학생 집단은 그들의 주관적인 자의식과는 별개로 일반 대중들로부터 얼마만큼의 승인과 존중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다이쇼기의 근대 일본에서처럼 그들은 이른바 ‘정신상의 귀족’으로, 혹은 ‘각세이상(학생님)’으로 대우받을 수 있었을까.

 

중등교육에서 세칭 일류학교라는 명성은 그런 학교에서 길러내는 인간상의 독보성에 기인하기보다는 일류대학교로의 진학 성적에 기대어 만들어졌다.42 경기중·고등학교나 서울중·고등학교의 명성과 인기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 학교에 입학하고 싶었던 주된 이유는 그 학교의 학생들이 읽는 책이 ‘야비한 소설’이 아니라 ‘양서’였고 그 학생들이 ‘교양’의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교양이 부재한 채로 배양되어가는 엘리트 의식을 가진 존재, 그것을 동아시아의 학자들은 ‘학력 엘리트’라는 개념으로 포착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에 별도의 주제로 다루게 될 것이다.

 

사회학자 이만갑(李萬甲)은 1950년대 말기, 여전히 지배적으로는 농촌사회였던 한국의 사회 상황과 의식을 조사하기 위해 오늘날에는 수도권으로 여겨지는 경기도 남부 6개 촌락을 대상으로 희유의 사회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그 조사 내용 중에 촌민들의 사회계층 인식을 확인하기 위해 “세상에서 사람들의 지위가 높다든가 낮다든가 하고 말합니다만 그것은 보통 무엇으로 정해진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응답자 336명 중 194명이 ‘학식이 많다’(57.7%)로, 31명이 ‘돈이 많다’(9.2%)로 답했다.43 이 때의 ‘학식이 많다’는 것은 고급문화로서의 ‘교양’의 내면화를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더 높은 ‘학력’ 자체의 취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학력이 새로운 지위와 계층 질서를 만들어내는 사회가 바야흐로 도래하고 있었다. 자녀를 어디까지 공부시키고 싶은가를 묻는 교육 포부 관련 문항에 국민학교(31.9%), 중학교(26.5%), 고등학교(14.6%) 대학(12.5%)이라고 답했다. 전체 응답자의 58%는 서당교육조차 받지 못한 무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70%에 가까운 사람들이 중등 이상의 학력을 원했고, 대학 진학 포부도 12%를 넘어섰다.44 학력 취득을 위한 경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1960년대 이후가 되면 민중들의 교육 포부는 범계층적으로 고조되고 거침없이 증폭된다. 그 결과로 중등교육의 보편화와 완전 취학이라고 하는 해일이 밀려들게 된다. 그것은 중등학교 학생의 저항도, 그들의 교양도 거침없이 쓸어버릴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해일이 밀려들기 전에 중등학교 학생 문화의 가장 장렬하고 거대한 불꽃이 타올랐다. 1960년의 4월혁명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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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東亞日報』 1955.8.16. 〜 1955.8.26.
  2. ‘권세와 이득’을 얻기 위해 관계요로에 뇌물을 바치며 부정한 청탁을 하는 관행을 의미한다(「十字軍」 『東亞日報』 1951.3.12.(2).).
  3. 원래는 ‘염소’를 가리키는 사투리였는데, 미국의 원조물자 야적장에 뛰어든 염소를 찾으러 간 사람이 물건을 훔쳐나온 후, 그 수법을 반복한 데서 유래한 말이라고 하며, 원조물자 절도를 의미하는 말로 통용되었다(「얌생이이란?」 『京鄕新聞』 1952.3.5.(2).).
  4. 朝鮮總督府學務局 (1944), 『朝鮮諸學校一覽』, 朝鮮總督府. ; 문교부 (1959), 『문교행정통계표 4292·4·30』, 문교부. 1943년도 중등교육 학생은 중학교, 고등여학교, 실업학교, 실업보습학교, 사범학교의 조선인 학생수를 모두 합한 것이며, 고등교육 학생은 제국대학, 전문학교, 전문정도 각종학교의 조선인 학생수를 모두 합한 것이다. 1959년도 중등교육 학생은 중학교, 인문계고등학교, 실업계고등학교, 사범학교 학생수를 모두 합한 것이며, 고등교육 학생은 종합대학교, 대학, 초급대학 학생수를 모두 합한 것이다.
  5. 「‘우리의 盟誓’ 文敎部서 制定」 『東亞日報』 1949.7.29.(2).
  6. 「民族宣言을 宣布」 『朝鮮日報』 1952.2.17.(2).
  7. 「없어지는 ‘죽음의 盟誓’」 『京鄕新聞』 1960.9.13.조간.(3).
  8. 유네스코·운크라派韓敎育計劃使節團 (1953), 『文敎月報特輯 大韓民國의 敎育再建 유네스코·운크라 派韓敎育計劃使節團最終報告書』, 文敎部[UNESCO-UNKRA Educational Planning Mission to Korea (1953), Rebuilding Education in the Republic of Korea. Paris.], 21쪽.
  9. 오제연 (2016), 「팽창하는 학교와 학생」, 홍석률 외, 『한국현대생활문화사 1950년대』, 창비, 129-130쪽.
  10. 이동헌 (2008), 「1950년대 국민화 담론연구―‘도의’교육을 중심으로」, 『동아시아문화연구』, 43, 한양대학교동아시아문화연구소, 193쪽.
  11. 梁熙錫 (1958), 「빵과 良心과의 對決―道義敎育은 왜 하는가?」 『新太陽』, 77-78쪽.
  12. 梁熙錫 (1958), 「빵과 良心과의 對決―道義敎育은 왜 하는가?」 『新太陽』, 77쪽.
  13. 「敎委總會거쳐 二月中公布」 『동아일보』 1960.2.1.(3).
  14. 「國民倫理綱領은 무엇인가」 『朝鮮日報』 1960.2.2.(조간)(3).
  15. 유네스코ㆍ운크라派韓敎育計劃使節團 (1953), 『文敎月報特輯 大韓民國의 敎育再建 유네스코·운크라 派韓敎育計劃使節團最終報告書』, 文敎部[UNESCO-UNKRA Educational Planning Mission to Korea (1953), Rebuilding Education in the Republic of Korea. Paris.], 12쪽.
  16. 中央敎育硏究所(편) (1956), 徐明源(역), 『敎育課程指針』, 大韓敎育聯合會, 182-183쪽. 3차 미국교육사절단 보고서(American Education Team 1954-55 (1955). Curriculum Handbook for the Schools of Korea. Central Education Research Institute.)는 1956년에 중앙교육연구소에서 서명원(徐明源)의 번역으로 『교육과정지침』이라는 번역서로 출판되어 교육현장에 공유되었다.
  17. 성내운(1956), 「敎育의 새해, 問題의 교육」, 『새교육』, 1월호, 20쪽.
  18. 「解放十年의 特産物 (2) 사바사바」 『東亞日報』 1955.8.17.(3).
  19. 「門外聞」 『京鄕新聞』 1952.4.16.(2).
  20. 「餘滴」 『京鄕新聞』 1953.3.26.(1).
  21. 「根絶안되는 中高校雜賦金」 『東亞日報』 1954.6.12.(2).
  22. 「定價붙여 補缺生 뽑는 學園」 『東亞日報』 1957.10.5.(3).
  23. 「定價붙여 補缺生 뽑는 學園」 『東亞日報』 1957.10.5.(3).
  24. 「公立中學補缺入學에 最高는 三百萬圜」 『東亞日報』 1960.10.26.석간.(3).
  25. 朴載淳 (1957), 「敎育秩序蹂躪하는 特權階級」, 『新太陽』, 5月, 195-196쪽.
  26. 沈泰鎭 (1994), 「1ㆍ4후퇴 후의 국가고사」, 沈泰鎭 외, 『師友文選』, 교문사, 124-125쪽.
  27. 朴載淳 (1957), 「敎育秩序蹂躪하는 特權階級」, 『新太陽』, 5月, 196-197쪽.
  28. 吳天錫 (1960), 『民主敎育을 志向하여』, 吳天錫敎育思想文集 1(1975년 복간), 光明出版社, 191쪽.
  29. 金種 「敎壇日記 <56> 賣國奴 시대 (2)」 『東亞日報』 1980.5.26.(4).
  30. 문교부 (1959), 「5. 민주주의와 언론」, 『중학국어 Ⅲ-1』, 문교부, 25-26쪽.
  31. 「學校 運營과 盟休」 『朝鮮日報』 1959.5.25.조간.(1).
  32. 연정은 (2004), 「감시에서 동원으로, 동원에서 규율로―1950년대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14, 역사학연구소, 248-250쪽.
  33. 리영희, 임헌영 (2005),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한길사, 49쪽.
  34. 예컨대 京畿高等學校七十年史編纂會 (1970), 『京畿七十年史』, 京畿高等學校同窓會. 혹은 京畿百年史編纂委員會 (2000), 『京畿百年史 1900-2000』, 京畿高等學校同窓會. 등은 이들 집단적 기억의 계승과 재생산을 위한 매체이자 증거다.
  35. ‘교양의 배양기’라는 개념은 일본 구제고등학교의 문화를 ‘학력귀족’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한 다케우치 요(竹內洋)의 『학력귀족의 영광과 좌절』에서 원용한 것이다(竹內洋 (1999), 『日本の近代 12―學歷貴族の榮光と挫折』, 東京: 中央公論社). 일본과 조선, 대만 등 동아시아의 학생문화에 대해서는 오성철 (2018),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 서해문집. 참조.
  36. 김한식 (2010), 「학생 잡지 『학원』의 성격과 의의」, 『상허학보』, 28, 293쪽.
  37. 김한식 (2010), 「학생 잡지 『학원』의 성격과 의의」, 『상허학보』, 28, 315쪽.
  38. 「학원프레스」 『학원』 1959년 10월, 김한식 (2010), 앞의 책, 317쪽에서 재인용.
  39. 「바야흐로 全集부움」 『朝鮮日報』 1958.11.22.석간.(4).
  40. 박숙자 (2012), 「1950년대 ‘문학전집’의 문화사」, 『서강인문논총』, 35,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85쪽.
  41. 박숙자 (2012), 「1950년대 ‘문학전집’의 문화사」, 『서강인문논총』, 35,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00쪽.
  42. 해방 이후 신설되어 일약 최고의 중등학교로 부상한 서울중ㆍ고등학교의 최고의 자랑은 신설되자마자 곧바로 졸업생의 서울대학교 합격자수 및 합격률에서 경기중ㆍ고등학교를 능가했다는 사실이었고, 이것이 그 학교 교원과 학생들의 긍지이자 대중적인 인기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김원규 (1988), 『다시 태어나도 교육자의 길을』, 강화석, 123쪽).
  43. 李萬甲 (1960), 『韓國農村의 社會構造―京畿道六個村落의 社會學的硏究』, 韓國硏究圖書館, 171쪽.
  44. 李萬甲 (1960), 『韓國農村의 社會構造―京畿道六個村落의 社會學的硏究』, 韓國硏究圖書館, 172쪽.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식민교육사 및 교육역사사회학, 동아시아근대교육의 비교사회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교육과학사, 2000),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서해문집, 2018), 역서로는 야나기 하루오의 『학급의 역사학』(교육을바꾸는책, 2026), 가리야 다케히코의 『대중교육사회의 형성』(학지사, 2023), 고마고메 다케시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공역, 역사비평사, 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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